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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기원과 신화」 - 서해숙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기는 했으나, 출판된 지도 오래된 책이다. 저자 서해숙 선생은 출판 당시에는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한 국문학과 교수였으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벌써 19년 전의 일이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는 각자의 성과 이름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성과 이름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주민등록증에 쓰인 성과 이름이 신분을 나타내기는 해도 그것에 얽매이지도, 그것을 위해 살지도 않는 것 같다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성씨 대부분은 왕족인 경우와 혹은 귀화한 경우에는 스스로 성을 만들어서 쓰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왕으로부터 사성(賜姓)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어떤 성이든, 나름대로 신화적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제1장은 ‘한국 성씨신화의 이해’, 제2장은 ‘한국 성씨와 시조신화’로 구분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기술된 대부분은 민속학자들의 연구 논문이며, 특히 제2강에서 ‘남평문씨와 문다성 신화, 남원진씨와 진함조 신화, 경주최씨와 최치원 신화, 견씨와 견훤 설화’를 중점 기술하고 있는데, 남평문씨 문다성의 후손인 나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제1장】한국 성씨신화의 이해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나, 단군신화처럼 역사와 이야기 중간쯤인 것을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신에 관한, 또는 신성(神性)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본질적 이해를 의도한다면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신화다. 앎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인식, 가치 등에 대해 기원적인 역사를 설명함으로써, 신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통합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신화는 신성성이 인정되는 집단의 범위에 따라 건국신화, 시조신화, 부락신화, 기타신화로 분류하고, 관련해 성씨 신화의 서사구조는 상생담(箱生譚), 즉 금궤, 석함, 궤, 금합 등 상자를 매개로 한 것과 난생담(卵生譚), 즉 주몽, 박혁거세, 석탈해, 김수로 신화처럼 알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양쪽 부모에게 씨를 내려받았다는 이야기는 신기하지 않아서인지 그런 것은 거의 없다.
성씨 신화는 성씨 집단 내에서는 신화지만, 집단을 벗어나면 전설이나 민담으로 변이된다. 성씨의 뿌리를 말하는 족보는 시조에 대한 신성성과 당위성을 근원적으로 해설하고 있기는 하나, 허구적이거나 모방된 것도 아주 많다. 이 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규원사화』등에 실린 족보 관련 신화와 해당 족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성씨의 고향』, 『한국인의 족보』, 『한국성씨 대관』, 『만성대동보』, 『한국민족설화 연구』,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한국구비문학대계』, 『한국구전설화』등에서의 성씨 관련 설화와 자료들을 검토·선택·수용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김씨로 그중에 경주김씨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경주김씨 시조 신화는 오늘날까지 영속성을 갖는다. 이는 다른 성씨들도 마찬가지다. 『성씨의 시조』에 따르면 “경주김씨 기원은 김알지로부터 시작된다. 김알지는 서기 63년 신라 탈해왕 9년, 서쪽 시림(계림)의 나무 가지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면서 성을 김(金)으로 하사했는데, 여기서 경주김씨가 시작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김알지는 박혁거세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왕은 아니었다. 자운(紫雲)이 가득한 곳이라 하여 김알지의 출현을 예고하기는 하지만, 탈해왕의 측근이던 대보공 호공이 밤에 시림이라는 곳에서 기이한 징조, 빛과 구름은 금궤 속 아이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그것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는금궤 아래서는 흰 닭이 울었으므로, 시림(始林)을 계림(雞林)으로 바꾸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김알지는 탈해왕에 의하여 길러졌고, 4대 탈해왕에 이어서, 13대에 이르러서야 ‘미추이사금’이 경주김씨 최초 왕이 되었던 것이다.
