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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挽響山李先生晩燾 二首
(만향산이선생만도) 이수
《향산 李 선생 만도를 추모하다》 2수
我來淸凉下(아래청량하)
不見響山子(불견향산자)
響山何以終(향산하이종)
成就實得是(성취실득시)
청량산 거처를 찾아온 아집이
향산! 그대를 만나지 못했는데
산 메아리를 마감하면 어찌하려나?
성취한 本의 깨우침이 이런 것인가.
*원문1연에서 아(我)는 아집 또는 외고집이란 뜻으로 작가자신을 지칭하며, 하(下)는 거처를 의미함.
*원문2연에서 자(子)는 경칭인데, 여기서는 ‘그대’ 으로 번역하였음.
*원문3연에서 향산(響山)은 고인의 자호이며 동시에 본래의 의미는 ‘산 메아리’란 뜻인데 산 메아리를 마감했다함은 생명을 마감했음을 의미함.
*원문4연의 실득(實得)에서 실(實)은 여기서는 본질, 근본, 본성, 바탕이란 뜻으로 실득이란 ‘得道’와 동의어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음.
烟花聖鮮時(연화성선시)
烜烜好家氏(훤훤호가씨)
隆熙無世世(융희무세세)
響山獨不耻(향산독불치)
안개 속에 꽃이 성스럽고 신선할 즈음
빛이 나고 화려하여 사랑하는 학자분인데
흥성함이 대대로 이어짐이 없어도
산 메아리는 장차 부끄럽지 않으리.
*원문3연에서 융희(隆熙)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의 연호(1907~1910)이기도 함.
【24】挽拓菴金先生道和
(만척암김선생도화)
憶昔承當日(억석승당일)
申勤篤志箴(신근독지잠)
湯慓銘新濯(탕표명신탁)
曾兢戒臨深(증긍계임심)
浩乎何下手(호호하하수)
要在此杍心(요재차자심)
癡庸違法誨(치용위법회)
誰復我金針(수복아금침)
《척암 김 선생 도화를 추모하다》
옛일을 회고하며 오늘 생각에 잠겨보니
뜻하신 가르침을 부지런히 펼치시어 도탑게 하였고
솟구치는 용맹스런 금석문을 새롭게 청소하여
거듭된 굳셈으로 경계에 나아가심이 깊었도다.
아! 광활하심이 어찌 하수라 하겠으며
요긴한 곳에 계셨으니 이것이 가래나무 중심이구나.
미련한 평범함이 위법을 훈계하니
누가 다시 나에게 금언을 내리겠느뇨?
*척암 김 도화 선생은 구한말 안동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신 선비임.
*금석문(3연):쇠와 돌에 새긴 글자를 말하는데 오래토록 숭상하고 기념하는 대상을 지칭함.
*6연에서 ‘가래나무 중심’이란 선비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모범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뜻임.
【25】紫湖精舍修稧時謹次板上韻 三首
(자호정사수설시근차판상운) 삼수
《자호정사 지붕을 손질할 때 삼가 판상에 차운하다》3수
廊廟江湖一念頭(낭묘강호 일념두)
晩年精舍紫陽秋(만년정사 자양추)
記馬何曾經濟策(기마하증 경제책)
束牲還抱攘尊愁(속생환포 양존수)
雲盡蒼屛猶暮壑(운진창병 유모학)
潭空晴月更寒流(담공청월 갱한류)
嗟今叔世知誰責(차금숙세 지수책)
謾讀遺書感不休(만독유서 감불휴)
강호정 별채묘당은 전일함의 극치고
해묵은 정자는 자양현의 추상이니
마상객은 어떻게 미리 법도를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해냈던가?
희생이 안고 온 것은 존귀함을 물리친 시름의 속박이었구나.
푸른 병풍에 구름이 다하니 저무는 골짜기는 머뭇거리고
개인 달은 강가 허공을 차갑게 흐르며 끝없이 가는구나.
