김그루(본명 김미옥) 선생님이 새로운 필명 김미사로 새 시집 『어떤 날을 되돌리면 그날이 와』 (시인동네, 2026)을 내셨습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책소개
2023년 《문예바다》로 등단한 김미사 시인의 첫 시집 『어떤 날을 되돌리면 그날이 와』가 시인동네 시인선 282로 출간되었다. 김미사 시인이 소재로 삼은 삶의 수많은 양태는 소중한 정신성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유와 정신을 팔아 산 시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팔아 얻는 다른 것, 이를테면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것들은 또 다른 가치로 전환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를 산다는 것,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소중한 그 무엇을 언어화하여 한층 진전된 사유로 세계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느껴질 것이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해설 엿보기]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문학은 그 어떤 사회적 의제를 생산해 내지 못하며 시대의 잉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여타의 매체들에 밀려 독자들과의 접점을 마련하지 못한 채 주변화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쓰이고 있는 이유는 자신과 같이 주변화되고 타자화된 존재를 향한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연대는 문학의 생존을 위함이라기보다 타자화되거나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를 채록하고 이를 형상화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을 도모하는 수행에 가 닿는다. 자본화된 세계에서 내몰린 존재, 그 타자의 의미와 가치를 사유하고 그들이 겪어온 시간의 층위를 재현함으로써 문학은 부조리한 세계와 대면하고 예술적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이 만들어내는 가치란 그 자체로 항구적이고 고정된 어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맺는 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미사 시인의 시에 내재된 고뇌의 흔적을 톺을 필요가 있다.
시인은 「사유원」에서 “가벼워지고 싶은 바닥의 마음”을 원한다. “달항아리”처럼 “비어 있지만 가득 찬 평안이 있는”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지향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플래니모”의 고독함을 감당해야 한다. 플래니모란 일종의 떠돌이 행성으로 구심점도 없고 항성도 없이 은하의 중심을 기점으로 홀로 공존해 가는 존재이다. 스스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천체인 플래니모는 고독한 삶의 행로로 인해 시인이 지닌 절대 고독의 층위에서 사유할 만하다. 고립과 달리 고독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플래니모가 단순히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은하의 중심’을 기점으로 삼는다. 무수히 많은 항성으로 이루어진 은하의 중심을 기준점으로 혹은 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플래니모의 고독, 즉 시인의 고독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상쇄할 만한 그 무엇이며 그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실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김미사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바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전유해 타자의 고독, 그 소외된 존재의 정동과 맞물린다.
한 묶음
종이 뭉치를 파쇄기에 넣는다
순식간에 글자들이 조각조각 갈려 나간다
이미 저질러놓았던 맘이
파쇄되는 짧은 순간
마음의 한가운데라 여겼던 문장들이
파쇄되어 이제는 누구나 써도 되는
문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행복이 슬픔을 끌고
슬픔이 안녕을 끌고 사라진다
행복과 슬픔이었으니
위로 아닌 위로가 되어버린 문장들
끝끝내 하얘질 수 없는 참담들
왔었으니 되돌아갈 수도 있는 거라 다독이며
잠시 숨을 몰아쉰다
생의 파쇄기를 거친 너는
다음 문장을 짓기 위해 가고 있겠지만
남아 있는 나는
파쇄된 종이 뭉치를 뭉쳐
봉투에 넣는 일이 고작이다
― 「파쇄」 전문
「파쇄」의 화자는 “마음의 한가운데라 여겼던 문장들이” 적힌 “한 묶음”의 “종이 뭉치를 파쇄기에 넣”어 파쇄한다. 순식간에 갈려 나가는 글자들을 보며 화자는 “이제는 누구나 써도 되는/문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쓴다. 내 것이었으나 파쇄되는 순간 누구나 써도 되는 문장이 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자의 마음이 담겼던 문장은 파편화되어 더는 화자 ‘나’의 의도를 담지 못한다. 그것은 ‘나’로 수렴되지 못하는 그저 낱낱의 글자일 뿐이다. 그러나 글자, 즉 언어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속으로 공유되는 그 무엇이자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기호 체계일 따름이다. 한 사람에게 독점되지 않는 언어는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종이가, 문장이 파쇄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이 슬픔을 끌고/슬픔이 안녕을 끌고 사라”지는 정동의 층위를 감각한다. ‘나’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행복과 슬픔을 경험했기에 그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문장을 쓸 때의 “위로”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위로의 경험은 ‘나’를 전유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공유재로서의 언어로 전이된다. 그럼에도 되돌릴 수 없기에 “끝끝내 하얘질 수 없는 참담”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저 “왔었으니 되돌아갈 수 있는 거라 다독이며/잠시 숨을 몰아”쉴 따름이다.
― 이병국(시인·문학평론가)
첫댓글 김미사 시인 님의 시집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시집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