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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송나라를 세운 침류왕(재위 383)
침류왕(枕流王363~422)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爾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삼한왕, 왜왕이던 침류왕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과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가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는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참조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 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가 백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침류대왕 우치천황을 모시는 우치신사
또한 383년 계미년에는 즉위 16년을 맞아서 우전팔번인물화상경에서 왕16년이라고 기록했다. 즉 367년에 즉위한 것이되는데, 칠지도에서 기奇를 왜왕으로 임명한 해가 태화 4년으로서 367년이었다.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에 인용된 탁순왕卓淳王(=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발언이 중요하다. “갑자년 364년에 백제대왕이 탁순국왕에게 백제 사신, 구저久?,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등 3인을 보내어 왜국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구저한求?韓, 막고성莫古城, 미추성彌鄒城 등의 백제 지명이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 기록의 구저, 미주, 막고 등 3인은 그 백제 삼성三城의 성주城主였을 것이며 그 위치는 현재 평양 이북이 되고, 각기 독자적인 가신家臣 군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간 것이다. 탁순왕은 백제 사신 구저들을 억류하고, 신라로 압송하기까지 하였다. 신공황후의 신하 시마숙녜斯麻宿?가 왜국으로부터 탁순국에 다다르니, 일이 그르쳐진 것을 알고, 시마숙녜는 그의 가신 니하야爾波移를 백제로 보내었고, 시마숙녜는 왜국으로 귀국하였다.
[삼국사기/신라기]에서는 364년경에 왜국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백제와 왜국은 366년경에 탁순국卓淳國(진해鎭海) 등 7국을 쳤다. 왜국장수와 백제장수 목라근자木羅斤子, 사사노궤沙沙奴? 등은 비자호比自~(창녕昌寧),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 록국?國(거제도巨濟島), 안라安羅(함안咸安), 다라多羅(합천陜川), 탁순卓淳(진해鎭海), 가라加羅(고령高靈 대가야大伽倻) 등 7국을 쳐서 백제 속국으로 하였다. 이후 백제군이 전라도의 비리比利(완산完山=比斯伐), 벽중?中(김제金堤), 포미지布彌支(보성寶城), 반고半古(반남潘南), 침미다례?彌多禮(해남海南=침명浸溟)를 쳐서 백제 영토로 하였다. (윗 지도 참조)
탁순국卓淳國은 신라와 이웃에 붙어있었다. 탁순국은 임나연정에서 졸마국卒磨國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그 위치는 진해鎭海에 있었다. 따라서 갑자년 탁순국에 이른 백제인은 동해안의 함흥에서 동해 연안을 타고 배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서해안으로 일본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안라安羅는 아나(阿那; 安)가야라고 하였던 함안咸安이다. 다라多羅는 대가야大伽倻가 있던 합천이다. 남가라南加羅는 김해金海 금관가야다. 가라加羅는 불특정한 이름인데 위에서는 가야를 대표하는 고령高靈일 것이다. 록국(~國)의 록은 구록口?으로 파자破字하여 거제도巨濟島로 추정된다. [위지왜인전]의 구사가야拘邪伽倻가 거제도인데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대의 또다른 상황 기록으로, [일본서기]에서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중요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백제 장수인 목라근자를 왜국 땅에서 신하처럼 데리고 있다가 가락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왜왕은 바로 백제의 382년 당시 왜왕인 침류대왕인 것이다.
383년 평양 한성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침류대왕은 중국의 북조, 전진前秦으로부터 참전을 요청받는다.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340~406)의 아들이며,
383년 11월에 중국의 남북조가 충돌한 역사적인 비수대전?水大戰이 있었다.
모용수는 고구려, 백제를 친 전연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며, 전연 말기에 전연을 배신하고 전진의 부견황제에게 귀의했고, 370년 전연국 수도 업성 함락으로 전연은 전진에게 몰락했다. 부여왕 여현은 전연황제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었고, 그의 아들 부여왕자 여울은 후연황제 모용수의 사위가 되어서 후연의 재상이 되었다.
