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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거슬러 올라감
순리에 역행하는 물줄기
스스로 뿜어내고자 하니 힘겨운 삶
순명
따르는 것
따지지 않고 복종하는 것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이끄심에 맡기는 것
장류수
길게 흐르는 물줄기
쟁취하는 야곱은 분수의 힘겨운 일생
흐름에 자신을 맡긴 요셉은 마냥 흐르는 長流水
세례성사 때 나는
주님의 것으로 성별 되었다.
이미 그 때부터
거룩한 내맡김은 시작이 된 셈.
이끄심에 따르는 것
내 삶의 종착역은 하느님 나라.
그 목적지에
나는 닻을 걸어 놓았다.
난 내가 나약해서 참 좋다.
난 내가 가난해서 참 다행이다.
난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아 행복하다.
내가 똑똑하면
매사를 내가 앞장서 할테니까.
좀 바보같고 모자란 삶이기에
만사를 그분께 의탁할 수 밖에 없다.
부족한 것이 얼마나 충만한 것인지!
내 안의 예수님이 매사를
내 대신 앞장서 주신다.
이 얼마나 안전한 운행인가!
기관차를 예수님께 맡겨드리고
나는 객차되어 내 맡겨 이끌려가니,
나라는 작은 물방울이
목적지 바다에 이를려면
흐름에 맡겨 어디든 가리지 않고
밀려 나가야 한다.
때론 계곡의 급류와 어울려 부딪침에 아파하고,
어느 곳에선 개울물이 되어 얕으막 자갈들과
올망졸망 데이트도 즐기게 된다.
그런가 하면 폭포를 만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내맡겨 떨어지고 나면
도리어 짜릿한 쾌감을 맛본다.
어느땐 늪에 머물며
지리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홍수에 떠밀려 강물이 되고,
합류되는 동지들을 받아들여 여행을 한다.
그 동지들 중엔 내가 싫어하는
똥물도 있었고,
공장 폐수도 만났지만 그냥 어울렸다.
합창의 정화인가?
모두가 큰 물을 이루니 도리어 맑다.
순리에 맡긴 삶, 장류수의 삶.
늘 낮은 곳 부터 채워 스며드는 삶,
앞이 막히면 유연하게 돌아가는 삶,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고여 쉬어가는 삶.
순리에 떠밀려 오다보니
어느덧 목적지 바다를 만났다.
우리네 인생도 역행치 않고
순리에 따르면 이와 같으리!
바다가 물의 제왕이 됨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덕이니라.
그 분께 내맡긴 영혼은
자유로움의 흐름을 즐긴다.
이것이 순명을 통한
長流水의 받아들임 축복이었다.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해
만사를 원망없이 받아들임한 성조 요셉
새옹지마의 실상을 보여준다,
화가 복이 되다니,
극적반전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 온
순명의 대가 요셉!
그 삶을 들여다보자.
대강줄거리
요셉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하느님으로부터 미래가 약속 된 꿈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열일곱 살 때 이복형제들의 살의(殺意)에 찬 미움으로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경호대장 집에 팔려 간 그는 마침내 주인의 신임을 얻어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호대장의 부인을 겁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되어 다시 구덩이, 곧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준 댓가로 자유인이 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가 서른이었다. 열일곱에 시작 된 고통스런 삶이 13년 동안 계속된 것이다. 이집트 총리가 된지 7년이 지나 온 세상에 가뭄이 들었을 때 요셉은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그들과 화해하고 아버지 야곱과도 상봉하게 된다.
A
요셉 이야기에서 옷은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재료가 된다.
