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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상 수항문 지구 개발건 2023.1.30. 권오철
배경
봉화군 봉성면 장평리 충효당 인근 `제1지구 한베트남 역사관’,‘제2지구 베트남 기념지구’, ‘제3지구 베트남 마을’ 개발이 한베트남 국가 예산에 의해 개발된다.
이에 한베트남의 클라우드 펀딩을 통한 진정한 우의의 장을 실사구시.실사구익,실속제일의 정신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상황
현재는 1,2,3 개발에 우선 350억원정도의 1차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2018년 사업계획 용역서에 나와 있다. 일차 베트남 고위층이 오고 하지만 실제 이익이 나와야 영속성을 가지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제4지구 내용
1지구는 충효당 중심의 역사관이고, 2지구는 기념관을 짓고 수익이 나는 휴양시설이고, 3지구는 실제 베트남 마을을 조성하여 관광자원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에 있는 화산이씨의 근거지를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여기다가 수항문, 망국단,월남산성등의 복제품을 건설하여 분단의 아쉬움을 달래고, 그 추진과정에서 남북의 교류도 기대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리왕조 사당등 베트남식 왕궁 건물도 건설하고 이는 리조트로 하여 한베트남 양국의 우의의 장소로 이용하고, 인근 다덕약수와 함께 특화 한다는 것이다.
민자 투자 규모
1) 1차 한베트남 리왕조 지역 두선(실제는 하노이)지역과 한국의 클라우드 펀딩 각 1000만불 규모로 2000만불을 받아서 시작한다.
2) 2차로는 기본 계획하에 제4지구를 화산봉(花山峰)으로 명명하고 본격적으로 도로 및 지구 평탄 작업을 한다. 약 4000만불 추가 투자가 필요하며 이는 주식화 한다.
3) 3차는 옹진 기념물 (수항문, 망국단,월남산성등) 과 리왕조 기념물(왕궁등 양식이나 리조트)교육관등을 건립하여 운영한다. 베트남인의 신혼 여행지로도 이용. 인근 안동,영주,경주,울진바다등 이용의 허브 역할을 한다.약 1억불 정도가 필요하며 역시 주식화 한다.
5. 손익계산 및 자금 플로우
(별도 산정하며 공식적인 용역기관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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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상 탈출 정착기 (소설의 일부분)
황해남도 옹진군 본 영리에 있는 비각, 수항 문 비에 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고려 때 이용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래 중국의 농서 땅. 즉 1174년 대월 제국의 수도 탕롱 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리 왕조 대월 제국의 6대 황제였던 영종의 7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송나라 때 남평 왕으로 봉했는데 후에 국호를 안남으로 고치고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송나라에서 전란이 일고 안남의 왕족들이 망할 것을 예견한 그는 강대한 국가이면서도 문명국이고 예와 도덕이 밝은 고려국 밖에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 끝에 배를 타고 고려 옹진현을 통해 망명하였다. 고려는 옹진현의 남쪽 미자동에 거쳐를 정해주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조용히 살게 했다.
몽골의 수군이 옹진에 달려들어 연해 지방을 약탈하였다. 고려 군사들이 드센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귀화한 이룡상은 자기도 고려를 위해 뭔가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어느 날 몽골의 수군이 갈항만에 정박하여 겁에 질려 있다가 흰 기를 들고 항복해왔다. 금박 칠한 큰 함 5개를 황해도 책임자 앞으로 보내어 왔다. 책임자는 기뻐 선뜻 받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이룡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용상은 함을 조심히 들여다보니 적의 장수들이 함 안에 숨어서 칼을 준비하고 여러 장수들을 헤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용성은 상자에 구멍을 내고 끓는 기름을 부어 적들을 다 죽인 다음 다시 금박칠을 하여 돌려보냈다. 고려군의 선물인 줄 알고 뚜껑을 열어본 적들은 겁에 질려 정식으로 항복하고는 즉시 도망쳤다. 그 후 왕은 이용상의 공로를 평가하여 화산군으로 봉하고 땅 30리, 민호 3.000호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진산을 화산으로 고치었다. 이렇게 몽골 수군의 항복 문을 받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이라고 하여 수항 문비라 하였다.
사실 화산군은 현재 북한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이다. 이용상의 집성촌은 대부분 황해도 지역에 있으며 일부 월남자와 경상도 지역에 일부 살고 있는 후손들이 있다.
여황제가 된 소성공주와 자신의 8세에 불과한 조카 썬 까인(陳煚)을 결혼시켰다. 그리고 왕위를 남편에게 넘기도록하는 방식으로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마침내 쩐 까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리 왕조가 멸망하고 진씨(陳氏) 대월(大越)이 건국되었다. 1226년 1월의 일이었다.
