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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말로 외국어어원 풀기 원문보기 글쓴이: 나비우스
平 평평할,평
일본어 음독
ひょう·びょう·へい 효우 ,뵤우, 헤이
훈독 :たいら다이라 ひら 히라
평양을 피양이라고도 발음을 한다.ㅋㅋㅋ
양은 땅의 변음이다.
고로 평평한 땅 ?
고구려 평양은 실제 만주에 있었다.
사실 만주에 평양성이 한 둘이 아니거든.
북한 평양성은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름만 똑같지.
하여간 역사를 왜곡시키려고 얼마나 수고를 하셨을까?ㅋㅋㅋㅋㅋ
검증과정을 과학적으로 거치고 있는 상태다.
식민사학자들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국민들이 그들 손에 놀아나고 있다.
아까운 국민세금들... 동북역사재단인가 머시기 한테 ..한심하다~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조만간 역사책이 수정되어서 나올 것이다.
피라-->히라
ㅍ<-->ㅎ 호환
피라는 펴라의 경상도사투리
펴는 것을 뜻한다.
다이라 이것도 평평하다.
우리말에 타리 다리 다리다
아래 어원자료 설명에도 'to iron' 다림질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옷을 다릴때 쭉쭉 편다.
옛날 쇠를 다룰때도 이런 쭉쭉 펴는 기술이 있었다.
내 고향 울산 지방에도 그 오랜 전통이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청에서 달천 쇠부리축제를 매년 연다.
달천은 성안동 건너마을로 가면 빨리 간다.
근처에 천마산도 있는데 달천농공단지 그 근처다.
우리말 다리다 에서 결국 건너갔군.ㅎㅎㅎ
영어 iron도 앞에 p나 b가 탈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piron ,biron 펴다의 활용 편 ,부리다의 활용 브린 부린 -->어원
영어 friday의 fri란 말은 부리 쇠 金을 부리는 것을 뜻한다.
부리다의 어근 부리-->어원
과거엔 좀 더 강하게 프리 푸리 로 발음했을 것이다.
세수대야
대야를 일본어로 다라이 라고 말한다.
대야는 물을 담아서 무엇을 씻을 때 쓰는 둥글넓적한 그릇.
야금 [冶金, metallurgy, Metallurgie]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 정련하여 사용목적에 적합한 필요한 형상으로 만드는 기술.
광석에서 금속을 빼낸다거나 조(粗)금속을 정련하거나 하는 것,
즉 금속 제련은 주로 화학적 조작에 의한 것으로, 화약 야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대야는 놋쇠로 만든 대야이다.
대야는 물을 담아서 낯, 손, 발 따위를 씻는데 쓰는, 둥글넓적하게 생긴 그릇으로,
고려시대의 상류층은 청자로 구은 청자대야도 썼으며..
철기술로 유명한 변한弁韓(방가라 혹은 벵가라)말고도 진한 辰韓(다라가라) 이
즉 다라국이 제철로 유명했던 나라이어서 대야를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변한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가야지배층은 틀림없이 인도 방글라데시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방글라데시어를 벵골어 라고도 하지.
방글라 말하고 우리말하고 아주 유사하거든.
하여간 이 다라이는 일본어인데 어원은 드라비다어에서 온다.
아라우 -->씻다 ,명사형 -->아라이
사실 일본어는 경상도말이 대부분이다.
문화적으로 백제의 문물을 많이 받아드렸지만 언어학적으로는 가야가 우선이다.
경상도사투리도 사실 알고보면 산스크리트어나 드라비다어를 보면 인도식 말투다.
그래서 경상도말이 세계어가 되는 것이다.
데+아라이-->손씻음
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t-->d-->r 발음변음이 발생한다.
때우다 땜질한다. 철로 입히거나 막는 것이다.
땜빵 ㅋㅋㅋㅋㅋ
탙-->탇-->탈-->타르-->타라
하여간 가야의 정체성을 푸는 열쇠는 바로 고깔에 있다.
