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50) 마르틴 루터를 오늘날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루터의 말대로 신앙은 그 자체로 성령의 선물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논제」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사진=언스플래쉬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 전후 재평가 활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을 목표로 했지만
교회의 기존 제도와 교리의 일부까지 부정
그가 강조한 ‘의화’의 핵심은 사랑의 하느님
가톨릭 신앙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의 역사 속에서 마르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을 전후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루터는 복음이 개인적이고 실존적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살아 있는 메시아이자 위로임을 확신하였고, 하느님 은총의 장엄함을 보여 주는 복음의 위대함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을 목표로 삼았고, “주님이시요,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회개하여라’고 말씀하시며 신자들의 온 삶이 참회의 삶이기를 바라신다”(「95개조 논제」, 1항)는 점을 개혁의 정신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존 제도와 교리의 일부까지 부정하는 듯한 루터의 개혁 요청이 당시의 고착된 시대 상황에서는 주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개혁적인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청했고, 이에 루터가 자신에 대한 파문을 시사하는 교서와 교황의 문서들을 불태워 버리자 레오 10세 교황은 1521년 1월 3일 그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였습니다. 루터는 오직 성경에 대한 믿음으로 교황이나 공의회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오직 성경에 묶여 있고, 자신의 양심은 하느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확신하면서 성전(聖傳)으로 확인된 교리의 일부를 부정하였습니다.
루터가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 모순되는 처신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인 농민들이 영주들에게 반기를 들고 농민 전쟁(1524-1525년)을 일으켰을 때 루터는 살인과 약탈을 하는 그들을 학살하라고 귀족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제 독신제를 반대하여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혼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초대 교회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이어 온 신앙의 유산을 재발견하면서 교회의 쇄신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하느님 백성인 교회 구성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에 동참한다고 가르쳤고, 교계 제도에 앞서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였습니다.
계시의 원천인 성경은 사도전승인 성전과 뗄 수 없는 신앙의 규범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통하여 돋보이게 강조한 내용들이었다는 점에서 루터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교회 분열의 책임을 떠넘기는 상반된 평가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강조한 ‘의화’의 핵심에는 죄인인 우리를 동시에 의인으로 판결해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깊은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루터의 말대로 신앙은 그 자체로 성령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랑과 희망에 미치는 구체적인 효과입니다. 이는 오늘날 가톨릭의 신앙 이해와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