이때 384년에 고구려 고국양대왕故國壤大王이 전연前燕이 차지했던 대릉하大凌河 하구의 요동遼東을 공략하였다. 중국 사서에서 동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거해 자치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 385년 상황이다. 晉世 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385년 후연황제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農을 파견하여 백제가 빼앗은 영지성과 황룡성, 그리고 고구려가 점거했던 요동성을 수복한다.
광개토왕 시대인 408년에 평양시 덕흥리에 묻힌 유주자사幽州刺史 진묘鎭墓가 있다. 그의 고분에는 아래와 같은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군 신도현 도향경 감리 ○○郡 信都縣 都鄕敬 甘里 석가문불제자 ○○씨 진 사 釋加文佛弟子 ○○氏 鎭 仕 위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位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용양장군 요동태수 龍讓將軍 遼東太守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使 鎭 연 칠십칠 훙 언이 영락 십팔년 年 七十七 薨 焉以 永樂 十八年 태세재 무신 십이월 신유삭 太歲 在 戊申 十二月 辛酉朔 을유 성천 이옥궤 주공상지 乙酉 成遷 移玉櫃 周公相地 공자택일 문제선시--이하 생략 孔子擇日 文帝選時------下略 묘주인공 “진”이 유주자사를 지낼 때에 연군태수, 범양내사,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무명태수 등 13군태수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소재지까지 계현?縣의 연국성燕國城(=전연국 중기 수도)으로 벽화에 기록되었고, 벽화 행렬도에는 전통적으로 유주자사 치소인 계현의 현령縣令도 등장한다. 그의 관직 기록 중 최상위에 고구려 국소대형 좌장군이 있어서 그가 말년에 고구려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유주의 관리로서 장사長史, 사마司馬 등을 임명하는 그림이 있는데, [양서梁書]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처음 장사長史를 두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진”이 죽은 408년까지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존재했어야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고구려 유주자사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광개토왕 시대 사건이라면 [광개토왕 비문]에 이 찬란한 업적이 반드시 기록되어야하는데, 고구려인이 적은 현실에는 비문에 그와 관련한 아무 기록이 없으므로 광개토왕 시대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둘째로 당시 중국의 사정을 보면 유주 북경北京에는 389년 4월 후연국의 모용성盛이 들어가 계성?城(유주자사 치소, 한때 선비족 전연국의 수도였었으나 385년 2월 불탔다.)을 복원하고 지켰고 그후 유주는 401년경에 탁발씨의 북위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고구려와 별 인연이 없었다. 따라서 진이 유주자사를 지낸 것은 광개토왕 이전이고, 당시는 고구려인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백제 본토에서는 384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신대왕을 폐위하고, 침류대왕의 서형庶兄인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이 즉위하였다. 침류대왕은 이 당시에 지금의 산동반도 래주萊州의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를 거쳐서, 지금의 청도시靑島市인 성양군城陽郡, [신찬성씨록]에 백제국 벽류왕이 기록되어 있고, 出自百濟國避流王也 그 후예는 광정련廣井連인데 벽려혼의 도읍이 바로 청주 광고성廣固城이었다.
이때 침류대왕이 당시 동청주東靑州인 산동반도 청도靑島에 백제대왕百濟大王으로서 출정나와 있었기에, 백제 본토 내부에서 진사대왕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고, 또 391년 광개토왕자가 백제 본토를 침탈하는 빌미를 주었다.
391년 진사대왕辰斯大王(346~395)은 광개토대왕에게 패전하고, 급히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은 백제에 구원병을 보낸 대신에, 진사대왕을 잡아 일본으로 보내고, 근구수대왕의 아들 아신대왕을 다시 백제대왕으로 세운다.