오늘에 탄식하노니 말세에 누가 있어 책무를 드러내겠느뇨.
옛일을 알고 있는 남겨진 기록은 감동함에 휴식하지 않으리.
*제목에서 판상운이란 제사 등 어떤 의식을 끝낸 후 그날을 기념하기위해 시모임을 갖는 행사(방법은 벽상운과 동일)로 추측되며 이에 대해 벽상운이란 행사와 관계없이 시제와 압운을 써서 벽에 걸어놓고 각자가 시를 지어 제비뽑기하여 순서에 의해 시를 발표하는 행사임.
*이날 참석한 사람들이 지은 시는 압운 글자가 강의공께서 생전에 지으신 압운 글자와 동일함.
(3수 모두가 1,2,4,6,8연의 끝 자가 頭, 秋, 愁 , 流, 休이며, 작가께서 사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어 고심한 작품으로 추정)
*한시가 중국현대시와 다른 것은 평측과 압운으로써 ‘언어 사용 폭을 제한’시켜 놓고 지정된 시간에 참석자들이 기량을 겨룸.
*강의공께서는 그 당시 장남인 백암공을 잃은 슬픈 속마음을 ‘여름날 토담지붕을 덮은 솔가지가 가을날의 단풍처럼 빨갛게 타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비록 전쟁으로 인한 것이지만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더욱이 백암공께서는 국자감시험에 합격하여 장차 국가의 예비지도자 양성기관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 유생이었으며 또한 가정적으로는 장남이라, 선조(강의공)께서는 살아남은 자신을 원망까지 하시면서 남모르는 수많은 밤과 낮을 홀로 고통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워낙 정신력이 강한분이라 그나마 견디셨는데 그 후 후손들은 선생께서 천국에서나마 근심을 잊으시고 편하게 보내시길 빌며, 그 고통을 대대손손 살아있는 후손들이 분담하고 그 뜻을 기린다는 차원에서 시문과 제문, 축문 등에 休를 사용하였으며, 休자를 사용하여 정자(삼휴정)를 지었으며, 족보를 살펴보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는 많은 후손들이 자호에 休자를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번역인의 6대조 4형제분은 이름에서 학렬 자를 休자로 하셨다. 休라는 것은 휴식이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마음을 비우며 산다는 뜻으로 대외적으로는 영광인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문중의 아픔이며, 고통을 분담하여 하나가되는 ‘가문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음.
*1연에서 전일하다는 것은 마음과 힘을 오직 한곳에만 쓰는 것을 말하는데, 1연의 전체내용은 강의공 부자께서(강호정)는 나라를 구하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신 최고점의 극치라는 뜻임.
*2연에서 추상은 가을날의 서리라는 뜻으로 ‘엄정한 절개’를 상징함.
*3연에서 마상객이란 말을 탄 나그네란 뜻으로 강의공을 지칭하며, 4연의 뜻은 임란참전으로 인하여 얻은 희생은 벼슬을 거부한 것(존귀함을 물리침)과 장남인 백암공을 잃은 시름으로 인한 구속된 마음이라는 것임.
*5연에서 푸른 병풍이란 ‘하늘’을 가리킴.
屹立遺亭江上頭(흘립유정 강상두)
僉謀修稧適丁秋(첨모수설 적정추)
彦卿設食偏多感(언경설식 편다감)
仲淹登樓不禁愁(중엄등루 불금수)
却憐花石猶餘在(각련화석 유여재)
漫見雲泉獨自流(만견운천 독자류)
孱孫非敢追先事(잔손비감 추선사)
要體吾家矜式休(요체오가 긍식휴)
우뚝 서있는 정자는 강의 상류 길목에 자리하고
모두가 모색하여 볏짚을 손질하니 기뻐하는 장정의 계절인데
음식을 베푸니 선비와 관리에게 다량의 인정이 쏠리는지라
누각에 올라 (옛날)한가운데 머무르니 수심이 멈추지 아니하는구나.