남평문씨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거란전쟁」을 치뤄 이긴 고려 현종 때다. 남평문씨 족보에는 시조 문다성은 신라 20대 자비왕 때 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에서 태어나 신라 때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평문씨 시조 신화는 활발하게 논의되는 신화 중의 하나로 여러 문헌에 산재 되어서 전한다. 신라 자비왕 당시에 남평은 ‘미동부리’로 백제 땅이었다. 백제 개루왕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신라에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기는 하나, 문다성이 활동했을 서기 500년 무렵은 신라와 백제 간에도 싸움이 잦았다. 그런데 백제에서 태어나 신라의 벼슬을 지냈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고, 미동부리가 남평(南平)으로 된 것은 고려 때로, 문다성이 남평 개국백(開國伯)이라는 관직을 받았다는 것도, 합리적이지는 않다.
남평문씨 시조에 관한 기록은 1846년(현종 12년)에 간행된 『남평문씨족보』로써, “세승(世乘)에 이르기를 시조는 남평군에 있는 큰 연못 바위 위의 석함 가운데에 강림하셨다고 한다. 이때에 상서로운 자색(紫色) 기운이 나타나자 신라 왕이 그것을 살펴보고, 기이한 징조라 여겨서 그곳의 수령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하고, 문씨 성을 내렸다. [석함의 면에 붉은 글씨로 文이라고 쓰여 있었던 까닭이다] 이로써 남평문씨가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 자세히 보면 ‘전남 남평면(1995.1.1. 남평읍으로 승격) 동쪽 장자지(長者池)에 큰 바위가 있다. 어느 날 장자지에서 자색의 서기가 있어 왕이 현주(縣主)를 시켜 살펴보게 하였다. 바위 위에서 오운(五雲)이 감돌면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왕은 하늘이 나를 돕기 위해 내린 것이라 하여 기뻐하였고, 궁중에서 양육했다. 아이가 다섯 달이 되니 문무가 빼어나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다성(多省)이라고 이름 지었다. 석함의 면에 文이라 씌어 있어서 성을 문씨로 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장자지가 있고, 석함이 놓였던 바위를 문암(文巖)이라고 한다. 후손들이 시조 문다성을 모신 장연서원(長淵書院)이 그곳에 있다’로 요약된다.
경주김씨 시조 신화에서는 호공이 계림에서 기이한 징조를 목격한 데 반해, 남평문씨 시조 신화에는 현주(수령)가 단지 왕의 지시를 따르는 수동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다만 왕은 혜안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석함은 김씨신화에서는 금궤, 석탈해 신화에서는 목궤, 제주 삼성신화에서는 목함과 같은 류의 해석이다. 거기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채, 천지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 것인데, 이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함을 의미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왕은 하늘이 나를 돕기 위해 아이를 내린 것으로 알고 기뻐하였다는 것은 천지의 화합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다.
비범함과 영특함을 보고 이름 지었고, 혼인, 이적異蹟, 죽음 등은 생략되어 있어서 자질적 한계를 보여주지만, 시조의 특출함을 보여주는 서사 단위는 영웅일대기적 삶의 모습을 축소한 것이다. 김알지 신화에서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金으로 삼은 데 반하여, 남평문씨는 석함의 면에 글씨가 씌여져 있어서 성씨로 삼았다는 것은 성씨의 유래를 절대적이고 단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하늘의 게시로 절대불변의 성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새롭게 형성된 문씨 씨족집단의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해석 되기도 한다.
문암은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위치하며,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암을 일러 ‘시조께서 탄강하신 바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문암을 보호하는 현대식 ‘문암각’이 세워져 있다. 남평문씨 시조 신화의 장자지와 바위는 오늘날 후손들에게 성소로 거듭나고 있다. 또 장연서원은 후손들이 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하는 곳으로 신화의 구술 상관물이다. 장연서원은 제의의 장이며, 의례를 통해서 원일성原一性을 회복하고, 조상숭배의 발현으로 굳어져 있다. 결국 이러한 증거물은 남평문씨 시조 신화의 진실성, 신성성을 확보하는 구심력이 되어 후손들에게 다른 씨족집단과는 변별성을 보여줘 자긍심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책을 참고했고 내 생각도 가미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지금(2022∼2026) 윤석렬 대통령의 성이기도 한 파평윤씨에 대해서다. 파평은 지금의 파주로 파평윤씨 시조는 윤신달(尹峷達)로 그는 신라 51대 진성왕 6년 892년에 태어나, 972년(고려 광종 23년) 81세 때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합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으므로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으로 삼중태광태사에 이르렀고,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조의 5대손 윤관(尹瓘)은 문관에 올라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가 되었으며 영평(鈴平, 파평의 별호)현 개국백에 봉해짐으로써, 파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파평윤씨는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발현한 토착 세력으로써 토성이라고 할 수 있다. 파평윤씨 족보에 실린 기록이다.
