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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정[서울 남산 전통 활쏘기 국궁장]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인천여행]최초의 테마박물관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1971년 11월 어느날]
석호정.호미 추천 0 조회 67 11.06.08 1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천여행]최초의 테마박물관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 호미숙

 

아직 우리 주면엔 개발이 되지 않는 달동네가 몇 군데 남았다. 달동네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건, 달과 가까운 산꼭대기 마을이다, 판자촌가 비슷한 가난과 궁핍으로 하루를 연명해도 언덕길마다 삶의 투쟁 속에서도 훈훈한 미소가 넘치고 따스한 인심이 전해지는 우리네 도시의 서민마을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옥수동 달동네도 마찬가지고 개발의 명목으로 그 정겨움이 사라지고 있어 아련한 옛추억은 기억 속으로 묻어야만 한다. 그래도 그 산업화 개발 속에서도 마을이야기를 살리고자 테마박물관으로 꾸민 인천의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그곳에 가면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그 시절의 어려움과 그 때 사람들의 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수도국산을 오르는 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한 쪽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고 한 쪽은 여전히 판자촌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허름하고 여기저기 기운 볼품없는 집들이 다다다닥 붙어있고 녹슨 철대문 넘어 널려진 빨래가 그 곳에 사람이 생활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낯익은 풍경 우리네 유년의 시절의 시간을 되 돌려 놓은 듯한 그곳 언덕고개 꼭대기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현대식 건물로 인천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1971년 11월 저녁 6시 무렵의 풍경을 만난다. 개짓는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 다듬이 소리,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맑은 밤하늘엔 별이 송송 박혀 어둠을 수놓는 곳, 수도국산 달동네..그 때를 느껴보자

 

수도국산 유래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 또는 송림산이다. 산언덕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송현동, 송림동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한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보가 큰 보인이어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타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 이라는 명칭은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버인 뒤 산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달동네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유래는 '달나나 천막촌' 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중반 사이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은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생겨났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달동네> 방영 이후이다. 어려운 처지 속에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달동네'는 불량노후주택이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도국산의 달동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잃고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로 찾아 들었다. 비탈진 소나무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였고, 이어 한국전쟁(6.25)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여들었으며, 1960-19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5만5천여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고한다.

 

6.25가 금방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인데 산꼭대기까지 3000여 가구가 들어서게 되었다. 산업화 되면서 시골서 올라온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구가 3천여 명이 되었었다. 요즘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시 재생사업을 하면서 시민단체에서 동네를 없애는 것보다는 박물관을 만들기로 제안해서 건립하게 되었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동네의 물건들을 채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으로 전시했다. 6-70년대 최초테마 박물관 시점은 1971년 11월 어느 날 저녁 풍경 모습이다.

72년부터 새마을이 되면서 바뀌기 전의 71년을 잡았으며 6시를 잡은 이유는 밤이 되어야 살아나는 동네 즉 달동네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수도국산 오르는 길

오른쪽 편 언덕길에는 여전히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판자촌 비슷한 좁은 집들이 들어차 오래 전 부터 살아온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이곳은 헐지 않고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과 어울리도록 하나의 관광지로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초현대식 건물로 수도국산 정상에 위치해있다

 

 

수도국산 박물관 탐방

때는 바야흐로, 1971년 11월 어느 날 오후 여섯시

   
   
   
   
   
   
   
   
   
   
   
   
   
   

그 때 그 시절,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요? 이곳 달동네 박물관에 들러보면 그 시절을 고스란히 떼어 옮긴 듯이 그때의 물건을 재현이 아닌 직접 기증을 받아 전시했기에 실제로 사용하던 물건이기에 고스한의 그때의 삶이 배여 애환을 느낄 수 있다.

 

 

벽지는 한 집에서 나온 것인데 11겹이다. 신문부터 바른 흔적을 볼 수 있었고 매년은 아니라도 몇 년마다 벽지를 발랐을 것이기에 얼마나 오랜세월 한 집에서 살았는지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있다; 하얀 마네킹은 실존 인물.. 퇴직을 하고 고물 주어서 이웃을 도와줬다는 동네 할아버지 실물과 똑같이 만들어 세웠다고한다.

 

전봇대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 세웠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동네라 시장이 아닌 초입의 거리이불을 틀어서 부풀려 만들어 겨울을 보냈던 솜틀집, 솜틀도 이 전의 주인이 직접 기증했다고한다. 연탄가게 아저씨도 마지막 까지 연탄배달 하던 아저씨가 직접 기증했을 정도다.

 

어둑한 골목길을 들어서면 이발소에서 들리는 음악소리 들려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71년 그때에 내가 서있다. 어두운 밤이 내리고 노을이 지는 풍경 .. 가로등만 켜지고 별이 뜨고 고양이와 개소리 다듬이소리가 나고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달동네의 밤이 왔다.

 

이때 인천에는 성냥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성냥부업을 하는 가족 풍경도 보이고 우물이 없어서 물을 사다가 먹는데 물파는 사람이 돈을 받아 수도 꼭지가 없는 수도에 꼭지를 연결해서 물을 팔아다고 한다. 옆에는 물지게 체험도 할 수 있다.

 

 

그 시절의 불편함이란 여러가지 중에 화장실은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었기에 공동화장실 사용하거나 요강을 이용했었다고 한다. 내 유년의 시절과 비슷한 풍경이다. 마루에 동그마니 놓여있던 요강, 그외에 모든 풍경은 그 시절의로의 시간여행이기에 충분했다.

 

주의* 이곳 화장실을 실제로 이용하는 사례가 있어 용변금지라고 안내판을 붙였다.

 

그 시절의 인형 못난이 3자매..지금도 그 모습으로 우리에게 추억의 그리움이 선하고

단발머리와 교복에 까까머리 남학생을 보자 그 시절로 뛰어가고프다.

 

-수도국산의 애환을 한편의 시로-

 

나에게 수도국산 달동네는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아픈 곳이 아니었지요.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힘이지요-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송현배수지는 표고 56.8m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부지면적 36,780㎡, 5,000㎡로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23호의 송현배수지 제수변실로 인천시 동구 송현동 23-62에 위치해 있다. 건물 모두가 콘크리트로 되어 있으며 세월이 흘렀음에도 웅장한 모습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그대로 세월을 머금고 있었고. 배수지 위에는 트렉을 만들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수도국산 달동네를 내려오며

 

대문도 없는 어느 집 앞의 개가 낯선이들에게 컹컹 짖어 대면서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개집 주변에 걸린 빗자루와 삽 등이 달동네에서 꿈을 일구며 삶을 엮는 사람들의 보통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돌탑을 보면서 달동네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가 기원이 고스란히 보인다.

달동네에서 벗어나 좀더 근사한 곳에서 살고자 하는 가난과의 전쟁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며

또 하루해가 저물어 달빛을 보고 잠을 들어야 했던 그 시절 서민들의 애환의 기도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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