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圃隱포은정몽주 스크랩 [용인]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와 충렬서원
古方 추천 0 조회 83 13.02.21 08: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용인에 산지 9년째, 주말 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등잔밑이 어둡다고 용인에 있는 문화유적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6월 어느날, 하루 날을 잡아 여기저기 돌아보았다. 그 첫번째가 경기도 문화재 1호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과 그를 모신 충렬서원이다. 

 

수지 집에서 출발해 광주가는 43번 국도로 가다가 레이크 사이드 골프장 들어가는 길로 빠져 나와 우회전하면

바로 동네 뒤쪽에 충렬서원이 있고 거기서 100m쯤 내려가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1km정도 가면 포은 선생의

묘역이 있다. 위치상 충렬서원을 먼저 찾았는데 포은선생 묘소부터 소개를 하고 충령서원을 소개하려 한다.

 

정몽주 선생에 대해서는 40여년전 초등학교 다닐때에 "이런들 어떠하리..." 라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라는 단심가라는 시조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가보지도 못하는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 대 흘린 피때문에 선죽교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있다는...전설.

 

포은 정몽주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영천(永川)에서 출생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다. 1363년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

(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에는 동북면조전원수

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고,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나라에 가서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에는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고,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다.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런 포은 선생의 묘쇼가 용인 모현면에 있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 선생의 묘소는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었다. 그가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태종 6년(1406) 3월, 풍덕에

초장 하였던 묘소를 현재 위치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순절한 뒤 풍덕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할 때 면례행렬이 수지구 경계에 이르자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현재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포은 선생의 묘소는 단분으로, 상석·혼유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호석·난간석 등은 1970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1972년에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 등 대대적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역에서 내려다본 전경. 모현면 능원리는 이 묘역대문에 능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묘역 안내도 웬만한 왕릉 규모다.

조선의 개국에 반대해 이방원이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개성 선죽교에서 살해했는데 정작 이방원 자신이 왕이되고 나서는

정몽주의 충절정신을 높이사서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 후에는 이렇게 거대한 묘역을 만드는걸 용인하엿고 그후의 왕들은

서원에 사액을 하였으니 충신에 대한 정신은 왕조가 바귀어도 영원한가 보다.

 

그런면에서 지금의 정치꾼들은 너무나 지조가 없고 관용도 없다.    

 

 포은 정몽주 신도비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 사모지붕 비각 내에 서향(西向)으로 안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1696년에 세웠고, 1699년에 기록을 하였다. 방부의 비신 세우는 곳에 3단으로 층계를 마련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개석의 처마곡선 양끝을 경사지게 올린 것이 특징이다. 총높이는 약 388㎝로 비신 높이는 238㎝, 너비는 89㎝, 두께는 39.5㎝이다.

 신도비에는 “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포은정선생신도비명병서(皇明高麗守門下侍中益陽郡忠義伯圃隱鄭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수증(金壽增)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올렸다.

 

지난번 황희정승 신도비에도 우암 송시열과 곡운 김수증이 찬하고 서 하였던데 포은 선생 신도비에도 이들의 흔적이 있다.

 그옆의 비석들

 

 

 

 모현당과 경모사가 있는데 용인 문화관광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유명한 단심가 비석

 백로가

 

 포은 선생 묘역

 

 묘역의 전경

봉분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우측에는 묘표가 1기 세워져 있다. 상석 좌우로는 망주석 1쌍, 상석 1쌍, 문인석 2쌍, 석양 2쌍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담이 둘러처져 있다. 묘표는 방부운수(方趺雲首) 양식이며, 비신의 윗면은 ‘凸’ 모양으로 다듬어 운수를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운수의 앞뒤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장식하였다. 건립 연대는 1517년(중종 12)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는 약 220㎝로, 비신높이는 151㎝, 너비는 62㎝, 두께는 15㎝이다.

 모현당과 경모사

 묘표의 비신 앞면 중앙에는 한 줄로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음기를 각자하였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미상이다. 
 

 

 

 

 

 

 

 

 

 

 

 이날은 마침 단오날이라 포은의 후손들이 제를 올리고 있엇다.

 

 

 

 포은선생 묘역 바로 옆에 저헌 이석형의 묘가 있다. 이석형은 연안이씨인데 어떻게 바로 옆에 묘가 있을까?

 

연안이씨용인에 입향하게 된 것은 조선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정몽주의 증손녀와의 혼인에서 비롯되었다.

정몽주의 묘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었고 이후 이석형의 묘가 그 옆에 있게 되면서 후손들이 정착하게 되어

모현 지역에서 영일정씨와 더불어 최대의 가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묘자리에 대해서는 시집간 딸이 밤새워 묘자리에 물을 퍼 올렸다는 야사가 전해 내려오는데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연일정씨와 연안이씨 가문의 묘소가 혼재해 있는 특이한 묘역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 오기전 먼저 들렸던 충렬서원을 소개한다.

충렬서원은 1576년(조선 선조 9)에 이계(李棨)·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정몽주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웠으며, 서원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회진되자 1605년(선조 38)에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가 현감 정종선(鄭從善)·이시윤(李時尹) 등과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서원을 중건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사우 3칸, 동 서재 각 2칸, 문루(門樓) 3칸을 지었다. 이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겨 배향하였다. 중창과 함께 1609년[광해군 1]에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설곡(雪谷) 정보(鄭保)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1706년[숙종 32]에 다시 후손 정제두(鄭齊斗)·정찬조(鄭纘祖)를 비롯한 여러 유림의 공의로 옛터에서 조금 서쪽인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어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를 중건하고, 1956년에는 강당을 복원하였다. 1972년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사당을 전면 보수하고, 강당 및 내삼문을 해체 중건하였으며, 1975년에 홍살문과 외삼문을 신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원 입구. 진입로가 좁고 네비에도 애매하게 나와 찾는데 애를 먹었다.

묘역에 비해 관리가 안되고 허수란 느낌을 받았다. 개방이 되지 않아 안에는 들어가 볼수 없다.

 

 

 

 

 

 

 

 

 

2년전 정몽주 선생의 고향인 영천에 갔을때 선생을 배향한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었다.

앞으로 묘소가 있는 용인이냐? 탄생지 이자 고향인 영천이냐 하는 다툼이 생길수도 있겠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모신 영천 임고서원 관련 포스팅  참고 :   http://blog.daum.net/j68021/1374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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