“남원윤씨보를 살펴보면 시조를 연못 위에서 얻었다는 이야기는 대체로 파평 용연리에 살던 할머니가 석함을 얻었다는 속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괴이하고 허망한 소리와 연관되어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속설 말미에 공에게는 좌우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이 있고, 양어깨에 붉은 점이 해와 달 모양으로 있으며, 발에는 7개의 사마귀가 있었다. 때문에 혜종(惠宗)이 즉위하여 공의 모습이 범상치 않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좌천시켰다. 혜종은 마음에서 매우 시기하여 끝내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지에서 죽자, 동경(경주)에서 장사지냈다고 한다.”-〈파평윤씨 을해보(1839년)〉
더 자세히 보면, ‘경기도 파평 파평산 기슭에 용연이라는 못이 있다. 어느 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더니 벼락과 천둥이 쳤다. 주민들이 분향하고 제를 올렸다. 사흘째 되던 날, 윤온이라는 노파가 못 가운데 금궤가 떠 있는 것을 보았고, 금궤 안에는 아기가 있었다. 아이의 좌우 어깨에 붉은 사마귀가 있고,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발에는 7개의 점(사마귀)이 있어서 광채를 발했다. 할머니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고, 할머니의 성을 따 윤씨라고 했다.’는 것인데, 이야기가 맹랑하지만, 오늘날 윤씨 성을 가진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성씨 집단의 변별성을 갖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는 노파가 아기를 왕에게 봉헌했다 하여 奉씨가 된 ‘하음(강화도)봉씨’에서도 볼 수 있으며, 노파의 성을 따랐다는 것은 시조에게 노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읽힌다. 노파의 성을 따랐다면 모계 성씨 계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씨제도가 확립된 고려 중엽 이후에도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성씨를 계승한 흔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평문씨처럼 아이가 담긴 석함에 ‘尹’자가 새겨져 있었다거나, 아이의 손바닥에 ‘尹’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아무튼 성씨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환원적으로 성씨 신화에 대한 신성성과 진실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후손들이 다른 성씨 집단과의 변별성을 확득하기 위해서이고, 씨족집단 내부 결속을 꾀하여 구심점으로 작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성씨라면 신라시대 박·석·김과 육촌장의 성씨인 이씨, 정씨, 손씨, 최씨, 배씨, 설씨 등일 것이다. 처갓집 성씨이기도 한 배씨는 금산가리촌 촌장이던 지타(祗沱)가 시조다. 처음 명활산에 내려와 한지부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와 같다. 하늘에서 신인이 산봉우리에 내려왔다는 것은 단군신화와도 맥락이 같다. 하지만 지타는 제왕이 아니라 촌장으로 강림한 것이고, 명활산은 한지부의 주산으로써 하늘에 직접 연결되는 가장 가깝고도 신성한 공간을 의미한다. ‘하늘에 이상 세계가 있고, 거기에 인간과 연결되는 통로를 통해서 내려왔다.’는 것은 인류기원설 신화의 또다른 형태다.
