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獨立)을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면『①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힘으로 따로 섬 ②남의 원조나 동료가 없어서 혼자 하는 일 ③한 나라가 완전한 주권 행사의 능력을 가짐 ④개인이 한 집안을 이루어 완전한 사권행사의 능력을 가짐』이라고 뜻풀이가 되어있다. 반면, 광복(光復)은『①빛나게 회복함 ②옛 사업을 되찾음』이라고 적혀있다.
독립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나 광복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단어의 뜻풀이에서 각 ①의 항은 한자어의 훈을 풀이하고 있으나 다음 항부터는 상황에 맞는 내용의 설명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독립이란 단어의 쓰임이 우리가 여태 배워 온 것처럼 그렇게 숭고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한 점이 있어서 이를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대한독립협회" "독립신문" "독립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은 만고역적이며 "갑신오적" 중에 하나였던 "완용"이다. "독립협회"를 만든 사람이 "재필"이고 "재필"은 "독립협회"의 고문이었고 다음 회장은 "치호"가 맡았다.
"치호"는 "이등박문"의 수양아들로 "독립문"이 새겨진 '은찻잔'을 "이등박문"에게 선사했다. 그러자 "이등박문"은 "치호"에게 자기 사진을 주어 "독립협회" 사무실에 걸어두게 하였다.
"독립신문"을 만든 신문사의 초대사장은 역적 "재필"이다. 후에 "재필"은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필립재슨"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신문사의 2대 사장은 부왜역적 "치호"다.
중국(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작자도 역적 "재필"이며, 거기에 "독립문"이란 글(문패)을 쓴 작자가 역적 "완용"이다.
예부터 역적은 "성(姓)"이 없다. 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을 나라에 빼앗겼다. 그러기에 이완용을 완용이라 하고, 서재필을 재필이라 하며, 윤치호를 치호라 한다. 이들을 가리켜서 부왜역적이라 한다. 부왜역적(附倭逆賊)이란 일본을 이롭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나라를 해롭게 만든 사람들이다.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완용"의 일당은 우리나라의 땅을 일본에 팔겠다는 문서에 서명날인을 했다. 그리고 덕영을 시켜서 순종임금의 옥새를 훔치게 했다. 한 주일 후인 8월 29일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하는 "일·한 합방"이 선포되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일이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치일'이라고 해서 "경술국치"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집어먹었다고 해서 "일·한 병합"이라고 했다. 어느 날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 국어사전이라고 만들면서 일본말 사전을 베껴 쓰기 하여 "일·한 병합"을 "한일합방"으로 바꿨다. "한일합방"이라면 '한국이 일본을 합방하는 뜻'인데 "훔치고 베껴 쓰기" 전문가인 그에게 그 내용은 안중에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도 "한일합방"으로 배웠다.
우리말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말도 없었다. "훔치고 베껴 쓰기" 전문가인 그가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흉내 내어 '군사부일체'라 했고, 일본의 '양처현모'를 훔쳐서 '현모양처'라 했다. 틀림없이 그는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은 "일·한 병합"을 꾸미면서 그 공에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작위와 함께 은사금을 내렸다. 완용의 요청으로 순종임금의 옥새를 훔쳐서 "일·한 합방서"에 찍어준 덕영(윤哥)은 자작에 봉해지면서 은사금 40만 원을 받았다. 그러니 그도 틀림없이 돈을 받고 광복 후에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을 것이다.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그 증거도 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日 관리 증언 녹취록 내용: 송병준 나라 팔 때 1억 5천만 엔 요구』라는 기사가 났다.
2004년 8월 12일 22시 05분 도쿄 연합통신을 인용한 국민일보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송병준의 친일매국 행각=송병준이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일본에 조선을 팔아넘긴다.” “1억 5,000만 엔을 내라”고 교섭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 3,000만 엔밖에 들지 않았다. 송병준은 미즈노 총독부 정무총감 임명 직후 접견에서 “합병 당시 일본이 한국 측에 지불한 돈이 너무 적다. 이번에 100만 엔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총감은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독립(獨立)'이란 말이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말이었다. 간교하고 교활한 일본은 열아홉의 재필을 앞세워서 우리 땅에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완전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미끼를 던지며 "독립"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후세들은 재필의 무리를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었다고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당시 일본의 앞잡이이며 부왜역적이었던 재필의 무리가 훌륭한 독립지사화 된 교육이 이 땅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경술년(1910년)에 나라를 빼앗기고 을유년(1945년) 8월 15일에 나라를 되찾았다. 이를 "광복(光復)"이라 한다. 일제의 식민으로부터 풀렸으므로 "해방(解放)되었다."라고도 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 되었는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학자들 때문에 이 땅에 "독립"이란 말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는 "독립"이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다.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독립지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독립"이란 말이 좋다고 쓰면 일본은 비웃고 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시대를 36년으로 한 것도 잘못이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36년이 나오지 않는다.
만 35년에서도 한 주일 이상이 모자라는데 36년이라고 책에서 가르치고 있다. 더하기와 빼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인 모양이다.
2. 대한문(大漢門)이 아니다.
