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쓴 삼교노인은 “조사스님들이 가르쳐 보이신 바를 공안이라 한다” 라고 말했다.
이렇듯 공안은 옛 선사들의 언행과 깨달음의 기록이다. 공안은 매우 많아 보통 천칠백공안
이라 한다. 이는 『전등록』에 등장하는 천칠백 한 분의 선사들이 보여주 機緣 과 언행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공안집이라 할 수 있는 『무문관』 『벽암록』 『선문염송』
등을 보면 실제로 천육백오십여 가지의 공안이 나와 있다.
공안으로 채택된 선사들의 문답 내용을 살펴보면 특별한 형식이나 법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마른 똥막대기다’ ‘뜰 앞에 잣나무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서강의 강물을 다 마시
고 와라/ 등등의 공안은 사람들의 본래 마음자리를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직지인심 ․ 견성성불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체험한 선사들은 이 본래 마음을 제자에게 깨치게 하려고 다양한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스승과 제자가 뜨겁게 부딪히는 구체적인
현장성이 생동하고 있으며, 이 특별한 현장을 배경으로 깨치의 세계에서 나오는 선사들 특유의
언어와 행위가 모든 상투적인 일산을 튀어넘는 格外 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깨달음이
뭡니까?” “마음이란 뮙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임제 선사는 “억” 하고 고함을 첬으며, 덕산
선사는 몽두이질을 했다. 여기에서 ‘임제 할’ ‘덕산방’ 이라는 활발발한 선푸이 펼쳐주기 시작했다.
조주 선사는 어떤 스님이 “마음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 “차나 한 잔 해라”한다. 이렇나 일상적인
행위이다.
송나라 때 대혜 선사가 간화선을 체계화한 이레 선 수행자들은 선지식의 지도 아래 많은 공안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여 참구해 왔다. 따라서 오늘날의 선 수행자도 이러한 천칠백 개의 공안
가운데 하나를 선지식으로부터 간택받는 것이 좋다.
그러면 천칠백 가지 공안만이 진정한 화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지난랄 간화선 수해앚들은
경전의 내용이나 조사 어록, 나아가 선사들이 보여 준 언행을 화두, 곧 공안으로 공부했다. 또한
간화선 선사들은 선대 조사들의 말씀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부분에서 또 하나의 공안을
만들기도 했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선지식들이 불조의 말씀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그 분들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공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들은 수행자들마다의 근기와 성격, 나아가 만나는 시간과 장소에따라 그때 그때 적절한
소재를 통하여 공안을 제시했다. 이처럼 공안의 소재는 다양하며 오늘날에도 공안은 두두물물에
담겨 있는 것이다. 두두물물의 참모습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뿌리가 뽑힌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안은 언어나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에 좋은 공안이 있고 나뿐 공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의 특징을 감안하여 명안종사에 의하여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새로운
공안이 제시될 수도 있다.
다만 “옛 공안은 열들하고 새로운 공안은 뛰어나다”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안에 ‘옛 공안’
이 있고 ‘새로운 공안’이 있어 그 시대에 맞은 공안이 따로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 이라는 말이다.
특히 물질문명에 대한 관심 외에 다른 여유가 없고 정신적인 깊이와 이해가 날로 천박해져 가는우리
시대의 현실을 두보 볼 때, 단순히 옛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놀라우리만큼 완벽한 옛 선지식들의 수행
방편을 무턱대고 낮게 평가하는 일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라 하겠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