왕조가 이씨에서 진씨로 넘어가면서 대규모 살육이 일어났다. 먼저, 진수도는 리 왕조의 왕족과 종친들을 전부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새로운 왕조 건국의 걸림돌인 혜종을 독살하였다. 1226년 12월 진수도는 독살된 혜종의 장례식을 빌미로 그 자리에 참석한 왕족과 그 종친들을 남김없이 도륙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리 왕조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멸족을 당했다.
그러나 몰래 진행되던 진수도 일당의 계획은 궁중에 심어놓은 이용상의 심복을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긴급한 상황을 보고받은 이용상은 혜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계획을 바꾸고 참모들과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갑론을박 끝에, 먼저 도성을 탈출하여 훗날을 도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자신의 세력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러나 당장 피신할 곳이 없었다. 이미 진수도의 세력이 전국의 호족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곳곳의 요충지도 이미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용상은 중국의 송(宋)나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심복을 항구도시 하이퐁(海防, Hai Phong)으로 보내 배를 구할 것을 지시했다. 험준한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바다로 피신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용상은 병을 핑계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기족과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많은 인원이 도성을 소문 없이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행히 곳곳에서 이들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다. 하노이에서 하이퐁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계절이 우기(雨期)의 막바지였지만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려 길이 미끄러워 수레를 밀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벅찼다. 아이들과 부녀자, 노인들이 포함된 그들의 일행은 속도를 낼 고수 없었다.
“전하. 궁궐에서 보낸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후미를 따르던 호위대장 군필(君)이 급하게 달려와 이용상에게 보고했다. 대열을 훑어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이용상이 소리쳤다.
이렇게 가다가는 하이퐁에 도착하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 것입니
“짐수레를 버리고 간다. 각자 최소한의 자기 짐만 챙겨라.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들만 수레에 태워라. 나머지는 모두 발버리고 간다. 서둘러라. 하이퐁에서 만나자."
부하들이 신속하게 수레에서 짐을 끌어내리고 대신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들을 부축해서 태웠다. 이용상이 선두에와 서서 밀을 몰았다. 급하게 각자 짐을 챙긴 사람들이 말에 올라 뒤 따랐다. 대열이 짧아지고 수레의 속도도 빨라졌다.
길가에는 버리고 간 수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추격대와의 거리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바쉬지 않고 말을 몰아 하이퐁 항구에 도착한 이용상 일행은 부둣가로 들어섰다. 미리 파견한 부하들이 소형 선박 2척을 선착장에 대놓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상의 호위병과 가족을 중심으로 배에 올랐고, 나머지 배에는 그의 심복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2대의 배에 사람들이 모두 올라타자 배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용상이 뱃머리에 서서 출발 신호를 보냈다.
“송나라로 간다. 배를 몰아라. 모두 안전하게 가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전하.”
배가 항구를 막 벗어나려고 할 때, 진수도가 보낸 궁궐의 군사들이 부둣가로 들이닥쳤다. 화살을 어지럽게 쏘아대긴했지만 이미 이용상 일행이 탄 배는 항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군사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추격할만한 배를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겨우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항구를 벗어나면서 이용상은 멀어져가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돌아와 이 산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이별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같은 왕족이자 호위대장인 군필이 뱃머리에 올라 소리쳤다.
“모두들 조심해라. 후미를 따르는 배와 거리를 잘 조정하고, 항로를 잘 잡아라."
"예. 장군"
부하들이 신속하게 배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겼다.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바다는 비교적 잔잔했다. 육지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새 사방에는 망망대해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이용상은 극적으로 가족과 일단의 부하들과 함께 진수도의 마수에서 벗어나 베트남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베트남 최초의 보트피플(boat people)이 된 그들의 앞에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항구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고요하던 바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자 배 내부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배를 처음 타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배 멀미는 피할 수 없었지만, 하늘에검은 구름이 잔뜩 몰려들고 파도가 거세지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갑판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용상도 배 멀미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하, 태풍입니다. 갑판은 위험하오니 선실로 들어가십시오.""
호위대장 군필이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용상을 선실로 끌었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었고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성난 파도가 연달아 갑판 위를 쓸고 지나가자 더 이상 갑판 위에는 사람이 서있을 수 없었다. 하늘이 점점 검어지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왔다.
“돛을 내리고 뱃머리를 잘 잡아라. 사람들을 모두 선실로 들여보내고 갑판 위로 올라오는 자가 없도록 해라. 노약자들을 잘 챙겨라"
"예. 전하”
“후미를 따르는 배도 이상 없는가?"