배씨의 시조가 신라 2대 유리왕 9년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祇部)로 고치고, 비로소 성을 사성 받았다는 것은 다른 성씨와 함께 “화목을 의미하며, 동시에 회맹의 의미를 갖는 집단공동체적 특징을 보여준다.”이런 씨족집단은 혈연집단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府를 중심으로 정치조직으로 이어지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이 사성하였다는 것은, ‘촌민들의 상호간 유사성보다는 차이성을 나타내고자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씨족공동체가 부족 형태로 이행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유리왕이 사성함으로써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성씨가 왕에 의해 구체성을 실현하고 성씨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배씨 시조 신화와 이어지는 『달성배씨가승보』에는 그것을 더 구체화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배천생은 단군시대 남해 우두머리이다. (…) 단군이 백성과 신하에게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필시 황천후토(皇天后土-하느님과 토지신)가 나의 정성에 감동하여 신아(神兒)를 내림으로써 신령스럽고 기이한 종적을 보이신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붉은 비단옷인 까닭에 비(緋)자에서 사(糸)를 버리고, 의(衣)를 두어서 배(裵)로 성을 삼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하였다. 나이 13세가 되자 모습이 장대하고 뜻과 기상이 웅건하니 바닷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추대하여 장으로 삼았다. 그러자 단군이 그를 남해장으로 세웠다. 그후 자손들이 남해장을 세습하였다.” - 이상 〈동국야사〉
지금까지 상생담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담과도 비슷한 신화들이다. 다음은 창녕조씨 시조 신화로 이류교혼담(異類交婚談)으로 된 신화다. ‘창녕조씨 시조는 조계룡으로 그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서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태자태사」에 올라 창성부원군에 봉해졌고, 후손들이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창녕조씨는 충간공파, 장양공파, 시중공파 족보에는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때 한림학사 이광옥(李光沃)의 따님이신 예향(禮香)이 청룡질(배앓이)을 앓아, 화왕산 정상에 있는 용담에서 목욕하다 청룡의 아들 옥결(玉玦)과 만났는데, 그로 인하여 계룡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니, 협하(脇下-옆구리)에 曺자가 새겨져 있는지라 그로 말미암아 성을 조씨라 하였다고 하였다. (…) ‘나는 화왕산성 큰 연못의 신룡의 아들 옥결인데, 내가 아이의 아버지다. 아들을 잘 기르면 공후에서 경상(卿相)에 이르기까지 자손만대가 끊임없이 번창할 것이라 하였다.’이에 아이의 외할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은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었고, 왕이 계룡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장성하여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는데, 이 사람이 창녕조씨 시조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매계 조위와 남명 조식(曺植) 선생도 창녕조씨로 이에 대하여 “조계룡은 진평왕 사위가 되어 5남 2녀를 두었으며, 조겸(曺謙)은 조계룡의 6대 손이다.”라 하였다. 창녕조씨 시조의 신화를 서사 단위로 보면, ‘예향은 나면서부터 복질이 있어서 고생했다. 어떤 사람이 창녕 화왕산 용지에서 기도드리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길일을 택해 연못에 가서 지성으로 기도드렸다. 그때 갑자기 운무가 자욱하고 주위가 깜깜해지더니, 연못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 병은 낫았으나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후 꿈에 장부가 나타나 아이의 아버지가 신룡의 아들 옥결이라고 알려주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예향의 아버지인 이광옥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알렸고, 왕은 자세히 듣고 조계룡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가 장성하여 창녕조씨 시조가 되었다.’이런 이야기다.
어쩌면 황당하고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지만, 재미는 있다. 진평왕은 역사적 인물이고 그는 딸은 천명(김춘추의 어머니), 덕만(선덕여왕)이 있고,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막내 선화공주가 있어서 백제 무왕(맛동서방)과 결혼했다고 향가에는 전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창녕조씨 시조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주어씨 시조 신화에도 전한다. 충주어씨 시조는 어중익(魚重翼)으로 그가 잉어와 이류교혼를 통해서 탄생했다고 충주어씨족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묘보(고종 19년)인 1879년 간행된 「충주어씨족보」에 따르면 “평장공 휘 중익의 성은 원래 지씨(池氏)이며, 휘가 급(及)이었다. 하루는 급의 부인이 연못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나타났다. 용모가 수려하여 부인이 신이 하게 여겼다. 소년은 장차 귀한 아이를 낳을 것이라 말한 뒤 잉어로 변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후에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큰 비늘 셋이 있고 광채가 났다. 이에 태조 왕건이 그에게 어씨(魚氏) 성을 사성했다.”는 것이다.
