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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한복음 8 : 3 - 11
제목: 정죄하는 자와 정죄하지 않는 자
일시: 2010. 8. 8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어디를 가나 문제투성이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문제를 만난다. 중요한 일들이 산재해 있는 젊은 시절뿐 아니라, 연세가 드신 어른에게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에게도 문제가 있다. 심지어 막 태어난 아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 살아 있는 한 문제는 달고 살게 된다. 그러기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보다 문제를 푸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인은 분명 문제 거리였다.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고 주님은 어떻게 푸시는가?
II.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함으로 풀었다.
분명히 이 여인은 죄를 지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현장범이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 여인의 문제에 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미 정죄했고 사형집행의 계획까지 마음에 품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5절). 그런데 그들은 이 문제를 그 여인에게 국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이 여인을 미끼로 해서 눈에 가시 같은 예수님까지 잡으려고 계획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예수님의 입술에 모든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여인의 문제를 더 확대하여 예수님의 문제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이 잘못했다면 그 현장에서 바로 죽였어야지 예수님에게 끌고 오기는 왜 끌고 오느냐! 권투선수가 코너에 몰린 선수를 향해 계속 주먹을 날리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코너에 몰고 있다.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persisted in asking 하고 있다. 닦달 하면서 빨리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통수에 걸리게 하여 그를 고소할 챤스를 잡았다고 야단이다. 모세의 법이냐 로마의 법이냐에서 예수님이 어느 쪽을 택해도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세의 법에 따라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면 로마법에 걸릴 것이고 그냥 놓아주라고 하면 모세의 법에 걸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여인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정죄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문제에 대한 반응과 그들의 풀이 방법은 정죄였다. 그들은 아무 문제없는 예수님에게서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여인을 잡았으면 알아서 돌로 칠 일이지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곤란하게 만드는가?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을 넘어서 예수님까지 잡으려고 덫을 놓고 있는 것이다. 정죄하는 사람은 조건을 찾는 사람들이다. 털어서 먼지를 내고 억지로 법의 덫을 놓아 발목에 태클을 걸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무리수를 둔다. 인위조작이 거기에 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삼는 이러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문제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가 문제이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 여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못되먹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눈길이 간다. 우리는 진정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돈?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에 탐욕하고 절제를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이다. 돈이 왜 나쁜가?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돈을 사랑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학문제? 풀기 어려운 그 수학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못 푸는 내가 문제이다. 수학에서 확률과 통계부분이 있다. 이것이 약해서 고3때에 어느 의대생에게 과외를 한 적이 있다. 수능에 2문제가 나왔는데, 결국 틀렸다. 그 놈이 나쁜 놈인가? 문제는 그 확률과 통계가 아니라, 그 문제를 풀지 못하는 내가 문제이다. 그 문제를 가지고 출제자나 문교부 당국에 가서 항의할 수 없다. “왜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냈느냐? 문제가 그래서 되느냐?”
술이 문제인가? 술기운에 그랬다고 한다. 이놈의 술이 문제라고 한다.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절친한 친구처럼 함께 하면서 마시다가 문제가 있으니 술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법에서 이해하고 문제 있는 술에다 징역을 선고하는가? 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여자를 조심하라고 한다. 여자가 문제인가? 삼손과 데릴라! 삼손에게 여자가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 예쁜 게 죄냐? 데릴라를 보지는 못했지만, 최고로 예쁘게 보라. 예쁜 게 죄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죄지은 사람들이다. 여자에게 약한 삼손이 문제였다. 여자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문제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서 지내다가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다. 잘못은 그가 했지만, 그 잘못에 대해 처리해야 하는 문제는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다.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인가? 용서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할 것인가 아닌가는 나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많이 보일 때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왜 내게 문제가 많이 보이지 하는데서 물음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야 한다. 문제시 삼는 것이 나의 문제가 된다.
