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살아내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론 없는 경험은 맹목(盲目)이다. 그러나 경험 없는
이론은 단순한 지적 놀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명제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 개념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후 여러 갈래로 변주된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유명한 발언을 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주장 때문에 기독교와 이 사람은
상극에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 개념 이해에 있어 그의 관점만큼
명쾌한 선례가 없다. 할 수 없이 그를 등장시키니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마르크스는 그리스 인식론의 전통과 헤겔, 포이에르바하의 관점을 변증시켜 이론과 실천(Theorie und Praxis)의 배타적 정의를 명쾌히 제시한다. 즉 “이론은
실천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는 포이에르바하에서부터 블랑키, 프루동, 바쿠닌에 이르는 수많은
이데올로그들과 평생에 걸쳐 격렬한 이론 투쟁을 실행한 사람이다.
그러한 싸움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즉 올바른 실천을 이끄는 과학적 이론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그러한 이론을 무기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공을 부유하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위험성을 지적함으로써
구체적 실천 즉 “살아냄”의 의미를 끈질기게 추구한 인물인 것이다.
이론과 실천에 관련된 그의 핵심 주장은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밝힌 아래 문장으로 요약된다.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이모저모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is to change it.)“
이 같은 테제(theis)를 기독교식으로 변환하면 어떻게 될까.
고린도 전서 13장 1~2절 말씀이 가장 어울린다 생각된다.
즉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실천>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늘과 땅을 무시로 오르내릴만큼 교리와 율법에 정통하다 해도,
그것을 자기 몸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오히려 안 믿는 자만 못하다. 오늘날 진리와 율법을 부르짖는 대한민국의 숱한
“예수쟁이”들이 “개독”이라는 멸시를 당하며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지점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믿어진다.
내가 대구교회를 나의 교회로 확신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곳은 공리공론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을 땅 위의 구체적 삶으로
살아내는 <실천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주의 손에 이끌린 이현래 목사의
삶이 그러했다. 뒤를 따라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교회의 실천성을 명백히 예시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천국과 기적을 내세우면서도 기실은 세상에서의 영광을 기복(祈福)하는
교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교회들이
실천적 행위에 있어서는 세상의 가장 낮은 기준조차 미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구교회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최근 언론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있는 어떤 거대 교회의 부자세습을 보라.
세상보다 더욱 그악하고 집요하게 세상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대구교회는
이러한 탐욕의 메커니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인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대구교회는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자부심을 지닐 권리가 있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정직하고 정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구교회를 사랑한다.
<변화하고 연합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지 3주가 지났다. 그동안 묵상하는 마음으로 여러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하여 내가 발견한 대구교회의 달라진 모습은 무엇일까?
우선 건물이 엄청난(^^)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중요시될 일은 아니다. 담임목사가 이현래 목사에서
김치현 목사로 바뀐것이 중요한 외형적 변화다. 하지만 이 역시 말씀 안에 흐르는
생명의 물줄기가 복사판처럼 똑 같다는 점에서 놀라운 변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같은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변화는 사람들에 있었다.
지지난 토요일 <길을 묻는 카페>가 끝나고 교회 카페에서 이순자 자매와
잠깐 교제를 나누었다. 나는 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이 온유해졌다. 전에는 왠지 다가가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그런 게 다 없어지고 여린 순처럼 부드러워졌다”.
비단 그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난번 글에서 말한 대로) 대식이가 달라졌다. 성운이가 달라졌고 승숙이가 달라졌고 준재가 달라졌고 진희가 달라졌다.
(멋쟁이 치헌 형님은 더 멋있어졌고^^). 청년부 간증도 달라졌고
순모임 간증도 크게 달라졌다.
인원수로는 많지 않으나 내가 만난 형제자매들 모두가 뭐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달라졌다. 이 느낌을 정확히 묘사하면 어떤 문장이 될까?
그래,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말이 제일 어울리겠다.
생명은 자라고 또 자라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한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목격한 변화들이 참으로 놀라웠다.
외모는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지만, 형제자매들 안에 빛나는 존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성숙해지고 빛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었다.
