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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시인은 보통사람과 얼마나 다를까? | ||
/ 김형윤 출판인 | ||
부산일보 2008/07/22일자 027면 서비스시간: 10:42:05 | ||
신문에서 청마 유치환 선생의 기사를 읽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시인은 보통 사람과 얼마나 다를까?
신문은 올해 7월 14일로 청마 선생이 탄생 백 돌을 맞았으며, 이를 기려서 선생이 태어난 곳인 거제도에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몇 해 전에는 거제시와 통영시가 서로 청마가 자기 고장 사람이라며 '소관'을 다투었으며 이 문제로 법정에까지 갔다는 기사도 났었다.
내가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청마 선생이 경남여고의 교장 선생으로 부임해왔다. 청마 선생이 시인인 줄은 학교에서 배워서 일찍부터 알았었지만 교장 선생이라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인이 교장 선생이라니, 무척 느낌이 신선했다.
교장이기 보다는 시인이었던 청마
그 시절 나는 경남여고 교장실로 친구와 함께 기어이 청마 선생을 뵈러 갔었다. 그때 뵌 선생은 다른 교장 선생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할 바가 없었다. 말씨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으나 듬직한 신체에 색깔이 노릇하게 들어간 안경을 끼고 있었던 탓인지 인상이 좀 엄숙하고 차가웠다. 그뿐 나는 아쉽게도 선생의 내면으로 들어갈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대학 시절, 어느날 신문에서 청마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1967년 2월 13일 밤 아홉시 반 무렵에 시내 버스에 치여 돌아가셨다. 예순도 못 된 쉰아홉 살,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이번에 선생의 탄생 백 돌 관련 기사를 읽다가 문득 떠올린 것은 선생의 그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때 전해 듣기로 선생은 술을 한잔 한 상태에서 횡단보도가 아닌 곳으로 차도를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묘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가 만약 시인이 아니고 교장 선생이기만 했다면 그렇게 비명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장 선생과 무단횡단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고독감, 허무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바닷바람 차가운 2월의 밤에 술을 마셔야 했고, 혼자 어둠 속을 걸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반평생을 교사로 일했던 청마 선생은 남학교보다는 여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경남여고에 오기 전에는 대구여고의 교장이었고 그 앞은 경주여중고의 교장이었다. 돌아가시던 해에는 부산 남여상의 교장이었다. "남학생들은 거칠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청마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신문의 칼럼에서 썼던 글을 기억한다. 선생은 그 글에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추한 동물이라고 지적했다. 여자는 소피를 볼 때 손을 더럽힐 일이 없지만 남자는 부득이하게 손으로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부위를 만져야 하는데, 그 더럽혀진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태연히 악수하고 이것저것 다 만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에는 화장실에서 손 안 씻고 나오는 남자와 악수하는 것은 물론 같은 밥상 앞에 앉기도 꺼리지만 선생의 이 글을 읽던 시절에는 나 또한 손 안 씻는 남자였다. 그러하였으므로 선생의 이 글이 한편 민망스러우면서도 참 별스럽기도 하다고 여겨졌다.
시인은 풀잎 흔들림에도 눈물
이제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보통 사람과 얼마나 다를까? 시인은 큰 꿈을 가슴에 품고 우주의 신비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아주 작은 풀잎 하나 흔들리는 것에서도 눈물 흘리고 밤잠 못 드는 존재이다. 시인은 소피 본 남자의 손을 못내 부끄러워할 수 있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바람 부는 밤길에 술에 취해 혼자 정처없이 걸을 수 있다.
부산 하단에 가면 유치환 선생의 시비가 있다. 청마 선생은 거제도에서 태어났고 통영에서 성장기를 보냈지만, 인생의 가장 원숙한 시기를 부산에서 보낸 분이다.
. 구태여 두 도시 사이에 끼어들어 '소관' 싸움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부산 사람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던 한 시인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