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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서일지 (2024.06.04~06.25)*
6월 4일 화요일
도서관은 집, 집은 책 읽는 학교
1
조그만 빨간 배낭을 어깨에 메고 도서관에 가기 위해 화창한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는데 자신을 다섯 살이라고 손바닥을 벌린 꼬마가 어디 나들이를 가는지 같이 걸어오던 가족 앞으로 갑자기 뛰어나오며 나에게 외친다.
-가방 메고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야?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애는 한 아파트에 같이 사는 줄은 이제 짐작하지만 사실 생판 모르는 낯선 아이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다는 건 저런 것을 말할 게다 싶어 다시 한 번 꼬마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손을 들어 반갑게 흔들어 주었다.
2
도서관은 맑고 화창한 날씨에 걸맞게 1층 현관을 지나 있는 깨끗하고 조그만 로비부터 환하고 밝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누구나 자리에 앉아 조용히 독서에 빠지고 싶게 모두를 늘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번 달에는 조금 욕심을 부려 많은 책을 빌려본다. 4권의 시집을 필두로 주섬주섬 가방에 책을 담다보니 어느새 17권이다. 빌려오면 늘 같이 읽는 아내도 배려해야 한다.
빌려온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60조각의 비가》, 이선영
-《뿌리에 관한 비망록》, 손종호
-《지구 특파원 보고서》, 손나래
-《캣콜링》, 이소호
-《찻집》 라오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2》, 무라카미 하루키
-《검은 책 1, 2》, 오르한 파묵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스탕달
-《부적 1, 2》, 스티븐 킹 & 피터 스트라우브
-《쾌락독서》, 문유석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케이트 커크패트릭
-《미치도록 잡고 싶다》, 정락인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주영하
-《먹보 여왕》, 애니 그레이
3주 안에 빌려온 책 17권 모두를 읽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낚시를 하듯 손맛에 이끌리는 대로 책을 집어 읽을 예정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 3주 후면 어느 정도 읽었는지 수확이 나올 것이다.
그 수확의 질과 양은 그 때 그 때 기록되는 독서일지(수확일지?)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겠다. 독서일지를 적는 이유는 자신과 일상에서 어느 정도 긴장을 유지할 필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무엇보다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신념이 더 강하겠다.
이제 나도 내일 모레면 육십이다. 어릴 적 성장과 공부에 여념이 없던 소년과 청소년기,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생활에 매진했던 중, 장년을 거쳐 이제 인생의 수확이 한창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할 노년으로 입성하게 된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내 남은 시간동안 내 스스로가 하고 싶어 하고, 원하는 일이나 취미에 남은 열정을 바치며 향유하고 싶다.
책을 빌려서는 한편으로는 배낭에 넣고, 넘칠 경우 필요할 것 같아 추가로 들고 간 하얀 장바구니에 몇 권의 책을 넣어 한편으로 메고, 한편으로는 손에 덜렁거리며 들고 오다보니 오후 운동 길에 흔히 보게 되는 배낭과 신발주머니를 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는 꼭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다.
해서 앞으로 한 3주간 집은 책 읽는 학교가 될 것이다.
긴 실업기간 중 오랜만에
맥주와 튀긴 통닭을 먹는 오후
1
오전에 장모님이 진지하게 다녀가신 후
아내는 얼마 전 저녁 운동 중 진지하게 생각했던 치맥을
통 크게 서둘러 추진 한다
2
얼른 카드를 받아들고
먼저 가장 싼 병맥주를 두 병 사고
브랜드 있는 비싼 닭 대신
그 값으로 근처 통닭 두 마리를 튀기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전혀 진지하지 않다
3
이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겠다는 선언에
원래 두었다가 내일 먹으려 했던
한 마리마저 게눈 감추 듯 먹어치우고
안주와 균형이 맞지 않아 남았던
싸구려 맥주마저 깨끗하게 순식간에 다 비우자
세계에는 갑자기 종말이 찾아온다
4
원래는 무료했을 오후
저녁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세계는 적막 속으로 한없이 침잠하고
새삼
낮 동안의 그 모든 번잡스러움에
그만 종말을 느꼈던 것이다
6월 5일 수요일
사유(思惟)하는 삶을 위한 지난(至難)한 여정(旅程)
1
독서를 하다보면 책을 읽는 행위에 몰두해 그냥 활자를 읽는 수준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다 읽고 나도 무엇을 읽었는지,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등에 대해서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책을 읽는다.
‘케이트 커크패트릭’의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을 읽는다. 철학자인 ‘보부아르’의 철학적인 내용을 놓고 이해를 구하는 글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여러 각도로 짚어가며 보여주는 전기적 형식의 글이어서 작가의 글의 진행 방향을 짚어준 머리말을 지나가자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2
보부아르는 학생시절부터 공부를 잘 했던, 그것도 아주 잘 했던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으로 그녀가 학생 때부터 꾸준히 써 온 일기를 들 수 있다. 그녀의 일기는 본인 자신이 후일 문학 작품이나 철학적 논문을 쓰는 기본 자료로 활용되는데, 뿐만 아니라 후일 그녀의 전기를 쓸 작가들에게도 그녀를 분석하고 진정한 자아의 그녀에게 다가서기 위한 방법으로서 일기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방향이나 의미와 좀 다를 수 있는 부분으로 책에 실린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을 보노라면 그녀의 얼굴에 서린 총기와 미모가 보통 수준 이상이었음에 은밀히 감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
…… 《제2의 성》은 “사랑에 빠진 여성”, 사랑하는 남자를 인생의 중심에 둔 나머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사랑을 하는 여성은 자신의 판단을 저버리면서까지 매사를 사랑하는 이의 눈을 통해서 보려하고 그 사람의 독서, 미술, 음악 취향을 따라간다. 그 사람이 함께 있고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면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 여성은 오로지 그의 생각, 그의 친구, 그의 의견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 가치에 조건이 붙는 것처럼, 남자에게 사랑받아야만 가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사람이 “우리”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녀에게 더 큰 행복은 없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의 일부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라고 할 때 그녀는 그와 연결되고 동일시된다. 그의 특권을 공유하고 그와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린다.
(본문 6장 자기만의 방, 중에서)
한국의 여류 소설작가 박경리 선생은 인간의 삶을 우주적 큰 맥락에서 자손을 낳아 기르는 과정인 ‘양육’이라고 보았던 시각과는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4
사르트르는 경험을 살아내는 대신 글을 쓰려 했고, 그 점이 보부아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에 대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거슬렸다. (본문 6장 자기만의 방, 중에서)
당대 프랑스를 대표했던 유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였고, 계약결혼으로 평생을 함께한 두 사람의 시각차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5
‘사유하는 삶’에 대한 강렬한 신념으로 일찍부터 철학적인 삶에 인생을 걸기로 한 보부아르는 세간에 알려진 사르트르의 그림자가 아닌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세우려 애를 썼고, 두 사람의 잦은 토론 과정에서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가 된 사르트르의 철학적 개념형성에 지대한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실례들이 책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한다.
6월 6일 목요일
여러 종류의 기록물이 가지는 의미
1
-케이트 커크패트릭의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을 읽어나가며
아내와 저녁 운동이 서서히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체중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얼마 안 있으면 60kg대로 진입할 것 같다. 운동량이 몸속에 누적되어 가는 지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전날 노동을 한 것처럼 무겁고 달착지근하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체중을 재고 달력에 다소 변동은 있지만 줄어가는 체중을 적고, 확인하는 기쁨도 만만치 않게 쏠쏠하다.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을 읽다보면 보부아르의 ‘폴리아모리적’이고 ‘양성애’적인 애정행각에 염증이 치민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신념에 입각한 처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유가 있는 철학적인 삶이란 기존의 관습과 진리의 체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한때 역사의 지각변동과 같은 대혁명을 거친 나라에서 치룬,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에 대한 세계적 반응이 센세이셔널 할 정도로 폭풍 같은데, 그런 역사적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그 같은 신념에 입각한 삶을 유지하기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고, 과연 가능할까 싶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얼마 전 읽은 ‘로라 콜먼’의 《나와 퓨마의 날들》이 언뜻 떠오른다. 그녀가 처음 볼리비아의 동물보호 환경단체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부터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관해 책을 쓰게 되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 말이다.
‘보부아르’가 생전에 기록물로 남겨둔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어릴 적부터 써 온 일기, 사르트르를 비롯한 그의 연인들과 오랜 시간 주고받은 각종 편지, 그리고 그녀가 집필한 각종 철학 관련 논문과 소설 작품들 등등. 조선시대 왕들이 사간원을 시켜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해서 문서화시켜 놓은 역사적 행위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그건 어쩌면 자신도 지배당할 수 있는 일상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종의 정신적 안전장치와도 같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일상은 역사가 될 수 있고, 특별한 모험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이 세계를 마음껏 유린하는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후일과 후세를 겨냥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 같은 삶을.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그것도 현격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도 그런 짜릿한 모험과 일상을 연출할 수 있고, 무한하고도 특별한 경험을 누릴 자유를 획득한다. 지금의 통신 혁명으로 이룬 빛과 같은 속도, 전 세계인들의 빠른 교류와 호응,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성취감과 희열을,
가능성을 요즘 세상은 날마다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2
-손나래의 시집, 《지구 특파원 보고서》에서
비정규직
목이 잘려 천 년을 살아온
부처를 생각해 본다
미처 부처가 되지 못해도
목이 잘린 사람들
걸어 다니고 있다
지하철과 버스터미널에도
목에 풀칠을 단단히 하지 못한 사람
목이 떨어져 피를 흘린다
이차돈의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았다는데
요즘 사람들
검은 피가 흘러내린다
검은 넥타이가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넥타이들이
목을 찾아다닌다
새로운 목에 자세를 고쳐 매기 위하여
목 잘린 닭이 피를 뿜으며
방향감각을 모르듯
공원과 광장을 찾아다니며
수화를 하고 있다
<斷想> 흔히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두고 ‘목이 잘렸다’고 말한다. 여느 사람처럼 목에 풀칠을 단단히 하지 못해 잘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목 없는 사람들이 잘려서 잃어버린 목을 찾아 지하철과 버스터미널과 공원과 광장을 헤매고 있다. 그것도 목이 없어 수화를 하며....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세상을 구원하고 중생을 제도한 부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삼국시대 이차돈처럼 혼탁스러운 세상을 구원하고자 순교한 것처럼, 직장을 잃은 채 세상을 배회하는 비정규직들은 삶의 밑바닥에서 갖은 희생을 감수하는 엄연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에게 사랑의 따스한 시선과 관심을 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3
물을 마시며 부엌으로 난 조그만 창을 바라보니 고속도로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차량들의 물결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때 시간이 오전 10시 무렵인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내려가서 휴일이 끝나는 오늘 안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냐, 내일이 금요일이라 징검다리에 연차를 쓰면 일요일까지 나흘을 쉴 수 있으니 어쩌면 모처럼 푹 쉴 계획을 짠 차량의 행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차량이 고속도로를 꽉 메운 채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가족이 그렇게 계획했을까. 이번에는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약 5백 페이지에 달하는 케이트 커크패트릭이 쓴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을 끈질기게 읽는다.
