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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보고서로 자서전 써 봤습니다.
오늘의 인민-역사가-되기
이 글이 자서전의 형식을 띨 것임은 분명하다. 애초 그런 의도에서 사료들을 수집했고, 스스로도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 하워드 진과 같은 역사학자들이 말년에 인생을 돌아보며 저술했던 색깔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직업적 역사가도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대가들도 아니다. 그래서 자서전이 갖는 회고적 조망과 낭만적 향수라는 것에서 아직 장년층에 불과한 내가 거리낄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앞으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결국 개인사를 서술할 때 현재와 대비됨으로써 등장하게 될 회고적 관점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개인이나 집단과 사회의 역사 그 무엇이든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춰보지 않은 채 서술될 수 없다 해서 반드시 회고적일 수 밖에 없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다만, 내가 대가들의 자서전에서 느꼈던 한계 같은 것들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역사적 자료들을 뒤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넋두리 같은 고백록에 그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늘을 기록하려 한다면, 어제의 흔적과 내일에 대한 기대 없이 어떤 기록을 남길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보다는 이미 완결되어 정해진 법칙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점쟁이나 전능한 신에게는 역사적 서술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는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미확정성들이 오늘을 이야기할 다채로운 가능성으로 펼쳐져 있다.
어떤 면에서 역사가는 아마도 무당과 신을 통해 욕망하는 사람들의 목표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조의 순간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즉, 지속적으로 새롭게 서술되면서 창조되는 세계를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다.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지는 않으면서도 뭔가를 쓰는 행위 자체가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라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를 지라도 진리를 창조하려는 욕망만은 공통적이다. 물론, 쓰는 것만으로 무슨 세상을 바꿀 진리를 창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소위 먹물이라 불리는 역사가 집단이 세상을 바꾼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역사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세상이 바뀐 흔적들을 접하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백, 수천 년 전의 기록들은 결국 어떤 퇴색되어 왜곡을 피할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변형을 자체의 속성으로 갖는 기억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는 갈 곳을 잃은 듯이 보인다. 보다 솔직히 말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고민하지 않은 채, 전통의 방식대로 찍어낸 옹기처럼 습관적으로 가던 길을 가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짜릿한 전율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것이다. TV와 인터넷을 비롯한 대중 매체를 통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문학 엔터테이너들 가운데 역사학자들의 인기가 가속화되는 것에 비례해 역사학계와 대중과의 간극은 줄어들고 있을까? 굳이 저 멀리 조선시대나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대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확장을 지속하고 있다. 2017년 <1987년>이라는 영화가 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보수정권 9년 동안 저질러진 광우병, 천안함, 4대강, 세월호, 그리고 헌정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탄핵에 이르는 사건을 되돌아 봐야 한다. 역사학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 대중과 더 가까워졌을까? 오히려 대중들이 온갖 디지털 사료들을 발굴해 해석하고 가공해 그들만의 새로운 디지털 역사시대를 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근현대사는 대중의 역량이 일정부분 역사학자의 전문성을 넘어설 수도 있지만, 고대와 중세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들은 사라져 버린 고어들과 먹물 분위기 물씬 나는 고전어에 대한 전문적 수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대어와 다르고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학문적 수련을 위한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한시를 읊조리고 라틴어 경구와 그리스 서사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스승에서 제자로 전수되던 전통은 여전히 유효할까? 이런 역사학계의 독점적 지위가 앞으로도 그렇게 될 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몇 년 전 프랑스로 의철학을 공부하러 간 동료 중 한 명은 자신이 프랑스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19세기까지의 사료들 중 주요 문헌들은 세계 곳곳에서 온라인으로 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다. 편집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랍어 사본들을 제외하면, 이제 지중해 고중세 시대의 고전어 판본들의 디지털화는 국경을 넘어 접속이 가능하다. 사료를 찾아 유학을 가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물론 뒤비가 뒤져대던 수도원의 금전출납부처럼 자질구레한 일상의 흔적들은 여전히 전문 역사학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역사학자는 고상한 사료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즉, 고중세 문헌학자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에서 새롭게 역사를 서술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미 고고학자들은 더 이상 원시 인류의 유골을 짜맞추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중세 수도원 묘지에서 발견된 음식쓰레기들과 유골의 성분을 조사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감성의 역사에 도전했던 알랭 꼬르벵이 악취, 날씨, 창부와 같은 것들을 다뤘던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꼬르벵과 같이 <몸의 역사>를 썼던 조르주 비가렐로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 빌려 봤던 최덕경의 <동아시아 농업 사상의 똥 생태학>이니 카트린 드 실기의 <쓰레기, 문명의 그림자>와 같은 책들도 이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불결하고 지저분한 것들이나 너무나 익숙해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엔 평범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역사가는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결국 나의 평범하고 사소한 흔적들을 되짚는 것으로 자서전이 시작될 수 밖에 없다. 꼬르벵의 날씨, 침묵에 관한 저술들이 공감과 동시에 어떤 불편함을 줬던 것을 떠올려 본다. 기록물을 남길 수 있었던 먹물들의 시각에서 옛 시절의 감성의 역사를 재구축한다는 것. 누구의 시선으로 역사를 볼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아마도 이 자서전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전문 역사학자가 아직은 되지 않은 일반 대중 또는 ‘인민’의 시각으로 본 한국 현대사의 40여 년을 나름대로 새롭게 돌아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요즘 내게 중요한 일상은 육아와 공부의 병행에 대한 실험이다. 전에는 가능할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정치적 외교적으로 만발하고 있는 남한에 사는 내 일상에서도 그런 것들을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서전 쓰기도 결국 그러한 시도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
두 딸의 육아를 병행하며 공부를 하다 보니, 늘 나의 어린 시절과 대비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가끔은 내가 떠올린 기억이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옛날 기억 중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보면, 7살인 첫째 딸은 이제 제법 시간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서 몇 년 전의 사건들을 조금씩 떠올려보고 들려준다. 물론 둘째도 질세라 열심히 뭔가를 폭포수처럼 떠들어대지만, 대부분은 언니의 기억을 묘하게 엮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거나, 최근 기억을 오랜 얘기처럼 연기하듯이 말해 준다. 아직 둘째에게는 과거보다는 모든 게 현재형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듯 하다. 어쨌든, 첫째의 기억의 편린들을 쫓다 보면, 4살 때 동생이 태어난 날의 기억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앞으로 얘기하겠지만, 두 딸은 모두 집에서 태어났다. 첫째는 자신의 방에서 둘째는 피아노가 있는 큰 방에서.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모두 안산의 어느 조산원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주민등록시스템이란 것이 집에서의 출산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은 이제 병원의 영역이 된 지가 오래인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소위 절친 중의 한 명은 집에서 동네 할머니가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절친에게 그 질문을 던진 때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뭔가를 열심히 새롭게 공부하느라 파보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즈음에는 출산의 주체와 장소가 병원으로 넘어가게 된 시기를 통계청 자료로 뒤져보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사실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 더러, 요즘엔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게 병원에서 태어나는 것이 남한의 현실이다. 아버지는 46년생으로 소위 피란을 갔던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로 병원에서 탄생한다는 것이 기이한 세대였다. 한 세대만에 이렇게 바뀐 것이 요즘의 빠른 시대변화에 그리 충격적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태어나던 시대에도 집에서 출산하던 비율은 절반은 아니더라도 꽤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 가장 이른 기억은 5살 무렵에 찍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이제는 사진이 기억을 유발한 것인지 기억이 강렬해 그 사진만을 유독 관심 있게 봤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색동옷이라고 불리던 한복을 차려 입고 기차 식당칸에서 포크로 뭔가를 먹던 모습이다. 또 하나는 어느 야외 파라솔에서 킨 사이다에 빨대를 꽂아 마시던 장면이다. 첫째 딸의 잊을 수 없는 옛 기억 중에도 들어가 있는 ‘사이다’에 대한 기억. 우리 부부는 모두 탄산음료를 즐겨먹던 10대를 지나 20대를 거쳐 오면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고깃집 회식 때에도 그 흔한 사이다 한 병을 마시지 않게 됐다. 결국 아이들의 육아에서도 사이다는 화석처럼 멸종된 유물로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러던 첫째 딸은 아버지의 칠순 잔치에서 부모 곁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그 날 처음 만난 사촌 언니가 생애 처음으로 바로 그 ‘사이다’를 줬던 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의 사건을 이후에도 몇 번이나 잠자리에서 말하던 첫째를 보면서, 나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탄산음료의 기억과 묘하게 대비되던 생각이 났다. 인간의 미각은 정말 강렬함에서는 다른 감각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사이다를 생애 처음 맛본 딸의 느낌을 나도 어렸을 적 이미 겪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치아관리니 건강 때문에 아이들에게 탄산음료를 금지하는 미국의 어느 주 법안까지 등장한 상태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사이다는 사라진 듯 하지만, 실제로는 에이드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여전히 카페나 음식점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렬한 기억의 장소가 기차의 식당칸이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당시에 식당칸을 이용한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특실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도공무원으로 33년 간의 공무원 생활을 겪은 아버지의 삶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개발 독재 시대라 불리던 박정희 정권이 6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발 계획 5개년에 따라 건설했던 경부 고속도로가 70년에 완공되긴 했지만, 아직 올림픽 특수를 타고 80년대 마이카 시대가 오려면 멀던 때였다. 일제와 서구 열강이 구한말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했던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경인선이 최초의 선로였다. 어렸을 때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완행 열차를 타고 지금의 안산에 위치한 소래 포구에 가서 각종 수산물을 싼 값에 사서 철로 위에서 구워먹던 것도 잊을 수가 없다. 수인선을 운행하는 기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실제 운행 중인 열차의 운전대를 잡아보기도 하는 특권을 누린 것도 아버지의 직업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 최초의 자동차가 93년도에 생기기 전까지 내 모든 중장거리 이동 수단은 기차였다. 외가였던 천안을 가든지 멀리 전라도 전주를 가든지 언제나 열차 이외의 수단으로 움직여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6.15 선언의 후속 절차 중 하나였던 남북 철로 연결과 유라시아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내게 묘한 흥분을 주기도 한다. 지질학과 지리학이 구분되지 않던 어린 시절, 자연 풍광을 원없이 맛보던 열차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기 때문이다. 버스나 자동차와는 달리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묘하게 정적인 느낌이 있었다.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 하면서도 원경에서 멀리 조망하면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적 기억들에 담긴 농촌의 일상들은 그로부터 먼 훗날 스위스나 스페인을 기차로 여행할 때도 떠오르곤 했다.