연민을 물리치고 꽃무늬 돌비석에 여분의 마음을 잠시 두니
넉넉함을 드러내는 구름 강은 홀로 태고 속으로 흐르는구나.
나약한 후손, 경모하는 조상을 위한 일에 감히 잘못이 있다면
우리 가문의 요긴한 몸통에 자랑하는 관례를 멈추지 않음이라네.
*2연에서 볏짚을 손질한다는 것은 지붕을 손질한다는 뜻인데, 정자의 지붕이 실제 초가일 수도 있고 또는 기와지붕일 수도 있음(인류역사의 시초에는 지붕을 짚으로 덮었기에 짚을 지붕의 대명사격으로 사용한 듯함) 후단에서 기뻐하는 장정의 계절이란 선조의 정자를 수리하니 마치 가을날 곡식을 수확하는 일꾼의 기쁨과 같다는 뜻임.
*3연은 지붕수리한 후 제사를 지냈음을 뜻하며 음복을 함께하니 종인들 간에 정(情)이 두터웠다는 뜻임.
*5연과 6연은 옛 생각에 빠지니 슬픔이 멈추지 않아, 인근에 위치한 돌비석으로 잠시 눈을 돌려 비석에 새겨진 구름문향을 유심히 살펴보니 여유로운 구름들이 마치 태고 속을 흘러가는 것처럼 느꼈음을 뜻함.
*7연과 8연의 의미는 강의공과 백암공 부자께서 임진년에 국난을 극복하신 일은 대외적(국가적)으로는 자랑할 일이나 내적(가문의 관점)으로 실상인 알맹이를 음미하면 지극히 슬픈 일인데 그것을 간과한 채 여태까지 자랑을 일삼은 것이 잘못이라고 작가는 묘사하고 있음.
先亭遺在碧巖頭(선정유재 벽암두)
棟雨簾雲度幾秋(동우렴운 도기추)
百世羹墻尊慕地(백세갱장 존모지)
欄干花石易關愁(난간화석 역관수)
興廢邱園看世道(흥폐구원 간세도)
古今詩賦盡名流(고금시부 진명류)
多士不謀同一案(다사불모 동일안)
從知林構永貽休(종지임구 영이휴)
선대의 정자가 남아있는 곳은 푸른 바위 꼭대기인데
용마루에 비 내리고 주렴에 구름 드리운 것이 몇 해이던가?
일백세대를 견디어온 담장은 우러르는 터전을 소중히 하고
난간에는 꽃무늬 새겨진 돌은 빗장의 시름을 전해주는구나.
언덕과 뜰이 흥하고 폐하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니
시와 부는 고금에 이름난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도다.
많은 선비들이 논의하지 않아도 하나가된 같은 생각인지라
숲을 이루는 사람들이 알고 따른다면 오래토록 休는 남으리.
*2연에서 주렴은 대나무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으로 햇살 등을 가리는 발.
*3연의 의미는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강호정자 건물을 소중히 여기며 보호한다는 뜻임.
*4연에서 빗장이란 대문안쪽에 달린 빗장을 지칭하며, 대문을 닫은 후 가로질러 잠그는 막대기.
(난간에 서서 바라보면 대문안쪽 빗장이 보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
*6연에서 부(賦)는 한문학의 장르의 일종.
*8연에서 숲을 이루는 사람들이란 문중(숲) 구성원인 사람들을 말함.
【26】謹次慕遠堂韻
(근차모원당운)
鄕先可杜有聞經(향선가두유문경)
後裔追之肯構亭(후예추지긍구정)
君國殊恩封縣重(군국수은봉현중)
江湖係戀遠臣停(강호계연원신정)
一體永陽賢難季(일체영양현난계)
百年高鬱氏炳靈(백년고울씨병영)
川阿不改雲嵐攺(천아불개운람이)
從此仁門見晷星(종차인문견구성)
《삼가 모원당을 차운하다》
시골에서 유명한 선비인지 여부는 소문난 글과 친한데
후예들이 옳게 여기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정자를 지어
군자의 고장에 특별히 은혜를 베풀며 현판을 소중히 받드니
강호는 사랑을 잊지 못하고 추종하는 머무름에 마음이 깊었구나.