6월 7일 금요일
장모님, 여자 귀한 줄 알어!
1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케이트 커크패트릭 지음/이세진 옮김/교양인 2021년판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becoming)
현대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여성 철학자이자 문학 작가였고,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전 세계가 주목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과 사회운동 방면으로 평생 맹활약을 펼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일생을 탁월하게 서술한 전기(傳記)다.
또래보다 총명했던 그의 유년 시절과 ‘철학’이라는 학문을 평생의 지기로 선택하고, 진학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시간을 거쳐 비록 정식 결혼을 해서 이룬 것은 아니지만 평생 그의 가족처럼 지내게 되는 사르트르, 올가, 보스트, 란즈만 등의 지기들을 사귀는 과정들을 연대기 순으로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그가 집필해서 발간한 각종 서적-사상, 문학 작품, 수필, 자서전, 지인들과 교류한 각종 편지, 일기 등-들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들이 이 책에서 아주 세세하게 드러나 독자들의 깊은 이해를 수반하게 도와준다.
이 책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철학사상적으로 특출한 여성의 ‘사랑의 철학적 실험’이라는 미명하에 실행한 복잡한 애정편력사이기도 하다. ‘보부아르’에게 젊은 시절 ‘결혼은 일종의 함정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사상에 힘입어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2년간의 계약 결혼’을 성사시켜 시작한 부부지간은 계속 계약을 연장해 사르트르가 지병으로 보부아르 곁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 이어지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오늘날의 법적 시각에서 보면 ‘사실혼’이라고 판정해도 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녀의 다소 문란하고 파격적이며, 복잡한 애정 편력은 그녀가 《제2의 성》과 같은 탁월한 철학적 사상과 그에 걸맞은 저서를 발간할 때마다 사회 각층의 보수적이고 주류 엘리트인 남성들로부터, 심지어는 그가 대변하려고 했던 여성들로부터도 격렬한 저항과 비난을 받게 하는 원인제공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의 《제2의 성》과 문학작품 《레 망다랭》같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책은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철학자로서 그녀가 오래 전부터 그 기본 개념에 대해 사유해 왔고, 먼저 제기하기도 했던, 그의 사상적 일생의 배우자였던 사르트르와도 틈만 나면 즐겨 토론했던 ‘대자적 시각’과 ‘대타적 시각’이라는 개념은 사르트르를 거쳐 그 후 20세기 철학과 문학계를 풍미했던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바탕이 된다.
이런 그녀의 날카롭고 명민한 지성은 당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여성 인권에 대해 눈을 뜨게 했고, 마침내 《제2의 성》을 출간함으로서 여성해방 운동의 원조를 이룸과 동시에 1970년대부터 프랑스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페미니즘’의 선봉자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보부아르의 일생은 철학적으로 무장하고 실천적 삶을 실험적으로 살아낸 투사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제2의 성》에서도 나타나지만 과거 관습과 인습의 수동적 삶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삶’을 살고자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에 과감하게 저항하며 개선시키는 투쟁의 점철이었다. 그녀의 평생에 걸친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과 이 책 전 부분에 걸쳐서 드러나는, 다소 문란하고 복잡한 애정편력은 그런 확고한 신념의 체계 위에서 시도된 혁명적 생(生)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보부아르의 인생은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전 세계의 많은 나라를 공적인 일로 방문하기도 했지만, 틈만 나면 사르트르와 혹은 다른 연인과 쿠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동유럽 등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여행을 일상화시켜 즐기며 살았던 여성이다.
그녀는 노년에 이르러 발간한 책들이 연일 베스트셀러가 되어 거액의 돈이 수중에 들어오자 고향 근처에 집을 사서 일정 기간 안주하기도 했지만 인생의 태반을 일정한 주거지 없이 호텔을 전전하며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던 그야말로 ‘나그네’적인 여정을 보낸 인물이다. 이 책에서 저자 ‘케이트’가 밝혀낸 “삶에 대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그녀의 신념이 이런 삶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내가 철학자가 아니란는 말은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열심히 공부해 왔고, 철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철학을 가르쳤고, 철학에 물들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나도 여전히 철학자입니다. 내 책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게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내 책에서 그 방식을 제거하려야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책, 제16장 ‘보부아르의 유산’ 중에서)
남녀의 성적 차별을 넘어 사유(思惟)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절대적으로 살고자했던 보부아르의 일생을 축약하는 본인의 글이다.
2
오빠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이소호
뭘말하고싶어?아프면죽이나끊여먹지왜나한테전화해?나이제욕하는것도지쳐너욕하고싶은거참고있는거지그런거지뭐가두려워?나는내모든것을나눠줬는데넌만족할줄을몰라이해서난우울한여자는싫어야징징짜지말고똑바로말해그리고말하기전에다시한번생각좀해봐내가이렇게무식한여자랑사귀었었나?너똑똑하잖아그런것아니잖아대화가되잖아그러니까뭘아는것처럼행동하지마오빠가차근차근알려줄게다널위한거야야너나못믿는거야?농담인데정색을하고그래전에도말했지만니가기세고예민해서우리연애까지불행해진거야다른남자였으면진작헤어졌겠다이번에도봐줬다내가다음부터그러지마정힘들면술마시고잠이나자너그런거잘하잖아어차피너곧풀릴건데지금그냥기분좋게끊으면안돼?아까너입은옷못봐주겠더라돈생기면옷이나한벌사라보세말고브랜드있는걸로나안쪽팔리게야나니까이런소리하는거야나만한남자어디가서못만나오빠는변한게아니라니가변한거야초반엔꾸미는척이라도하더니요즘엔긴장도안하나봐아무튼난바빠서그래그것도이해못해?일없으면취미를가지던가티비를봐나만쳐다보지말고난생산적인여자가좋더라오늘뭘했는지알아서뭐하게그만좀물어봐지금의심하는거야?집착하는것도아니고니가이럴때마다미칠거같아이러니까네가그동안남자들한테차인거야나니까지금까지사귀는거야서운하게생각하지마연인사이에이런말도못해?우린이세상누구보다제일가까운사이잖아너생각하는건나뿐이야잊지마그러니까오빠한테잘해
(이소호 시집, 《켓콜링》에서)
<단상(斷想)>
이 시(詩) 안에서 한마디라도 자신이 이성간에 상대방에게 사용한 적이 있다면 이 시간부로 반성하자. 말이란 대부분 자라면서 주변에서 배우거나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일 테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먼저 당신의 사랑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당신 자신을 상처 낼 거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성간의 사랑에서 사용되는 말은 아무리 세심해도 넘침이 없다는 것을, 궁극의 행복을 위한 꽃길이라는 것도.
6월 10일 월요일
작가의 감수성, 독자의 감수성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1》을 다 읽고,
이제 2권을 앞에 두고
1
독서 중에 생긴 이야기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 확인한다. 극중 ‘마미야 중위’가 주인공인 ‘오카다’에게 만주 관동군에 근무하던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이 작품 책 1권은 대체로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를 이끌고 가는 미지의 인물들이 주인공 오카다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과거의 이야기가 많다. 또한 아직 예측하기 어려운 결말과 지금까지의 기묘하고도 신비한 분위기 형성-무라카미 작품 대부분의 특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마미야 중위’가 작품 속에서 만주에 파견되었던 당시는 1937년이라고 했으며, 당시 러시아는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며 로마노프 봉건왕조가 몰락하고, 스탈린이 레닌의 사후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즉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명을 변경해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1권 말미에 등장하는 소련군 장교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느새 러시아인, 러시아 장교로 그 명칭이 변하더니 계속 러시아 장교와 소련 장교가 번갈아 나오고 나중에는 러시아 장교로 내용 속에서 퇴장한다.
이 부분에 의문이 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있어 이런 부분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 국명 러시아와 소련의 의미는 달라도 아주 다르다. 그러나 달리 다른 시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텐션이 높은 주말을 보내고 난 월요일 오전의 반쯤 졸리는 눈으로 읽어가던 중에 이런 구별이 발견되고 ‘내가 잘못 읽었나?’싶어 소련군 장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는 것은, 내용 전개에는 별 문제가 없는 사소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극중 인물인 ‘마미야 중위’라는 작품 속의 나이는 칠십대 후반의 노인이 하는 매사에 부정확할 나이이고 의미만 전달되면 대충 말하는 노인의 말씨라고, 그것도 실제가 아닌 픽션 상의 논조라고 이해해도 되련만 갑자기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뛰어난 소설 작가가 그런 사소한 말씨의 차이에서 오는 극중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을까 싶은 지적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다. 러시아 장교와 소련 장교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명칭이 풍기는 이미지가 엄연히 다른 것 아닐까.