기차로 보던 풍광들과는 다르게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수원이라는 도시였다. 그 때만해도 도시계획이나 골목이 반듯하게 구획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사실상 외지인이 헤매기 딱 좋은, 번지 수를 알아도 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집집마다 커다란 정원은 아니어도 조그만 텃밭이나 김장하고 난 뒤의 항아리를 묻을 땅이 있었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이런 주거 공간 이외의 자투리 공간의 존재는 사실상 옥외 화장실의 존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화장실이 모두 실내로 흡수된 주택 구조에 살다 보니 아파트라는 기이한 문화 속에 살게 되면서 텃밭이나 마당이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직도 나는 수직으로 밀집된 아파트 문화를 꺼려하는 터라 다세대의 소규모 가옥에 살고 있다. 오히려 결혼 이후 거의 단독주택에 사셨던 부모님은 이제 아파트로 이사해 살고 계신다. 무엇보다 이주의 원인이 도시 재개발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라는 미국계 금융회사가 남기고 간 상흔이 수원의 부모님 계신 곳에서는 재개발이라는 현실로 다가왔다. 거의 30년을 가까이 사셨던 터전이 별다른 이유 없이 정부의 정책에 따라 철거되어야 하는 상황이 우리 집만의 경우는 아니었다. 길게는 70년대 이후 이촌향도의 가속화 속에서 시골도 도시화 되어 이제는 웬만한 군 단위 시골에서도 아파트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오히려 부동산 업자들이 시골의 아파트를 전원아파트라면서 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비록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내게 시골의 경치가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방학이면 늘 외가였던 천안으로 장기 체류하면서 사촌들과 뛰어 놀던 기억 때문이다. 소달구지를 타던 시절이 경운기로 바뀌고 이제는 아파트 숲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될 때마다 외가로의 발길이 뜸해졌던 것 같다. 남한의 도농 풍경이 변해가면서 나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제도교육으로 더 깊숙이 그리고 입시경쟁의 한복판에 서게 됨으로써, 방학 동안의 장기 체류는 점점 꿈 같은 일이 되어 갔다. 몇 년 전에 입학한 조카가 매번 장인어른 댁에 내려와 밀린 숙제를 하느라고 친인척들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그 시절이 좀 더 앞당겨진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강남에서는 4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을 보내려고 동네 엄마들끼리 모임을 결성해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이다. 극단적 상황이 강남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전반적으로 학생들에게 학업부담의 강도는 높아진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요즘엔 언제일지 모를 남북한의 인적 물적 교류로 북한의 자연환경이 남한을 답습하지 않을까 괜히 걱정되기도 한다. 흡수통일은 버렸을지언정, 남한의 부동산 기득권들이 북한의 널따란 들과 산야를 자신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변질시키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들 수 밖에 없다. 멀리는 미국에 가서도 부동산 폭등의 장본인이라 지탄 받기도 하지만, 가깝게는 천혜의 자연을 가진 제주도조차 서울내기들이 내려와 부동산 시장을 어지럽힌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어린이집을 3세부터 7세까지 다니면서 취학 전에 이미 또래 문화를 국가 제도의 틀에서 겪게 되지만, 내 어릴 적에는 유치원이 첫 집단 보육시설의 관문이었다. 게다가 유치원도 의무교육이 아니었으니 입학 전까지 그냥 동네 형 동생들을 비롯한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 마련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따라 술래잡기를 하거나 공사장에서 가져온 온갖 부산물들로 제각각 놀이를 만들곤 했다. 도시에는 맞벌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부모와 어떤 식으로든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내 두 딸의 경우, 외가든 친가든 조부모를 보거나 친인척을 만난다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사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그나마 가까운 수원 친가인 경우 일부러라도 손녀딸들과 부모님을 자주 만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내려가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 조부모님들은 예전과는 달라진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산업화 시기의 남한의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는 와중에도, 조부모들에게 말년에 손자손녀를 돌보는 것은 기쁨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사회적 관습 같은 것이다. 운동회나 입학식 때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가 왔던 아이들이 드물지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국가 보육시설이 점차 확대되고, 육아의 주체가 오로지 부부에게로 전이되는 본격적인 핵가족 시대와 더불어 소위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조부모들은 이제 당신들의 삶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제는 미리 시간을 맞춰 내려가지 않으면, 아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조부모와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보육시설의 확충이 육아 문화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는 느낌을 근래 들어 자주 받게 된다. 어쩌면, 삶의 익숙한 문화적 양상들이 어떻게 변해야 할 지 고민도 하기 전에 급변하는 사회적 현상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수년 전에 어느 유력 정치인이 대선 후보 공약의 화두로 내걸었던 ‘저녁이 있는 삶’이 실질적으로 고려되는 시대가 요즘이다. 갑자기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일자리 문제가 육아를 비롯한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양적 일자리의 확충이 아니라 52시간의 법정 근로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OECD 최장 근로 시간을 자랑하던 국가가 왜 갑자기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을 내세우게 되었는가? 이제 박정희로 시작해 전두환 시대에 누리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고성장 국가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그러한 고도 성장의 판박이가 오늘날 중국 경제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제는 저성장에 걸맞게 소득과 삶의 질을 고민해야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의제에 불과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돌파구는 지금까지 국가주도의 방향성을 인민에게 넘겨 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통일을 향한 여정이 그러한 방향전환의 시초가 될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인민의 상상력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개마고원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평양으로 옥류관 냉면을 맛보러 가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는 피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남한의 경제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방책으로서만 논의되지 않을까 하는. 단적으로 남과 북 사이에는 토지 공개념을 두고 근본적인 심연이 자리한다. 남한의 경우, 이미 온갖 위헌 소송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문화된 개념인 반면, 북한의 경우 국토개발의 전권이 국가에 귀속되기에 토지는 전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최근 베트남에서 외국 특히, 중국 투자자본에 대해 99년 토지 이용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냈다가 극렬한 반중시위가 발생했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인민이 보기에 남한의 경제적 도전은 한편으로 침략적 제국주의의 판박이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남한이 급격한 고도성장을 통해 이룩해 낸 성과들 이면의 폐단들이 이제서야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공립 육아 시설 확충을 얘기하지만, 정작 자기 집 앞의 동네에서 맘 편히 놀 수 없는 거주공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어디든 침범할 수 있는 이면도로의 확장은 결국 아이들의 골목을 대체해 버린 것이다.
내 나름으로는 육아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의미로 시작한 1년 간의 육아 휴학이 이제 마무리 되는 막바지에 두 딸과 함께 제주도에서 작은 일상의 실험을 해 봤다. 육아휴학 이전에도 아이들 등하원을 비롯해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소소한 육아 일상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이집도 엄마도 없이 터전을 옮겨 20여일을 살아 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시도였다. 시작은 작은 계기로 하게 됐다. 제주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지인의 호의로 주저 없이 단행한 실험. 의식주 가운데 결국 살 곳만 정해지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남한 사람만큼 절절히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깨달은 인민보다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쫓는 쥐떼들처럼 모두들 부동산의 신화에 물들어 있는 듯 하다. 저녁이 있는 삶이 시대를 앞선 슬로건이었던 것은 일과 행복에 대한 인민들의 행동이 아직은 덜 무르익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권 때 수구언론과 부동산 기득권 층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물어 뜯던 종부세와 사학법이 누더기로 개정되던 것이 동시에 떠오른다. MB라는 부동산 건설업자 대통령의 신화에 모두들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한 표씩 던졌던 시대가 박정희 시대의 붕괴를 상징하는 박그네의 탄핵으로 일단락이 됐다. 인민이 늘 현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상식이다. 다만, 결국 변화는 인민이 앞장설 때 가능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다. 역사가 늘 진보하는 것도, 현명한 판단에 따르는 것도 아님을 21세기 남한의 역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나 하나일 것 같지는 않다.
돌이켜 보면, 동네 골목 문화의 존재가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과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희미해졌다는 것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방과 후에 옆집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동네 골목 대장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어서 온갖 연령대의 동네 아이들이 몰려 다니며 놀곤 했다. 동네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 훈계 정도 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았고, 낯선 이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의 행동에 훈계를 하다가 범죄행위로 취급되기도 하고, 반대로 흉흉한 아동범죄의 위험에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지나치게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집 앞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이 오늘날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범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 유명했던 ‘개구리 소년들’과 같은 유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괴범죄는 그 때도 여전했다. 그러나 잠재적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오늘날과 차원이 달랐던 것에는 적어도 앞집과 옆집에 누가 살며, 누구네 몇 째 딸 정도는 알면서 지내던 ‘동네’라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 사회시간 그룹 숙제로 지도를 그리러 답사를 나간 때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신시가지라 불리는 곳에나 있었을 뿐, 지금처럼 도시 전체의 배경 숲처럼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는 그 풍경은, 뭔가를 지도에 그려봐도 성냥갑처럼 똑 같은 길다란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낯설기 그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집안이 아파트 문화에 진입한 것은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였으니, 여전히 나는 남한의 주류 거주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셈이다. 사회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촌향도라는 개념을 배우면서도, 정작 내가 그 속도전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깨닫기는 쉽지 않았다. 조금씩 변해가는 외가의 풍경과 하나 둘씩 아파트로 들어간다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떤 상실감 같은 것은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지인들을 만나서 우리 시대를 ‘고향이 사라진 시대’라고 부른다. 명절이면 내려가던 시골들도 이제는 상전벽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린 곳이 부지기수다. 댐 건설이나 산업단지로 시작해서 요즘에는 도시 재개발로 수십 년 동안 살아오던 터전이 순식간에 허허벌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 유년시절의 동네도 지금은 아파트 건설 현장에 포획된 지가 오래다.
<강남 1970>이라는 영화는, 논밭으로 가득했던 시골이었던 오늘날의 강남 땅이 어떻게 정치권력의 탐욕에서 개발되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에 편승해 한 몫 잡으려던 조폭과 재벌, 부동산 업자들, 끝으로 막차에 오른 일부 인민들까지 부동산 투기의 광풍 속에 몰려든다. 사실 당시에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에 오를 정도면 중산층을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가끔씩 부동산 투기에는 좌우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왜 다운계약서나 위장전입인지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이미 남한 사회에서 상당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에게 부동산 투기는 빼놓을 수 없는 생존방식인 것이다. 이 욕망의 그늘에서,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어린이집 등하원 시에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이 바로 내 차를 피해 비켜선 뒤 조심스레 지나칠 때이다. 이제는 집 앞에까지 아스팔트 이면도로가 점유해 버린 풍경 속에서 아이들은 단 5분이라도 차 없는 골목에서 뛰어 놀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의 학부모들이 지나치게 안전과 위험에 민감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성장과 개발의 늪에 빠진 뒤틀린 욕망이 만들어 낸 공간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자칭 육아실험을 한답시고 제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람의 냄새였다. 서울 동네에서 미세먼지가 뿌옇게 뒤덮은 날들을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 맡았던, 동네 가발공장의 분진이 떠오른다. 지금이야 거주지에 그런 환경 위해 시설을 허가해 주지도 않겠지만, 당시에는 도시 곳곳에 이런 저런 소규모 공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주거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커다란 굴뚝에서 희뿌옇고 시커먼 매연을 내던 공장들이 드물지 않던 시대에 매일 저녁 뉴스는 ‘스모그’에 대한 얘기였다. 그런데 국민학교 사회 문제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스모그의 위험성에 비해 도시에 살았어도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이들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보다는 규모가 작은 수원이라는 도시라는 차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에 비해 일반 인민들의 경각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마 절대 수치만 놓고 보면, 80년대 스모그로 인한 미세먼지의 양은 오늘날보다 월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중국발 황사가 문제라느니 국내적 요인이 주요하다느니 주장은 분분하지만, 핵심은 이제 내 어릴 적보다 미세먼지의 수준이 덜한 시대가 되었어도 사람들이 안심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자외선 지수와 먼지 오염도에 따라 마스크를 비롯한 호흡기를 감싸는 용품으로 치장한 나들이객들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오늘날이 낯설기 그지 없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아침 나절이면 환기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은 습관적인 일이었지, 기상정보에 따르는 행위가 아니었다. 가발공장의 분진과 방역차량의 연기를 쫓아다니며 놀던 시대를 떠올려 보면 이것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가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가속화 될 것 같다. 최근에 방사능 물질인 라돈이 검출된 침대에서 보듯이, 첨단기술에 대한 신화에 빠져, 가리지 않고 써왔던 방식들에 대해 인민의 안전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60년대 DDT의 생태계 파괴 과정을 폭로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남한에서는 이제서야 제대로 이해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두 딸에게 장난감을 사준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도 장난감은 넘쳐난다. 대부분 친척이나 지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할 때 가장 살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난감이라고 단연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남한, 아니 이 세계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정형화된 장난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듯이, 온갖 장난감을 사들여도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만일 노는 것이 목적이라면, 장난감은 최소화하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자연을 더 많이 접하는 것이 좋다. 자연은 늘 그런 듯 변함없는 장난감 같지만 사실 아이들은 온갖 방식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내 어릴 적에는 장난감의 종류 자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방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놀이 문화가 아니었다. 맘대로 실컷 뛰놀다가 배고프면 집으로 들어오곤 했던 시절과 먹거리가 넘쳐나서 밥먹이기가 육아에서 제일 힘들다는 엄마들의 하소연이 심심찮게 들리는 오늘날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먹거리와 놀이가 모두 아이들의 욕망과 관계된 것이라면, 진정 필요로 할 때 공급될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방 한 가득 장난감으로 가득 차도 결국은 갖고 노는 것은 몇 몇 손에 익숙해져 선호하는 몇 가지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잉여일 따름이다. 아무리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며 내놓아도 배고프지 않으면 밥 한술을 떠넘기기가 힘든 것이 아이들의 식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식을 수시로 주면서 밥 때를 가리지 않고 군것질을 한 아이에게 끼니를 거나하게 챙겨줘 봐야 돌아오는 것은 식어터진 음식을 처리할 수 밖에 없는 부모 자신의 처량한 신세일 뿐이다.