국어사전
고깔 속담·관용구
[명사] 승려나 무당 또는 농악대들이 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
영어사전
고깔
conical hat, usually decorated with paper flowers, worn by Buddhist dancers and some players in farmer...
고깔,변 弁
고깔 cone
변한의 변弁은 고깔모자를 쓰고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제사장의 모습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僧舞)」
[출처] 나비 - 조지훈 「승무(僧舞)」|작성자 오르페우스
불교에서 파생된 승무는 불교의 의식무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면서 “실제로 승무의 의상이 되는 장삼과 고깔, 붉은 가사뿐만 아니라 승무라면
연기되어야할 북놀음은 불교의 예술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고깔모자라고도 불리는 고깔입니다. 고깔은 본래 불교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절의 상좌(上佐)나 무당, 풍물꾼, 나장(羅將)과 급창(及唱) 등의 하급관리들이 사용한 모자입니다. 전통 춤사위인 승무(僧舞)에서도 볼 수 있는 바로 그것이지요. 고려시대 이후 사헌부(司憲府)와 의금부(義禁府)의 나장(羅將)이나 관아의 급창(及唱) 등 하급관원들도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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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은 승려가 주로 쓰는 건(巾)이다. 고깔은 주로 모시·삼베 등의 저마포(苧麻布)로 만드는데, 이등변삼각형으로 배접한 베 조각을 둘로 꺾어 접어서 다시 이등변삼각형이 되게 하고, 터진 두 변에서 밑변만 남기고 다른 변은 붙게 하여 만든다. 고깔의 유래에 대해서는 휴정(休靜)이 처음 만들었다고도 하고, 중국 주나라 때의 관(冠)인 변(弁)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또한 신라의 여인관(女人冠)과도 비슷하고 고려 후기의 흑건대관(黑巾大冠)과도 같은 모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변상(弁狀)의 고형(古形)이 송낙, 즉 소나무 겨우살이로 엮어서 만든 여승의 모자가 되었고, 이것이 저마포제(苧麻布製)의 고깔[曲葛;곡갈]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고깔은 '곳갈'이라고도 하는데, '곳'은 첨각(尖角)을 의미하고, '갈'은 관모(冠帽)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의 형상과 일치한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관모의 고유한 형태인 변형(弁形) 관모가 고깔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고 본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삿갓·송낙 등도 모두 고깔형 관모에 속하지만, 좁은 뜻으로는 단지 헝겊으로 만든 포(布製)의 삼각건만을 고깔이라고 지칭한다. 고깔은 흔히 절에 있는 승려 가운데서도 상좌들이 썼으며 사헌부의 나장이나 관아의 급창(及唱) 등이 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승무·농악·무당 등의 복식에서 일부 볼 수 있을 뿐이다. (增補韓國服飾史硏究, 金東旭, 아세아문화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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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깔> ※ 위 박스 옆에 넣음
<도면 고깔> ※위쪽 도면
위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고깔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끝이 뾰족한 관모의 변형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고깔을 만드는 재료는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처음부터 종이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종이로 만든 모자는 비를 막을 수도 없고, 쉽게 찢어지거나 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착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시(모시풀 껍질의 실로 짜며 곱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여름철 옷감)를 이용하여 고깔을 만들었고, 그 외 다른 재료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이 1939년 발표한 '승무'는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박사는 얇고 가벼운 비단을 뜻합니다.
고깔을 종이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농악에 쓰이는 고깔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래 농악은 농경사회로 진입하며 일하는 데 흥을 돋구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던 일종의 제(祭)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불교가 쇠퇴하면서 사찰이 빈곤해지자 굿중(절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으로 꽹과리를 치고 돌아다니며 시주를 청하는 중)들이 무리를 지어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이 굿중패들을 본딴 걸립(乞粒; 동네에 경비를 쓸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패를 짜서 각처로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리며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일)이 행해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농악에 사용되는 고깔은 삼각형의 모자에 원형의 종이꽃을 3개 또는 5개를 달게 됩니다.