작가는 왜 그랬는지, 의도가 있었던 건지, 몰랐던 건지, 내가 별거 아닌 일로 뭔가 노리고 일으킨 자의식의 도발인지, 결국 문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나에게 있어서나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는 건지 지금도 판단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외 다른 유감은 조금도 없음)
2
함께 TV보는 치과
휴게실에서 잠시 대기 중에
리모컨을 들고 TV를 트니
저번 주 틀어서 시청했던
뉴스 채널이 그대로 나온다
이번에는 그 시간대에 나오는
교양프로로 채널을 돌린다
꽃으로 예쁘게 우린 차를
남녀가 모여앉아서 점잖게 마시고
덕유산 꼭대기 향적봉에선
가져간 라면을 남녀가 즐겁게 먹는다
늙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온 또래의 중년 여성
들어서자 다가와 앉는 또 하나의 중년 여성
치료가 끝나 나온 아내도 중년 여성
우리는 모두 중년 이상의 나이
아내와 집에서 하듯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그들과 같이 병원 TV를 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같.은. TV를 보고 있다
3
신정호수에서
아내와 신정호수가 지척에서 보이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젊은 남녀가 양산을 쓴 채 지나가고
유독 두꺼운 입술이 닮은 가족들이 지나가고
꽉 낀 짧은 스커트차림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지나가고
맞은 편 창공의 푸른 스크린에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또 연방 지나간다
그 뒤로 유모차에 개를 태운 남녀가 지나가고
늙은 남자와 여자가 개를 산책시키며 지나가고
호수 위로 놀러 나온 일가족을 태운 보트가 지나가고
신록의 숲으로 삼면에 빽빽이 쌓아올린 산등성이가
호수 위로 새들을 날려 보낸다
아내는 잠이 온다며 금새 누워버리고
잔디는 얇은 바람에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호수는 반짝이는 무수히 작은 빛들로
푸른 하늘에 정지한 뭉게구름같이
하얗게 시야에 찍힌다
종종 토요일 오후면 날로 꾸는 꿈이다
이 모든 것들은
4
*《찻집》*
-라오서 지음/오수경 옮김
중국 근대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담은 희곡
청조 말, 제국열강의 시대, 그리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직전의 민국 등 약 반세기에 걸친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였던 근대사를 압축했는데, 중국의 가장 일상적인 생활 문화터전이기도 찻(茶)집을 주 무대로 해서 3대에 걸친 세월 동안 일어나는 격동의 역사적 변화를 연극으로 담은 작품이다.
권력자인 관료의 부정부패, 중국에서 수탈과 억압을 일삼는 서양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중국 각지 군벌들의 장기간에 걸친 세력다툼, 이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농촌의 농민들의 각종 생활고와 도시로의 무작정 이주에 따른 이중고, 이때 농민들은 어린 자식들을 부유층의 노예나 첩으로 팔아버리는 비인간적인 행위들로 가정과 사회는 극도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무엇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거나 교훈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을 도입해 중국 근대사에서 일어난 고되고 격렬했던 민중들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서, 과연 무슨 일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졌는지 찻집을 운영하는 왕씨 일가와 주변 인물의 3대에 걸친 역사를 ‘찻집’이라는 틀 안에 압축해서 관객에게 고스란히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연극에서 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이 기간의 중국의 변화상을 알기 위해 책을 통하려 든다면 역사책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수많은 책을 읽어도 모자랄 판이다.
평화로운 서민들의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실 거의 변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2막, 3막으로 넘어가면서 찻집의 내부 시설이나 벽에 붙여진 각종 문구나 장식품의 변화, 등장인물들의 대화내용의 변화 등을 통해서 각자의 인생에 서서히 그러나 결과적으로 많은 변화가 찾아든 것을 인생말년에 비로소 발견하는 것처럼, 역사에 있어서 변화의 거대한 물결을 연극을 통해서 독자들은 비로소 폐부 깊숙이 호흡하듯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인생의 변화처럼 역사의 변화를 읽어내며 각자의 방식대로 교훈이나 경험치를 가중하고 새로운 인식을 덧붙이는 계기가 된다.
6월 11일 화요일
무엇하나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作, 《태엽 감는 새 연대기·2》의 본문 중에서
1
슬슬 주변이 뜨거운 가마솥처럼 더워질 조짐이다. 계절적으로 여름에 들어선 만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주말만 해도 베란다 방향으로 창문을 열어놓으면 제법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체력 소비가 그만큼 많아질 것에 대비해야 할 것 같다.
낮에는 기어코 책을 대출한 도서관에 전화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이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인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은 1, 2권뿐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혹시 3권은 도서관에서 다른 회원에게 대출한 건 아닐까요?
-죄송해요, 그건 아니고. 구매할 때 출판사에서 3권이 출간되지 않아 누락된 것 같아요.
-그게 다 무슨 소립니까. 구매하려면 제대로 알아보고 3권 모두를 구입했어야지…
볼멘소리를 도서관 문헌정보팀에 하니 조만간 구매해서 열람실에 비치하도록 하겠단다.
2
책을 읽을 때 FM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을 틀어서 함께 들으면 묘한 궁합이 일어난다. 머리가 상쾌해지며 책이든 음악이든 작품 이해가 쌍방 간에 경쾌하게 이루어진다.
때마침 아나운서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개하며 최근 클래식 음악 애호가답게 자신의 집에 소장 중인 클래식 음악을 작품별로 감상을 기록한 에세이를 발간했다는 청아한 멘트가 흘러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군(作品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특별한 단어가 줄곧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기묘한’이다.
만일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기묘한’ 소설가라고 할 것이다. 그는 어쩌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인 현대인의 평범한 일상에서 ‘기묘한 정경’을 찾아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몇 년 전에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러하거니와 그 이전에 읽은 ‘1Q84’와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 등의 작품들은 그 기묘한 줄거리 설정과 환상적 분위기로 인해 의외의 신비함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베스트셀러들이다.
일전에 근무하던 사무실의 벽에는 이 작품에서 등장하고, ‘기사단장 죽이기’에 연이어 등장하는 ‘우물’이 수묵화로 그려져 걸려있었는데, 근무 중 잠시 눈을 돌려 영감을 얻거나 상상을 통한 휴식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비단 이 우물뿐 아니라 빈집, 고양이 등 무라카미는 일상의 평범한 생활각처 도구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작품을 진행시키기로 유명한 작가가 아닌가.
이제 2편도 다 읽었다. 마지막 3권을 다 읽어야 내내 기이하게 전개되며 여전히 결말에 대한 추리가 불가능한, 기묘한 줄거리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인데 당장 3권이 없어 마무리를 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다.
3
제목에 나오는 ‘태엽 감는 새’란 태엽을 감는 소리인 ‘끼익’, ‘끼익’ 하는 소리로 우는 새에서 나온 것으로, 작품 중에서 주인공 ‘오카다’조차 실제로 그 새를 본 것은 아니고 그 소리를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새가 말 그대로 태엽 감듯이 민가에 날아와 울어 젖힘으로서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고 여기고 있다. 날씨가 날로 더워지고 있다. ‘태엽 감는 새’같은 원동력이 주변에 좀 있어야 지치지 않고 여름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6월 12일 수요일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누리다
-스티븐 킹, 피터 스트라우브 작 《부적·1》을 읽으며
1
-무서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여기가 세상의 끝인 걸까, 그런 걸까
(이 책 《부적·1》의 본문 중에서)
활짝 열어 놓은 창밖으로 파란 하늘의 정경과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과학이 발달되어 지구가 둥글다고 판명되기 전에는 서구의 유럽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세상에는 그 끝이 있고, 그 끝에는 절벽과 같은 낭떠러지가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며 그곳으로 여행하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천 길 낭떠러지는 아마 존재한다면 우주의 밑바닥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우주는 방사형 방향으로 지금도 팽창 중이고 밑바닥이란 개념은 없으며, 전 시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그 밑바닥은 다만 저마다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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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의 주인공 잭 소여(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주인공 톰 소여를 모델로 해서 지은 이름으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이다)는 ‘순간이동’을 통해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이제 1, 2권으로 된 작품의 도입부를 막 읽어나가는 중이다. 미지의 세계로 이동하는 방법은 병에 든 어떤 짙은 색의 액체를 마시는 순간 일어난다. 소년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 잠시 다녀온 바에 따르면 그곳에 거주하는 어떤 새는 크기가 어마어마하고 심지어 인간의 말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극중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쪽 세계를 순간이동하며 왕래가 가능한 무리가 두 부류 있다.
잭 소여가 처음에 믿지 않자 그의 눈앞에서 마술 같은 놀라운 이적을 선보인다. 그건 소설가 스티븐 킹이 다른 작품에 흔히 보여주는 일종의 창의력이 풍부한 상상력인데, 이번에는 벤치의 발밑으로 지면의 흙이 소용돌이치며 파들어 가 주인공을 빨아들일 수도 있을 구멍을 내는 것이라든지, 공중에서 뚜렷한 음성이 들려온다든지, 주인공을 납치하려는 작자들의 눈동자가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서서히 변하는 것들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정차되어 있는 자동차가 마치 위장된 덫인 것처럼 사람이 접근하면 문이 열리면서 손이 파충류처럼 길게 뻗어 나와 순식간에 차안으로 끌어당기고는 문이 닫혀버린다. 먹어치웠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차 주변에는 조금 전과 같이 정적만이 감돌고 그 차는 그대로 다음 표적을 위해 가만히 정차해 있다, 와 같은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순간이동과 관련해서는 작가의 다른 작품 《다크 타워》 같은 곳에서는 주인공 앞에 갑자기 문이 나타나며 문을 열고 통과하는 순간 다른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는 장면들이 나온다.