영천과 한 몸이 되어 현인께서는 말년을 어렵게 보냈으나
고귀한 향기가 백년이니 선생의 신령스러움은 선명하였도다.
변하지 않는 강과 산이 구름과 남기를 바꾸었으니
이를 따르는 어진 문파는 별 그림자를 볼 것이네.
*모원당은 임진왜란 때 성리학자 여헌 장현광(1554~1637)선생의 종택이 소실되자 종인인 장경우 등이 선생을 위해 고향인 경북 구미에 건립한 집인데, 여헌선생은 기존의 성리학을 극복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펼친 것이 세상에 알려져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서 관직이 내려졌으나 거절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모병활동을 하였다가 포항시 죽장면 입암마을(당시는 행정구역이 영천에 속했음)에 있는 일제당에서 생을 마감하였음.
*위 시는 상기 내용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임.
【27】謹次寓慕齋韻
(근차우모재운)
百載經營築數間(백재경영축수간)
於乎德業儘難攀(어호덕업진난반)
臬日定中因舊地(얼일정중인구지)
庭門平正得新顔(정문평정득신안)
賢孫勤力誠無盡(현손근력성무진)
先祖遺模庶不閑(선조유모서불한)
草立墻垣嚴且肅(초립장원엄차숙)
英靈如在有時還(영령여재유시환)
《삼가 우모재를 차운하다》
일백을 머리에 이고 법도를 꾀하고자 수 칸 집을 지어
아! 덕을 세우는 일을 공경하고 의탁함이 극진하였으니
옛 근본으로 말미암아 해시계 막대기가 고정된 곳은 심중이요
신선한 얼굴을 지녔으니 뜰 안의 문은 공평하고 정직하였구나.
현인의 후손이라 애쓰는 정성은 소멸하지 않았고
선조께서 남기신 본보기가 오롯이 휴식하지 않았도다.
풀로 세워진 담장울타리는 엄숙하고 숙연한데
꽃에 영혼이 살아있는 것 같아 당시로 되돌아옴과 친하네.
*우모재는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오동)에 위치하며 선조 때 함평훈도를 역임하신 조황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재사(齋舍)임(훈도란 조선시대 전의감 등에 두었던 종9품 관직이며, 외관직으로는 지방의 향교에서 선비들을 교육시키는 교관(선생)을 말함).
*1연에서 ‘일백을 머리에 이고’ 라는 것은 머리에 담고 있는 지식이 풍부함을 의미함.
【28】謹次安聖碑竪立韻
(근차안성비수립운)
尙憶腥氛蔽海時(상억성분폐해시)
若公尊衛可傳垂(약공존위가전수)
堪嗟中國交蹄久(감차중국교제구)
其柰先宮訊馘遲(기내선궁신괵지)
巖穴猶爲吾道地(암혈유위오도지)
城隍自是昊天期(성황자시호천기)
寒山片石非徒語(한산편석비도어)
還似當年護聖師(환사당연호성사)
《삼가 안성비(碑) 수립에 차운하다》
바다에 도달했을 때 비린 기운을 오히려 생각하게 되고
우러르며 지키는 것이 그대이었기에 전수가능 하였는데
탄식을 견디며 중국을 오고가는 말발굽이 오래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옛집을 조사하여 목 베는 것을 지연하였는가?
바위동굴을 오히려 위하였으니 우리네 도리의 바탕이요
성황당 외고집이 높고 맑은 하늘을 기약하게 하였구나.
쓸쓸한 산의 납작한 돌비석이 여론은 아니라할지라도
그해가 돌아온 것과 닮았기에 성스러운 스승을 지켜주네.