이제 아이들이 자랄수록 늘어가는 품목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이다. 요즘엔 성인들을 위한 도서목록도 넘쳐나지만, 아동 도서의 그 다양한 종류를 보노라면 책읽기를 정말 아이들이 좋아하게 된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많다.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아동용 도서라는 것은 위인전이나 동화전집을 제외하면,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따분한 아버지의 서재에서 독서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동 도서를 집에서 찾기 보다는 동네 친구들이나 학교에서 열심히 빌려본 것으로 보아 특별히 이 점에 대해서 부모님이 관심을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다른 부모님에 비해 월등하게 아동 도서에 무관심했다기 보다는, 당시에는 방문판매원이라 불리던 도서 판촉사원들이 동네 골목을 찾아 다니며 전집으로 싸게 파는 식이었다. 어느 집이 샀다고 하면 몇 집이 따라서 사고, 그렇게 비슷한 전집들이 집집마다 꽂혀 있었다.
예전에 황석영의 소설을 사재기해서 지탄을 받았던 어느 출판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출판사가 나름 성장하게 된 배경도 따지고 보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전집류를 강남의 부잣집들 상대로 팔아서 성공했다는 얘기가 들려오곤 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특정 출판사의 전집류 책들을 아이들마다 갖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옛 생각이 나서 쓴 웃음이 나곤 했다. 이제 나는 1년에 책 한 권을 잘 사지 않는다. 아마도 엄청나게 폭발한 도서출판 시장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을 소비자일 것이다. 대부분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원서의 경우는 디지털화 되어 있는 자료를 구해 보곤 한다. 가끔씩 지인들의 서재를 보면서 책을 빌려가기도 하고, 상호대차라는 시스템으로 전국의 웬만한 도서관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를 원없이 누리는 편이다. 책의 구매가 물품의 소유욕을 만족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 느낌이 오래 가는 희귀본이 아닌 바에야 구매보다는 빌려보거나 공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요즘은 너무도 많은 책이 출판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인쇄매체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가끔 그래서 나는 세상 자체를 원없이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으로 상상해 본다. 지적재산권을 들먹이며 작가의 노고에 대해 열변을 토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찍이 리차드 스톨만이라는 유명한 해커가 표방했던 ‘카피 레프트’, 즉 지적공유권이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이미 1971년에 시작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가 표방하는 디지털 도서관의 혜택을 고전 문헌 검색 때 자주 느끼게 된다.
학창 시절
나의 경우 제도 교육에 진입하는 순간은 국민학교 입학 때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경시대회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라고 해야 한다. 오늘날 넘쳐나는 올림피아드 대회는 이러한 경향성이 극대화 되어 포화된 상황이라고 볼 만하다. 아마도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시도 수학 경시대회에 학교 대표로 출전했던 것 같다. 수상도 한 것 같지만, 교과서를 넘어서는 수준이 아니라 특별히 어려웠다는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이후로 나갔던 경시대회는 점차 난이도의 중압감이 오늘날로 치면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시대로 변해 갔다. 아마도 전국 단위 수학 경시대회 선발을 위해 학교에서 매일 방과 후에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갖고, 방학 때에도 나와서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국민학교 5,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 3명을 뽑는 학교 대표에 선발되지 못했다. 학업이란 것이 실패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느껴봤던 것 같다. 게다가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자각도 생겼다. 수학과 함께 선발된 과학 경시대회는 대표로 출전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대회를 치렀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정신 없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 나의 성격이 점차적으로 어둡고 과묵해져 갔던 것에는 이런 제도교육의 경쟁 세계에 포획된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늘 방과 후엔 아이들과 축구니 야구니 논두렁밭두렁 같은 놀이를 하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릴 때까지 놀곤 했던 시절과 비교해 보라! 경시대회 준비를 위해 친구들과 멀어지고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수학기호들과 공식과 씨름하거나 텅빈 과학실에서 실험조작을 하면서 보내게 되었으니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에게 엄청난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이자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으로 차출된 청년들이 가슴 속에 품고 다니며 애독했다던 그 책을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만나게 됐다. 국민학생이 읽기엔 뭔가 어둡고 비밀스런 청소년기에 대한 이야기들로 시작했지만, 공감할 만한 점이 있었다. 싱클레어의 두 세계가 물론 남한의 국민학생과는 달랐겠지만, 내게도 그 즈음 어떤 분열된 세계상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아프락삭스.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낡은 세계의 파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어떤 경구처럼 순식간에 떠올리게 되는 문장이 이 책이 내게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 닿는 청소년기의 도서 목록에서 늘 빠지지 않던 헤세의 작품들.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 등등. 더욱이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은 나처럼 지역 수재로 경쟁세계에 내몰리다가 결국에는 자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이보다 더 공감할 만한 책도 없었다. 살면서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최초로 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 자신의 자살보다 일단 주인공의 자살에 공감했다는 점에서. 가끔 입시 스트레스로 자살했다는 청소년들이나, 심지어는 KAIST에 들어간 대학생들도 자살하는 기사를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실존을 부정하다 못해, 삶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경쟁 교육의 산실이 바로 학교라는 것을 이보다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때도 없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름대로는 이대로 질식된 채로 살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개봉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이뤄진 듯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해 얘기를 들었던 것은 중학생 때였고, 제대로 감상해 본 때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국민학교 때부터 경시대회를 준비하던 관성은 중학교에서도 지속되었지만, 이제는 과학고를 향한 진학 대비반이 화두가 된 시대였다. 그 때만 해도 과학고로의 진학은 고교 평준화가 몇 군데 시도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이던 시절이었으니 새로운 신분상승을 향한 관문이었다. 중학교 3년에 대한 기억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가 실패를 맛본 때문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준비했다기 보다는 당시의 이공계 학업에 대한 열풍과 맞물려서, 한편으로는 과학자라는 신화적 이미지에 빠져 있던 청소년기의 소박한 목표였다. 친구들과 놀 시간도 희생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시 학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노력까지 했음에도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실제로 더 놀랐던 것은 주변의 선생님들과 부모님이었다. 모교였던 중학교에서 해마다 1명씩은 과학고로 진학시킨 나름의 노하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원자 중에 내가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여러 번 시험을 복기하면서 깨달았던 것이지만, 나로서는 경쟁시험보다는 장기간에 걸쳐서 꾸준히 조금씩 쌓아가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계량적인 지표들이 수재라는 것을 나타내긴 했어도 경쟁이라는 압박감이 내게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게 자극하기 보다는 장애물로 작용했음을 당시에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지금도 시험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의 30분 남짓한 시간이 떠오를 정도로. 참으로 많은 세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떠올리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버스에 내려서 미련 없이 이제 경시대회와는 담 쌓기로 마음 먹었다. 어떤 면에서 시험의 당락을 그 누구보다 앞서서 예감했던 날이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전환점이라고 여길 만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경시대회를 경험 삼아서 출전하긴 했어도 절대로 수상이나 구체적 목표를 정해 나가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은 오히려 홀가분한 분위기에서 좀 더 자유를 맛봤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적당히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놀 줄도 아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비밀을 손에 넣은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세상은 수학이나 과학을 비롯한 제도교육이 가르치지 않는 배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를 고등학교 2학년 때 보고서 푹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탱고, 아르헨티나 말로는 땅고인데, 그 때만 해도 유럽식인지 아르헨티나 식인지에 대해 구별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후일 이 두 개가 사뭇 다른 춤사위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감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몸을 움직일 기회는 경시대회 준비를 하면서도 꾸준히 운동 삼아 즐겨 했던 것으로 축구가 있었고, 친구들과는 당시의 슬램덩크라는 일본 만화의 대유행으로 농구를 즐기곤 했지만, 춤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질 계기 같은 것은 없었다. 당시 남학생이 빠지게 될 춤이라면, 내가 중학생 때 말 그대로 혜성같이 등장해 일약 아이돌의 시조가 됐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댄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주로 듣던 음악들은 중학교 때 이미 클래식과 케니 지와 같은 색소폰 연주자나 아니면, 조용한 발라드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내 또래의 아이들이 열광적으로 빠져들던 그 댄스문화에서 나는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탱고라는 춤에 빠졌던 것이 나로서도 이상하기 그지 없다.
내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노랫말이나 멜로디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들어보지 않았던 음악을 두 딸과 제주도로 내려가는 첫 날 3시간의 운전 속에서 계속 들었다. 두 딸은 새벽 여행길이라 잠이 든 차 안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음악을 들으면서 당시 내 또래들의 모습과 함께 나처럼 장년층을 넘은 오늘날의 기성세대를 떠올리게 됐다. 거리나 공원에서 이들의 댄스 동작을 연습하려고 휴대용 전축을 들고 다니던 힙합 소년들이 이제는 기성세대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앳된 20대 초반의 가수도 어느 덧 50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최근에도 음반을 내면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그는 분명 당대 10대들의 욕망을 정확히 집어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오늘날 그가 꿈꾸는 음악은 더 이상 10대들에게 그만큼의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실제로 그가 데뷔 이전에 추구했던 음악은 대중적으로 유명했던 음악보다는 오늘날의 음악과 더 가까워 보인다. 80년대 문화에서 독특한 점이 있다면, 대중음악이 상품으로서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외국 언론들이 올림픽 특수를 맞아 경제가 활황을 구가하던 남한을 보고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말을 하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댄스 곡 ‘교실 이데아’의 가사를 음미해 본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그걸로 족해, 내 사투리로 내가 늘어 놓을래,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 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 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그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며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 버리지, 이젠 생각해 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할 척 시대가 지나버린 걸, 좀 더 솔직해 봐 넌 알 수 있어.”