작가 스티븐 킹은 이런 류의 SF 소설과 또 다른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실감 넘치는 스릴러적 줄거리를 펼쳐 보임으로서 문학계에 독보적인 그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3
인간의 정신세계(精神世界)는 그 영역으로 치면 과거에 비해 아주 다양해졌다. 무엇보다도 세계 거대 종교라 일컬어지는 기독교, 회교, 유교, 불교가 있는데 이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다룬 영역이다. 과학적으로는 의학계에서 다뤄지는 일반적인 정신세계와 심리학에서 많이 다뤄지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고 한편으로 아직 미지의 학문으로 여겨지는 심령세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철학에서 다뤄지는 이데아론, 실존주의, 경험론, 합리론 등 모든 사상체계도 일종의 정신세계라고 볼 수 있다.
문학과 예술에서 다뤄지는 정신세계도 다양한데 먼저 문학에서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나 모험, 일상생활 등, 각종 상황이나 환경에서 작용하는 사고방식과 심리 상태가 있겠고, 미래 세계를 다룬 SF소설, 사이코의 복잡하고도 비정상적인 심리를 다룬 스릴러물, 원시 종교에 속하지만 현대 문화에서 엄연한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속이나 지역적 신앙을 다룬 작품군, 스티븐 킹과 같이 현재의 세계에서 3차원적으로 공간영역이 다른 곳으로의 순간이동과 같은 이적이 일어나는 가공스런 세계 등 찬찬이 시간을 두고 짚어볼라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간의 문화는 이런 식으로 따져보다 종합해보면 결과적으로 정신세계로 집결된다. 앞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보여주는 신비한 세계는 또 어떤가. 그것은 스티븐 킹처럼 인간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과 차별되는 별다른 공간이 존재하지 않아 보이지만 의식의 저 너머에서 생생한 세상으로 순식간에 넘어오는 장면이 더러 보인다. 그리고 그 넘어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흔적(멍)이 주인공의 신체(얼굴)에 남아있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초능력의 정신세계’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본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이단(異端)이라 일컬어져 한동안 금기시되던 소설(천주교의 성경도 이 무렵에는 사학(斯學)으로 취급되었다)이 중국에서 넘어와 민가에서 향유되기 전의 유교와 불교의 엄격한 경전시대에 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상상하곤 했을까.’ 하고.
6월 13일 목요일
바로 이곳이 신세계(新世界)다
-스티븐 킹, 피터 스트라우브 작, 《부적·1》을 읽어나가며
-문유석의 《독서쾌락》을 읽고
-이선영의 시집 《60조각의 비가》를 틈틈이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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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의 지금껏 독서경험을 쓴 책 《독서쾌락》은 제목에서 처음 느꼈던 이미지와는 달리 별다른 흥미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대신 말미에 쓴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꼭지에는 일부 애정이 갔다.
제목인 ‘독서쾌락’처럼 독서를 생의 오랜 친구인 습관으로 삼고 그 독서습관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생은 충분히 행복한 삶이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저자가 하고자 한 말은 말미에 씌어진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 앞에 속도감 있게 씌어 진 내용들은 그의 화려하고 흥미로운 독서편력에 다름 아닐 터다.
2
시인 ‘이선영’의 시집 《60조각의 비가》는 천천히 다가왔다. 시인들은 ‘흔히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 다가온다’라고 말한다. 이 시집도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저번 주 화요일(6월 4일)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은 손종호의 《뿌리에 관한 비망록》, 손나래의 《지구 특파원 보고서》, 이소호의 《캣콜링》의 시집 3권을 포함해서 모두 4권이었다. 그 외 소설, 희곡, 산문 등을 합해 읽을 책은 모두 17권이었다.
어찌어찌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보니 이선영의 시집은 빌려온 시집 중에서 맨 나중이었는데, 그나마 때가 되어 시집을 펼쳐들고 읽었지만 <감나무 비가>로 시작되는 첫 ‘비가’부터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 읽다 그만 덮고 말았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흐른 후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시집을 오늘 점심 식사 전 잠시 읽었는데 마음에 조금씩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비가’라고 붙은 제목의, 대부분 초반부에 수록된 시는 다 읽게 되었다.
시가 많은 부분 감성과 정서적 이미지에 호소한다면 여러 형태의 이미지로 조합된 시구들이 뇌리에 나름 호소력 있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즉,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며 해석이나 설명을 요구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경우에든 시가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이해불가인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의 감성 코드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제목에서는 ‘60조각의 비가’라고 붙여졌지만 시집 안의 시들은 초반부 <감나무의 비가>를 포함한 7수만 시 제목에서 ‘비가’라고 따라붙고 나머지는 ‘비가’라는 시어가 따라붙지 않지만, 시집 제목이나 시어에서 알 수 있듯 ‘비가(悲歌)’적 의미가 녹아들어든 작품들이 대부분(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60수’다)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감나무 비가
-이선영
저 나무가 감나무였구나, 감이 무르익었구나, 알아챈 날이 있다면
그날은 감나무를 바라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하루였으리라
어느새 감나무 아래 감을 몽땅 사서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시는
아래층 할머니의 바지런한 손길이 고마우면서도 야속한 건 왜?
감을 따자마자 감나무는 황급히 감나무이기를 멈춘다
감이 열리는 나무임을 알려 주던 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감나무는 앙상하지만 단단한 가지의 밀도 속으로 감겨들어 간다
감은 퍼뜨리는 열매가 아니라
감나무를 짙은 흑연의 침묵 속으로 잠겨 들게 하는 열매였음을
감나무는 알고도 붉은 심장 켜 단감을 빚어낸 것일까
오래 달고 있으면 제 몸에서 썩어 들어갈 감이라
가지 늘어질 새 없이 빼앗기고도 한마디 말 못하는
한 그루 감나무여, 그닥 눈썰미 있지는 않지만
이 가을 그대가 달았던 감의 마지막 관객이 있었다면 위로가 될 텐가
그대의 감이 빚은 빛나는 순간에
그대의 감을 써는 쓸쓸함을 함께 맛봐야 했던
<斷想> 세계의 안과 밖이 모두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생(生)의 숨겨진 비밀(秘密)’을 내밀하게 엿보기라도 할 태세의 시인이다.
‘동전의 양면’이라고도 볼 수 있을 이분법적으로 세상 이치를 들여다보기, 좀 더 쉽게 말해 본다면 ‘음지와 양지’나 ‘빛과 어둠’과 같은 흔히 사용되어지는 이분법적으로 세상과 세계를 일반적으로 나누어 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 두 세계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긍극적으로는 하나의 세계로 합일된다는 입체적 사고를 연상시킨다.
‘감이 빚은 빛나는 순간’과 ‘감을 써는 쓸쓸함’이 그렇고, ‘알아챈 날이 있다면’과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하루’가 그러하다. 이런 대비되는 시구는 전 연을 통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비가(悲歌)’는 결코 ‘비가(悲歌)’인 슬픈 노래만 끝나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을 여지를 남겨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시각은 우리 앞에 전 생(生)을 통해 펼쳐지는 생의 어떤 이면을 슬픈 감정을 넘어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의 이런 자세와 의지는 앞서 읽은 시집 초반부의 7수(<감나무 비가>, <이불 비가>, <피아노 비가>, <주머니 비가>, <남현동 비가>, <4월 비가>, <구름 비가>) 전체에서 뚜렷하게 지속적으로 감지되고 있다.
3
‘잭 소여’는 ‘마법 주스’를 통해서 이쪽의 ‘현실세계’와 저쪽의 아직 알 수 없는 ‘비현실적 동화 같은 환상적 세계’ 사이를 순간이동하며 왔다 갔다 한다. (‘스티븐 킹’은 이번 작품에서 ‘피터 스트라우브’라는 작가와 공동 창작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어디까지가 스티븐 킹의 상상적 영역이고 어느 부분이 또 다른 작가의 기타 영역인지 독자는 알아내기가 어렵다.)
스티븐 킹 작가(또 다른 작가 피터는 편의상 생략)가 창의력 짙은 상상으로 빚어낸 새로운 세계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잭이 ‘마법 주스’를 마시고 순간이동해간 세계에서는 퓨마를 닮은 말이 마차를 이끌고 있다. 블루베리를 닮은 거대한 과일이 있어 얼른 따먹어 봤는데 매우 달고 맛있다. 두 개만 따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영역은 정해져 있어 그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다.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 표현으로는 하느님조차 그 밖으로는 나간 일이 없다고 한다.
이 세계는 잭이 사는 현실 세계와 일대 일로 영혼들이 연결되어 있어 한 쪽 세계의 영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면 다른 쪽 세계의 영혼도 어떤 식으로든 시간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잭의 현실에서 잭의 어머니는 불치병에 걸린 상태로 입원해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병원의 진단을 무시하고 잭과 함께 도피적 여행을 다니지만, 순간이동해간 저쪽 세계에서 잭의 어머니는 병상에 누운 채 눈을 감은 채 곧 죽음을 맞이할 태세다.
문학 작품은 일단 몰입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현실의 자질구레한 일상을 한동안 잊을 정도로 작품 속에서 펼치는 세계로 빠져들어야 한다. 그런데 스티븐 킹과 같은 작품을 읽으려면 독자는 그런 몰입의 문(門)을 적어도 2개나 거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티븐 킹의 상상세계에서 영영 못 헤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작품 속에서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주인공 잭이 가지고 다니는 ‘마법 주스’를 주문처럼 언제나 현실 세계에서 챙기고 있다.