【29】謹次洛南金公世平豎喝韻
(근차낙남김공세평수갈운)
人道先生報索遲(인도선생보색지)
江湖朝市一般知(강호조시일반지)
魯庵天性家文學(노암천성가문학)
英廟春坊國盛時(영묘춘방국성시)
已得靑雲堪致顯(이득청운감치현)
從來蘊玉自含輝(종래온옥자함휘)
衿紳四會題黃絹(금신사회제황견)
却賀慈孫奉孝巵(각하자손봉효치)
《낙남 김 선생 세평 비석세우는 것을 삼가 차운하다》
선생께서 백성을 다스림은 느긋하게 알리고 살핌이라
세상 사람들과 조정 안팎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정에서 글을 배웠기에 천성이 노둔하고 홀연하여
나라가 왕성한 시대에 영예로운 정전은 봄 동네였구나.
이미 얻은 청운을 감내하며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종래에 쌓아온 옥구슬이 스스로 빛을 머금었도다.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흉배 두른 이가 황색 비단에 글 쓰니
자애로운 후손들은 하례를 사양하며 효의 술잔을 받드네.
*김세평: 조선중기 문신으로 자는 안세 호는 낙남 본관은 경주이고 현종 때 건릉능참봉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두 고을을 잘 다스려서 청백리로 임명되었는데 숙종 때 훈련대장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했다고함.
*4연에서 정전(正殿)이란 국가의 정사를 집행하는 곳.
*5연에서 청운(靑雲)은 벼슬을 지칭함.
*1연에서 6연까지는 주인공(김세평 선생)의 삶의 전 과정을 요약 묘사하셨으며 7연과 8연은 비석을 세우는 당시의 광경을 표현하셨는데 7연은 당일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으며 관리들도 찾아와 고급비단에 축문 등을 썼다는 뜻이고 8연은 방문객의 하례에 후손들이 겸손해하며 사양을 했다는 뜻임.
【30】謹次智仙齋韻
(근차지선재운)
俯仰乾坤一草堂(부앙건곤 일초당)
主人家計晩年長(주인가계 만년장)
木食林居村似澹(목식림거 촌사담)
泉精石采地還粧(천정석채 지환장)
范帳煙深分夜碧(범장연심 분야벽)
韋園花構半春香(위원화구 반춘향)
仁山智水非徒耳(인산지수 비도이)
看取工夫次第光(간취공부 차제광)
《삼가 지선재를 차운하다》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봐도 초당은 한결같고
집을 계산하는 주인장은 저무는 해에 늑장부리누나.
나무를 양육하여 숲 우거진 마을은 담담한데
깨끗한 샘과 풍치 있는 바위로 지면은 화장을 하였구나.
연기가 자욱하니 단정한 장막은 저녁 푸름 베풀고
꽃이 만발한 둘레 동산에 봄 향기가 한창이어라.
어진 산과 지혜로운 물을 함께 들을 수는 없으나
보는 것으로써 공부하니 버금순서로 빛을 발하네.
*지선재(智仙齋)는 지혜로운 신선이 머무는 누각이라는 뜻임.
*2연에서 집을 계산한다는 것은 집이 낡았으나 주인은 수리하지 않고 늑장을 부린다는 뜻으로 유유자적함을 묘사한 것임.
【31】五懷堂會中敬賦一律
(오회당회중경부일율)
紫陽山水最遺名(자양산수 최유명)
堂構丁寧有述明(당구정녕 유술명)
醉月觴飛靈運樂(취월상비 영운락)
寒天衣拊伯康情(한천의부 백강정)
後屬其何無念祖(후속기하 무념조)
今人自定不忘生(금인자정 불망생)
光風設食非徒耳(광풍설식 비도이)
千載悠悠繼止聲(천재유유 계지성)
《오회당 모임 중에 공경하며 부(賦) 한수를 읊다》
자양산수의 으뜸이라는 명성이 전하여지니
정자구조가 정녕 넉넉한 밝음을 펼치는데
취한 달빛에 술잔을 받드니 즐거움이 신비로워
서늘한 날씨에 옷깃을 어루만지니 다정이 극치로다
후손이 장차 어찌 선조를 생각하지 않으랴만
지금의 사람이 본시 정해짐은 탄생을 잊지 않음이구나.
