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자도 황경한 사랑의 십자가나무
후풍도는 바람의 섬이다. 돛배가 제주 바다를 건너려면 순풍을 만나야 한다. 후풍도는 너른 바다로 나가려는 돛배가 거센 바람 뒤 순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던 바람의 섬이다.
고려 때 후풍도를 조선시대에 추자도라 하였다. 추자는 가래 열매로 사촌인 호두보다 갸름하다. 추자도는 상·하추자도,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가 가래 열매를 뿌려 놓은 듯 옹기종기 모여 얻은 이름이다. 조선과 구한말에 전남 영암군, 완도군 등이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 시기에 제주도가 되었고 전라도와 제주도 뱃길의 중간 기착지이다.
이 추자도는 고려 원종 때인 1271년 삼별초 대몽항쟁에 여몽연합군 토벌군이 전함 160여 척을 타고 제주로 가다 폭풍우에 대피했던 곳이다. 또 1270년 5월부터 1273년 4월까지 서남해안 모든 섬의 공도령에 섬을 비웠다가 1352년 공민왕 원년 해금령으로 주민 입주가 허용됐다.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러 제주에 가고 올 때도 전함 314척이 거센 풍랑에 머물렀다. 이때 주민들에게 그물로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었고 주민들은 ‘조국도통대장 최장군 신위’를 모신 사당을 세워 오늘까지도 그 은덕을 기리고 있다.
조선 세종 3년(1449) 들끓는 왜구에 다시 공도령을 내렸다. 그러자 성종 21년(1490) 주인 없는 추자도에 왜구가 머물며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했다. 1494년에는 4척의 왜선이 제주도의 공물까지 약탈했다. 다시 주민이 들어온 것은 7년 왜란이 지나간 선조 41년(1608)이다. 이때 해금령은 선조의 치덕이 아닌 23전 23승으로 왜를 몰아낸 이순신의 은덕이다.
추자도와 제주도 중간쯤의 관탈(冠脫)섬은 제주 귀양길의 선비가 갓과 관복을 벗고 평민 옷차림으로 갈아입던 섬이다. 그렇게 추자도는 제주도 유배인들의 중간 기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추자도에도 유배 선비가 여럿 머물렀다.
영조 때 이진유(1669~1730)는 1755년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완도 신지도에 이배되어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1705~1777)의 큰 아버지이다. 이진유는 1725년 ‘을사처분’에 추자도에 유배되어 ‘속사미인곡’을 지었다.
정조 때 궁중의 잡무를 맡은 대전별감 안조원이 34세 때 왕의 도장을 몰래 사용하다 들켜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모두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처를 외면하자. 관노 집에 억지로 떠맡겨졌다. 관노는 그릇을 내동댕이치며 ‘단칸방에서 우린 어찌 사느냐?’며 역정을 냈다. 안조원은 잘 곳이 없어 처마 밑에서 자고 동냥으로 끼니를 때우며 한여름에도 더러운 누비바지를 입어야 했다. 이때의 심사를 ‘내 눈물 모였으면 추자섬을 잠기게 하였으며, 내 한숨 풀었으면 한라산을 덮었으리’라고 읊었다. 이 3,519구의 한글 장편가사 만언사(萬言辭)를 한양 궁궐에 보내니 궁녀들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지나가던 정조가 알게 되어 2년 만에 유배가 풀렸다.
황경한은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에 순교한 황사영의 아들이다. 황사영의 처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관노,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관노가 되었다. 이에 정난주는 아들이 관노가 되는 걸 막으려고 선원들에게 ‘아들이 죽은 것으로 해달라’ 부탁한 뒤 추자도 예초리 바닷가 바위에 두었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황경한은 오 씨 어부의 아들로 성장했다. 그날 두 모자가 피눈물로 헤어진 ‘물생이 바위’에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훗날 어른이 되어 자신의 신분을 안 황경한은 어머니가 살았던 제주도를 바라보는 곳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그 황경한의 묘를 지키는 소나무도 십자가이니 은혜의 십자가이다. 눈물의 십자가와 은혜의 십자가는 온 세상에 믿음과 소망, 사랑을 나누는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