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술의 정체성
(가)
한과 비애의 정조는 조선인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 내려온 자연스런 ‘우리’ 정서라기보다는 20세기 일본인의 머리에서 창안된 그럴듯한 허구이다. 이처럼 한의 정서가 조선의 전통으로 등극하게 된 배경에는 피식민 조선의 패배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던, 역사의 승리자 일본의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이식(移植)된 한을 ‘우리 전통 예술의 본질’로 금이야 옥이야 키워낸 토양은 다름 아닌 1920년대 이후 한국의 문화적 풍토 자체였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의 민족주의는 상무(尙武) 정신에 의해 고취되었고, 이 시기를 풍미한 것은 수동적 비애미라기보다는 단호한 비장미였다. 이 시기에 범람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의 각종 영웅․위인전은 영웅과 초인의 전투적 이미지를 부조(浮彫)하는 데 고심했다.
그러나 국가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애틋한 민족 감정이 증폭되었던 1920년대 이후의 담론에서, 온 민족을 선도할 초인적 ‘영웅’은 떠나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원망스런 ‘님(연인)’으로 급작스레 대체된다. 김소월의 <초혼>이나 서정주의 <귀촉도>는 이런 의미에서 민족고유의 비애의 정조를 계승한 전통의 적자(嫡子)라기보다는, 20세기 초반 한국의 민족주의와 한의 은밀한 내통이 얼결에 빚어낸 서자(庶子)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예술에서 한이라는 정서는 고유한 것도, 자명한 것도 아니다라는 앞서의 논의를 백 번 인정한다고 해도, 어쨌든 김소월의 시는 슬프다. 다시 말해 고대가요 <공무도하가>, 백제의 노래 <정읍사>에서 고려가요 <가시리>, 그리고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혼>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정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원히 유예되고 질긴 기다림은 결국 한으로 응고된 것 아닌가. 또한 망부석 설화의 전통을 잇는 이들 작품에서 스며 나오는 정서는 분명 슬픔보다는 한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거기까지이다. 한의 정서는 결코 우리 전통 예술의 정서와 외연이 같지 않다. 한이라는 정서는 우리의 민족성이나 전통과 결부된 실체가 아니며, 절실한 한을 노래한 작품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손유경,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우리 전통 예술은 恨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는가?’
(나)
우리는 막연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일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도 옳은 면이 있다.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국적인 것, 즉 특수자뿐이므로 특수자들의 공통 속성이나 성향을 세계화하자는 것은 일리가 있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 즉 우리의 특수성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우리도 모른다. 이 상태에서 이 전략이 어떻게 성공을 거둘 수 있겠는가?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세계적인 것의 속성을 한국적인 양식에 담아내는 전략의 성공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언제나 한국의 정신이나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국적 특성을 말해 왔다. 그 하나의 예가 ‘한(恨)’이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한국의 정서는 한이라고 배웠다. 민요, 판소리, 문학 작품 등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한’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시는 우리 민족 정서에 아주 잘 부합하는데, 소월 시의 특징은 우리의 ‘한’을 잘 표출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서울 올림픽 식전, 식후 행사가 보여 준 한국의 정서는 ‘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란한 북소리와 화려한 부채춤에서 ‘한’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사물놀이패의 장단에서 ‘한’을 느낄 수 있는가? 김홍도의 그림은 어떠한가? 나는 김홍도의 그림에서 ‘한’보다는 해학과 풍자를 느낀다. 즉 ‘한’을 내재화시킨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자신을 벗어 던진 자유를 느낀다. 그 속에 풍자가 숨어 있지만 그것을 ‘한’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나하나 검토하다 보면 각 분야의 공통 속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세계화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세계 시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속성, 즉 세계적이라고 생각되는 속성을 우리의 것에서 찾아내어 특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적 속성을 알아내서 역으로 그것을 한국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다. 즉 한국적인 것에 숨어 있는 세계적 보편 속성을 발굴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에 숨어 있는 세계적인 것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방안일 것이다.
- 탁석산, <한국의 정체성>
(다)
님이 오마 하거늘 저녁밥을 일찍 지어 먹고 중문(中門) 나서 대문(大門) 나가 지방(地方) 우희 치다라 안자 이수(以手)로 가액(加額)하고 오는가 가는가 건너 산 바라보니 거머횟들 서 있거늘 저야 님이로다.
보선 버서 품에 품고 신 버서 손에 쥐고 것븨님븨 천방지방 지방천방 즌 듸 마른 듸 가리지 말고 워렁충창 건너가서 정(情)엣말 하려 하고 겻눈을 흘귓 보니 상년(上年) 칠월(七月) 사흗날 갈가 벅긴 주추리 삼대 살뜰히도 날 속엿것다.
모쳐라 밤일싀망정 행여 낫이런들 남 우일 번하괘라.
-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논제1] 제시문 (가), (나)의 공통 주제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전통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를 밝히시오. (4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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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설
우리 전통 예술은 한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는가? 라는 문제 제기를 통하여 우리 전통 예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밝혀 보자는 문제이다. 한의 정서만이 우리 예술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제시문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다른 인식을 찾아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준이나 방안 등이 무엇인지도 알아 보고자 한 것이다.
제시문 분석
(가) 한의 정서는 우리를 식민지화한 일본인들이 창안한 허구로 파악한다. 즉,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이 한의 정서를 일반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한의 정서는 결코 우리 전통 예술의 정서와 외연이 같지 않다. 한이라는 정서는 우리의 민족성이나 전통과 결부된 실체가 아니며, 절실한 한을 노래한 작품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에서 발췌한 글로써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분석 과정에서 한국의 정서가 ‘한’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제시문 (가)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는 글이다.
(다) 그리워하는 임을 어서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사설시조로 삼대 줄기를 임으로 착각하고 속은 것에 민망해 하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