내 사투리로 떠들겠다니. 이미 알퐁스 도데가 마지막 수업에서 묻어버리려 애쓰던 지방 사투리는 여전히 죽지 않은 인민의 반항의지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이 바꾸길 기다리지 말라던 서태지의 94년 이 노래 이후 그의 팬들은 어떻게 살아왔던가? 당시에는 이 가사를 이렇게 음미하면서 주의 깊게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내 음악 감상 목록의 어디에도 주류였던 적이 없는 댄스 가수 1세대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 시절에 나처럼 서태지를 변방으로 여기는 애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이제 서태지에 그렇게 열광하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학부모와 교육자로 의기투합해, 노래 가사처럼 자식들을 질식시키는 사교육시장을 떠받들고 있다는 점이다.
기성세대가 된 그 시절의 나의 또래 청소년들의 감성을 다시 느끼면서 한편으로 이런 감성이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한낱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외침이나 몸부림이었을까? 어쩌면, 히피문화와 락음악에 열광했던 미국의 60-70 세대가 음반의 소비자로 소비문화의 첨병으로 전락해 갔듯이, 남한의 X세대는 대중 문화의 향유자일 뿐, 가사가 담고 있는 저항과 분노의 메시지와는 점차 거리를 두게 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서태지와 저 노래를 부르던 멤버 중 하나는 YG라는 거대 기획사의 사장이 되어 무한 경쟁의 아이돌 양산 공장장이 되었다. 대중가요의 권력의 최상층에 올랐던 이가 전성기 때 불렀던 노래치고는 정말 반예언적인 노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태지는 이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락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본과 영향력에 만족하는 듯 하다. 메시지는 여전히 전달되지만, 먹물성은 좀 더 깊어지고, 음악가로서, 메시아적인 취향은 좀 더 강렬해졌다. ‘하여가’에 등장했던 90년대 초반 국악기 태평소의 연주부분이 강타했던 충격을 기대하기에는 그도 늙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고 싶은 락음악을 할 수 있으니 그는 성공했음에 틀림없다고 봐야 할까?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 보다 더 강렬하게 공명하는데, 인민들은 보다 덜 그의 음악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문화대통령이 되어버려 이제 모난 돌 정 맞듯이 나설 수가 없게 된 족쇄를 누가 채워버렸을까? 10대들의 탈출구를 연예인, 아이돌로 제약해 버리게 되자, 이 놀라운 대중 음악계의 이단아는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꿈이 가진 다양성을 획일화 시킨 꼴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길거리 캐스팅을 꿈꾸고, 아이돌 오디션 수업이 대치동 학원계에서 입시의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가 되어 버린 사교육의 신세계를 마주하면서 어찌 서태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뭔가 부족하다. 서태지 이후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변의 흐름을 좀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하워드 진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말했듯이 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에서 실패만을 본다면 70년대 반전운동의 활화산 같은 생명력은 우연한 사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80년대 남한 대중 음악의 발전상에는 영미에서 주로 태동했던 락음악이 60-70년대 반전 운동과 맞닿았던 것과 비교되는 측면이 있다. 사회적 반항의 흐름들이 젊은 세대를 등에 업고 문화적 조류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90년대 초 서태지의 등장에는 80년대 인민의 저항이 꿈틀거리는 듯 보인다. 박정희의 군부 독재로 암울했던 70년대에 한국 대중음악은 격렬한 메시지를 담은 락음악보다는 은유적인 가사의 포크송이 주류였다. 신중현과 엽전들로 인기를 구가했던 신중현이 퇴폐라는 낙인이 찍혀 활동정지를 당했던 락음악의 암흑기를 지나, 본격적인 전성기는 80년대에 시작된다. 80년 5월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전두환 정권은 어느 해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숨 막히듯 통제되는 교실 속에서 입시 경쟁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고분고분한 듯 보였을 뿐, 실제로는 폭발 일보직전이었듯이. 이런 점에서 87년 6.10 항쟁은 그 심층에서 뚫고 나온 인민의 행동이라 불릴 만하다. 80년 5월에서 87년 6월에 이르는 시간은 실패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인민이 좌충우돌 저항의 돌파구를 찾던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입시제도는 달라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경험으로 보아도 사교육의 변질은 오히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 급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를 비웃으며 셔터 문을 내린 채 밤새 공부해야 했던 학원생들이 드물지 않았다. 서태지는 이 시기 청소년들의 저층에 깔린 억제된 욕망과 분노들을 정확히 간파했다고 봐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서태지를 통한 대리만족에서 오는 울분과 토로만으로는 이 거대한 체계가 무너지기 쉽지 않다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었다. 그렇게 외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내가 겪었던 경쟁세계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아이들을 옥죄는 제도교육의 카스트 제도같은 것이었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 이상으로 실질적으로 뭔가를 바꾸는 것. 어쩌면 내 자신을 바꾸는 것이 진정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제도 교육 속에서 어떻게 반항과 저항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견뎌낼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보란 듯이 대학 진학과 함께 자퇴를 하고 세계를 떠돌며 춤도 배우고 교육제도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그 때가 올 때까지 견디는 것뿐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암시를 걸며 버텼던 고3 시절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해철과 이승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신해철과 서태지는 6촌 지간이다. 그리고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과는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 유명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모두 락음악의 계보에서 시작해 대중과의 접합을 추구했으며, 작사와 작곡이 가능한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신해철의 경우 음악 편집과 프로듀싱 능력까지 겸비했다. 이승환에게는 들국화가, 신해철에게는 부활이, 서태지에게는 시나위라는 락밴드들과의 접점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내 학창시절, 이들 세 명 중 한 명의 음악에라도 빠져 있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던 이들의 음악이 락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내게는 곱씹어 볼 문제였다. 락의 저항정신이 공중파를 타고 대중에게까지 전달되기까지 은밀한 포장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들은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이미 70년대에 대중 음악의 검열제도는 웬만한 연예인들의 입바른 소리 정도는 틀어막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90년대라고 해서 검열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이 상황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듯이 ‘모난 돌 정 맞는다’는 옛 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앞선 세대들과 그 자녀세대들은 대놓고 반항하기가 쉽잖은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고 봐야 한다. 결국 문화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은 서태지가 얻었지만, 그 이상의 저항과 반항의 정신이 10대에게 전염되는 것은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 마치 하워드 진이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한다>에서 미국 제도 교육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장려하는 듯 보여도 결국 민주당과 공화당 이외의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했듯이.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국 선출되지 못했던 정당정치의 왜곡된 모습과 ‘종북’ 딱지로 반 세기가 넘겨 버텨왔던 남한의 수구세력의 존재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을 아직도 ‘인민’이라는 말만큼이나 듣기가 힘든 남한을 보면, 그나마 미국의 정치교육이 보다 개방적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MIT의 촘스키, 예일대의 데이비드 몽고메리, 그리고 보스턴대의 자신을 포함한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활동 공간을 허용하는 기득권층의 자유주의에 현혹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소수의 존재로 자신들의 관용성을 대외적으로 광고하는 동시에 이들을 적절히 선을 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 바로 이 집단들의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샌더스가 민주당의 기득권층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심층집단의 지지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결국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기득권들의 합의나 회의, 토론 보다는 지금까지 배제되고 소외되어 왔던 인민들의 행동이 응집될 때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듯 보인다.
최근 샌더스는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친 트럼프의 공헌을 인정하면서, 이제 의회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로 활동하던 때에 트럼프에 대해 쏟아낸 신랄한 비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남북 관계 전문가가 없다는 미국에서 현 국제정세를 제대로 보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남한의 수구언론이 자기 입맛에 맞게 북한에 대한 추측성 보도를 하고 이를 다시 미국의 우파 주류 매체가 영역해서 보도한 뒤, 다시 남한에서 재인용되면서 뭔가 대단한 전문가의 견해로 포장되는 찌라시 언론의 통제로 70년 넘게 정당화된 정전체제였다. 늘 준전시상태로 살았다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 한번도 평화공존을 제대로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인민들이 이제서야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우리에게 국제 사회의 일부로서, 통일의 상대로서 진정으로 인식되기까지 정말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최근의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굉장히 일렀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학창시절의 제도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제대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시절
연대기적으로만 본다면, 이제 대학 얘기가 펼쳐져야 하겠지만, 20대가 시작된 이후 내게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에는 대학진학이 포함되지 않는다. 어쩌면, 전공을 통해 밥벌이를 한 적이 없을 뿐더러 지금도 여전히 이와는 무관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간단히 나의 전공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왜 결국 대학 자퇴나 중퇴도 아닌 졸업을 하게 되었는가를 밝힐 필요는 있다. 전공 선택에는 그리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입이 치러졌던 90년대 중반에는 반도체 산업의 호황과 IT산업의 초창기로 이공계 인력이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 수준의 사회적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중국의 주류 정치인들 대다수가 공학계열의 학부를 마쳤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이공계열이 정책과 핵심 요직들에서 천대받는 것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리의 과학기술이 근본적 탐구보다는 당장의 기술적 효용과 이득에 초점을 맞춰 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기술직에 대해 천시했던 전통적 문화를 원흉으로 꼽기도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학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제대로 분류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고 보인다. 어떤 타성에 젖어 이런 성향이면 인문계니 자연계니 학생들의 잠재성을 제도교육 초창기 때부터 단정해 버린 뒤부터는 획일화 해버리는 교육은 내가 학창시절 때부터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이었다.
내가 주변에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본래 나는 문과를 선택해 사학과로 진학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을 많이 읽고 동네 친구네 집에 가서 위인전을 몽땅 빌려다 보기도 했으니 당연한 미래일 지도 모른다. 어떤 목적론적 도식에서 보면, 분명 내 독서 목록에서 차지하는 역사서들의 분량만으로도 사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역사일반을 다룬 책이나, 고대나 중세 근대를 비롯한 시대별로 국가별 역사에 대해서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는 표현이 맞았으니까. 아마 내가 역사를 좋아했던 이유가 있다면, 수학과 과학의 도식들로 갑갑했던 것과 달리 역사는 마음대로 탈주하며 상상하고 활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수학이나 과학 책이 하루에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는 절대 학습량이란 게 있다면, 역사서들은 읽다가 끊임없이 샛길로 빠져서 최종적으로는 엉뚱한 곳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맛보게 되는 희열을 주곤 했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수학과 물리학 전공 서적을 새롭게 보게 될 일이 늘어가면서, 사실 내가 배웠던 수학과 물리학이 편협했던 것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얼마든지 수학사와 물리학사도 일반 역사서만큼이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그렇게 수학과 물리학을 접한다면, 정해진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왜 이런 연구를 해야 했는지에 대한 보다 색다른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교육을 혁신하려는 누구든지 학문 자체의 역사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담아 교육철학을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학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공부를 해야 하는 것만큼 기존의 사회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좋은 토대도 없다. 비판이 없는 공부란 사실상 인간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요즘은 AI가 등장하여 몇 몇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비판적 판단을 내릴 날이 머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때는 뭔가 미래지향적이라는 느낌을 주던 POSTECH이라 불리던 포항공과대학 전자전기공학과로 입학을 했다. 전공은 그저 당시의 시류를 좇아 가장 수학과 물리학에 가까운 이공계 학문을 택했다고 봐야 한다.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학창시절 동안 진절머리가 난 터였고, 이제는 뭔가 좀 만들고 부시고 하는 실제적인 공부가 좀 더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학과 공부 자체에 대한 미련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4년 동안 학점은 롤러 코스터를 타듯이, 널뛰기 하듯 했는데, 이유는 전공과의 여부를 떠나 과목 자체가 맘에 들면 열심히 파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다지 관심도 열정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돌이켜 보면, 복소함수론과 양자역학만큼은 수강을 했던 것 자체에 어떤 뿌듯함을 느끼는 과목들이다. 각각 수학과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꾸준히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공계적 소양을 쫓아갈 수 있었던 토대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수학자도 물리학자도 아니지만, 닥치는 대로 수리철학과 물리학에 관한 저술을 읽어서 자기 나름대로 엮어 놓았다. 차이와 반복도 그렇고 천 개의 고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번역을 하는 이들이 들뢰즈의 각주에 등장하는 자연과학 문헌들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엉뚱한 번역을 접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학시절 관심 있는 영역이라서 손을 놓지 않았던 수학과 물리학 공부가 이제서야 빛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연구중심대학 POSTECH. 그 때는 참 대단한 슬로건이라 여겼던 대학의 광고 문구였다. 그러나 하워드 진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밝힌 대로 70년대에 보스턴 대학이 내걸었던 기치가 연구중심의 세계 초일류 대학이었다. 보수적 총장 존 실버의 전횡에 모두 침묵하도록 재임용에서 비판적인 교수들을 탈락시키면서 대학의 먹물들을 통제함으로써, 무려 20년이 넘게 시카고 대학을 좌지우지 했던 인물이었다. 총장 이후에도 이사장을 거쳐서 죽기 몇 년 전에도 다시 총장으로 재직했던 보스턴대의 MB와 같은 인물이었다. 구속이나 여타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다는 점만 빼면. 포항의 조용한 연구시설 같은 대학에서 나는 데모없는 90년대 대학생활을 보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시위에 나서 구사대니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구속되었다가 훈방되기를 밥먹듯이 하던 시절이자, 최루탄이 여전히 대학가의 시위에 사용되던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다닌 대학에서 데모를 벌일 경우, 퇴학을 당할 수 있도록 학칙이 제정되어 있었다. 나는 데모를 할 생각이 없을 지 언정, 퇴학이라니. 그럼 내 고등학교 동창들은 경찰에 끌려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퇴학처분을 무릅쓰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치적인 학칙에 의해 통제 받고 있다는 것쯤은 깨닫고 있었다. 그 때 그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동기생을 만난 적이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익숙한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정치적 일상에서 깨닫게 됐던 때였다.