<사진 굿중패> 19세기 말에 활약한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도를 보면 굿중패는 판굿을 하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승복을 한 2인이 등장하는데, 각각 춤을 추거나, 꽹과리를 친다.
[출처] 종이접기 고깔, 고깔 접기의 유래|작성자 야수헌터
인도계열언어들
벵골어 Phaṇā
칸나다어 Kōn
신할라어 kon
타밀어 Hūṭ 궅(-->굴-->군)
텔루구어 Huḍ 궅-->굳
힌디어 hud
펀자브어 Kōna
그럼 방글라데시 고깔로 검색을 해보았다.
실롱이 속한 메갈라야 주는 어떨까. 이들의 공식 언어는 영어다.
카시와 자인티아, 가로족은 각각 카시, 자인티아, 가로어(語)로 말한다.
서로 간 소통은 대개 영어나 힌두어로 이뤄진다고 하는데, 만난 사람 중엔
영어를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실롱에서 40㎞가량 좀더 올라 링키르뎀 마을(Lyngkyrdem Village)에 들렀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이 마을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카시족 부락.
양철지붕 집과 가끔 보이는 초가집에, 길에는 까만 돼지가 돌아다닌다.
맨발의 아이들은 고깔을 뒤집은 모양의 바구니를 이마에 끈으로 동여매고
냇가 빨래터로 향하고 있다. 바위 위 여기저기 널린 빨래가 새뜻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012142135325&code=900306#csidx8c27fa7ecf3ff3b85e3dee8a6943111
인터넷 자료에 방글라데시 자료에는 유독 고깔모으기 등 뭐 이런 자료가 많다.
그 만큼 고깔은 방글라데시랑 깊은 역사적 인연이 있다고 본다.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의 최대의 명절은 라마단이 끝나는 1월말 경에 오는...
울긋불긋한 고깔모자와 가면들로 포화상태가 된다.
변한의 정체성은 바로 이거였어!
고깔모자다!
그리고 신라 유물중에 특이한 게 있는데 백제나 고구려에 없는 그것이 바로
토우!!!!!!
토우 중에 개미핥기란 동물을 만들었는데 손성태 교수님은 아메리카대륙 멕시코에서
누가 갔다왔는 것으로 생각을 하시던데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곳과 관련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개미핥기는 인도에서 그것을 본 사람이 한반도에 와서 만든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인도지방인 것이다.
아래의 글을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다.
고깔모자 쓴 신라 기마족은 사카(스키타이)족
- 코카서스 인종인 신라인들이 남긴 암각화는 초원문화 반영한 그림
기원전 800년에 서양세계에 등장하는 유라시아 초원세력을 총칭하는 말로써 서양에서는 스키타이라 불리우고, 동양에서는 흉노라고 기록된 '사카'라는 말은 우리말 해해(하하)의 변음어다. 곧 해를 숭상하는 태양족이라는 의미다. 즉, 동북아에서 초원길을 따라 서진한 단군조선의 갈래라는 의미다.
1-4세기 남3한 중 진한땅인 한반도 동부지역(영남)으로 유입된 신라인들은 고깔모자를 쓴 사카족이다. 해민족의 부도사상을 인도에 전파하여 불교의 교주가 된 석가모니가 바로 사카족이다. 고깔모자를 쓴 이들 사카족은 페르시아의 전쟁포로로 잡혀 페르시아 고대 그림에 그려지기도 했다.
코카서스 인종과 혼혈화된 사카족은 흉노족에 포함되었고, 한나라와 선비의 연합군이 흉노를 공격할 때 40여만이 선비족으로 흡수되었는데, 고구려와 전쟁 중에 패한 모용 선비족이 동해안을 따라 영남땅으로 들어 와 석탈해 왕조의 이사금 시대를 종식시키고 마립칸 시대를 연 신라 김씨왕조인데, 이들 중심세력이 사카족이라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적인 초원문화답게 성기와 성행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신라인들의 토우. 발발이맨들의 기원? 빈번한 강간과 성폭행 사건들의 근원적 유전인자들인가?
