呂祖日
回光循循然行去, 不要廢棄 正業
(여동빈, 태을금화종지, 7장)
한자로 쓴 것은, 한자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Carpe Diem 같이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라틴어 표현에서
‘날을 잡아라, 오늘을 살아라...’ 식으로 하나하나 뜻을 알아 갈 때처럼,
모르기 때문에 뭔가 더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크고 그렇게 알아지는 것의 쾌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10년도 훨씬 전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스승께서, 살생하는 사냥꾼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늙은 스승이 돌을 주시며, 손으로 갈아 삼존마애석불을 만들라” 하신다는 제 꿈을 들으시고 ‘정업(正業)’을 말씀하시며 든 일화입니다. 스님과 중생들이 정성을 들여 예불을 드리는데, 정작 부처님은 그곳을 떠나 사냥꾼에게 가서 그의 춤을 구경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사냥꾼이 자신이 잡은 사냥감 앞에서 좋아서 신나게 춤추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들은 정업을 지금 다시, 도가의 선인, 여조의 말에서 회광,...정업...을 마주하며, ‘빛을 안으로 돌이켜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굳이 세상일이나 생업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그 뜻을 떠듬떠듬 헤아려 봅니다.
회광, 빛을 몸 속 깊은 곳까지 닿게 돌리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신비로운 일인데,
그동안 공부한 융의 정신 체계(가설)로 상상해보면,
의식이 자아만의 영역을 고집하지 않고, 모르는 깊은 무의식을 겸손하게 그리고 용기있게 탐색할 때 빛을 보는 일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끙끙대서가 아니고, 또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이, 나를 둘러산 자연 자체가 제대로 순환하고, 이를 두고 정업이라 하신 말씀이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몸을 치료하고, 마음을 치유한다고 할 때,
내가 상대(patient, client)에게 무엇을 하려 하기보다,
나에게 빛이 돌아가게 하는 일이 먼저구나 합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도가 선인의 말도 허황되게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도 그랬고, 융도 그랬고,
정말로 나에게도,
맹인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리는 기적은, 허황된 일이 아니고,
새로눈 세계에 눈 뜨고 새로운 소리를 듣게 된, 바로 내 안의 변화 아니면 무엇일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냥꾼이 구르고 깨지며 사냥감을 쫓듯,
손이 닳도록 돌을 문지르며 새로이 드러날 형상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