방학이면 학생 운동하던 절친들을 만나 주야로 술판을 벌이면서 시국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참 온실 속의 화초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학비가 국공립 수준이었던 사립대였던 데다가 온갖 시설들이 연구시설에 준하게 학부 때부터 전폭적으로 지원되던 그 곳은 연구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는 ‘완벽한 낙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위험한 낙원’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승환의 노래 중에 ‘위험한 낙원’에 내가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해 줘요 나를 살려 주세요 내 목소리 들리지 않나요 다시 또 그냥 지나치면 난 그대로 눈을 감고 사라져 버릴지 몰라 답답해요 그대에겐 사소한 얘깃거리 말이 너무 쉽죠 다시 또 그냥 쉽게 잊혀지면 난 그대로 눈을 감고 하찮아 질 거예요 언제나 좋은 것만 찾는 그 뜨겁던 심장과 눈빛과 침묵 속에서 그대도 어쩔 수 없어요 파라다이스 그 파란 하늘 꼭 담은 바다 빛나는 모래알 중 하나가 되겠죠. 그대가 꿈꾸던 파라다이스! 원하는 것 모두 가질 수 있는 그런 대신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게 하죠 벽을 부수고 또 허물수가 없다면 난 그대로 여기 남아 하찮아 질 거예요 언제나 쉬운 것만 찾는 식어버린 심장과 눈빛과 침묵 속에서 그대도 어쩔 수 없어요 파라다이스 그대가 꿈꾸던 파라다이스 원하는 것 모두 가질 수 있는 그런 대신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게 하죠.”
대학생에게 안락함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학비와 기숙사만 해소되어도 충분하다. 연구장비와 시설이 불필요한 것은 아닐 테지만, 미래의 연구자가 될 대학생이 정치적 의식 없이 순응해 갈 때에만 그런 것이 주어진다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인간이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는 바에야 기본적인 자신의 인권조차 통제되는 대학생이 미래의 먹물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내겐 끔찍한 것이 누군가에게 안락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기호식품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할 자유를 갖는다는 기본적 인권의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데모를 하지 않아도 다른 이가 데모를 할 때 어떤 불이익이 가해진다 것에 분노하지 않는 대학생이 진정 고등교육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나? 나는 먹물이 나름대로 사회적 역할이 있다고 보는 편이다. 인민이 분출의 계기를 모색하고 있을 때, 먹물이 전위에 서서 모난 돌 정 맞듯이 먼저 매맞고 쓰러지는 일이다. 내가 아직 진정으로 먹물이 되지 못했다고 믿을 때가 아직 그렇게 철두철미한 투쟁가가 못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많은 수의 명문대생들이자 미래의 먹물이 될 가능성 높은 먹물들이 자신들의 노력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서운함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했던 것을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취가 개인의 순수한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지난한 제도교육의 경쟁세계를 학창시절과 학원강사를 통해 겪고 내린 결론은 이미 그들은 출발선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대부분은 인민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이 지식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맹목적 우월감에 도취된 이들이 너무 많은 듯 하다.
졸업은 선택이었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만두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지만, 집안의 우환으로 졸지에 스무 살에 맏이가 되어버린 둘째라는 상황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그러다가 졸업시즌은 왔고, 4년 간의 대학 공부가 뭔가를 남긴 것이 있는지도 궁금했기에 KAIST로 대학원 시험을 치렀는데 정말 운이 좋아 합격했다. 대학원 1번 면접이라 유독 쉬운 문제를 받았다는 것을 같이 시험을 친 동기생들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구술면접은 내게 그다지 큰 중압감을 주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위험한 낙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공간이었던 KAIST에서의 학업을 지속한다는 것이 싫었다. 결국 진학을 포기하면 바로 군대로 가야 하는 남한의 신체 건장한 남성으로서 실존적 문제에 직면하게 됐고 학사장교로 입대함으로써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학업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장교로 3년 반을 복무한 뒤에 인생에서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세계를 주유하는 기회를 맞이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행
왜 중남미로 여행을 가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난생 처음 해외로 떠나는 여행치고는 참으로 준비가 부족했던 여행이라 할 만 했다. 출국하는 비행기 옆 자리에서 만난 멕시코 사는 교포가 내게 던진 물음이기도 했고,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묻기도 했었다. 문화적 측면으로만 놓고 보자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배우고 싶었던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웠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군대에 들어가서 여유로운 장교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시에 20대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동호회를 통해서 탱고를 접하고 라틴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됐다. 그 때 이후로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려면, 그 나라의 춤과 음악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외국인이 현지인과 만났을 때 춤이라는 매개를 통해 교류하는 것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춤만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여행의 주요 체류지가 쿠바와 칠레였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쿠바야 춤이든 음악이든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보고로서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칠레가 그런가? 당시만 해도 남미의 부국에 깔끔한 도시경관과 안전한 치안 상태로 알려져 있던 이 곳은 와인으로 제일 유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와인을 즐겨 마시지는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물 마시듯 먹던 여행 중의 습관 때문에 각종 와인을 섭렵하며 고급와인도 종종 마시기는 했지만.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그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학생인 파블로 네루다의 고국이다. 솔직히 미스트랄은 시 한편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네루다는 시를 통해 빠졌던 계기가 있었다.
위험한 낙원이었던 대학의 기숙사에는 당시에는 획기적일 정도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는데 24시간 영화만 방송되는 유료채널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무료한 주말이나 학기가 마친 뒤에 술자리도 싫은 때에는 기숙사 휴게실에서 몇 시간이고 영화들을 보곤 했다. 그 중에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바로 네루다의 이탈리아 망명 시절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였다. 제목도 이탈리아 풍에, 초반 분위기도 잔잔한 것이 얼마 안 가서 채널을 돌리려다가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때 마지막 장면에 올라온 ‘시(Poesia)’라는 작품에 매혹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의 내용에 감동한 것도 있지만, 번역된 시로도 이렇게까지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즈음 나는 번역된 외국 문학들에 대해 회의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며칠 후부터 독학으로 스페인어 교재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작심삼일까지는 아니었지만, 한 달 정도 하다가는 뭔가 답답한 마음이 들어 포항 밖에서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교포를 찾아 다니기도 했지만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네루다의 시를 스페인어로 낭송할 수 있다는 것은 마냥 좋았고, 사전을 옆에 두고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는 것에도 종종 빠져들곤 했다. 언젠가는 네루다의 나라 칠레에 가보려던 꿈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것은 분명했다. 졸업하고 군대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자마자 그야말로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해방된 느낌 그대로 별다른 계획도 없이 저지른 여행이었다. 아직도 멕시코에 도착했던 날 숙소를 찾아 헤매던 때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행 준비는 부실했다. 장장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낼 배낭 여행자로서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은 숙소나 유적, 관광지 보다는 네루다의 시와 스페인어 그리고 춤과 문화, 역사에 관해 출판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것뿐이었다. 구체적 여정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배낭여행자.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도 이 때의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새롭게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칠레가 내게 라틴 아메리카라는 지역의 문학을 통해 다가왔다면, 쿠바는 보다 은밀하지만 낭만적인 향수로 다가왔다. 네루다를 알기 전에도 체 게바라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일종의 신화가 되어 버린 영웅이자 젊은이들에게는 반항의 아이콘처럼 느껴지던 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였다. 마침 내가 여행을 계획했던 2004년에 번역 출간된 이 책은, 23살에 의대를 졸업한 뒤, ‘뽀데로사’라는 모터사이클로 남미를 주유하면서 남긴 기행문이다. 아직 혁명의 풍운아나 반제국주의의 아이콘과 같은 거대한 영웅의 모습보다는 좌충우돌 인민의 삶 속으로 뛰어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은 여행기가 오히려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젊은 시절 치기에 빠진 모습 그대로의 체를 보면서 그 이후의 체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을 쿠바에 대해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어떤 정치적 지향점에서 공감을 느꼈던 인물이 있다면, 네루다와 체 이 두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두 생애 초기에는 공산주의나 혁명과 같은 시대의 풍파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눈 뜨게 되는 계기를 접하게 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네루다에게 스페인의 전통시가와 인민의 삶에 천착했던 가르시아 로르카와의 만남은 단지 유명 연애시 작가로 그쳤을 수도 있는 자신의 시 세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체에게는 카스트로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쿠바 혁명의 동지애와 새로운 혁명의 아이콘으로 성장하는 인연이 된다.
