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백범일지
김구 지음
기적장강만리풍
-264쪽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 이 종손 재승 재혁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르니 마친 수로왕릉 의 추향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어 평생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 로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 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 과 그 종제 맹열과 그 내종형 최경렬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서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내가 그 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고효자이창매지묘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 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