[일본서기]에서 진사대왕이 왜군에게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宿彌,?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王而歸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346~395)로 나온다. [일본서기]에서는 침류대왕이 그를 죽인 곳이 고라考羅의 나루터였다. 여기서는 진사왕을 참수하지 못하고 익사시킨 것에 대해 한탄하는 침류대왕의 노래가 적혀있고 이때 부왕을 생각하여 같은 부왕의 자식인 진사왕을 베지 못하여 이를 재궁단梓弓檀이라는 나무에 비유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이니 역시 가라로 읽었을 것이고 가라신사辛國神社의 유래가 된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394년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일본에서 서거하고 396년에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본토를 쳐서 백제 한산 수도가 있던 대동강 이북을 점령한다.
이때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서거한 394년부터 396년까지 일본은 3년간 천황 자리가 비어있었다. 396년 침류대왕은 응신천황의 장자이자, 침류대왕의 형왕인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에게 천황자리를 승계토록 조치한다. 한편 침류대왕枕流大王은 396년 고구려의 백제 침략에 보복하기 위하여, 왜군을 총동원하여 399년에 신라를 쳤다. [광개토호태왕비문 9년]
그러나 바로 그 때, 399년 7월에, 중국 산동반도에서는 선비족 남연南燕 황제 모용덕의 침략을 받아서 산동반도를 선비족에게 다 빼앗기고, 산동반도 청주를 지키던 백제장수 벽려혼은 외롭게 전사하였다. 침류대왕은 산동의 벽려혼과 백제군을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399년 가을이었다. 399년 가을 침류대왕은 중국 땅에 다시 들어가서 침류소석枕流漱石(=枕石漱流 개울물에 씻기는 돌을 베고 자는 은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래 떠돌지 않았으니 100일도 지나지 않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5년만에 성공한다. 침류대왕은 그 유뢰지의 휘하에 응모應募하여, 참군사參軍事가 되는데, 유우劉裕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당시 참군사는 의병대장 같은 격이라서 정규 병력을 내주지 않았고, 그 휘하에 그를 따르던 수십명 가신, 친위대가 있었을 뿐이다.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는 363년생으로 칠지도에 나타난 왜왕기倭王奇와 같은 인물이었다. 유유의 아명은 바로 기노寄奴였다. [송서 본기]에는 유유劉裕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후손이라고 줄줄이 족보를 엮어서 기록했는데, 이는 조작이거나 남의 족보를 빌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동시대 북조北朝의 정사正史인 [위서魏書]에는 섬오랑캐島夷 유유劉裕의 출신 근본을 모른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위서魏書》에서 유유의 수식어가 섬오랑캐 도이島夷 유유劉裕다. 《위서열전도이전魏書列傳島夷傳》이 바로 송나라 고조 유유를 위한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해외 만황의 오랑캐 종족海外蠻荒的種族을 의미한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송나라 때 도이島夷에 대해서 백제에 속한 왜인으로 설명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왜국은 측천무후 때에 일본국으로 개명했다. 백제 남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산다. 백여 소국인데 이들이 양주揚州(동진의 수도)의 동쪽으로서 도이島夷라고 한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又倭國,武皇后改曰日本國,在百濟南,隔海依島而居,凡百餘小國.此皆揚州之東島夷也.按:東南之夷草服葛越,焦竹之屬,越?苧祁也.