영남지역 암각화에 그려진 신라시대 그림들에는 고깔모자를 쓴 많은 신라인들의 인물상들이 그려져 있으며,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려 놓은 그림들도 많다. 마치 인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적나라한 성행위 그림들이다. 이는 초원세력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반영하는 암각화 그림이며, 미색과 뛰어난 섹스테크닉으로 신라왕들을 갈아치운 미실이 대변하듯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개방적인 성문화라 할 수 있다.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 고려인들은 냇가에서 남녀가 서로 목욕을 하면서 지나인들은 더러운 족속이라며 비아냥거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실크로드를 달려 온 신라 김씨왕족,인도 석가족과 신라 사카족,그리고 고깔모자의 의미
"신라의 김씨왕족은 만주와 지나국을 지나 중앙아시아 천산 너머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성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알타이 지역과 천산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천산의 동쪽과 알타이 지역은 유사이래 동서 인종의 충돌과 혼혈지역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람과 문화가 넘어 오다가 기원후에는 동쪽의 사람과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 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지나 동북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 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정형진 지음)
문무왕비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
경주 박물관 마당의 서역 문양석. 경주 소재의 사찰에서 발견
그러나 신라 김씨 왕족이 집권했던 2~6세기 사이 신라가 채용한 적석목곽묘는 우리나라 삼국 중 유일한 양식으로 북방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는 묘제라는 점. 이 시기 황금유물을 비롯한 북방초원문화의 상품들도 다량 유입되었고 서역의 문물들이 대거 발굴된다는 점이 문무왕비 내용을 무시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는다.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경주 괘릉. 그 앞을 지키는 서역 무인상의 존재가 흥미롭다
지나국의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왕릉도 평지에 조성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연못을 메워 조성했기에 무덤방에 물이 차, 관을 천정에 매달았다고 해서 괘릉이다. 지나국의 장묘문화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괘릉에 무인 석상은 왜 서역인일까? 단순히 신라에 들어와 있던 용감무쌍한 서역 용병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뿐인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신라나 가야나 모두 혈통적으로 사카족의 나라인 만큼 사카족의 나라 인도나, 백인들과 혼혈화된 유라시아 초원세력과 연결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중 지장이 지나국을 유학할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 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이것이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 정형진'의 저자 정형진의 주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휴도왕(休屠王)은 '금인제천(金人祭天)'을 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금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금인이 불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기에 '금인(金人)'이라 불린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한서> 김일제전에도 휴도왕이 금인제천하는 까닭에 한 무제인 유철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
백마사는 이 금인(金人)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금인이 꿈에 나타나 백마에 경전을 싣고 오다(金人入夢白馬?經)'를 옮겨 놓은 기둥이 보인다. 여기서 일륜을 걸고 있는 금인이란 바로 불상을 일컬음이다. 휴도왕의 '금인제천'을 불교의식으로 이해하는 바가 무리가 아님을 알겠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라는 기사가 보인다. 왜 지나인들은 신라인들을 '변한의 후예'라고 했을까? 우리는 흔히 '변한' 하면 '삼국지' 한조에 나오는 낙동강 서쪽 지역에 있던 변한을 떠올리는데, 이 변한의 후예가 신라라고 이해하면 모순이 생긴다. 신라가 가야의 후예가 되기 때문이다.
변한이라는 말은 '고깔모자(皮弁)를 쓰는 한(韓)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깔모자를 쓰는 풍습이 흉노에게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라왕족과 흉노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무리다.