6월 14일 금요일
욕망은 온전히, 살고자하는 사람의 몫
-이선영의 시집 《60조각의 비가》을 읽으며
1
이미지들, 내 입으론 안 불어지는
-이선영
나는 내 시의 팔레트에
내 삶을 덩어리째 던져 넣지만
그들은 그들 시의 피사체에
이미지만을 던져 넣는다
팔레트는 탁하게 번져 가고
내 삶의 튜브는 쭈글쭈글해졌지만
그들의 피사체는 아직 양파 껍질 속에 있고
이미지는 그들의 렌즈 안에서 입혀지기 위해 대기 중이다
그리고 그들 삶은 다른 곳에서 동시 개봉 중이다
그것은 무적의 신권 지폐처럼 빳빳하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미지를 던져 넣고 이미지를 덧입히며
놀이처럼 뻗어 나가는 이미지의 리좀에
나는 이 비곗덩어리 육질의 삶을 덥석 들이밀었던 것이나,
이미지의 토끼적 증식에 한낱 거북이 발자국을 남긴 모양새가 되었던 것인데
이미지 대열에 편승하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서
삶을 삶으로가 아닌 삶을 이미지로, 이미지를 이미지로!
제발 삶은 삶대로 살고
시는 이미지만 물비늘처럼 반짝 건져 올려!
나는 쭈그려 앉은 저 계단참의 대걸레처럼
두 팔 가랑이 벌린 녹슨 가위처럼
줄 거 다 준 지 오래인데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이미지의 버블껌을 불어 봐!
이미지의 휘파람을 날려 봐!
아, 내 입은 버블껌도 안 되고 휘파람도 안 되고
이미지놀이 그림자놀이 불가!
자, 그러니 내 이미지는 내 살을 엷게 회 떠서 한 점씩 날리시압!
*이선영 시집, 《60조각의 비가》에서
<斷想> 이 시를 읽다보니 중학교 시절 국어 수업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오늘 배울 부분, 책 읽을 사람?”하면 “저요! 저요!”하며 너나없이 모두 책을 읽겠다며 손을 들어올린다. 책을 전 학급생에게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읽고 나면 읽은 학생에게 선생님께서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무슨 내용이냐?” 태반은 답을 못한다. 읽으면서, 더군다나 학급의 전 학생들 앞에서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추려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의 불호령은 어김없이 떨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이 작품 <이미지들, 내 입으론 안 불어지는> 또한 마찬가지다. 날 것처럼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만도 벅찬데, 고급의 철학적인 ‘이미지’가 다 웬 말인가. 글줄 깨나 읽고 철학적 사색을 하네, 시를 쓰네 하며 그것만이 삶의 정수인 듯 ‘이미지’를 내놓으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일상을 맨 땅에 헤딩하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시인 못지않게 치열하긴 마찬가지라.
소위 진보라는 이미지(?)하에 생의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며 잘난 체들 하지만 차라리 내 몸을 회 떠서 살신성인할테니! 징하기도 너무 징한 이 삶의 굿놀이의 끝판이자 막장 삶의 슬픔이여! 시 제목처럼 우리네 삶의 비가(悲歌)인 것이니.
2
생명의 본질은 욕망이다. 우주는 다른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구를 제외하곤 그 어떤 욕망도 발견할 수 없다. 욕망을 수반하지 않는 기계적 운동만 수많은 질서의 비밀을 안은 채 팽창할 뿐이다. 억겁의 시간과 손에 잡히지 않는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우주 공간 안에서 유일한 생명체로 인식되어지는 지구별은 그 자체로 고독이자 슬픔이다. 그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사유하는 그 인간이라는 종족의 유별한 고독은 지독한 슬픔이자 지독한 비가(悲歌)가 될 수밖에 없다.
6월 19일 수요일
소년판 오디세이아
-스티븐 킹 & 피터 스트라우브의 《부적·1·2》을 읽고
1
작가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서 주인공 ‘톰 소여’를 21세기로 불러와 ‘잭 소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켜 현대와 소년을 결합한 ‘소년판 오디세이아’ 작품 이름은 《부적·1·2》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책은 엄밀히 따지면 소년용보다는 성인용에 가깝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줄거리를 따라잡자면 1, 2권 합해 약 천오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작품의 양과 그 줄거리를 뒷받침하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과학적 상상력과 그 개념들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독해가 되지 않으면 줄거리에 대한 진도가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진도가 나간다 하더라도 작품 말미에 재등장하는 전편의 인물이나 배경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박 겉핧기 식’의 독서로 작품의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을 수도 있는데, 한 번 읽을 때 정독을 해서라도 매 줄거리의 정확한 독해 없이 페이지를 넘어가 버리면,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더라도 첫 번째에 볼 때 느끼는 새로움과 흥미를 놓칠 수도 있고, 솔직히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줄거리 구조상 진행 속도가 빨라-독자마다 그 속도감은 다르겠지만-적절한 속도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라 형편에 따라서 난이도도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작가적 수준에 준하는 두뇌를 필요로 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야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애초의 작품의 재미라는 목표를 달성할 것 같다.
2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중간 중간에 집필의 필요성과 작품의 복잡다단하고도 거대한 스케일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명의 작가의 협업의 결과로 나온 작품이라는 점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줄거리 전개도 엿보인다.
부적을 획득하러 주인공 소년 ‘잭’과 ‘리처드’가 해변에 위치한 ‘블랙호텔에 닿기 전 황폐한 ’포인트 베누티‘ 마을을 통과하는 긴박한 장면에서다. 마을에 들어서면 나체의 묘령의 여자가 등장하는 상가와 주택이 모여 있는 인적이 드문 것처럼 여겨지는 텅 빈 사거리 장면이 나온다.
공간 구조상 이 사거리틀 무사히 통과해야 작품 속의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종 목표물인 ‘부적’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블랙호텔 해변에 이르게 되는데, 무시무시한 뿌리를 지상에 드러내 몸을 휘감으며 주인공들의 통과를 방해하는 기괴한 나무들의 추적을 벗어나 블랙호텔이 보이는 언덕을 넘었는데, 또 다시 나체의 여자가 등장하는 상가 장면이 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처음 ‘포인트 베누티’ 마을에 등장할 때에는 둘이 걸어서 역경을 헤치며 지나간다. 하지만 그 마을을 겨우 통과하고 나서는 리처드가 힘들다고 해서 잭이 리처드를 업고 언덕을 넘게 된다. 그리고 업고 걸어 내려가는데 나체의 여자가 다시 등장하는 마을 장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언뜻 똑같은 장면을 흥미를 고조하기 위해(대단원에 다다르고 있다) 시각차를 두고 다르게 다시 전개한다면, 작가의 관점에 부흥해서 흥미진진하게 스릴 넘치는 장면을 즐기며 다시 봐 줄 수도 있겠지만 둘이 걸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닌, 한 장면이 끝난 상태에서 잭이 리처드를 등에 업었고, 업은 채로 가는데 그 마을이 다시 나온 점은 분명 작가들의 실수로 봐야한다는 것이다.(같은 장면을 시각차를 달리해서 다시 보여주는 부분은 이 책에서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두 명의 작가는 아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가 틀림없다 것은 이 작품이 두 권의 전편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소설은, 특히 스릴러나 추리 소설은 작가와의 두뇌싸움이라고. 읽는 독자는 작품의 흥미진진함에 빠져드는 것 못지않게 이런 트릭 아닌 트릭을 잡아낼 수 있는 명민함이 받쳐줄 때 작품 수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2권 제39장 <포인트 베누티>부분)
3
톰 소여가 아닌 잭 소여는 리처드 슬로트(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 톰 소여의 단짝인 허클베리핀을 연상시킨다)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부적을 획득해서 어머니의 지병인 암도 치료하고 부적에 얽혀 고통을 받거나 갈등에 얽혀있는 제반 문제들을 복수나 치료 등의 방법으로 단번에 모두 해결한다. 선이 악에 승리하는 것이다.
이 작품 기조에는 현대 과학의 총아인 물리학적 법칙들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장치로 곳곳에 설정되어 있다. 특히 잭이 작품 속 현재에서 살고 있는 미국과 잭이 수시로 드나드는 차원이 다른 ‘텔러토리’라는 세계로 순간이동하며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는 장면들은 유의해서 읽지 않으면 결국 작품 읽기를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장치들은 과거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배경으로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가 이 세상 같지 않은 신화에 나올법한 세계를 방랑하며 고향에 돌아가기까지의 모험과 분투에 나오는 장면들과 유사하다. 대신 성인 오디세우스가 아닌 톰 소여 또래의 잭 소여가 모험을 펼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이 외에도 두 명의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는 책 전편에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다. 한 번 읽어볼만한 두뇌 게임 작품이기도 하다.
6월 20일 목요일
유월 저녁 산책길의 살구
-손종호의 시집 《뿌리에 관한 비망록》을 읽으며,
-정락인의 《미치도록 잡고싶다》를 읽고,
-애니 그레이의 《먹보 여왕》을 읽으며.
1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아파트를 나서서 아내와 늘 가는 산책길로 들어서면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데 옛날식 이발소를 운영하는 아저씨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이발소 주변의 도로를 왔다갔다 왕복하는 걸음걸이가 운동의 전부다. 이발소를 지나면 4차선 큰 길이 나오며 육교가 보이는데, 육교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매년 이 맘 때면 살구나무에는 노란 살구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길가에는 아무도 관심이 갖지 않은 채 이 곳 저 곳 어지럽게 떨어지고 행인들의 발걸음에 밝힌 채 지나는 길가를 더럽히고 있었다. 재미삼아 한두 개 집어서 먹어보면 달콤한 게 침이 고일 정도였다.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살구는 변함없이 열렸지만 길은 텅 비어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살구를 보았는데, 이제 떨어진 살구는 아무 곳에도 볼 수 없다. 어제는 살구나무 위로 시선을 돌려 살펴보았지만 노란 살구는 눈에 띄지 조차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내와 걸어서 지나는 저녁 산책길에서 올해는 벌써 살구를 볼 수가 없다. 내년 이맘때는 예년처럼 풍성하게 열려 한동안 보는 재미를 주던 노란 살구를 볼 수 있을까.
2
무위삼제(無爲三題)
-손종호
1.