먼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 준 장신구 달린 옷은 짐승에게 물어뜯긴 옷 이야기로 발전된다. 이후 이집트에 종으로 끌려간요셉은 주인에게 청지기 옷을 받지만 그를 탐한 주인의 아내에게 찢겨지고 빼앗긴다. 그리고 요셉은 강간미수범이 되어감옥에 갇히고, 우여곡절 끝에 파라오의 신임을 얻어 이집트 재상들이 입는 고운 모시옷을 선사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옷은 더이상찟기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B
인간의 시간표와 하느님의 시간표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 간 뒤 13년 동안의 이끄심을 기다린 끝에 하느님의 시간을 맞이한다. 하느님의 시간표에 따라움직였던 가장 모범적인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도 왕이 되기 까지 거의 13년을 기다렸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지만 절대 하느님보다 앞서 나아가지 않았다. 사울왕이 죽었을 때도 성급하게 왕좌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사무엘 상권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후 하느님께 묻는다. "유다지방에 올라가 자리를 잡아도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자 다윗은 또다시 묻는다."어디로 올라 가면 좋겠습니까?" 하느님이 "헤브론으러 올라 가거라." 하시자 그대로 한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었다고 해서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시간표와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를 여쭤보며 행동하였다.
C
요셉의 부탁
요셉은 연회를 책임졌던 시종장에게 간곡히 부탁을 한다. 시종장이 복직되어 다시금 파라오를 섬기게 될 때 그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요셉은 이 부탁을 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막연하게 주장한다. 형들의 소행이나 보디발 아내의 소행을 낱낱이 밝히면서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다.그냥 그가 감옥에 들어올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만 말한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이유가 얼마나 지혜로운 처사인가! 후일 형들이 파라오를 만났을 때, 파라오가 사실을 알았다면 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겠는가? 누구도 적을 만들지 아니하고 포용한 요셉의 처신은 훌륭했다
D
요셉의 절대적 신앙
파라오는 요셉이 오자 묻는다. "내가 들으니 너는 꿈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푼다면서?"[41.15] 파라오는 요셉이 꿈의 세계를 꽉 잡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다시 한 번 요셉은 감옥에서 파라오의 시종장들에게 말했듯이 꿈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선언한다.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느님뿐이십니다."[41.16]이렇게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요셉은 꿈의 계시자가 하느님이심을 거듭 강조해서 알려준다." 앞으로 될 일을 하느님께서 폐하께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란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하면서 [41,25.28.32]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밑에는 역사의 주인은 파라오가 아니라 야훼 하느님이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셉은 파라오 앞에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하면서 하느님만이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유일한 신, 권능의 신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태양신을 섬기는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노예요 죄수인 요셉의 보잘것 없는 신분을 생각할 때 절대 권력을 지닌 파라오 앞에서 그가 했던 신앙고백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요셉은 경호대장의 아내에게 "이렇게 엄청난 짓을 제가 어떻게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느님께 죄가 됩니다." [39.9]하고 말하였다. 또 파라오의 시종장들 앞에서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40.4]하고 말하였다.그후 파라오 다음가는 권력을 가진 자로서 요셉이 보여준 태도는 모범적이다. 우선 그는 원한에 사로잡혀 복수하기보다는 사랑과 용서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세속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보통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자기를 반대하고 곤궁에 처하게 만들었던 이들의 명단을 만들어 하나하나 복수하는 일이다. 요셉 또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면 총리가 된 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보디발과 그의 아내를, 그 다음 은혜를 잊었던 시종장에게 어떤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다. 요셉이 선택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 요셉은 훗날 형들에게도 복수보다는 화해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복수는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훗날 형들이 울면서 "이제 우리를 종으로 삼아다오"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을 대신 하리이까?"[50,19]라고 말한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말은 복수는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명백히 밝히는 말이다. 야곱의 유언중 그가 묻는 말 "이 아이들은 누구냐?"에 요셉은 "이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이곳에서 저에게 주신 아들들입니다."[48.9]하고 대답했다. 요셉은 어느자리 누구 앞에서도 늘 하느님을 드러내 앞장 세운 신앙인의 참 표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E
겸손한 통치자 요셉