북조의 정사인 《위서》에 의하면 유유는 36세까지 미투리, 즉 짚신을 만들어 팔 정도로 가난했고, 그런데 짚신장수 격에 맞지 않게 도박을 좋아하여 무려 3만전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북위서]에 나타난대로 363년부터 399년 12월까지, 태어나서 무려 36년 동안 오로지 중국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짚신을 만들어 팔고, 말도 안되게 3만전이나 빚을 진 거액 도박이나 하던 건달이었다면, 36세에 느닷없이 수십명의 정병精兵을 데리고 전장에 나타나서 일당천의 괴력적 무용을 선보이고, 수천명의 적을 물리치고 게다가 높은 학식이 필요한 하비군 태수(왕)까지 399년 12월 전투 한번으로 곧바로 임명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후로 단 5년만에 동진東晋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도 없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유는 수십인을 데리고 정찰하다가 수천인의 적군을 만나 즉시로 공격하니, 따르던 부하들은 다 죽고 유유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적들이 절벽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유유는 분투하여 장검을 휘둘러서 몇명을 죽이고 다시 기어올라와서 고함치며 추격하니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유는 쫓아가서 계속 적들을 많이 죽였는데 본부의 유경선이 유유가 돌아오지 않으니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나서서, 유유가 수천인의 적을 홀로 추격하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여 부대로서 적들을 쳐서 대파하여 수천명의 적을 베었다. 使將數十人?賊。遇賊數千人,?迎擊之,從者皆死,裕墜岸下。賊臨岸欲下,裕奮長刀仰斫殺數人,乃得登岸,仍大呼逐之,賊皆走,裕所殺傷甚?。劉敬宣怪裕久不返,引兵尋之,見裕獨驅數千人,鹹共歎息。因進擊賊,大破之,斬獲千餘人”
침류대왕은 남연국 선비족의 땅이 된 산동반도에 급히 왔다가 선비군에 밀려서 동진 땅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침류대왕은 이름도 유유로 바꾸고, 방탕하다가 동진 장수 유뢰지의 진영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침류대왕은 중국식 이름인 유유劉裕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하여, 399년 12월 그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지 단 5년 2개월만에, 405년 1월, 동진의 수도를 강탈했던 환현桓玄의 난을 제압하였다. 유뢰지는 이미 환현에게 죽었고 도성에서 쫓겨났던 동진황제를 수도 건강建康에 복귀시키면서 동진의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겸 9주제군사九州諸軍事 겸 2주자사二州刺史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5년후, 선비족 남연국을 멸망시켜 청주를 되찾고 벽려혼의 복수를 한다. 송고조 유유의 뒤를 이은 18세의 소제少帝는 장부인張夫人의 소생이었다. 2대 황제인 소제少帝가 사치하여 궁궐에 호수를 만들고 배를 띄어서 그 안에서 향락을 즐길 때에, 성정이 지나치게 포악하다고 즉위 3년만인 424년에 신하들이 폐위하여 내쫓고, 동진 황제 공제의 딸이 유유에게 시집와서 낳은 문제文帝를 즉위시킨다.
이때 황태후 장부인은 황제 소제를 폐하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문제를 황제로 세운 대궐안의 권력자였지만, 스스로 궁궐을 나가버려서 동해안 오군吳郡으로 갔다가 2년후 사라진다. 백제, 혹은 왜국으로 건너가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426년에 죽었다는 그녀의 나이조차 기록이 없고, 능도 만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으니 죽은 나이를 기록할 수 없고 능도 만들 수 없었고 문제는 찾지 않았다.
송나라에 유유가 등장한 이후로 왜국은 갑자기 중국과 끊어졌던 교류를 되살려나가니 이때 중국 역사에 왜국이 다시 상세하게 등장한다. 이때, 왜국의 왜5왕이 교류한 중국 땅은 [일본서기]에서 항상 오吳나라였다. 즉 장부인이 머물던 오군吳郡이 강좌江左의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왜5왕倭五王은 왜찬왕倭讚王, 왜진왕倭珍王, 왜제왕倭濟王, 왜흥왕倭興王, 왜무왕倭武王 이다. 또한 백제는 송나라 문제의 원가력元嘉曆을 받아들여 사용한다. 백제가 송나라 원가력을 받아들인 것은 송나라의 연방 국가가 되는 것이다.
전후좌우 정황은 송나라 고조가 왜기왕이고 우치천황이고 백제 침류대왕인데, 백제 장수 벽려혼이 중국 산동 청주에서 제왕이 되었어도 실패한 것이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지, 혹은 왜구질을 싫어하는 중국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어서인지, 침류대왕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족보로 혈통을 꾸며서 중국을 통치하고, 스스로 백제왕이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송나라를 자신의 후예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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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인간/인류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