신라인들이 '고깔모자를 쓴 한인들'의 후예임은 신라의 사신이 지나국에 가서 자신들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에 대해서 언급한 데서도 나타난다. 수나라에 파견된 신라의 사신이 수나라 관리가 고깔모자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 "피변(皮弁)의 유상(遺像)인데 어찌 대국의 군자가 피변을 모르는가?"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깔문화를 쓰던 집단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중앙 아시아와 지나국의 경계선상에 있는 천산(天山)의 동서지역에 살던 사카족이다. 페르시아 고분에는 다리우스(기원전 521~486)왕에게 잡혀 온 주변 지역의 수령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 맨 오른쪽 인물은 사카족의 수령인데 그만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신라 김씨왕족은 바로 이들 사카족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간략하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이 왕권을 획득했을 때 조성하기 시작한 적석목곽묘는 중앙아시아 천산 서쪽에 있는 사카족의 그것과 가장 유사한 양식을 띤다. 둘째, 신라금관의 양식도 그 모델이 천산 서쪽의 사카족과 가장 가깝다. 셋째, 변한이란 명칭 자체가 '고깔모자를 쓴 한'인데, 중앙 아시아 천산 동서 지역에서 고깔모자는 사카족의 특징적인 복식이다.
이는 천산 동쪽에 있는 암각화나 고고학적 발굴유물로도 확인된다. 넷째, '산해경' 해내경에 "동해의 안쪽 지역(요서.산동-절강성)과 북해의 모퉁이(만주)에 조선이 있는데 하늘이 아끼는 사람들이다(천독天毒=천축).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기원전 800년에 등장하는 유라시아 초원세력(스키타이)의 본향이 단군조선이며 불교의 본향이 단군조선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첨탑처럼 하늘을 향해 뽀쪽하게 생긴 고깔모자는 바로 하늘을 경외하는 단군조선의 하늘신앙을 의미하며, 제천단인 피라미드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또한 고인돌로 상징화되는 모계문화인 마고신앙에 반하는 부계문화를 상징하는 선돌들이 고대 한반도 지역에 많이 세워 졌는데, 가부장적인 초원문화와 부합한 이러한 선돌문화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즉, 유라시아 초원세력은 단군조선의 갈래라는 의미며, 흉노의 시조 색정이 바로 단군조선의 열양지역을 통치하는 지방장관이였으나 민심을 위반하는 통치로 단제의 명에 의해 흉노가 거주하는 약수지역으로 유배당하여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 흉노시조가 되었다는 [환단고기]기록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해머리땅을 중심으로 동북아에서 독자적 문명을 일으켜 성장한 환국.배달.단군조선이 마치 서방에서 이주해 온 세력에 의해 건국된 나라들로 날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출처:http://www.kookminnews.com/news/view.php?idx=3320
영어로 flat 인데
l이 반모음 이으 적용
폈다 혹은 펴다-->어원
l은 유음이고 반모음성질이 있어 생략이 잘 된다.
고대한국어 즉 한자상고음
우리말로 벌을 뜻하는 말이다.
벌린다 편다 어원은 같은 것이다.
발음상의 변화일 뿐이다.
첫댓글 삼국유사에서 허왕후가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喩陀國) 출신의 공주”라고
주장함에 따라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가 아유타의 뿌리를 찾은 끝에 인도 최대
주인 우따르 프라데시주의 아요디야라고 결정했다. 이는 인도의 수많은 지명
가운데 아유타와 발음이 가장 흡사한 곳이 아요디야이기 때문이다.
아요디야는 ‘싸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힌디어의 뿌리)로
그 발음도 당시엔 ‘아요다’였다.
인도에 ‘아요디야’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또 하나의 아요디야는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수백 개가 되는 타밀어를 쓰는
인도 남동부 타밀 나두주(州)의 주도 첸나이(영어 이름 마드라스) 동쪽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다. 힌두교 국가 인도와 인접한 회교도 나라인 방글라데시
에서도 힌두교 마을 아요디야(현지의 뱅골어 발음은 아조다)라는 지명이 있어,
인도대륙에만 아요디야가 모두 3개나 존재한다.
변한 이 방그라 방가라 벵그라 벵가라 라고 불리므로 방글라데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