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가 불안과 동요로 들끓고 있다. 이 들끓는 사회에 휘둘리며 정신이 대책없이 소진되고 있는 듯한 피로감 속에서 붙잡은, 60여년 전에 독일에서 출판된 한 의사의 책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그 책은 막스 피카르트가 쓴 『우리 안의 히틀러』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불연속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시간은 지속이 아닌 순간으로 존재한다.”라는 구절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동물복제 전문가에서 일약 나라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이끌 생명공학 과학자로 부각되어 ‘국민영웅’으로까지 추앙받던 한 대학교수의 몰락을 지켜보며, 개정 사학법에 반발해 신입생 배정거부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며 저항하는 사학 관계자와 장외투쟁에 나선 악에 바친 야당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으로 『우리 안의 히틀러』를 읽고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곰곰이 따져본다. 불안과 동요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혹자는 우리 손으로 뽑은 지도자의 국정운영에서 보인 무능과 경박함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의 ‘다름’에 대한 불관용이다. ‘다름’에 대한 불관용은 그 근본에서 ‘나’만 옳고 ‘나’와 다른 모든 것은 그릇되다는 도덕적 독선이다. 불안과 동요는 그 ‘다름’에 대한 불관용에서 생겨난다.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도 그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에 것에 불과하다. 그 핵심은 “우리 안의 히틀러”다. “우리 안의 히틀러”가 맥락 없는 세상, 불안과 동요로 들끓으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우리 안의 히틀러”는 무엇인가 ? 그것은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간 압축 근대를 지향하면서 물질적 성장에만 치중하며 정신적 피폐함에 빠지면서 우리도 모르게 키워온 의식의 피상성, 파렴치함, 결과중심주의, 천박한 실용주의, 기만의 수사학,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속성과 맥락의 부재를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다름’을 갖고 있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자비하고 잔혹한 “히틀러”가 되었다. 조화가 깨지고 맥락이 없는 세계에서는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이고, 흉포한 폭력자고, 제동장치가 없는 독재자가 된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일목요연한 맥락 속에 살아 있는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지식들이 인간을 조화롭게 만든다. 하나가 다른 것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혼연일체를 이루면서, 다른 것, 전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적절한 척도를 정해준다. 그러나 불연속성의 세상에서는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이다.”
우리 자신이 “히틀러”라고 ? 그렇다. “무엇이 앞이고, 무엇인 뒤인지를 모르는 인간, 그 내면은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전혀 맥락을 모르는 인간, 그가 바로 살인자”며, “기억을 상실한, 내면의 꾸준함을 모르는 맥락 없는 존재, 이게 바로 나치스”다. 우리 사회의 불안과 동요는 다름아닌 우리 안에서 기생하는 “히틀러”의 유령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까닭이다. 이 “히틀러”의 유령들은 어디서 왔는가 ? “외부 세계가 혼란한 틈을 타 히틀러는 스며들듯 내면의 혼돈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수 있었다. 무든 것이 연관성을 잃고 뒤죽박죽일 때 그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그 옆에 달라붙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자였으며, 아니 차라리 살인 기계였던 히틀러란 존재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 그가 인류를 상대로 저지른 그 사악한 범죄는 개별자의 내면에 도사린 타고난 魔性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압력 때문에 저지른 불가피한 범죄였을까 ? 그는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는 데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았을까 ? 막스 피카르트는 심리학과 철학의 바탕에서 나치스 현상에 대해 의미심장한 분석을 하며, 이런 물음들에 대해 답한다. 피카르트는 나치스는 “해체된 세상의 심리를 파고든 독재”, “어쩔 수 없이 형식상 용인한 독재”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세계의 불연속성과 맥락 없음이라는 허점을 파고들며 자신을 국가 영웅으로 둔갑시켰다. 히틀러는 결코 특출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히틀러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지도자가 되고 영웅이 될 수 있던 배경에는 총체적인 불연속성에 빠진 세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경제 공황으로 두려움에 빠진 독일 대중의 무지와 불안이 불러낸 허깨비다. 피카르트는 히틀러의 얼굴을 두고 “그것은 텅 빈 0이다. 텅 빈 한 장의 백지다.”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히틀러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그를 신비화하고 우상화해서 “국가 영웅”으로 만든 20세기 중반의 독일 대중과, ‘황우석’에게 돈과 최고 과학자라는 명예와 신성불가침의 생명공학 권력을 몰아주고 “국민 영웅”으로 만든 21세기 한국 대중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히틀러의 지배는 명령과 “쇳조각으로 굳어진 지도자의 고함”과 탱크의 무력과 선동문화의 고함, 그리고 우생학의 잔혹함으로 뭉쳐져 있다.
“우리의 히틀러”는 “순간에만 집착하는 맥락없는 삶”, 타자의 ‘다름’에 대한 증오, 기만의 수사학,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된 피상적 이해로 뭉쳐져 있다. “우리 안의 히틀러”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머잖아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나’만 옳고 ‘남’은 그릇되다는 편견과 독선에서 벗어나야만 타자에 대한, 세상의 ‘다름’에 대한 관용을 생겨난다. 노자는 말한다.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매 밝았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매 빛났고, 스스로 치지 않으매 공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매 오래 갔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매 천하는 능히 이와 더불어 다툼이 없었느니라. (부자현고명 不自見故明, 부자시고창 不自是故彰, 부자벌고유공 不自伐故有攻, 부자긍고장 不自矜故長, 부유부쟁 夫惟不爭, 고천하막능지쟁 故天下莫能與之爭. 『도덕경』22장) “우리 안의 히틀러”를 없애는 것은 서로의 ‘다름’에 대한 관용과 따뜻한 이해를 키우고, 즉 서로 다른 다양한 지식과 인간이 어울려 만드는 조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때 세계는 진정한 연속성을 회복하고, 전체에 작용하는 질서와 맥락이 개체의 삶에도 같은 척도로 작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