쌓아둔 신문을 정리하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글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한다. 2004년 6월 22일자 <동아일보>에 <동아일보>社 권재현 기자와 <H대학> H라는 특임교수의 질의·답변 내용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서울에 있는 경운궁(慶運宮)으로 들어가는 대문 이름에 관한 시비다. 예의 그 대문 이름이 바로 현재에도 걸려있는 <대한문(大漢門)>이다. <대한문(大漢門)>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궁궐의 대문 이름에 <안(安)>자 보다 더 좋은 글자가 없다. 중국의 <천안문(天安門)>이 바로 그 例다. 개인 집의 대문에는 <안(安)>를 사용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 선조 임금이 임진년 4월 30일에 한양을 떠나 피란 길에 오르셨다. 이듬해 계사년 10월 1일에 왜군이 물러가고 임금이 한양에 다시 들어와서 광복했다. 이것을 계사 광복이라고 한다. 돌아와서 보니 궁궐이 모두 불에 타서 임금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 월산대군이 살았던 집이 비어 있어서 선조 임금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집을 <행궁(行宮)>이라 이름 짓고 대문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선조 임금이 그 <行宮>에서 승하하셨다. 그리고 세자 光海君이 그 <行宮>에서 즉위했다. <行宮·大安門>이라는 이름으로 왜군이 모두 回巢(회소:제집으로 돌아감)했다. 『慶事스러운 運勢가 돌아와서 大安하게 되었다』고 하여 <行宮>이라는 이름을 광해군이 <慶運宮>으로 바꾸었다. 그 후 광해군은 불 탄 <昌德宮>을 다시 일으켜 그리 옮기고 <慶運宮> <大安門>은 빈 궁궐로 되었다.
895년(을미년) 8월에 민비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시해되었다. 고종은 <경복궁>이 무섭고 싫었다. 이듬해가 병신년이다. 그 해 2월에 러시아 공관으로 고종이 몸을 옮겼다(아관파천). 또 그 이듬해인 정유년 2월에 <慶運宮·大安門>으로 몸을 옮겨서 선조 임금처럼 『慶事스러운 運勢가 돌아와서 왜놈들이 回巢하고 大安되기를 바랐다.』
1905년이 을사년이다. 을사오적신에 의해서 외교권이 한양에서 일본국 동경으로 가는 낭패가 있었다. 조선은 일본통감이 다스리게 되었다.
초대 통감이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 되었다. 伊藤博文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생각해낸 것이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실패한 원인을 <慶運宮·大安門>이라는 그 이름의 힘 때문이라고 믿었다. 博文은 먼저 <安>자를 바꾸고 다음해에 <慶運>이라는 두 글자를 바꾸려고 생각했다.
다음해가 병오년이다. 병오년 4월의 어느 날 밤에 博文은 <大安門>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慶運宮>이라는 현판을 <大漢門>으로 바꾸어 걸었다. <大漢門>이라는 현판은 부왜역적 南廷哲이 썼다고 한다.
1907년이 정미년이다. 을사년에 외교권이 일본에 빼앗겼는데 고종이 정미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을 밀사로 보내었다. 이에 伊藤博文이 고종을 죽이려하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면 살려 주리다'고 협박했다. 이에 고종은 자결했어야 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실위(失位)하여 <慶運宮>에 머물렀다. 이에 대문 이름은 큰 부랑아가 살고 있는 <대한문(大漢門)>으로 된다.
또 伊藤博文이 고종에게 말하기를 "네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니 너는 덕(德)이 있도다. 德이 있는 사람은 오래 살게 되는 수(壽)를 누리게 되니, <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겠노라"고 비꼬아서 생긴 이름이 <德壽宮>이다.
대문 이름에는 동사(動詞)가 들어가야 한다.
<大安門>의 <安>이 動詞다.
<大漢門>의 <漢>은 動詞가 아니다.
부랑쟁이를 괴한(怪漢)이라고 한다. 큰 부랑쟁이를 대한(大漢)이라고 한다. 하루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건을 가지고 부왜역적 완용무리들은 『怪漢 安重根이 伊藤博文 侯爵을 총살했다』라고 적었다. 일본놈들에게 <漢>은 부랑쟁이<한>으로 된다.
H대학의 H특임교수자는 <동아일보>와 취재에서 『伊藤博文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꾼 것이 아니고, <漢>이 <하늘>이기에 고종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꿨다』라고 했다. <漢>이 <하늘>로 통한다는 H 교수자의 한자능력을 의심하기에 앞서서 왜로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보호하려는 느낌이 수상하다.
이어 H 교수는 고종의 명으로 1906년에 쓰인 '경운궁 중건 도감 의궤(慶運宮 重建 都鑑 儀軌)'에 기록을 근거로 했으며, 의궤의 한 구절이 대한(大漢)은 소한(하늘기운소漢·하늘)과 운한(雲漢·하늘)의 뜻을 취한 것'이라며 <대한문>의 의미를 밝혀 놓았다고 하는데 역사 고증을 통해서 알아 본 바에 의하면
1. 고종의 명으로 1906년에 쓰인 '경운궁 중건 도감 의궤(慶運宮 重建 都鑑 儀軌)'에 기록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며
2. 1904년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는데 다행히도 <대안문>은 불타지 않았고
3. 위의 불로 인하여 불에 탄 전각(殿閣)을 다시 세우기로하고 윤용선이라는 사람을 '경운궁 중건 도감 도제조(慶運宮 重建 都鑑 都提調)'로 임명한 사실 외에는 경운궁 관련 문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왜로 이등박문을 두둔하는 H 교수는 그 왜곡하여 말한 의도를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올해로 광복 63년이다. 광복이 환갑과 진갑을 다 지냈다.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서 구성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