아침 나절 눈 큰 여치 한 마리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힌 풀밭 위에
가치독사 한 마리 한낮을 즐기고 있다.
햇빛은 그 곁에서
힘겹게 풀잎을 타고 오르는
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이며 있고
2.
흐르는 강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앞일도 내다보지 않는다.
들녘을 만나면 들녘을 적시는 강물
풀숲을 만나면 풀숲을 지나는 강물
다리를 만나면 다리 아래의 강물.
흐름 자체가 그의 삶이지만
사실은 흐르지 않고 있다
그는 그저 있을 뿐.
3.
빈 것을 채우는 것이 빈 것이며
채운 것을 비우는 것이 채운 것이라면
바람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
*손종호 시집, 《뿌리에 관한 비망록》에서
<斷想> 자연의 먹이사슬 속에는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해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대지를 적시며 도도히 흐르는 강은 흐르면서도 멈춘 듯 보인다. 어디를 지나가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탓에 그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람은 있어서 운동을 보게 하지만 그 실체는 없다.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런 것이 아닐지. 있으나 없는 것 같은 무위. 집착을 버려도 좋은.
3
*《미치도록 잡고싶다》
-정락인 지음/이다북스 2019년판
인간다운 삶의 완성을 향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사건을 추적해서 모아놓은 책이다. 기자 출신의 작가는 이렇게라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한 이면에는 행여 사건의 해결을 통한 범인 검거와 아울러 죽은 영혼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은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픈 동정심과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모두가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와 기쁨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의 완성을 이루어가자는 염원일 것이다.
작가는 미제 살인사건집인 《미치도록 잡고싶다》 발간 외에도 사회의 음지에서 고통 받는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여 신문, 잡지 매체를 동원해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사례들도 첨부해 놓았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저마다 제 살기에 급급해서 남의 급박한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라며 방기하기 일쑤인데, 작가는 자신의 전업을 걸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기자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미 그가 몸담은 세계에서는 파다하게 칭찬이 자자한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자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기조에 사회를 향한 따뜻한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회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이며, 삶이 긍정적인 기운으로 퍼져나가 기쁨과 보람이 되고 일상의 모든 과정이 삶을 완성하는 길로서 작용되도록 소명을 다해 그것을 일구어나가고 있다.
미해결된 사건 하나하나를 돌아보면 기자와 같이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 대해 그 잔인함과 비열함에 피가 끓기도 하고, 가족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는 한편으론 우리 사회의 사람간의 관계를 이루는 다방면에서 오는 미성숙과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관심과 동정과 관용이 많은 부분 부족하지 않은 지 성찰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근간적으로 적용되어져야 할 ‘정의로움’에 대해서도 이번 독서를 통해 되새기게 된다.
4
빅토리아 여왕과 그 시절 대영제국의 민낯
-애니 그레이의 《먹보 여왕》을 읽으며
작가 ‘애니 그레이’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요리사이다. 이 책은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왕궁에서 즐겨먹은 음식들과 그 음식과 관련한 다양한 부대 자료들을 모아 수필형식으로 전개한 음식 역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그 레시피들만 지루하게 엮어 독자들의 귀중한 시간을 마구잡이로 빼앗을 것 같지는 않다.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 어린 시절/ 정찬 방식/ 주방/ 요리사/ 별궁 등등의 각 장의 소제목에서 잘 드러나듯 각 장이 지은이가 붙인 듯 한 빅토리아 여왕의 별명인 ‘먹보 여왕’과 같이 독특한 내용으로 꾸며져 음식의 풍미처럼 별스런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린 시절>과 <정찬 방식>을 지나 <주방>에 이르고 보니 빅토리아 여왕 본인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대영제국이라는 과거 영국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국의 대표적 왕궁인 버킹엄 왕궁의 규모와 열악한 시설, 왕궁 안에서의 삶과 궁을 움직이는 복잡한 조직, 왕궁의 개보수 과정, 왕궁이 자리한 도시 런던의 삶의 일상과 행태, 여왕의 가족과 귀족, 정치가들의 움직임 등이 작가의 원래 의도와 달리(?) 타국인의 동경어린 시선을 달구며 서서히 그 면모를 드러내며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간미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왕궁의 하루 음식 소비량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요리와 관련한 전문 인력만 오륙십 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왕궁근처 민가에서 출퇴근하는 어느 나이 든 남자 하인이 왕궁의 음식 창고에서 상당량을 그냥 들고 나가다 관리에게 들킨 모양이다. 궁내부 차관이 그 남자 하인의 사직을 강력히 권고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만의 섬세한 감성으로 그 남자의 나이와 거느린 가족, 부양을 염려하며 자리를 보전시켰다고 한다.
대영제국 당시 영국의 왕궁 내 요리와 관련한 조직은 별스런 세계였다. 조리부, 제과부, 제빵부, 페이스트리부 등의 조직이 있었고 요리사 대부분은 프랑스 남자였으며, 여성 요리사는 있긴 했지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급료도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당시 요리는 프랑스가 대세였던 모양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에 ‘아 라 프랑세즈’라는 프랑스 방식이 있을 정도다.
6월 21일 금요일
풍경(風景) 둘
1
유월 거리 풍경
-저녁 산책 시간에
합기도를 마친 꼬마 여자애가 승격 띠를 받지 못했다며 삐진 채 마중 나온 엄마를 미소 짓게 만들고, 길가 한편에 마련된 빌라의 조그만 텃밭에는 늙은 엄마에 순종하는 정신장애 처녀가 심은 채소를 향해 물을 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우리는 걸으면서 이들은 본다) 원성동사거리에 있는 아파트단지 건축예정 부지는 펜스만 세워놓고 하세월이고 천안고등학교를 지나는 도로변은 소나무를 새로 이식하는 조경작업이 한창이고 그 밑에 최근 새로 문을 연 명륜진사갈비집 식당에는 평일에도 손님이 제법 테이블을 채우고 멀리서부터 고기가 굽히는 구수한 냄새를 피운다 (아내와 함께 우리는 걸으면서 이들을 본다) 일 년도 못 버티고 떨어져나간 돼지 대패삼겹살 식당자리에 요즘 유행하는 노란색 일조인 커피전문점이 새로 개업해 준비 중이고 아내 기억으로 처녀 적부터 있은 북경반점을 돌면 힘든 일을 마치고 노천 테이블에서 치맥을 먹고 마시는 주점가가 나오고 유일한 하천인 천안천 주변으로 운동과 산책을 하러 나온 시민들의 한가로움이 흐른다 (아내와 함께 우리는 걸으면서 이들을 본다) 농협 앞에서 채소와 과일 조금을 늘어놓고 매일 팔리기를 기다리는 지쳐 보이는 아줌마, 편의점과 호프집 앞 도로변에서 퇴근 후 한잔 걸치는 검게 탄 일용직 노동자들, 어제는 열렸다 오늘은 닫힌 음식점들, 술집, 또 호프집, 미용실, 테니스장, 지나가는 가벼운 표정의 행인들 (아내와 함께 우리는 걸으면서 이들을 본다) 이제 곧 재단장을 할 것처럼 펜스를 둘러 시민들 접근을 막은 오룡시민경기장 옆의 경사진 길을 오르면 근처에서 제일 큰 천안장로교회를 필두로 두 개의 교회가 더 보이고 학생이 많이 없어진 신안초등학교를 지나 일방도로를 빠져나가면 늙은 엄마에 순종하는 정신장애 처녀가 심은 채소를 향해 물을 주고 있던 텃밭이 다시 나오고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이들을 모두 보았던 우리는) 멀리 맞은편에서 석양이 붉게 노을 지는 한가로운 풍경에서 유월이라는 시간을 새삼 깨닫는다
2
영국 빅토리아 왕실의
식문화와 시대의 풍경
-애니 그래이 作, 홍한별 譯 《먹보 여왕》을 읽으며
제7장 아이들과 함께 :
여왕의 아홉 아이들과 함께 일반 가정처럼 산교육을 하고 텃밭을 일구며, 그곳에서 가꿔 나온 채소와 과일들로 아이들과 맛있는 요리를 해먹던 행복한 시절의 풍경
제8장 일상식 :
먹을 줄 아는 여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의 일상에서의 식탐기
제9장 특별식 :
1837년 9월 벨기에 레오폴트 국왕, 1844년 6월 러시아 차르(니콜라이 1세), 10월 프랑스 루이 필리프 국왕, 1855년 4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1867년 터키 술탄, 1873년 페르시아 나세르 알딘 국왕 등 국빈 방문시 빅토리아 여왕이 접대에 나섰던 당시 풍경
책은 이렇게 ‘요리’라는 한 분야를 통해서 역사적인 한 인물을 독특하고 특별하게 조명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흥미를 제공한다. 여왕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영국인들이 우러러볼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아울러 일반인들의 삶에 적지 않은 환상도 심어주었으리라 여겨진다. 이 책이 독서인에게 그런 동일한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작가의 관련 자료를 꼼꼼히 수집하는 시간, 그 자료들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며 필요시마다 정리하는 시간, 마지막으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당시 풍경을 재현해내며 수집하여 정리한 관련 자료들과 음식처럼 조화롭게 배합하는 일 등이 이런 특별하고도 훌륭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여왕의 꼼꼼한 기록 습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런 다양하고 특별한 장면들은 한 편의 영화로도 만들기가 어렵고 이제 와서 다큐멘터리 제작은 더욱 난제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해가 지지 않게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영제국의 풍경을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흥미롭게 담아낸 영화판 블록버스터이자 출판계의 맛깔나고도 훌륭한 특별식으로 칭송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은, 독서광들에게 일독을 추천하고픈 책이다.
6월 22일 토요일
초여름, 비가 내리고 책은 읽히고
1
이미 TV 뉴스로 예보되었던 비가 아침부터 소리 없이 추적거리며 내리더니 종일 내리고 있다. 여름이라 더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때아니게 맹위를 떨치며 연일 기온이 상승한 터라 다음에 오는 비는 마음을 차분하게 삭여주며 무덥고 길 여름 계절을 대비하게 한다.