대학 시절 체의 평전과 사진을 담은 기록물을 보면서 갖게 된 영웅 이미지를 넘어 실제로 당시의 쿠바인들이 어떻게 그를 기억하고 있을 지가 궁금했다. 네루다의 경우 내가 알고 있는 막연한 환상을 넘어서 칠레의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공산주의자를 끝까지 고수했던 그의 족적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다. 정치적 진공상태나 다름없었던 대학에 다녔던 내가 남한 사회가 오래도록 금기시해 왔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를 찾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모 무풍지대라는 그 현실이 오히려 내 자신을 정치적으로 더 예민하게 일상 속에 은폐된 부조리한 현실들에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은 나 하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MB가 옥죄고 그네가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보수정권 9년 동안 모든 인민이 침묵하며 순종했던 것이 아님을 오늘의 현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조금 더 뒤로 돌려보자. 조선 후기 세도 정치가 한창일 때도 민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열강과 부패한 조정이 인민을 핍박하던 때에도 동학혁명의 불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가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시절에도 1919년 3.1 만세 운동은 폭발했고,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트린 4.19와 박정희의 군부 독재에 맞선 부마 항쟁과 전두환의 쿠데타 정권에 저항했던 80년 5월의 광주 그리고 87년 6월의 항쟁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인민의 저항으로 가득 찬 역사를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수구보수세력으로 집결하고 있지만 대세는 이제 그들이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듯 하다. 종북과 좌파척결을 외치던 이들의 입에서 이제 반미와 자주독립외교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격세지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더 이상 대항해야 할 주적이 사라져버린 이들을 이제 어떻게 끌어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탄핵된 공주 그네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쏟고,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집회에 들고 나오는 어르신들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에서 혼란스러워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조갑제가 북미 수교로 남북의 평화공존을 구상중인 현 정권의 외교를 사대주의라 외치는 시절이 왔다는 것이 요즘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이렇게 보면, 종북이니, 좌빨, 빨갱이라는 말로 70년 가까이 끈질기게 인민들을 세뇌시키려 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의 배낭여행은 그래서 어떤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한 쿠바를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 이상을 의미했다. 체에 대한 낭만으로 쿠바에 왔던 한국 여행자들이 대개는 겉핥기식 관광을 하다가 막대한 비용만 쓴 채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에는 부시정권이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트리려고 주요 외화벌이의 수단인 여행산업을 고사시키려는 정책을 내놓았던 때였다. 즉, 쿠바 출입국 도장이 찍힌 미국인의 경우 1000달러의 벌금형에 처하는 법안을 시행하고 있었다. 쿠바를 적국이라 지정해 놓긴 했어도 쿠바 여행 자체를 막지 않았던 지난 정권과 달리, 이라크와 쿠바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하고 국제법이나 외교관례 따위는 일체 무시한 채 제멋대로의 행보를 보이던 때였다. 트럼프를 보는 많은 이들이 그의 외교적 돌출행동이나 아웃사이더 성향을 비판하지만, 사실 미국의 외교정책이란 것이 늘 자신들 입맛에 따라 변덕이 죽 끓듯 했다. 북한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는 수구세력과 보수매체들이 한 번이라도 이런 미국의 외교정책을 진지하게 되짚어 봤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쿠바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라틴 아메리카 인민들에게 쿠바라는 존재가 갖는 위상이 상당했던 것은 인상적이었다. 당시에 이미 국가보험제도가 정착되어 외국으로 수술해야 할 경우에도 항공비용을 비롯한 제반 비용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성형수술을 제외한 의료서비스의 수준은 중남미 최고라는 평가가 대체로 인정되고 있었다. 물론 거리에서 만난 쿠바 인민들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갖는 한계도 목격했음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쿠바의 주요 산업은 설탕 담배 커피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식했던 산업 이외에는 충분한 제조업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얼마나 섬유제품이 부족했던지 관광객들이 입다가 버리고 간 셔츠나 바지를 쿠바 인민들의 상당수가 지하경제를 통해 유통시키고 있었다. 내가 선물로 준 스키니 청바지가 30달러에 팔린다면서 입지 않고 팔려고 했던 쿠바 친구 W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이타(gatita-스코틀랜드 백 파이프)) 연주자였던 W-그의 실명을 밝히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여전히 지켜야 할 것 같다-와 만나고 동거하게 된 사건은 이런 배낭여행의 절정이라 할 만했다. 쿠바인들의 생계수단이 제한적이었던 탓에, 종종 관광하러 온 여행객들은 현지인들의 짭짤한 수입원이 된다. 나도 쿠바 입국 후 얼마 안되어 너무나 비싼 여행자 물가를 피해 비밀리에 현지인의 집에 숨어살게 되었다. 하지만, 동양인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도 흔치 않았던 탓에, 금새 이웃의 신고로 비밀경찰의 눈에 띄기 십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머물던 집안 사람 중에 쿠바 공산당원이 있어서 열흘 정도 체류하는 동안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과 마찬가지인 일당 독재 체제 하에서 당원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지를 생생히 실감했다고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공산당원의 집에서 나오기로 결정했던 날 밤, 아바나 해변으로 나가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을 때, W가 자기 할머니 집으로 들어와서 살아도 좋다는 제안을 했다. 별도의 방세 요구도 없는 제안이었으니 사실 경계를 할 만도 했지만, 상황이 긴박했으니 그날 밤 그대로 야반도주 해 숙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주한 동네의 부패한 비밀경찰과 적당한 뇌물을 주고 체류기간의 타협을 보고 나서야 쿠바에서의 체류가 안정적으로 보장되었다.
칠레. 그곳은 남한을 닮았다. 자연환경에서야 사막에서 극지까지 아우르니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1973년 좌파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붕괴된 후 반공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정치적 반대파들을 암살, 고문, 납치를 자행했던 것을 보자. 그 이후 박정희 정권과 돈독한 우호 관계 속에서 방위산업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농산물 개방을 피할 수 없었던 남한이 가장 먼저 수입 농산물에 관한 협정을 맺었던 곳도 바로 칠레이다. 이렇게 보면, 칠레산 체리와 와인을 중소 도시의 구멍가게에서도 볼 수 있는 오늘날까지 칠레와의 인연은 지속되고 있는 듯 보인다. 네루다는 바로 아옌데 정권이 몰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던 네루다가 20대에 연애시로 등단해 미남 시인으로 뭇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보이지만, 그래서 네루다의 시 세계는 다채롭다. 단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시로 일관하지 않았다. 일상의 소소한 소재들, 이를테면, 샐러리와 엉겅퀴에 바치는 송가를 비롯해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내가 페루의 마추픽추 유적지를 방문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대표작 <마추픽추의 산정>은 20세기 초에 발굴된 잉카 유적을 방문한 뒤 인민의 시각에서 격정적인 느낌을 담아냈던 작품이다.
시인이 정치계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는가를 네루다만큼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로르카와 교류하던 시절 스페인은 내전 중이었다. 인민전선 정권이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절친 로르카가 암살되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자로서 정치에 투신했던 네루다는 정치적으로는 늘 아웃사이더로서 기득권과 대립하면서 망명객으로서의 삶을 보냈다. 생애 말년에 드디어 공산주의자임에도 인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르지만, 아옌데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시인으로서 남는 길을 택한다. 태평양 연안의 항구 도시 안토파가스타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했을 때 봤던 당시 장례식장의 구름 같은 인파들이 모인 장엄한 사진에서 인민의 벗 네루다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네루다의 정치적 입장은 당시의 칠레 인민들에게 와 닿지 않는 듯 했다. 피노체트의 철권통치의 흔적이 공고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17년간의 독재 끝에 수천 건의 암살과 실종에 관해 기소되었음에도 종신 면책 특권에 따라 처벌받지 않았던 독재자는 자연사했다. 술판에서 부하의 총탄에 쓰러진 박정희보다는 안락한 죽음이었다.
여행자에게 칠레의 이미지는 남미 국가들 중 가장 치안이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남한도 외국인이 여행하기에 치안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인민 통제의 시대를 두 나라 모두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치안이라는 말이 특정한 국민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칠레와 남한은 모두 안전한 나라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재구축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나 사람으로서 국가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인민들에 대한 국가폭력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마치 서태지의 노래 가사처럼 학교 교육에 의해 세뇌되어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아이들처럼 온순한 국민을 양산하던 정권이 무너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남미 어느 곳보다도 정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받았다. 좋게 말하면, 서구적이고 도시적인 분위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딘가 내성적이면서 타인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은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단연 두드러진 면모였다.
중남미 배낭 여행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는 질문으로서 부족해 보일 지경이다. 오히려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심신이 날마다 변천을 거듭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지도 모른다. 미래의 먹물로서, 제도교육의 총아로서 살아왔던 20년 가깝게 구축된 껍데기가 한 순간에 사라질 리가 없을 테니, 반년에 가까운 여행으로 서서히 무너졌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서 이전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학원에 가서 연구에 전념하다가 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갖고 가정을 이루는, 지금의 내 대학 동창들 태반이 걸었던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남들이 정해준 길 말고도 인생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은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행을 통해 물질적 기반은 더욱 불안정해졌음에도 삶의 활력과 의지만큼은 넘쳐났으니, 어찌 보면 기묘한 부조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렇게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면 조금씩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느끼게 될 수도 있으니 내 마음 가는 대로 살되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갈등이 싫고 두려워서 침묵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차라리 모두가 제대로 마음껏 떠들며 살아보는 세상을 한 번쯤은 겪어 볼만 하지 않을까.
밥벌이와 공부
장교로서 별다른 생산적 활동 없이 허송세월 했음에도 월급을 따바따박 주던 군대를 제외하면, 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첫 직장은 학원강사였다. 사교육 시장에 일찌감치 진입해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있었으니, 강사로서 초반에 적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경시대회와 특목고 대비반을 전담했으니 나의 경험담이 유용하게 활용된 지점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비정상적인 남한의 사교육 일번지 대치동 강사로서 동기를 상실해 갔던 것은 분명했다. 우선은 귀국 후 새롭게 빠져들었던 초기 재즈 시대의 음악에 맞춰 즐기는 스윙 댄스에 매혹된 것을 들 수 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부정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스윙 댄스 강사로 몇 년간 활약하기도 했으니, 단순히 취미 이상으로 빠졌던 것은 맞다. 그래도 밥벌이는 적당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는 지극히 오늘의 쾌락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편이었다. 수년이나 수십 년 후의 노후를 걱정하는 흐름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외국계 보험회사들과 더불어 유행했지만, 나로서는 시간 낭비이거나 현재의 즐거움을 저당 잡힌 채 순한 양이 되는 길로 보였을 뿐이다.
강사로서의 자의식에 의문이 더해졌던 것은 의외의 방향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과학고 입시에 실패했었기에 학원에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학원강사가 수입을 얻는 구조는 안타깝게도 떨어지는 수많은 아이들의 헛된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교육의 대세라 주장하던 대치동 학원가에서도 한 반의 전부가 특목고 입시에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소수의 뛰어난 학생들의 성공담과 그를 모델로 하고 싶은 후발 주자들의 욕망이 거대한 규모로 집중된 곳일 뿐이다.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다고 해서 내 아이가 반드시 그 성공집단에 포함된다는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들은 늘 자식의 문제에서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 되기 마련이다. 내 아이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이끌고 가달라는 상담실의 학부모들이 늘어갈수록 강사는 기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굳이 싫다는 애를 억지로 입시에 데려오지 말고 적어도 공부에 조금이나마 의지가 있는 애들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으며, 그런 생각이 얼마나 대치동에서 순진한 생각인지를 여러 해를 거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맞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부를 할 의지도 이유도 스스로 설정하지 않은 소위 수재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름대로 수업준비를 하고 다양한 방면의 책을 읽다 보니 어느 새 내가 오랫동안 공부하고자 했던 분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과학사. 어쩌면, 이공계 학도로서 끊임없이 역사책을 부여잡았던 기나긴 개인사의 끝자락에서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과학사를 공부해 볼 생각을 품게 됐던 계기는 대학시절에 접했던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축약본. 본래 엄청난 분량과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니덤 총서로 시작되어 그의 사후에도 지속된 프로젝트였으니 축약본만으로도 상당한 두께를 자랑했다. 이어서 중국의 수학에 대한 책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영국의 발생학자였던 니덤이 중국을 방문했다가 그 문명의 놀라움에 빠져 중국 과학사라는 대장정에 투신하기로 한 지가 벌써 반세기가 넘은 시점이었다. 과학이라면 늘 서구 유럽을 원류로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가진 이들에게 니덤의 연구방향과 관점은 그 자체로 충격이라 할 만했다. 중국에 과학이라 불릴 만하게 있긴 한 건가? 그럼 역사가 유구한 중국 과학의 영광과 몰락의 원인은 무엇일까? 온갖 질문들이 떠오르게 할 만한 저작이었지만, 당시에는 그저 감탄하면서 읽기에 바빴다. 파란 눈의 영국인이 한자를 읽어가면서 나름 소중화라며 중국보다 더 중국문화를 숭상하던 남한의 고문 전문가들이 관심도 두지 않던 중국의 과학사를 서술하기로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학원강사를 하면서도 중국과학사든 서구과학사든 틈틈이 새롭게 번역된 저작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수업에 활용할 만한 것도 있었고, 웬만한 전문가들의 오류도 지적할 만한 서적들도 많았지만 사교육시장에서 이런 자료는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과학사를 나름대로 대치동 학원계에 새롭게 강의로 안착시켜보려고 수년 동안 노력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는 사이에 과학사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밥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통념이나 지적 계보의 근원을 뒤지는 작업으로 변하고 말았다. 즉, 강사로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학생이 되어 탐구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학의 경계를 넘어가게 된 계기가 바로 베르그송 철학과의 만남이었다.