이집트 통치자가 되었을 때 요셉의 나이는 서른이었다.[42.46] 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와 요셉이 공통점이 많다고 지적하는데그 중 하나가 둘 다 같은 연령대에 유명해졌다는 점이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서른 살쯤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3.23]라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께서 세상 모든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빵을 나눠주기 위해 공생활을 시작한 나이와 요셉이 세상 모든 백성에게 육신을 위한 생명의 빵을 나눠주기 위해 공직에 뛰어든 나이가 다같이 서른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성서에서 서른이란 나이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나이였다. 다윗 성왕은 어린 나이에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1사무16,11-13]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2사무5,4] 레위인들은 하느님의 성막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그 준비를 하지만 실제로 봉사를 시작하는 것은 서른이 되면서부터이다.[민4,46-47] 그외 둘의 공통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둘 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들에게 미움받고 거부당했다. 둘 다 은전 몇십 냥에 팔렸고 둘 다 멸시받는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로 고양되었다.둘 다 죄악을 멀리하였으며 30년이란 준비기간을 거친 뒤 공적자리에 나섰다. 둘 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제공하였다. 요셉은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영벌에서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었다. 둘 다 자기 백성은 물론 이방인들에게까지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모두에게 구원을 준 만민의 구세주였다면, 요셉은 유다인과 이집트 사람들이 기근을 피할 수 있게 하면서 함께 살아가게 한 인물이다. 통치자가 된 요셉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눈을 뗀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출세를 이기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기로 한 것이다. 성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성공 자체가 목적이 될 때에는 성공한 후에 공허와 쾌락의 죄에 빠지게 된다. 성공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요셉은 성공과 사명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것보다 성취한 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여기에 요셉의 위대함이 있다.
F
유다의 탄원
창세기 44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유다의 탄원은 인류의 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의 탄원은 한 인간의 간절한 청원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 될 늙은 촌로의 마음을 구구절절 감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성서 안에서 한 인간의 진실한 뉘우침과 회개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루카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이것밖에 없을 것이다. 유다가 이 긴 호소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이다. 그의 호소는 베냐민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늙으신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잃음으로써 갖게 될 비참한 심정을 구구절절 호소함으로써 이집트 재상의 자비심을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의 호소문 안에는 아버지란 단어가 무려 열네 번이나 언급된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요셉이 너무 미워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데 앞장섰던 유다가 이제는 반대로 아버지의 또 다른 아들인 베냐민을 위해서 대신 노예가 되겠으니 제발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이는 그가 과거에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22년 전 요셉의 찢어진 옷을 보고 통곡을 하던 아버지를 매정하게 바라보던 유다가 지금은 아버지가 베냐민을 잃고 상심할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유다가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결혼해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 아이들이 그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맏아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만 골라하다가 결국 죽게 되었고[38,7], 레위법에 따라 둘째 아들이 형수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형의 자식을 생산해 주어야 했지만 자기 씨가 형의 아이가 되는 것이 싫어서 밖에다 사정을 하다가 죽었다.[38,8-9] 유다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연달아 잃자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을 보호하고픈 본능에 며느리가 막내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38,11] 그러면서 유다는 늙으신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그래서 유다는 긴 호소문 안에서 늙으신 아버지가 베냐민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려면 결혼해서 직접 자기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유다처럼 말이다. 유다가 호소문을 마무리하면서 "그 애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저는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44.34]라고 한 말은 그가 자신보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더 생각하는 사람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제 유다로 인해 이스라엘 집안은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된다.
조병호는 「창세기 숲과 나무」란 책에서 우리가 흔히 놓칠 수 있는 반성거리 하나를 제공한다. 베냐민이 유다에게 가졌던 감격과 감사함이다. 베냐민은 졸지에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할지도 모를 자기의 운명을 대신 하겠다고 나서는 유다를 보면서 억제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훗날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에게 충성을 다한다.베냐민 지파의 요나단이 유다 지파의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해 주고 지켜준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 지파 곁에 남는 유일한 지파가 된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바오로가 유다 지파에서 태어 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한다. 과거에 있었던 은혜가 후대를 통해서 계속되는 것이다.