예)아내와 결혼해서 서로 의견이 불일치되기도 했다. “아니 이 작은 일로 그렇게 화를 내”라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이제 큰일났군 아내가 이 큰일로 인해 몹시 화가 나겠군”라고 생각했는데 별 탈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지금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작은 일은 작아서 저는 잊어먹었고 큰 것은 괜히 꺼냈다가 설교 후에 지적당할까봐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자체도 문제이다. “큰일”이니 “작은일” 이니라고 규정하는 것 조차 이미 저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정의이다. 저는 결국 나와 아내 사이에 큰 일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큰일이다. 콩나물국에 새우젓을 넣느냐 마느냐가 우리에게 큰 문제면 그것은 잇유이다. 찐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느냐 설탕에 찍어먹느냐가 잇슈가 되면 우리 집의 문제이다. 집을 말아먹는 경제적인 손실을 입어도 부부가 문제시하지 않으면 작은 것이다. 문제는 삼으면 문제가 된다. 문제는 따로 문제라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는 게 많아서 주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문제는 그 여인도 예수님도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었다. 그들은 문제시 삼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죄로 따지면 세리들, 창기들, 강도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늘 책망받고 혼나는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정죄하는 사람, 고소하는 사람, 허무는 사람, 문제가 자신들인지 모르고 외식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III. 정죄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때 자신들만 온 것이 아니다. 군중을 모아서 왔다. 돌을 들고 사형을 집행할 군중들을 동반하고 온 것이다. 군중은 단순하다. 여론이 형성 되는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을 타겟으로 하는 그 깊은 음모를 몰랐을 수 있다. 왜 이 여인을 주님에게로 데리고 왔는지 그 동기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이 왜 이곳 현장에 온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생각 없는 이 무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주님은 군중들에게 올바른 문제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형성한 여론에 따라 움직인 군중들의 시선을 여인이 아닌 군중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기보다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이 그렇게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멋지게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기 어렵다. “우리가 뭐 간음했냐”라고 하면서 죄가 없다고 객기를 부려 누구든 한 사람이 돌을 던졌다면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또 던지게 되는데 말이다. 주님이 죄 없는 자를 불렀을 때 군중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돌을 내려 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들은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없었다. 그 정도면 제대로 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특하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에게서 물러났다. 이들은 문제거리인 이 여인을 보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을 본 것이다. 그 문제가 자신들의 문제였음을 알았던 것이다. 군중들은 정죄하지 않았다.
이제 그 현장에는 돌을 든 군중도 없다. 주님을 고소하고 이 여인을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주님과 여인만 남았다. 이제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한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그녀를 정죄한 사람들도 정죄하기를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다. 주님께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주님도 정죄하지 않는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죄를 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죄는 죄라고 정하면 죄가 되고 정하지 않으면 죄가 안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를 정하는데 고수였다. 그들의 냉철한 눈에는 언제나 죄가 보인다. 왜냐하면 발목을 잡으려는 율법의 자대를 가지고 걸리기만 해봐라는 식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어긴 것만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법을 가지고 문제를 삼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주님의 특기는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녹이시고 그분의 피로서 모든 허물을 가리우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주님이 문제가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문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주님은 문제를 삼지 않으신다. 눈을 감아주신다는 것이다. 죄를 도말하시고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를 삼지 말라. 문제는 문제를 삼을 때 문제가 된다.
주님의 모습을 닮는 사람은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다. 정죄되어 죽을 사람도 살리는 분이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인도 살지 않았는가! 무너진 관계도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없는 문제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문제도 해결하시는 해결사이시다. 주님은 화목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은 이 땅에 죄지은 우리와 더불어 상종하시고 교제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관계를 깨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화평을 가져오고 관계를 살리는 사람은 겸손하며 허물을 감싸고 문제를 가슴에 품고 좋은 이야기를 한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다. 아버님께서는 속삭이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저는 다른 사람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 조심하라고 한다. 세우고 덕담을 하고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라. 누군가를 정죄하며 헐뜯을 때 동조하지 말라. 그리고 그렇게 나를 끌어들이려고 할 때 넘어가지 말라.
가까운 주변 지역에서 두 목사님들이 몹시 다투었다. 당시 저는 부회장으로 중재를 해야 했다. 그곳 지역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차 가는 날, 월요일에 한분의 목사님, 오는 금요일 날은 다른 한분의 목사님 집에서 머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분 중 한분이 다른 한쪽을 심하게 헐뜯었다. 결국 헐뜯고 모함하던 목사님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진실을 결국 드러난 것이다. A라고 하는 사람이 권목사에게 와서 B라는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 하면 저는 아 B가 바보구나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 A가 바보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사람은 돌을 들지 아니한다.
IV.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에서 해결점을 보기보다 내 자신에게서 해결점을 찾으라. 문제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 내가 어려운 것이다. Ich bin kalt라는 표현이 나는 춥다가 아니다. 보통 춥다고 할 때는 Es ist mir kalt가 맞다. Ich bin kalt 는 차가운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어에서도 어렵다는 말을 I am difficult 라고 쓰지 않고 It is difficult 라고 쓴다. I am difficult 라고 쓰면 내가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날이 차가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차가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와 일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슈베어리시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문제를 만들고 정죄하고 문제 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관계는 언제나 불화와 갈등으로 가득하며 무질서 카오스가 우리를 누를 것이다. 오히려 난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s ist mir egal!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이 여인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 눈에 안차는 것이 많다. 문제도 많이 본다. 이때 세상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묻기를 마지 아니 하면서 선택하라고 다그친다. 어떻게 반응하면서 살 것인가?
돌을 들고 살 것인가? 양심의 가책에 돌을 내려 놓을 것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고소하면서 살 것인가? 예수님처럼 죽을 여자도 살리면서 살 것인가?
문제를 삼으면서 살아갈 것인가? 문제를 풀면서 살아갈 것인가?
관계를 깨뜨리며 살 것인가? 관계를 형성하며 살 것인가?
법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은혜에 따라 살 것인가?
정죄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용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허물면서 살 것인가? 세우면서 살 것인가?
이 한주간도 세우는 사람, 회복시키는 사람, 주님의 마음으로 해결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