창녕조씨 신화는 예향이 용지에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리다가 홀연히 연못 속으로 사라진 뒤, 다시 솟아났으나 스스로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다가 현몽을 통해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면서 꿈속에서 이류와의 교혼으로 인한 아이의 존재를 밝히는데 반해, 충주어씨 시조 신화는 부인이 아이를 낳는데, 청의 소년이 아이의 몸에 이표(異表)가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실제 겨드랑이에 큰 비늘 셋이 있고 광채가 났다고 한 것이다. 아이는 잉어의 후예로서 평범한 아이와는 다른, 즉 비늘의 표징을 통해 시조가 남다른 존재임을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강채씨(平康蔡氏) 시조는 고려 고종 때의 채송년(蔡松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전의 시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 채숙도가 하남성 채현에 채나라를 세우고, 25대 후 채보한이 신라로 귀화해 내물왕의 부마가 되면서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고신시 후손으로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를 따라 조선으로 왔다는 설도 있고, 시조 채원광이 신라 17대 내물왕의 사위였던 최보한의 후손이라 하기도 하였으나, 상고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는 기록의 소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타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다. 후손들이 시조의 연대를 끌어올리려는 의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평강채씨는 시조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가운데 시조 탄생에 대한 기록은 「평강채씨족보」에 기록되어 전한다. 광무 2년(1898년)간행된 평강채씨 족보에는 “영롱한 거북이 평강에서 나와 사람으로 화化하니 왕이 이를 듣고 채씨 성을 하사하고 평강백에 봉했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이것은 직접 거북이가 현신하여 채씨시조가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하면 ‘평강 사는 대갓집 규수가 혼전에 잉태했다. 부모가 누구냐고 물으니 밤마다 미소년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에 명주실을 맨 바늘을 옷깃에 달아두었다. 미소년은 집 앞 연못에 사는 오색 영롱한 거북이었다. 규수가 낳은 옥동자에게 임금이 채씨 성을 주고, 본관을 평강으로 하였다. 지금도 거북은 채씨의 상징으로 전해진다.’이런 이야기다.
마치 전설 같으나 이야기의 핵심은 시조의 탄생과정이다. 거북이와의 이류교혼에 의해 채씨시조가 탄생한 것은 비정상적이지만, 그 신성성이 강조되고 있다. 밤에 정체불명의 사내가 처녀 방으로 들어와 자고 간다는 모티브로 구성된 전형적인 야래자(夜來者) 전설인 것이다. 야래자 전설이 평강채씨 시조 신화로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창녕조씨, 충주어씨 시조 신화에서는 시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만, 평강채씨 시조 신화에는 시조의 이름이 없다. 그 시조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과 관련지을 수 있겠다.
이들 이류교혼담에 의한 성씨 신화는 상생담과 마찬가지로 탄생과정만 이야기될 뿐, 건국시조의 경우처럼, 영웅일대기적인 면모와 혼인, 이적, 사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과 결부하여 공적을 쌓아 관직을 얻었다는 기록만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성씨 신화가 사회문화적 제도 장치로 성씨신화가 건국신화와는 다른 이야기 구조라고볼 수 있겠다. 문학적인 의미 외에도 신화가 전승될 수 있는 역사문화적 요인들에 대해서도 짐작해 보아야 한다. 성씨신화가 신화적 의미를 상실하면, 얼마든지 전설적 변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상은 성씨신화에 대한 서사구조라면, 그것이 형성되고 전승된 과정은 어땠을까? 성이란 혈연집단의 명칭으로 씨족적 관념의 표현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성씨신화는 씨족신화와 건국신화의 순차적 과정과 혼재를 거쳐서, 오늘날 구체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신화로써 환씨 씨족 신화이고, 환웅신회는 환씨 시조신화라고 할 수가 있다. 동명신화는 고구려 시조 신화이자 고씨 시조 신화이며,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 역시 신라의 시조 신화인 동시에 경주박씨, 경주김씨, 경주석씨 시조신화이기도 하다. 