G
요셉이 정체를 드러내다.
요셉은 유다의 호소문을 통해 "찢어지고 터진 마음"[시편51,17]을 보면서 형들이 정말로 변화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위의 시종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다음 그대로 서서 큰소리로 엉엉운다. 요셉이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낸것은 그와 형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화해)를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얘기가 파라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셉이 오래 전 감옥에 있을 때 파라오의 고관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출옥하게 해 달라 청했을 때, 그때에도 형들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겼는데도 그 사실을 감추고 유괴되어 이집트까지 끌려오게 되었다고 말했었다. 20년이 넘어 만난 형들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리고 화해하려면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 넘겼다는 일을 언급할 수 밖에 없다.[45.4] 만약 그러한 사실을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은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긴 그들을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이집트 땅에 정착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셉은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전체적 시각에서 치밀하게 행동하는 통합된 인격의 요셉을 볼 수 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고 나서 즉시 한 질문은 "나의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미 유다가 늙은 아버지를 염려하면서 막내동생 베냐민 대신 자기를 노예로 삼아 달라고 간곡히 탄원했는데도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시냐고 묻는다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하지만 요셉의 이 물음은 아버지의 생존여부를 확인하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 아니다. 요셉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와의 상봉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벅차올라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요셉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귀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 사람을 지칭할 때 소유격을 넣게 만든다. '나의 누이' 나의 님' 하듯이.
H
화해의 자리
요셉이 벅찬 감정을 주체치 못해 울음을 터트리자 그들은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요셉의 형제들이 얼마나 얼이 빠져 있었는지는 그들의 긴 침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형들의 감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요셉이 이집트 재상이라는 사실이 매우 혼란스럽고 믿어지지 않았을 테고 또한 한편으로는 죄책감으로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요셉이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하고 말한 것은 형들의 악행을 언급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들과 형제란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었다.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 사건에 대한 언급이야말로 22년이란 긴 시간의 공백을 메워주고, 가족들 안에서 잃어버렸던 그의 정체성을 되돌려 주는 사실이다. 요셉은 형들의 범죄 사실을 언급한 다음 즉시 하느님의 섭리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 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 입니다."[45.5] 즉 요셉이 형들의 범죄 사실을 언급한 것은 그 비극적 사건 뒤에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야기 하면서 그가 형들을 이미 용서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러한 것은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형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습니까?"[50.20] 이는 요셉이 하느님의 섭리를 형들에게 강조하고 자신의 용서를 전해주기 위함이다. 참된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간에 올바른 절차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범한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가해자는 이 요구 앞에서 진심으로 통회하고 잘못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피해자는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게 되는 것이다.
I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식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형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진실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요셉의 기구한 인생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네 번이나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4-5]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45.7]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45.8]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까?"[50.2]
요셉이 네 번에 걸쳐 섭리에 대해 발언 한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형님들이 저를 노예로 팔아 넘긴 것은 제 개인은 물론이요. 우리 가족과 민족을 위해서도 행운이었습니다"라는 말이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라자로가 중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11.4] 하고 말씀하셨다. 만약 예수님이 요셉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아무튼 요셉의 용서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인식 때문에 가능하였다.