영국 역사학자인 애니 그래이가 대영제국 시절 빅토리아 여왕의 음식과 관련한 왕궁 주변 풍경을 그린 논픽션 《먹보 여왕》을 다 읽고,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 1·2》와 역사학자이자 문학인류학자인 주영하 교수가 지은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를 비가 내리는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의 방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읽기 시작한다.
오직 비가 내릴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가 저 밑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자전거를 탄 아이와 그 아이를 쫓아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아이 모습을 잠시 우두커니 쳐다본다. 아이들 모습이 인근 아파트 동 사이로 사라지자 다시 조용해진다. 책 속의 문구들이 유난히 시적으로 각인된다.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다각도에서 깊어지며 마치 바닷가 파도처럼 밀려오듯 뒤따라와 잠시 책을 손에서 놓기도 한다. 그러나 책읽기에 이만한 분위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탓에 책을 들어 올리고는 깊이 잠수하듯 내용 속으로 빠져든다.
2
《먹보 여왕》
-애니 그래이 지음/홍한별 번역/(주)출판사 클 2021년판
먹는 일에 부리는 욕심이
좋아 보일 때
평생에 걸쳐 먹는데 진심이던 여왕이었고 뭔가 먹을 줄 아는, 그것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말년에 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음식을 자제하라는 주치의와 주변 신하의 간곡한 만류에 역정을 낼 정도였다(이 책을 읽다보면 빅토리아 여왕은 웬만해서는 역정이나 화를 내지 않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녀는 많을 때는 한 해에 만찬을 같이 한 인원이 십삼 만 여명에 달했다. 영국이라는 유럽 역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국가를 대표하는 국왕으로서 정치는 입헌군주제에 따라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에게 일임하여 명색이 상징적인 역할이었다고 하지만, 외교 관례이기도 한 드물게 국빈 방문이 있거나 매년 방문한 외교 사절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자리를 빛내는 역할은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자리여서, 그런 명예로운 자리에서 하는 식사는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국왕으로서 의무적으로 치러 내야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역이기도 했다(그녀의 치세 말기에 이르면 이런 그의 고충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곳곳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빅토리아 여왕의 일생을 다룬 독특한 전기문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대부분 전기문이라고 하면 출생부터 시작해서 교육, 성장, 결혼, 육아, 일과 성취, 중장년과 노년의 삶을 다루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 책 《먹보 여왕》은 부분적이고 간략하지만 전기문에 들어갈 구성 요소들은 연대기는 물론이고 그 형식대로 빠짐없이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왕궁의 전통적인 식문화와 다양한 요리, 요리와 관련한 요리사를 포함한 적지 않은 궁중 내 조직과 그들을 움직이는 행정 시스템 등이 다른 일반 전기문과 달리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목이 <먹보 여왕>이어서 다양한 궁중 음식과 그 요리법들이 주종을 이루는 지루한 내용의 서적일 것 같지만, 책의 겉장에 씌어진 부제와 같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치세 당시의 왕실 식문화를 소개하고 그와 관련된 영국 내, 외부 세계의 시대적 풍경을 수필의 신변잡기 형식과 같이 담백하고 비교적 간소한 문체(필요하면 빅토리아 여왕과 그의 가족이나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편지글도 그대로 인용)로 담아내어 책 읽는 기쁨에 새롭게 눈뜨는 경험(영화 ‘음식남녀’처럼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속 남녀 관계의 특별한 경험을 뛰어넘는 대영제국의 왕궁과 주변 일상을 스펙터클하게 관찰하는)을 선사하고 있다. 그건 요즘 대세인 화려한 영상이 해결할 수 없는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절대미감이다.
그녀의 각종 초상화가 보여주지만 남편 앨버트공이 사망한 이후로 음식에 더욱 열심이었던 탓에 언뜻 비만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여왕이 그 덩치(키는 작아서 158정도)로 영국의 왕궁인 윈저궁이나 버킹엄궁을 비롯해 그녀의 가족들의 별장 두 곳(오스본 하우스와 스코틀랜드 밸모럴성), 그리고 이웃한 프랑스를 비롯해서 틈만 나면 쉬고 싶다며 유럽의 인근 국가들로 적지 않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휴가를 다니며 이곳저곳 종종걸음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음은 모두 한결같이 열심히 입과 이빨을 이용해 음식을 먹어대는 여왕의 인간미 물씬 넘치는 풍경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정찬 방식>, <주방>, <요리사>, <별궁>, <아이들과 함께>, <일상식>, <특별식>, <더 넓은 세상의 음식>, <여왕의 노년> 등으로 전체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다.
-왕궁 주방과 당대 요리기구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여왕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날 수 있다.
-여왕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왕궁내의 조직과 행정 시스템을 볼 수 있다.
-유럽 왕실과 귀족층에서 유행하는 프랑스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인생사를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다.
-왕실과 국왕과 국민간의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대부분 한 국가의 역사를 생각할 때 정치와 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다소 긴박하고 격렬한 시간의 연속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권력획득을 위한 세력 간 암투를 위주로 그려질 때에는 비정함과 잔인함에 치를 떨며 권력의 비열한 속성이 역사의 모든 것처럼 오인되며 역사 돌아보기를 때로 거부하기도 한다.
애니 그래이의 《먹보 여왕》은 역사를 ‘음식과 요리’라는 특별한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서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과 따스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매 장이 주는 제각각의 풍경은 처음 보는 장면들의 역사로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를 포함해서 19세기 전반의 약 백 년의 영국 역사를 조망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일상적인 측면에서 차분하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 훌륭한 역작이었다.
6월 24일 월요일
꿈과 여름, 그리고 책 읽는 남자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1》을 읽으며
1
-그의 아내가 아침을 차리기 위해 식탁 위에 있는 잡지를 치울 때, 사임은 현관문 밑으로 들어온 그날의 신문을 읽으며, 쓰여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라 단어로 꾸며 놓은 꿈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1》, 제7장 <카프산의 글자들> 중에서)
2
나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둘 다 여인이자 나의 아내다. 소설에서 흔히 풍기는 ‘신비스러움’은 대개 이런 장면에서부터 시작되는가. 갑자기라고 하지만 떠난 흔적과 이별에 대한 편지가 남아 남자 주인공에게, 아니 독자에게 더욱 여운과 기대와 미련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 아마 소설의 줄거리를 끌고 가는 힘이 되겠다.
일전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주인공 ‘오카다’를 두고 어느 날 아침 출근한 이후 잠적해버린 그의 아내 ‘구미코’의 행적은 소설 속 일상을 온통 보랏빛 신비감으로 감싸버린다. 이제 결혼한 지 삼 년 안팎의 신혼과 다름없는 부부생활을 영위해가는 중이었던 오카다로서는 일상의 모든 시계가 아내가 가출한 순간부터 멈추어버린다.
지금 읽는 튀르키예의 대표적 작가 오르한 파묵이 이 작품으로 1990년 ‘프랑스 문화상’을 수상한 《검은 책·1·2》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갈립’과 어릴 적부터 친남매(엄밀한 의미에서는 사촌지간)처럼 자라 후일 부부가 된 ‘뤼야’(튀르키예 말로는 ‘꿈’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짧은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사라진다.
1권의 중반쯤 읽어나가며 둘의 관계(뒤로 갈수록 둘의 관계에 대해 더 세세하게 밝혀지겠지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갈립’이 ‘뤼야’를 무척이나 아끼고 끔찍이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어릴 적 둘이 장난치며 놀던 장면을 드문드문 반추하는 ‘갈립’의 회상 말고는 아직 아무런 반응도 ‘뤼야’는 표명하지 않고 있다(작가는 보여주지 않고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버티고 있다). 그래서 ‘뤼야’는 이름이 주는 튀르키예식 뜻풀이대로 공중에 붕 뜬 미지의 환상적 여인에 아직 머물고 있다.
작품 속에서 전하는 일설에 의하면, ‘뤼야’는 전 남편(좌익활동가)을 찾아 갔을 지도 모른다고 해서 ‘갈립’이 그 남자가 있을만한 곳을 수소문하며, 친지들에게는 아내 ‘뤼야’가 감기에 걸려 방에 누워만 있다고 거짓말을 해놓고는 튀르키예의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을 세워가며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3
-뤼야가 떠난 그 밤, 그의 눈앞에는 단지 삶의 일부, 어떤 기회나 놀이를 놓쳐버렸음을 깨닫게 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세계의 삶의 즐거움과 유희를 놓치는 데에 불만스러워하는 듯한 사람은 갈립이 아니라 항상 뤼야였다.
-뤼야의 기억 깊은 곳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지역들처럼, 파악할 수 없는 이 비밀스러운 지역의 신비한 식물과 두려운 꽃으로 뒤덮인 정원이 자신에게는 완전히 닫혀있다.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1》, 제5장 <그건 어린애 같은 행동이다> 중에서)
아직 우리의 작품 속 아름다운 아내는 어쩌면 어리석은 작품 속 남편에게 마음의 정원을 열어 평화와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제발, 현실 속 아내 분들은 불쌍한 남편들에게 그러지 말기를……)
이 책에는 제9장 <누군가 나를 추적하고 있다> 부분을 읽어나가는 중에 자연스레 느끼게 되지만 중동의 이슬람교를 주축으로 한 ‘종교적 신비주의’가 많이 나타난다.
독자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점은 그 종교적 신비주의가 정치 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연대해서 교묘하게 그 조직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부분인데, 인간의 내면에 관한 다양한 실험적 요소중 일부가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4
서구문화에 대한 반감이 유독 강한 중동의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발표되는 문학작품들이 거두는 성과는 기독교 역사만큼이나 깊고 다양하며 그래서 훌륭하다. 서구에 비해 덜 알려진 중동의 아랍과 회교권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은 찬란한 서구 문화의 일부 뿌리가 유서 깊은 중동에서 발원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산지 이집트에 가보면 있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대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로서 중동의 이슬람 문명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의 소산이자 자부심이다.