세월바람에 먹힌 것을 모두가 감지하지 못했어도
천년을 실어 까마득하니 이어지고 끊기는 멋이런가.
*오회당: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위치하며 영조 때 선조이신 정 석현을 추모하기 위해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아래 건립.
*원문 7연에서 설식(設食)을 먹다가 아닌 수동형인 ‘먹힌’으로 번역하였으며 그 뜻은 건물이 세월의 풍우에 의해 자연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사람이 살다보니 세월 따라 자신의 태생을 잊어버린다는 뜻일 수도 있음. 아울러 후단에서 이(耳)를 ‘듣다’가 아닌 감지하다로 번역하였음.
*작가께서는 8연에서 창가(唱歌)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이어지고 끊기는’ 멋의 풍류를 오랜 세월을 견디어온 오회당 또는 문중사에 접목시켜 이를 시적으로 묘사하신 듯함.
【32】伏次追慕齋韻
(복차추모재운)
先齋新築紫陽中(선재신축 자양중)
秩秩幽幽告落功(질질유유 고락공)
感悽常切履寒露(감처상절 이한로)
享假須欽渙樷風(향가수흠 환총풍)
也是百工居肆業(야시백공 거사업)
還應三代學端蒙(환응삼대 학단몽)
我願宗盟歸好處(아원종맹 귀호처)
仁山智水與之同(인산지수 여지동)
《머리 숙여 추모재를 차운하다》
조상의 누각을 자양고을에 신축할 수 있는 것은
숙고함이 깊고 그윽했던 것이 준공을 고하는 공로인데
슬픈 감정이 항상 절박했던지라 한로가 지났기에
제사를 빌려 마침내 흠모하니 번잡한 기운 흩어지누나.
방자함을 업으로 삼았으니 백가지 기교가 이것 이런가!
삼대를 되돌아 화답에 응하여 배움의 단초가 암담했도다.
우리가 원하던 종중의 맹세는 명당에 자리하고
인자한 산과 지혜로운 물이 함께하며 어울리네.
【33】謹次忠孝齋韻
(근차충효재운)
賀爲新成一肯堂(하위신성 일긍당)
相傳世世可流芳(상전세세 가류방)
當年主辱身先死(당년주욕 신선사)
此地山高水又長(차지산고 수우장)
慕仰遺風常凜凜(모앙유풍 상늠름)
於乎往來復蒼蒼(어호왕래 복창창)
父忠子孝家門學(부충자효 가문학)
從古永陽鄒魯鄕(종고영양 추노향)
《삼가 충효재에 차운하다》
새로운 것을 이루어 기리는 행위를 온전히 수긍하게 하는 전당은
대대손손 서로에게 전해지니 가히 향기가 흐르는구나.
그해 임금께서 치욕을 당하자 몸소 초월하시어 목숨을 걸었으니
이 땅에 산 높고 강물 또한 길어라
우러러 그리워하니 남기신 교화는 변함없이 늠름하시어
아! 오고가심이 다시금 푸르고 푸르도다.
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를 행하는 것은 가문의 가르침이니
영양(영천)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공맹의 고향이구나.
*충효재: 영천군 자양면 충효리에 위치하며 구한말 산남의진대장으로서 흥해, 청하, 영천, 영해, 청송, 신녕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하시다가 순국하신 정환직(1844-1907)선생과 용기(1862-1905)선생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코자 1923년에 건립하였음. 선생의 호는 동엄 이시고 본관은 오천이다. 의금부도사 및 중추원참의를 역임하셨으며, 아드님은 혜민원 총무를 거쳐 민영환 등과 함께 독립회 등에 가담하셨으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음.
*7연과 8연의 내면에는 임란 의병장이신 호수 정세아선생 부자의 내용도 함께 곁들어 묘사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