“이상 없습니다. 수신호로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항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추격을 벗어나려고 급하게 배와 사람을 구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상에서 맞닥뜨린 긴급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벗어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며칠 동안 사납게 몰아치던 태풍이 물러가고 바다가 고요해진 뒤에야 사람들은 갑판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용상은 부하들을 시켜 배 안의 상황을 점검했다.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에 식수는 충분했지만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쳐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태풍으로 돛대가 부러져 배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이용상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후미를 따르던 배가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험한 파도에 난파되어 침몰한 것인지, 아니면 태풍에 밀려 다른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용상은 크게 낙담했다.그러나 어찌하랴. 이 망망대해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호위대장에게 배의 부서진 부분을 고치고 식량을 보충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지루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표류하는 배가 서서히 북상하면서 이들은 기후라는 또 다른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따가운 햇실과 싸워야 하던 이들이 언제부터인가 밤이 되면 뼈 속까지 시려오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더운 나라에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추위는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더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은 배고픔과 갈증이었다. 다행히 간간이 내리는 빗물로 식수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식량을구하는 것은 큰 문제였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이들은 할 수 없이 낚시도구를 만들어 망망대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엉성한 도구로 그들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수면으로 떠오른 큰 거북이를 만나는 건 횡재나 다름없었다.
부러진 돛대 때문에 방향을 잡지 못하던 배는 망망대해에서 해류에 떠밀려 북상했다. 빗줄기는 이제 하얀 눈으로 바뀌었고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 둘 죽어나갔다. 이들을 지켜보는 이용상은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자신과 이들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무력함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다시 캄캄한 밤이 지나고 망망대해에 아침이 밝았다. 바다는 고요했고 바람도 불지 않는 화창한 날씨였다.
다시 캄캄한 밤이 지나고 망망대해에 아침이 밝았다. 바다는 고요했고 바람도 불지 않는 화창한 날씨였다.
"육지다. 육지.”
갑자기 갑판 위에 올랐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선실 안에서 상념에 잠겨 있던 이용상은 깜짝 놀라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갔다. 저 멀리 육지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흥분해서 서로 부둥켜안고 살았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떤 사람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추위에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얼마 만에 보는육지인가.
“노를 저어라. 육지에 배를 대라. 서둘러라.”
이용상의 지시에 군필은 부하들을 지휘하여 신속하게 움직였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화색이 돌았다. 마침내 배가 육지에 닿았다. 이용상은 부하들에게 속히 사람들이 추위를 피할 만한 장소를 찾으라고일렀다. 잠시 후 이들은 민가를 찾아 여장을 풀었다. 길고 긴 바다의 피난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1127년 정월 중순, 마침내 이들이 표착한 곳은 바로 황해도 옹진반도의 남단 창린도(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베트남을 떠난 지 꼬박 두 달이 지나 새해 신년벽두의 어느 날이었다. 실제로 오늘날 창린도로 향하는 해변을 '낙래외(落來隗)'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도착한 후 짐을 옮기다가 베트남 조상의 제기(祭器)를 떨어트렸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비록 송나라로 가려던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고려국에 안착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용상은 작은 섬은 정착할 곳이 되지 못하므로 육지에 정착할 적당한 곳을 찾으라고 사람들을 풀었다.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 이용상 일행은 육지로 이동하였다. 이미 사람을 풀어 미리 봐 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그런데 이들이 배를 타고 육지에 막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도적떼를 만났다. 도적떼들은 해안가에 배를 대고 해변가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묶어 배에 태우고 있었다. 해적이었다.
이용상은 부하들에게 즉시 마을사람들을 구할 것을 지시했다. 해적떼보다 적은 병력이었지만 호위대장 군필이 이끄는 베트남 사람들은 용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적들은 뿔뿔이 도망치고 잡혔던 사람들은 풀려났다. 마을사람들이모두 나와 이들을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눈빛만 서로 교환할 뿐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용상 일행은 마침내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에 정착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은 이방인들의 선행은 곧바로 옹진현에 보고되었다. 옹진현령은 이용상을 찾아 감사를 표하고 극진히 접대하며 필담(筆談)을 나눈 끝에 이들이 안남국 왕자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옹진 현령은 안남국의 황손이 멀리서 배를 타고 이곳에 이르러 해적들을 퇴치하고 백성들을 구했다는 상소문을 써서 고종에게 상주하고 그의 일행을 받아주기를 청원했다.
옹진현령의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환영하였다. 고종은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면서 극진히 대우했다. 이용상을 고종에게 표를 올려 “망국(亡國)의 왕자를 이리도 과하게 대우하시다니 몸 둘 바를모르겠습니다.”라고 고마워하자, 고종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어느 나라도 피할 수가 없다. 나도 언제 망국의 왕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고 답신을 보내 위로했다.