2000년대에는 소위 대중 인문학의 시대라 불릴만한 흐름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이 노자와 공자로 21세기 벽두에 EBS 교양강좌를 열면서 인문학 엔터테이너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TV 인문학 강연으로는 기록적이라 할 만한 시청률을 자랑하면서 다양한 부류의 인문학 강의 프로그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로 접할 수 있는 강의와 더불어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인사동에 철학 아카데미와 문예 아카데미가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대중의 지적 욕망을 자극하는 강의들을 선보였다. 나도 문예 아카데미를 통해 물리학자 장회익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고,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철학에 입문하기도 했지만 가장 강렬했던 것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영감을 주는 베르그송의 명쾌한 분석과 논리에 감탄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 강연자는 나의 결혼 주례를 맡아 주시기도 했던 류종렬 선생님이었다. 당시에는 연애도 안하던 상태였으니 훗날의 인연을 예감할 수 없었음은 분명했지만, 짧게 스치고 갈 인연이 아니라는 예감정도는 갖고 있었다.
정치의 일상화, 일상의 정치화
지금도 스윙 댄스를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댄스 홀에 나가서 즐기면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내게 춤으로 타인과 교류한다는 것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MB가 선출되던 대선을 전후로 동호회에서 정치적 얘기들이 조금씩 논의되기 시작했다. 좌우 가릴 것 없이 MB가 약속한 욕망에 투자했던 유권자들은 곧 서서히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부동산 투기를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던 시대에 실제로 득을 봤던 이들은 인민이 아니었다. 인민은 헛된 욕망의 소유자여야지 실질적 소유자여서는 투기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사교육시장이 극성기에 올랐던 때가 노무현 정권 말기에서 MB정권초기였듯이, 부동산 시장도 이 때를 정점으로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곤 했다. 리만 브라더스 사태가 2008년에 터졌을 때, 사실상 투기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어야 했다. 그 시한부 환자 같은 종말을 어떻게든 연장해 보고자 그네 정권의 모든 경제적 방향이 빚내서 집사라는 국가적 홍보에 집중됐다. 이 시절부터 서서히 대치동 강사로서 자의식도 희미해져 가는 한편, 과학사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전업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결정했던 정치적 결과들이 인민의 일상을 얼마나 뒤집어놓을 수 있는가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다. 사실 노무현 정권 5년을 보면서, 실제로 우리가 대통령 하나로 기득권을 해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수구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검새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던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 영향을 주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서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도 힘든 것은 아님을 MB정권의 등장과 함께 곧 절절히 체험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33년의 공직 생활 동안 국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을 3번이나 겪으셨다. 처음에는 70년대 혈기 왕성한 젊은 공무원 시절 감사관에게 뇌물주기를 거절했다가 미운 털이 박혀 파면 당한 것을 취소하는 소송이었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가 지금처럼 법률서비스 정신으로 의뢰인에게 겉으로나마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때가 아니었다. 그저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소송에 필요한 대부분의 서류를 혼자 도맡아서 쓰고 나면, 변호사가 최종 점검 정도만 하면 판사에 의해 결정되는 식이었다. 어쨌든 민형사 소송에 비해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해서 승소할 확률이 턱없이 떨어지는 행정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아버지는 복직될 수 있었다.
다른 두 건은 퇴직 후에 벌어진 소송으로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송이었다. 이는 MB정권이 들어서자 오로지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에서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퇴직 공무원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서훈을 취소하는 감사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유공자로 퇴직 후 7년 가까이 살아오신 분에게 느닷없이 서훈이 취소되었으니, 그동안 유공자로서 받았던 모든 금전적 이득을 토해내라 했다. 처분을 인정하고 수억의 빚더미를 부채로 떠안거나 행정소송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와 관련된 2건의 행정소송으로 4년간의 대장정에 올랐던 것이다. 2건 중 1건은 1심에서 패소해 항소심까지 갔던 터라 만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마지막 소송의 확정판결이 나고 몇 달 지나 아버지께서는 신장암 진단을 받고 암수술을 받기까지 하셨다. 부조리한 소송에 심신이 지쳐서 암이 발병한 것이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말씀에 반론을 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소송을 촉발했던 감사는 MB정권이 이전 정권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기획된 감사였다. 그 어떤 정치적 결정이 나의 일상을 심각하게 유린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고정관념이 무너졌던 4년 사이에 결혼을 해서 첫째 딸을 얻기까지 했다. 행정소송 동안 나는 사법 절차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고 법조계라는 곳이 얼마나 부조리와 불합리한 논리들로 자신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집단인가를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소송의 핵심 쟁점이 의학적으로 공무 중 다친 것임을 입증하는 문제였기에 의료계의 온갖 인맥을 동원해 방어논리를 구축해야 하는 것과 더불어, 항소심을 맡을 변호사의 교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소송을 통해 억울한 인민의 송사를 친절하게 경청하는 사법부의 엄정한 판결이란 허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오히려 AI처럼 엄정하고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판결만을 해주기라도 했던들 우리의 소송은 1년 이내에 1심에서 모두 해소될 수 있었다고 본다. 거의 결심에 도달한 소송을 재판부의 인사이동으로 교체되면 사건 이해한다면서 속절없이 시간 보내다가, 제대로 된 이해도 못한 초짜 판사가 탕탕 치면, 갑자기 한 인민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항소심에 전관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말더듬이보다 떨면서 반대 심문하는 꼴에 복창이 터지기 일복 직전이 된다. 내가 봐도 부실한 변론 준비를 변명한다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전관입네, 재판부와 동료였다면서 떠들어 대는 꼴에 웃픈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원은 흔히 가까이 할 곳이 못 된다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갈등이 법원에 와서까지 해결되는 인생이 행복할 리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얻은 것이 원래 누리고 있던 수준의 물질적 토대라면, 이 모든 장난 같은 사법 연극들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왜 이런 것을 고스란히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어진다. 아래에서 위로 안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안 될까 봐 미리 다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민의 촛불이 모여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반 세기 가까운 보수세력의 지방정치에 대한 주도권이 와해되는 것을 보면서 새롭게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고 본다. 안 된다고 하는 이들이 인민인지 기득권이나 그를 대변하는 먹물인지. 지방선거만 끝나면, 그렇게나 공손하게 시민들 곁에 다가와 인사하던 직업 정치인들이 자취를 감춘다. 한 마디로 일상이 정치화되는 것은 선거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인다. 진정 그런 것일까? 아니면 누구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까?
일상 속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이 말처럼 거창한 것이 아님을 깨달게 된 계기가 바로 육아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태어날 때는 의존적인 생물학적 개체인 아이가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다. 육아는 부모가 아이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으로 아이로부터 배우고 부모로부터 자극 받는 관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정치란 무엇일까? 어떤 정책을 내놓고 이에 대한 찬반을 표시해 다수결에 따라 진행시키는 것은 정치적 행위의 겉모습에만 집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라 불릴 집단들이 연대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구청장을 선출하고 국회의원을 뽑는다고들 하지만, 정작 실제 육아정책과 관련해서 직업정치인의 공약 이외에 무엇을 공유하고 있을까? 지자체장이 보육시설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들은 상당하지만, 정작 보육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저 시설과 제도를 보완하면 서비스가 좋아지리라는 상품자본주의의 관료적 버전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기도 지사에 당선된 어느 정치인이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했다. 이것은 인민 위에서 군림했던 온갖 기득권 세력들이 듣기 싫은 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도구란 효용가치가 없으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을 뜻하는데, 기득권 세력에게 자신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유권자는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민을 도구로 써먹다가 필요 없으면 외면하던 이들이 전복된 관계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저들의 호의로 뭔가가 제대로, 근본적으로 변화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87년 6.10 항쟁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려고 내놓은 6.29 선언과 같은 얄팍한 타협안들이 결국 누구를 희생시켜 누구의 뱃속을 불렸던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지방선거가 집권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것이 끝이 아니라 어쩌면 더 거대하고 구습에 물든 숨겨진 우리 안의 타성과 투쟁하는 시발점일 지도 모른다. 이번에 전폭적으로 밀어줬으니 인민을 위해 일 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인민의 도구로 진정 봉사하도록 기존의 정치풍토에 일상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내 일상에서 정치적 행위로 연결되는 고리를 공유할 또 다른 인민과의 연대에서 비롯될 것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쉬운 인민을 두려워했던 기득권 세력은 없다. 촛불혁명이 뭔가를 이뤄낸 것이 있다면, 바로 인민들 자신이 뭉치면 누군가를 두렵게 만들 수 있음을 자각했다는 것에 있다. 이 자각이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도록 일상 속에서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 낼 연대의 끈을 찾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의학사와 의철학에 입문하기까지
보통의 자서전이 자신이 이룬 것을 돌아 보면서 인생을 정리해 보겠지만, 아직 전문 의사학자도 의철학자도 아닌 나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민으로서 내 자의식이 먼 훗날 먹물 세계에 제대로 진입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변화하게 될 것인지에 경계심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새로이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현재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서술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즉, 먹물의 세계로 진입을 앞두면서 인민으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작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제도교육의 경쟁의 극단에서 대학진학에 이르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돌아 보면, 지극히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학생으로서 뭔가 새로운 교육제도에 대해 바꿀 수는 없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왜곡된 교육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게 된 것이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길들에 대한 단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회자되던 시절에 굳이 고통스런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성장해 가는 데 필수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다. 고통을 보편적인 것으로 세뇌하는 교육현실이야말로 뜯어 고쳐야 하는 것이지 답습하고 순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지 수치화하거나 객관화해서 누군가에게 지표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출산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통념 속에서 살았던 중세 서구의 전통이나 우리 사극에서 드러나는 난산의 장면들은 산고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례들이다. 정반대로, 출산 시에 분비되는 옥시토신과 같은 호르몬들의 폭발적인 증가가 전혀 고통 없는 출산을 보장한다는 주장도 많다. 의료계에서는 옥시토신을 자궁수축호르몬이라는 기능적 작용에 초점을 맞출 뿐 고통을 완화한다는 관점에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소위 자연주의 출산을 지향하는 몇 몇 산부인과들에서 이 호르몬의 작용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남한의 출산이 병원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지가 어언 30년 가깝게 되면서, 이제 출산은 병원에서 하는 것이라는 통념이 자리 잡았다. 