J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야곱
야곱은 이집트에서 요셉의 극진한 봉양을 받으며 17년을 산다.[47.28] 17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햇수이다. 요셉이 가나안에서 아버지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던 햇수가 17년이기 때문이다. 설화자는 의도적으로 두 개의 17년을 대칭시키고 있다. 첫 17년이 아버지 야곱이 어린 아들 요셉을 돌보아 준 시간이었다면, 나중 17년은 성장한 아들 요셉이 노약한 아버지 야곱을 돌보아 드린 시간이다. 저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에 맞갖게 자식도 늙으신 부모를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서둘러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께 간다. 요셉은 이집트 여인에게서 난 두 아이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유다 혈통에 들어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왜냐면? 유다인은 모계 혈통을 따르기 때문에 이집트 여인에게서 난 두 아들은 법적으로 유다인이 아니다. 야곱은 요셉의 간절한 바람을 헤아려 줄 뿐 아니라 그 이상의큰 축복을 내린다. "네가 얻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나쎄는 이제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이 내 아들 항열에 들어야 한다."[48.5] 이집트 며느리에게서 태어난 두 손자를 명실공히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족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레아가 낳은 첫 두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똑같은 지위를 준다는 것이다. 이는 요셉에게 두 몫의 유산을 준다는 것과 다름없는 특혜다. 요셉은 열두 부족에 들어가지 않지만 대신 그의 두 아들이 두 부족을 형성하는 것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특혜를 베푼 것은 사실 그의 영원한 연인 라헬에게 특혜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다. 라헬의 자식이 둘에서 넷, 즉 요셉, 베냐민, 므나쎄, 에브라임으로 늘어난 것이니 석녀라 놀림받던 라헬의 고통스런 날과 그렇게도 원하던 두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간 그녀의 슬픈 날을 위해서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최대의 보상을 한 것이다. 두 아들이 삼촌들과 같은 항렬에 들어감으로서 야곱의 아들은 13명이 된다. 본디 이스라엘은 12지파인데 어떻게 13명이 될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미드라쉬가 대답한다. 레위지파는 하느님의 일에 종사하는 그룹이 되면서 땅을 분배받는 12지파 명단에서는 빠진다는 것이다.[여호14.4 참조] 앞서 요셉의 두 아들이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항렬이 되어 같은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다. 출애급 초기 에브라임과 므나쎄의 남자 후손들을 다 합친 숫자는 72.700[민수1.32-35]인데, 40년 후에는 85.200으로 늘어난다.[민수26.28-37] 한편 르우벤과 시므온의 남자 후손들을 합친 수는 출애급 초기 105.800에서 40년후 65.930으로 감소한다.
K
요셉의 죽음
"요셉이 일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마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다시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서약을 시켰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가거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자 사람들이 그를 썩지 않게 만들어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셨다.[50.24-26] 죽음의 자리는 어떤 꾸밈이나 속임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평생 하느님 안에서 신앙의 흔들림 없이 살아온 요셉은 죽을 때도 그렇게 죽는다. 일평생 하느님이 주신 꿈을 품고 살았던 요셉은 죽을 때도 희망의 꿈을 꾸며 죽는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돌보심이 계속 될 것이요, 또 언젠가는 하느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시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 백성을 꼭 찾아올 것이라는 요셉의 유언은 모든 시대에 하느님을 신앙하는 사람이면 모두 가져야할 희망이다. 희망은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에 결정적 동기가 된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악과 죽음의 세력이 난무한다 해도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기에 주님의 행동양식을 살아야 한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묵시22.12-14] 요셉은 하느님이 찾아오시어 이스라엘 후손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까지 자기 뼈를 고향 땅에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야곱은 자기 시신을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했고, 그 지시에 따라서 자녀들은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었다.[50.4-13]요셉도 아버지처럼 자기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지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그날까지 지하에서 그들과 함께하려 했기 때문이다.
L
신앙안에 유유히 흐르는 장류수 요셉의 삶을 정리하며.