김수로왕 신화는 가락국 시조신화이자, 김해김씨·김해허씨 시조신화이고, 신라 6성인 이씨, 최씨, 손씨, 배씨, 정씨, 설씨신화 역시도 씨족집단에 의해 향유된 시조신화이자 씨족신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건국신화와 씨족신화는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동시성도 같이 갖는다. 즉 씨족집단이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면 그들이 향유 하던 신화는 왕가와 관련한 시조신화로 전환되면서, 건국신화가 되었다. 물론 차별성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원류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씨족 신화는 씨족이 소멸되지 않는 한 영원히 남게 되는데, 신라 6성 신화에서 보듯이 6성 신화가 박혁거세 신화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박혁거세 신화는 씨족 단위 신화였다가 건국신화로 발전하여, 박씨시조 신화로 정착하여 전승 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건국신화로 발전하지 못한 씨족신화의 경우에는 오늘날 성씨 신화로서 전승과 연계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김씨, 남평문씨, 하음봉씨, 창녕조씨 시조 신화에서는 전설적 속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모두 적지 못했지만, 파평윤씨, 달성배씨, 충주어씨, 평강채씨 시조 신화에서는 전설적인 속성을 구체화할 수 는 없다. 상생담, 이류교혼설 등 성씨 신화가 갖는 가장 중요한 점은 해당 시조의 탄생과 득성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후손들이 시조로부터 성씨와 함께 혈연의 근원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가장 큰 증거물이 되는 것으로 전설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화 기능을 강화시켜 준다.
신화를 구전되는 이야기라고 했을 때, 전설과의 연관 관계가 주목된다. 전설은 ‘역사적인 성향을 지닌 서사문학으로 주인공이 주위 환경과 부딪치는 관계를 복합적으로 나타내면서,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고 보태고, 다투며 하는 이야기를 일정한 사실에 근거하여 꾸며낸 이야기지만, 그것은 사실 해명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설은 문학이다. 다만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는 역사와는 구분되기도 하지만 또 만나기도 한다. 전설은 ‘역사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이 역사적 기능을 갖는 것은 신화가 세속화되어 전설이 되었다는 것으로, 신화의 합리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논문해설이라 그런지 쉬운 듯 어렵네)
충주어씨 시조신화에는 ‘잉어가 빨래하는 처녀에게 다가와서 처자의 성기에다 물을 쏘았고, 거기가 뜨거워졌다는 이야기로서 인간의 성행위에 비유될만한 직설적인 표현이 있다. 잉어가 처녀의 허리를 치거나, 물을 쏘는 등 신체적인 접촉 행위를 통한 교혼의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이외의 이류와 교혼이 가능했다는 사유 방식이 오히려 중요하다. 잉어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어머니의 꿈에 청의 소년이 잉어로 변하여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버지가 잉어라는 사실 밖에 모르는 경우에 시조의 전설에서는 성을 어떻게 지어주는지 그 상황이 더 궁금하다.
“아낙네는 물속의 고기가 허리를 친 뒤부터 태기가 있어 어린애를 낳았으므로 그 아이의 성을 魚씨로 하였으며, 이리하여 어씨의 시조가 되었다.”이런 작성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성씨 신화의 문화적 수용]
성씨는 혈족관계를 표시하는 인습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증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씨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18세기 이의현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이, 19세기 『증보문헌비고』에는 497성이, 일제 때인 1930년 250성이, 1960년 남한 인구센서스에서는 259개의 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과 같이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처음으로 민적법이 시행된 융희 3년(1909년)의 일로, 당시는 성이 없던 사람이 성을 가진 사람의 1.3배나 되었다고 하니, 천민은 의례 성이 없었다.