작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문학적 뿌리가 있는 과거 인류 문명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 그 중동의 땅에서 나오는 기름진 역사적 자양분-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을 잘 활용해서, 이 작품 《검은 책》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 《고요한 집》, 《내 이름은 빨강》 등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5
매년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장대비와 비바람 몰아치는 장마가 올 것이다. 장마가 지나가고 나면 본격적인 무더위와 무시무시한 태풍이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긴 여름이 시작된다. 언제부턴가 기온이 최고를 경신하기 시작하더니 잠 못 들게 하는 열대야도 그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의 세계조차 꿈과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그 원인이 기후의 변화에서 오는 건지, 급격한 과학 문명의 발달에서 오는 건지, 높아진 인류 문화의식의 수준에서 오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럴수록 더욱 분명한 건 나의 ‘책 읽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6월 25일 화요일
유월, 여름의 꿈은 한가하다
-6월초에 도서관에서 빌린 대부분의 책을 거의 다 읽고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1》을 읽고
1
아내는 아침을 먹고 나면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정오될 때까지 짧은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아내를 두고 거실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던 나는 소파에 깔아둔 진녹색 독서용 얇은 담요 위에서 발바닥에서 떨어진 듯 보이는 각질 몇 조각을 발견한다. 담요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거실로 난 창으로 가서 털 계획이다. 방충망까지 완전히 열어젖히고 담요를 완전히 밖으로 끄집어낸 뒤 막 털려고 한 번 흔들었을 때다. 그 순간 난 대학교 시절 같이 공부했던 여학생 친구가 얼핏 떠올랐던 것 같다.(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검은 책》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의 영향 탓…….)
“어이쿠, 이런.”
손에서 순식간에 담요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빠져나간 담요가 그만 고층 아파트 허공을 획하고 공중선회를 한 번 보이고 나더니 까마득한 아래층으로 고공낙하를 하기 시작했다. 창문밖에 걸쳐진 철제 안전 난간대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민 채 바닥으로 무사히 떨어지기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아파트 1층 출입구를 지나 단지 내 도로 주변을 빠르게 뒤져보았지만 담요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대신 위를 꼼꼼하게 훑어보니 7층 아파트의 거실 옆 첫 방의 철제 안전 난간대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일 열어놓은 어느 세대의 거실이나 방으로 바람에 날려 들어가 버렸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찾지 않으면 같은 동 윗세대에 사는 무고한 이웃들이 욕을 먹을 테고, 담요의 진한 녹색 탓에 얼른 부재가 눈에 뛴 아내에게 난 앉은 채로 추궁을 당하다가 마침내 불가항력의 이실직고를 듣고는 그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관용을 듣긴 하겠지만 아내가 나에게 늘 마지막으로 하는 습관대로,
-그러니 가만히 있지, 뭐한다고 깨끔을 떠느냐 이 말이야. 얼른 직장을 구해서 나갔으면 이런 소란은 없었을 거 아냐!
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다행스럽게도 담요가 7층에 사는 세대의 작은 방 난간에 걸려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리나케 7층으로 올라갔다.
이 아파트에 입주하고서 다른 층의 이웃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방문할 세대 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순간부터 현관 벽에 붙어있는 진회색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굉장히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웃은 두 번째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긴, 요즘 거실에 놓인 방문객용 화면을 통해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싶으면 문을 아예 열어주지 않는 것이 다반사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건 이제 너무나 당연한, 예의를 넘어서서 개인의 안전과 관련되는 사항이라 도시의 아파트에 살거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불문율인 것이다.
“누구세요?”
포기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서려는데 현관 안쪽에서 어떤 여자의 가는 음성이 들려온다.
“위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문을 열어줄까 말까하는 잠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강아지가 얼굴을 먼저 내민다. 우리 이웃은 자다가 잠에서 막 깬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을 놓는다.
“들어가 있어. 무슨 일이시죠?”
“위층에서 조금 전 난간 밖으로 먼지를 털다가 깜박 실수로 담요 하나가 밑으로 떨어졌는데 보니 댁의 거실 옆방 난간대에 걸려 있어서…….”
“잠시 기다려보세요.”
이웃은 아무런 표정 없이 담요를 찾아 가져다 문밖으로 내민다.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담요를 받아들고 얼른 집으로 돌아온다.
아파트에 입주해 7년째 살지만 이런 일은 처음인데, 그것도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오전에 갑작스레 일어난 소동 아닌 소동은 짧은 순간이지만 요즘 연일 평화롭던 가슴을 급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매사 급한 내 성격에 그나마 진땀을 흘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조용히 들어오는데 아내는 안방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여태 잠에 빠져 있는지 조그만 정적이 흐를 정도였다.
되찾아온 담요를 소파의 원래 자리에 깔면서 이 아파트는 그 건축의 애초 평면도 계획상 부득이하게도 오전에는 모두 잠시 잠을 청하게 되는 환경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때 갑자기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소리가 강하게 들려온다.
〔Web발신〕 XXX 환자님, 위내시경 조직검사결과, 헬리코박터균 감염 확인되었습니다. 제균 치료여부 상담위해 병원 재방문 바랍니다.
-이런 오늘 무슨 날인가. 어떻게 갑자기 난감한 일들이 이렇게 한 번에 닥치는 걸까. 가슴이 또 두근거리는 게 영 불안한데.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병원이라면 딱 질색인데…….
월요일 아침부터 갈팡질팡하며 그 동안 누렸던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영 좌불안석이 시작된다.
2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은 1권만 읽고 더 이상 읽기를 멈춘다. 도서대출 기한이 오늘이라 오후에 책을 반납해야 해서 더 읽기가 어중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3》을 비롯해 이 책 《검은 책·2》는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 같다.
(빌려 온 책을 같이 읽는 아내가 케이트 커크패트릭의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과 애니 그래이의 《먹보 여왕》을 다 못 읽었다며 다시 대출을 요구해 와서, 도서관에서 일전에 한 통화에 의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3》을 구비해 놓았다면 조만간 다시 빌려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4권의 시집을 포함해서 모두 17권의 책을 빌렸는데,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2》와 주영하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의 일부, 스탕달의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를 제외하고는 다 읽었다. 애초 이 모두를 다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빌린 것은 아니었다. 아내도 책을 읽는 나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따라 읽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이 읽을 요량으로 이만큼 빌렸던 것이다.
덕분에 6월 초여름의 시간이 잘 흘러갔다. 그리고 빌려온 책 덕분에 ‘생의 신비주의’에 관한 작가들의 생각(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태엽 감는 새 연대기》도 그러하지만 특히,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에서)들을 풍족하게 읽고 충분히 느꼈다. 아주 훌륭하고 이색적인 경험이 되겠다. 그러한 생각들은 다양한 철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치밀하고도 오랜 사색의 시간이 없으면 나오기 어려운 ‘사고(思考)의 결정체’일 것이다.
두 명의 뚜렷한 개성과 뛰어난 자질의 여성을 이번 독서에 만났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다. 그 동안의 역사적 오랜 시간 속에서 ‘생의 굴레’라고도 할 수 있을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사람의 훌륭한 인격체로서 발돋움할 계기를 사상과 문학 작품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보부아르와, 겉으로 들어나는 화려한 궁중 생활에 매료되어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선망하는 영국 여왕의 자리를 60년 가까이 묵묵히 지키며 9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정도 함께 일궈야 했던 여성 빅토리아의 삶은 서로 여러 면에서 대비되기에 충분하다.
그들 각자가 걸어간 삶이 평생 보장된 길과 불모지를 개척해야 하는 다른 길이 그러하고, 그들이 배우자를 선택하고 가정을 꾸려나간 극명하게 다른 방식에서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모든 여성들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선한 영향력을 훌륭하게 그리고 지대하게 끼쳤다고 여겨진다. 화려함의 휘장 속에 철저하게 가려진 평범한 인간의 국가에 대한 막중한 책임과 고충을 극복하고 온전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용감하게 시대의 불합리에 맞서 평생을 살아간 여인의 당당함이다.
시인 손종호의 《뿌리에 관한 비망록》을 포함한 네 권의 시집은 거실 테이블과 침대 옆에 두고 틈나는 대로 페이지를 열어 감성의 샘을 풍족하게 채웠다. 한 권의 시집이 만들어지는 데 걸린 시인의 오래고도 귀중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건 너무하는 얄미운 장난이 아닐까 싶은 미안한 감정도 없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알리고 싶다.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의 공저 《부적 1·2》는 흥미로운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이 두껍고도 어려운 책을 읽어내느라 나의 소괄 머리 없을 뇌를 혹독하게 단련시키는 재미 또한 대단했음을 특별한 경험으로 남기려 한다.
여름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다보면 어느 새 성별과 나이, 살고 있는 현실을 잊기 십상이다. 작품마다 개성강한 작가들이 펼쳐보이는 세계에 흠뻑 물들기 때문이다.
무더위에 눌린 감각이 무뎌져 마침내는 현실을 망각할 수도 있는데, 그보다는 무더위조차 잊을 정도로 매 작품마다 훌륭한 작가들이 제공하는 피서지이자 작품 세계로 순간이동을 해서 현실의 모든 것을 한 곳으로 제쳐두고 이번에 특별한 경험을 쌓아보도록 권한다.
그것은 매년 들어보는, 귀에 숱하게 듣는 별로 재미없는 말이면서도 귀중하게 여겨지는 내가 조금씩 조심스러워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신위지보’(愼爲之寶)인지, 아니면 더욱 젊어져가는 출람지청(出藍之靑)인지 잘 판단이 안서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이번 여름 경험에 찬 고견을 듣고자 함이다.
(2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