요셉의 삶을 정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삶을 아버지 야곱의 삶과 비교하는 것이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가 서로 유비(類比)되어 있다는 것은 두 이야기가 서로 공통된 줄거리 구조와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공통된 줄거리 구조를 보자.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둘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두 이야기 모두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들의 배신행위로 시작된다. 그리고 배신행위는 어린 형제의 생명을 위협한다. 둘째, 어린 형제가 다른 형제(들)과 떨어져서 20여년간 타관살이를 한다. 그동안 형들의 소식은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 셋째, 20여년이 흐른 후 형제들 사이의 상봉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다음으로 공통된 주제들을 보자.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는 속임수와 그로 인해 가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분열 그리고 화해와 재결합이다. 공통된 줄거리 구조와 주제말고도 야곱과 요셉의 삶은 그 세부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통된 요소를 보이고 있다. 첫째, 두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미래는 하느님이 결정한다. 하느님은 어떤 이유나 조건없이 주인공에게 복을 주기로 결정한다. 둘째,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전환시킬 꿈을 꾼다. 셋째,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형제들과 심한 갈등을 겪는다. 넷째, 주인공들은 타지에서 만난 인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섯째, 주인공들은 타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한다. 여섯째, 주인공들은 타지에서 큰 부(또는 명예)를 획득한다. 서로 공통된 점이 많지만 각 주인공의 삶에서 느끼는 인상은 다르다. 야곱은 참 힘겨운 삶을 산 것 같고, 요셉은 순풍에 돛 단 듯 편안한 느낌이다. 야곱의 삶은 계속되는 투쟁과 집념의 삶이다. 그는 장자권에 대한 집념으로 속임수를 써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고는 형의 복수가 무서워 집을 떠나야 했고, 그 이후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다시는 못 보게 되었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겠다는 집념 때문에 인색하고 고약한 장인 밑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20여년을 일해야 했다. 또 야뽁강에서 대면한 '남자'와 씨름하여 축복을 받아내려다가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고, 성급하고 잔인한 자녀들이 세겜 남자들을 무더기로 죽이면서 그들이 언제 복수할지 몰라 늘 가슴 졸이면서 살아야 했다. 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길거리에 묻어야 했고, 맏아들 르우벤이 그의 소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수치를 맛보아야 했고,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무참히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어린 손자들이 배를 움켜쥐고 우는 참담함을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야곱의 생은 거친 풍파 속에 놓여진 힘겨운 생이었다. 그러나 야곱이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요셉만큼 힘겹게 산 것은 아니다. 비록 야곱이 유랑생활은 했지만 요셉처럼 노예로 팔리지는 않았다. 비록 야곱이 14년 동안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이용당했지만 자유인의 신분이었고 옆에는 사랑하는 연인 라헬이 있었다. 반면 요셉은 종의 신분인데다가 줄기차게 괴롭히는 주인마님이 있었다. 나아가 요셉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은 요셉보다 더 힘든 삶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야곱이 더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되는 건 왜일까? 그 이유는 야곱의 집념과 요셉의 순종 때문이다. 야곱은 집념이 컸던 만큼 하느님께 항복하기가 어려웠다. 야곱은 하느님섭리에 의탁하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축복을 움켜쥐려고 애쓰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매사 자기 편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늘 계획과 계략으로 채워졌다. 한편 요셉은 아버지보다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았지만 아버지처럼 축복을 움켜쥐려 애쓰지 않았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겼다. 그는 이 세상의 악과 불의 앞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제한시키지 않았다. 우리라면 지쳐서 포기했을 13년이란 노예와 감옥살이의 긴 역경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곤란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당신 선의로 이끌어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그의 삶은 고통보다는 축복이 부각되는 것이다. 요셉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그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행위를 할 때에도 반드시 '하느님' 중심이었다.
꿈을 간직한 요셉과 하느님의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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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하지 말고 순명해야하는 이유가
야고보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고을에 가서
일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었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 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보 4.13-17]
주님께서 원하시면 어디든지 마다 않고
채우고 스미며 흘러가는 장류수가 되자!
섭리에 맡겨진 '나'라는 물줄기는
내 계획대로 절대 갈 수 없다.
뒤에서 밀어주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힘에
나를 온전히 맡기며 그분의 때를 기다린다.
순종의 삶, 섭리의 여정 그것이 장류수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었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 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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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 중 성조요셉의 이야기는
송봉모신부의 저서'신앙의 인간 요셉'의
내용중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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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장류수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은 임마누엘 신앙(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을 견지함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