성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사회가 시작된 원시시대부터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소규모 집단을 이루며 살았고, 그것은 씨족 사회로써 전원이 힘을 합쳐 수렵, 어로, 채집을 하고 적을 방어하기도 했다. 이것이 점차 부족사회로, 부족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처음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으로, 그들은 거주하던 곳의 지명과 산하를 성으로 삼았다. 신농씨는 어머니가 강수에 살았으므로 강씨(姜氏)로, 황제는 희수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로, 순임금은 어머니가 요하에 살아서 요씨(姚氏)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한자가 들어오고 난 뒤로 보이는데, 이는 성을 모두 한자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주몽의 성을 고씨 혹은 본성이 해(解)였던 것을 고(高)로 고쳤다고 한다. 주몽은 마의를 입은 사람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납의를 입은 사람인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수조의(水藻衣)를 입은 묵거(默居)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는 아기가 들어 있던 알이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혁거세’라고 하였다. 유리왕 9년에는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 부장들에게 성을 주었다고 했다. 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 계통에서 내려왔다 하여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가락국 시조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하였다고 신화는 전한다. 고구려는 을파소, 명림답부 등 장수왕 이전에 이미 성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고구려에 연원을 둔 성씨는 극히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의 시조는 대부분 라말여초와 그 이후의 인물들이다.
족보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상세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는 1476년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이다. 이는 현존하는 것으로 다른 씨족집단에서도 족보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오래된 족보는 친손은 물론 외손계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이 둘이 합작하여 만드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17세기 이후 임진,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가족제도, 상속제도의 변화로 족보가 변모하기 시작했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친손이 족보 제작을 주관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성을 얻는 과정은 모사성(模寫姓), 모계성(母系姓), 사성(賜姓)으로 분류하는데, 모사성은 어떤 징표나 형상에 따라 성으로 삼는 경우를 말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모계성, 임금이 직접 성을 내리는 경우를 사성이라고 한다. 모사성, 모계성인 경우에도 왕으로부터 성시에 대한 권위를 획득하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의 사성의 범주에 속한다. 경주김씨, 남평문씨, 달성배씨 시조신화는 모사성에 해당하고, 하음봉씨, 파평윤씨 시조신화의 경우 모계성에 해당한다. 모계성을 따른 경우는 대가야 월광태자가 정견모주 10대손이며, 김수로왕과 허황옥도 둘째 아들에게 허씨로 사성한 것이다. 창녕조씨, 충주어씨, 평강채씨 시조신화의 경우는 전형적 사성에 해당한다.
남평문씨 족보는 1731년(영조 7년) 발간된 「신해보」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남평문씨대동보』가 발간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남평문씨시원기’로서 시조신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문암, 장자지의 사진들을 수록하여 신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에 제작된 족보일수록 시조신화에 대한 신뢰성과 적극성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도 했지만, 세계화를 띠는데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존재감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뭐 그런 거 말이다.
성씨신화는 정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자손으로써 알아야 하며 후세에도 알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지 모른다. 이것은 곧 족보 편찬의 당위성과 함께 성씨신화에 대한 신화적 합리화라고 할 수 있겠다. 어중익을 시조로 하는 충주어씨 시조 신화도 족보를 비롯한 관련 문헌에 상세히 전한다. 1879년 간행된 족보와 1999년 발간된 족보에서도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시대가 바뀌어도 후손들이 갖는 신화의식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가 왕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 묻기를 ‘어떤 비늘인가?’하였다. 이에 공은 임금 앞이라 감히 용의 비늘이라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고기비늘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족보는 姓氏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월이 흐르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성이 중복되고, 한 성씨를 가진 자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계통을 밝히기 어렵게 되자 계통을 일목요연하게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 계보로서의 족보다. 우리 조상들은 고려시대 이미 족보를 처음 기록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여러 사회여건과 성숙한 문벌의식이 높아지면서 족보 편찬을 활발히 했다.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로 각 집안에서는 살아 있는 어른의 경우,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간행된 족보일수록 시조에 대한 신화적 미화가 심화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비록 신화에서만 시조신이 기억된다할지라도 제의를 통해서 매번 성씨신화는 환기되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결국 성씨신화는 과거의 시조와 현재의 자신 그리고 미래에 있을 후손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어주는 연결고리다. 시조가 있기에 자신이 있고, 자신이 있기에 장차 후손들도 존재하는 이상적인 구심체를 성씨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성씨신화는 시조의 탄생을 통해 씨족집단의 시원을 설명하기도 하고, 신화적 질서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역사성, 사회성 같은 복합적 의미를 갖는 신화를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교육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성씨신화다.
【제2장】 한국 성씨의 시조신화
- 이하 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