1253년 12월, 옹진현령이 다급하게 이용상에게 달려와 구원을 요청했다. 몽골군이 쳐들어와서 지역이 초토화되고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용상은 즉시 자신의 부하들과 고려병사들을 한 데 묶어 부대를 편성하여 수성전략을수립하였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화산(花山)의 삼면에 흙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웠다. 오늘날 황해도 옹진에 남아 있는 화산산성(花山山城)이 바로 그것이다. 이용상은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투석기를 쏘면 함께 쏘고, 성벽을 넘으면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 대응했다. 몽골군이 집요하게 계속 공격해 왔지만, 매복과 기습작전을 번갈아 전개하여 몽골군을 대파하고 5백여 명을 포로로 잡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이들은 반년동안이나 끈질기게 저항하며 산성을 지켜냈다.
이용상의 활약과 전공을 보고 받은 고종은 그를 포상하여 관직을 높이고 화산을 중심으로 30리 일대의 식읍 2천호를 추가로 하자했다. 또,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祭需)를 내리고 화산관(花山關)에 '수항문(受降門)'이란 친필을 내려 걸도록 하였다.
고려 조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서도 이용상은 늘 조국을 그리워했다. 해마다 고향을 향해 제사를 지내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천수를 누리고 화산에 묻혔다. 그가 고향을 그리며 세운 망국단(望國壇)과 화산산성, 고종이 이용상에게 내린 수항문(受降門), 그리고 그의 망명과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기적비(受降門紀蹟碑)가 이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를 삼아 본관을 화산으로 하여 계보를 이어갔다. 이용상은 망명할 때 리 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을 그의 후손들이 화산이씨 족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화산이씨의 족보에 기록된 리 왕조의 계보와 쩐 왕조가 기록한 리 왕조의 계보가 일치함으로써 화산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이간(李幹)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李一淸)은 안동부사를 지네고 안동시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조의 4대 왕인 인종 이건덕(仁宗 李왕乾德, lý Can Đúc)의 셋째 아들이자 5대 왕 신종 이양환(神宗 李陽煥, Ly Dirong Hoán)의 아우가 되는 이양혼(李陽焜)이 조상이다. 이양혼은 신종과 왕위를 두고 다투다 북송으로 망명했고, 이후 북송이 쇠락하면서 고려로 와 경주에 정착했다. 그의 9세손인 이우원(李遇元)은 국자생원(國子生員)으로 상서좌복야에 추봉되어 정선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정선(旌善)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용상의 화산이씨 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들이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인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1995년에 화산이씨 대표단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해 왕손으로서 인정받았다.
베트남에서는 19세기까지 이상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조선에 표류한 베트남 황태자 일행을 조선인들이 약탈하고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설의 근원은 아마도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에 대한 이야기가 그 지역에서 대를 이어 입으로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베트남(월맹)의 역사학자가 있었다. 당시 북베트남의 문화문한
그런데 1959년에 이 전설을 확인하려고 북한을 방사절로서 북한을 방문한 역사학자 쩐반잡이 북한학자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옹진의 망국단과 수항문기적비 등을 답사했다. 그는 이용상의 전설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에 보고서를 남기면서 서문에 이용상은 북베트남과 북한의 우호관계를 상징한다고 기록하였다.
목으로 남베트남과 한국의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남이 패망하고 이훈도 1976년에 사망하면서 화산이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7년, 화산이씨 25세 후손인 인 이훈이 남베트남(월남) 대사관을 방문하여 자신이 베트남 왕자 이용상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 뒤 이훈은 남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뿌리 찾기 활동을 계속하였고, 그의 활동은 1226년 리 왕조가 멸망한 뒤 741년 만의 귀향 당시 남베트남의 대통령까지도 관심을 보였지만, 씨의 뿌리 찾기는 실패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1995년 3월, 베트남 정부의 초청으로 화산이씨와 주소 확인되었다. 이들은 하노이 북부 박닌성 딘방에 위치8명을 모시고 있는데, 베트남 화폐 1천 동짜리 주화에 새겨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이들은 계보의 종묘를 찾아 분향했다. 리 왕조의 종묘는 역대 베트남 국민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다.
화산이씨는 남한에 560가구에 4000명이 거주한다.
800년 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왕족의 후손들이 수만리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그 계보를 이어오고 있었으니 그 기이한 인연의 끈은 놀랍다.
그리고 당시 정착한 베트남인이 이용상 하나 만 아닐 것이고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또 북쪽이 원조이니 그 쪽 화산이씨도 추적하여 남북이 통합된 진정한 이용상의 후손으로서 기념비적 사업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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