교회가 지금까지의 소극적, 방어적 자세를 버리고 바깥을 향해 서서히
문을 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버님 제사 모시러 내려간 지난 토요일,
가창의 한 커피숍에서 치현 형을 만났을 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교회가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과거에는 바깥을 향해 문을 닫아 걸은 감이 있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을 실천으로 살아내는 교회 공동체의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홈페이지 사랑방에 개설된 <자유토론방>이 세상을 향해 용기있게
지경을 넓혀가는 그러한 상징으로 이해된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따라 (형식적으로) 카톨릭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
그러한 카톨릭과 또는 다른 개신교회와 대구교회가 결정적으로
다른 특징이 무엇일까? 관계와 연합이라고 본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다니던 개신교 보수 교회에서 학을 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입만 열면 대속자 예수를 (밤새 통성기도로) 부르짖는 사람들.
그러나 눈만 뜨면 거꾸로 교회 안에서 온갖 반목과 차별을 행하는
자칭 그리스도교인들. 세상 신분과 재력과 권세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분열하고 척을 짓는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곳은 다르다. 육체노동자도 정신노동자도, 교수도 학생도, 판사도 피고인도,
의사도 환자도 차별이 없다. 말씀 안에서 하나의 형제자매(비유가 아니라 실제로)다. 세상 어떤 단체, 조직, 결사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사람의 연합>이
살아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를 사랑한다.
<“사람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LA영미에게 이런 마음을 전했다. “우리 사는 세상의 진흙탕 속에서
눈을 뜨고 하늘 높이 빛나는 그리스도의 별을 바라보는 것. 그 별을 마침내 땅위에
모셔 내려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교회를 향한 나의 꿈”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은 대구교회의 멋들어지고 완벽한
교리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없는 기이한 말씀 때문도 아니다.
바로 사람 때문이었다.
나에게 마음을 주었고 내가 마음을 드린 목사님과 형제자매들의 사랑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소유나 신분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직 존재로 나를 받아준 유일한 곳이 대구교회였기 때문이다.
교리체계에 있어 가장 설명이 정교한 곳은 카톨릭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없다.
레지오 마리에같은 역사가 오랜 조직이 있고 다양한 모임이 있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 내가 카톨릭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고,
미사를 일러 제사와 같다 칭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 교회는 다르다. 사람들의 온기가 있다.
그러한 관계로 결합된 운명적 공동체가 있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대구교회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말씀이 귀에 설다.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평안하기만 하다. 잠시 멈추었던 나의 생명이
언젠가는 창성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세상 속에서 지쳐 쓰러진 나를
품에 안아주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안아줄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살면서 진실된 사람을 만나는 것, 더구나 그런 사람을
“무더기로” 만나는 것만큼 벅찬 경험은 없다. 그러니 아무 값을 치르지도 않고 이 “인생의 진국”들과 형제자매가 되어 울고 웃고 안식하는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아인 것이다.
이러니 내가 대구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내가 믿는 예수의 모습은>
사람은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만난 존재를 가슴에 품는다.
그러한 존재가 가리키고 안내하는 길을 걷게 된다.
예수가 바로 그런 참사람을 대표하는 존재라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마음에 품은 모습 꼭 그만큼의 예수를 살아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하여 내가 만난 예수는 하늘에 머물러 울부짖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는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되어 세상에 오셨고
인간으로 살아가셨다는 것.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며 끝내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수 밖에 없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내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였던 시인 정호승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울려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는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오죽하면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어내셨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줄 존재가 얼마나 필요하셨으면 그리 하셨을까.
아담을 창조하신 후 진정 기뻐하신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원래의 자리를 이탈했을 때,
사탄의 길인 “울부짖으며 참소하는” 자리로 옮겨갔을 때 나는 하느님이 “외롭고
괴로우셔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뿐인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피조물이 살아가야 할 운명의 자리를 보여주셨다고 믿는다.
하느님조차 그러하신대, 흙에서 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는가.
교회 뿐이다.
심연처럼 어두운 존재적 외로움을 이겨낼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공간.
사람과 사람이 참 관계를 맺고 연합 속에서 안식할 수 있는
절대적인 통로는 이곳뿐이다. 교회 안에 길이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같은 교회가 더욱 확장되고 널리 퍼지기를 원한다.
십 몇년 전 무저갱 속에서 떨며 죽어가는 나를 품었듯이,
우리 교회가 비탄과 절망 속에 헤매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을 품어주고
치유해주는 “참 사람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교회로 돌아온 한 남자의 간절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