제왕절개 비율이 의료비용이 가장 높다는 미국과 경쟁을 할 정도인 남한의 산모들이, 여전히 비병원 출산 비율이 30퍼센트인 서구 유럽의 산모들보다 출산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어떤 이들은 서구적 체형이 출산에서 갖는 이점들을 강조하면서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우리의 병원출산 문화는 급격하고도 기형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산모들이 갑자기 위험군에 속할 정도로 출산능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고통에 민감하게 된 신세대 산모들의 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왕절개 시의 의료수가 증가와 보다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병원이란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어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환자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던 병을 발견해 내는 첨단 의학 기술로 두려움과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삶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면서 보험산업이 활황기에 접어들었듯이, 의학은 건강한 이들까지 잠재적 환자로 둔갑시키는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2000년대 한 때, 갑상선 암 절제 수술 비율이 OECD 평균보다 월등히, 원폭으로 인한 방사능 요인을 감안하는 일본에 비해서도 몇 배는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정도면 핵전쟁이라도 벌어진 공간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한 환자들의 양산이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절제 수술이 필요치 않거나 굳이 조기 발견해 암환자로 여생을 보낼 필요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음이 의료계 자체의 반성과 함께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의료인들은 그 많던 갑상선 암 수술이 급감하게 된 것은 결국 암보험을 주요 시장으로 하는 사보험 회사들의 엄격한 심사과정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이제는 신약이니 치료법의 신기원이라며 극찬하는 언론과 의료계의 목소리를 적당히 흘려 들어야 할 시대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던 종교의 역할을 의학이 떠맡게 된 시대에 또 다른 치유를 통한 삶의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의학에 대한 맹목적 믿음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프랑스의 의철학자 깡귀엠은 갈릴레오를 기념하는 논문에서 물리학에는 병리학이 없다고 했다. 던져진 공에 어떤 병리적 상태에 해당하는 궤적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달리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에는 생리학과 병리학이 존재한다. 병리적 상태란 지극히 인간적인 감성에서만 가능한 표현인 것이다. 보다 넓게는 생명체의 자기 보존적 특성을 전제로 할 때만 적용될 수 있다. 아마도 의학사와 과학사가 갈라지는 분기점 중의 하나는 병리학의 존재 여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의학은 과학보다 개체의 특성에 보다 주목하기 마련이다. 의학과 생물학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토끼라고 지칭되는 생물 종을 연구하는 사람은 시공간에 퍼져 있고, 자신이 접한 적도 없을 구체적 토끼에 대한 특성보다는 ‘토끼’라고 보편적으로 지칭되는 개념의 공통적 특성들에 주목하게 된다. 결국엔 개별 토끼에 대한 연구를 피할 수 없지만 보편적 토끼에 대한 연구가 궁극적인 지향점이 된다. 반면, 의학은 어떤 환자에게 적용된 치료법에 대한 특이성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질병을 겪게 될 환자군에게 적용될 것이라 예단할 수 없다. 대략적으로 치료의 효과를 논할 수 있을 뿐, 구체적 사례에서는 개별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문화적 조건들을 비롯한 구체적 특성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생물학자의 목표가 토끼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라면, 의학은 개별 환자의 치유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양자 모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완벽히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공통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문제를 접근하는 방향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사에 대한 공부에 도전하려는 욕망이 생겼을 즈음 내가 마주친 실존적 상황은 첫째 딸의 출산이었고, 앞서 밝힌 일련의 현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가정출산을 하게 된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산은 질병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병원에 포획된 것일까? 육아와 출산 문화는 과거와 크나큰 차이가 없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한 번쯤 던져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아이를 출산하는 문제와 맞닥트렸을 때는 단순한 호기심의 영역에서 머무를 수가 없게 된다. 한 생명체가 탄생하는 문제를 날아가는 공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해 학원강사로서 내가 물리학을 가르쳤던 경험이 오히려 자연과학이 내놓은 해명들에 대해 더 의문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삶의 역설적인 측면들인 지도 모른다. 출산을 통해 질병이란 무엇인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질병에 대한 통념과 사유들이 변천해 왔는지를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어느 고학생의 말이 학창 시절에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이런 회고적 관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현재의 상황을 위해 안배된 것처럼 삶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파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그저 쉽고 잘 될 거라는 낙관적 희망도 내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의 경험만큼은 나로서도 공감이 갈 때가 있었고, 나만이 그런 것을 겪지는 않았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마주칠 때가 많았다. 아마도 내가 역사에 빠지게 됐던 것도 겪고 싶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해소할 무궁무진한 사례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내 일상은 육아와 공부가 서로 교차로 짜이면서 침투하다가 어느 덧 하루의 끝에 이르곤 한다. 아마도 육아 휴학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북유럽 복지 국가들의 정책에서 신선했던 것이 아빠들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하는 정책이었다. 결혼을 해서 육아를 하기 전에는 막연했던 느낌이 왜 저들이 엄마가 아닌 아빠들에게 육아를 의무로 부과했는지 깨닫게 됐다. 태어나서 1년까지를 돌이켜 보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빠는 보조자로서의 역할이 더 크게 부각된다. 나의 경우엔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신생아 시기에 많은 시간을 보낸 흔치 않은 사례에 해당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자고 하며 보내는 출생 초기에 일터에 나갔다 돌아오게 될 아빠의 존재를 자리매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첫 돌이 지나고 신체적으로 행동반경도 넓어지고 정서적 교감의 양상도 다양해진 영유아기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 엄마는 그 동안의 육아로 이미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가 된다. 이 때 육아에서 소외되거나 보조자에 머물던 아빠가 갑자기 뛰어든다고 해서 원활한 육아가 가능해질까? 성인으로 살았던 수십 년간의 리듬을 영유아와 맞춰 나가는 적응기간이 없이 육아가 가능하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육아는 어른과 아이 모두 상호 적응의 형태로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류의 육아가 아무리 보편성을 갖는 유인원의 특성을 보인다 해도 결국 개별 가정에서 나타나는 육아의 양상은 특수한 측면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심지어는 역사적으로도 육아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니, 육아 정책을 공시적인 문제의 틀에서만 바라보아서는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브로델이 16세기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지역을 연구하면서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에 천착했던 것이 떠오른다. 역사란 본래 장기적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 전업 역사가들의 작업은 2세기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한의 육아도 장기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읽은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과 사와야마 미카코의 <육아의 탄생>은 이런 관점에서 아동과 육아의 역사를 조명한 책이다. 미카코의 저서는 최근 저술이지만, 사실 아리에스의 저술이 일본에 유입된 이후 육아와 관련된 사회사 연구가 촉발됨으로써 완성된 연구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주류 역사학계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의 외국 저술들을 접하다 보면, 늘 마주치게 되는 의문이 우리는 어땠는가였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이안 해킹이 푸코의 광기와 정신의학 연구물에 감탄하면서 한참을 푸코 연구서를 썼다가 완성 직전에 폐기처분하면서 했다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푸코를 분석하지 말고 푸코를 실천하자’ 역사는 결국 어떤 문헌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자신의 학문적 방향성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가들의 저술 자체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그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정작 역사가의 일상과 실존적 상황에 대한 고민이 없는 먹물들끼리의 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어떤 사태를 분석해 냈지만, 자기 주변의 마을이나 지역에 대해서는 까막눈이 되어 버리는 먹물형 지식인이 넘쳐나는 시류에서 나 또한 다를 것이 없잖은가 하고 자문할 때가 많다. 공부한다고 하면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이나 인간의 도리쯤은 제쳐두더라도 면죄부를 받던 학창시절을 지나 학계로 와서 인용되지도 쓸모도 없는 논문들을 양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어제 오늘의 일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동창이 빌려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 김우창의 <궁핍한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책이 있다. 세세한 책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 때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만은 여전하다. 국토가 침탈되어 식민지인으로 살게 된 상황에서 지식인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였다. 일제에 부역한 인물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우리 모두 친일파였다는 자조적인 시대를 살았던 만해 한용운의 치열한 자기 비판을 그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여기며 감탄하기만 해야 할까? 시대적 상황에 눈감은 채 제도가 만들어 놓은 연구풍토 속에서 어떤 돌파구와 새로운 시도들이 용납되기는 할까? 하워드 진의 표현대로 기득권이 펼쳐놓은 선택지에는 이미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들뢰즈 식으로 탈주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엄청난 희생 이런 것 없이는 불가능할까? 그런데 왜 여전히 인민들은 끊임없이 저항하며 분출하고 있는가? 나로서는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들이 모두 사유에서 비롯된 논리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허황된 이야기들로 비춰질 때가 많다. 실제로는 독박 육아하는 엄마, 취업난에 시달리는 취준생, 입시 교육에 허덕이는 학생,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밤샘 알바를 뛰는 대학생, 노후 불안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뭔가를 바꿀 상황에 서 있다. 이들과 접점을 이루지 않고 논리적 해결책을 아무리 제시해 봐야 언젠가는 누군가 쓰고 남겼던 얘기들의 재탕이거나 스스로도 믿지 못할 허황된 이론들의 재구성에 그치지 않을까? 역사가가 인민으로서 자의식이 없이 점점 상부로 향할수록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담론을 위한 담론만을 양산하게 된다. 이공계에서는 사이언스라는 유수의 논문 중 90퍼센트 이상이 인용도 되지 못하는 종이 낭비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지 벌써 오래다.
후기
자서전에는 반드시 후기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든다. 쓰다 보면 결국 쓰고 난 뒤에 중요한 사항이 빠졌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기를 본문만큼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와 본문을 손질하는 것이 서술 당시의 느낌을 각색하는 듯 해서, 가능한 가볍게 풀어두고 갈 필요가 있다.
오늘을 사는 인민으로서 역사적 작업을 펼쳐 보려 한 내 의도가 얼마나 잘 구현됐는지는 이 글을 잠재적 독자들이 판단해 줄 문제가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얘기가 빠질 수 밖에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남미 배낭여행의 많은 경험들이 언급되지 못했다. 아마도 종잡을 수 없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여행기록들로 인해, 상기할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철학과 과학에 대해 심취하는 것만큼이나 한 때 스윙 댄스의 역사에 빠져, 노마 밀러라는 스윙 댄서의 회고록을 초벌 번역해 놓았던 전후 사정을 풀어 놓았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몸에 대한 논의가 사회학이나 역사, 철학, 의학 등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요즘, 오랜 시간 동안 춤을 통해 내가 느꼈던 바들을 자세히 풀어놓게 될 기회를 언젠가는 잡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끝으로 요즘 내가 리듬에 대해 빠져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에서 시작된 아이-되기, 동물-되기에 대한 공감을 통해 육아의 리듬이 점차로 변해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나의 공부도 육아와 동기화가 진행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단계로 이탈해 갈 것인지가 나로서도 궁금해진다. 가끔은 틀에 박힌 일상의 리듬에서 훌쩍 벗어나 바다로 산으로 들로 나가고 싶어했던 육아 시절이 있었다. 그 때마다 거리와 시간에 대한 제약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인지 시도의 문턱에서 늘 돌아서곤 했다. 이 점에서 제주에서 한 육아실험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바다든 산이든 느끼고 싶으면 가기로 했다. 당일치기든, 숙박을 하든, 해가 저무는 것을 보러 가든, 모래놀이 하는 두 딸의 웃음소리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빠져보든. 하고 싶을 때라 여겨지면 바로 뛰어들어야 뭔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육아와 공부로 뒹굴면서 깨달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