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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고려 성종때 서희장군께서 거란으로부터 수복한 6주는 흔히 “강동6주”, 서희장군이 쌓은 성은 “강동6성”으로 불리어지며, 현재의 한중 국경인 압록강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국사교과서 등에 기록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서희장군께서 거란으로부터 수복한 6주와 6성의 원래 위치를 고찰해 본다. 먼저, [속자치통감]에 기록된 6주는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이고,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은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 곽주(郭州)성ㆍ귀주(龜州)성 ,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이다.
1. 참고 자료 및 연구방법
위에 기록된 지명의 원래 위치를 찾는데 참고한 자료는 [신교본요사], [고려사절요(민족문화추진회 번역)], [속자치통감], [원사], [하북정구연혁지(河北政区沿革志)], [중국고대지명대사전(중화박물편집)], [고금지명대조표], 지나의 북경, 승덕시, 호로도시, 영구시, 향하현 등 홈페이지 , 기타 지나 사가들의 글 등이다.
지나의 여러 기록 중 간체로 기록된 것은 번체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였다.
지명 위치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원사지리지]였다. [원사지리지] 동녕로(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조에는 아래에서 다시 인용하겠지만,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된 60여성은 고려, 원에서 당의 옛 명칭을 그대로 썼다(雖仍唐舊名)”고 하였다. 따라서 원래의 주, 성의 명칭, 관할하는 현의 명칭을 연결고리로 하여 원래 위치를 찾아 보았다.
2. “강동6주” “강동6성”에 대한 용어 검토
필자의 연구결과 서희장군께서 수복한 6주와 6성은 국사교과서의 기록과 다르게, 현재의 요녕성, 길림성, 하북성, 산서성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강동6주”라는 용어는 우리 스스로에게 6주 위치가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최면을 거는 효과가 있다.
필자는 ‘강동 6주’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서희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서희 수복 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서희장군이 쌓은 6성은 “서희 개척 6성”으로 부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6주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압록강 동쪽을 위미하는 “강동”이라는 용어가 [요사]나 [고려사절요], [속자치통감] 등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어느 사서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국사책에는 “강동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이것도 혹시 식민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고도의 최면술이 아닌지 의심된다.
Ⅱ. 서희수복 6주 6성 관련 국내외 기록 실태
1. 국내 기록
(가) 야후백과 사전
고려 성종 때 평안북도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고려 때 군사상 교통상 요지였던 강동6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압록강의 동쪽지방을 개척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열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6주 개척 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郭山)·선천(宣川;宣州)·안의(安義;定州)·흥화(興化;義州東)·구주(龜州;龜城) 등지에 강동6성을 쌓고 거란에게 적의를 보였다.
이에 거란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약속불이행을 추궁하고 국왕이 친히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에서 이를 듣지 않자 거란은 1018년(현종 9) 이래 3차에 걸쳐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려의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제3차 침입 때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거란군은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어 돌아갔는데, 이를 구주대첩이라고 한다. 두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에 지쳤기 때문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거란은 강동6주의 요구를 철회하였으므로 강동6주는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 야후백과사전에서 압록강은 현재의 한중 국경인 압록강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고려시대의 압록강은 현재의 요녕성 요하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사이트에서 여러 번 언급된 것이므로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나)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 993년에 이미 압록강 안쪽은 수복하였고, 바깥쪽에 대한 수복을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희 수복 6주’와 6성이 압록강 안과 밖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 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命平章事徐煕,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是歲,命平章事徐煕,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2. 속자치통감 卷第三十 宋紀三十
己未,高麗王詢遣刑部侍郎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六城。 기미,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주가 노하여 화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속자치통감에도 ‘서희 수복 6주’가 압록강의 동쪽이라는 기록은 없다.
Ⅲ. 서희 수복 6주의 위치
1. 6주의 명칭 연혁
이제,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를 찾아 본다. 6주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당이 고구려를 강점한 이후 붙인 지명을 고려도 그대로 사용하였고, 요나라, 원나라도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요사와 원사의 지리지에는 그 명칭과 관할하는 현(縣)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瓖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錄事司.土山縣.中和縣.鐵化鎮.都護府,自唐之季,地入高麗,置府州縣鎮六十餘城,此為都護府,雖仍唐舊名,而無都護府之實.至元六年,李延齡等以其地來歸,後城治廢毀,僅存其名,屬東寧路.定遠府.郭州.撫州.黃州.領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五縣,長命一鎮.
원사/지/권59 지제11. 지리2/요양등처행중서성/동녕로
동녕로, 본 고구려 평양성. 장안성이라고도 함. 한이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곳에 낙랑을 두었다. 진 의희 이후 고구려 왕 고련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원나라 지원 6년, 이연령, 최탄, 현원열 등이 부주현진 60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8년 서경을 동녕부로 고치다. 13년.(..) 현재도 옛 명칭 그대로다(今姑存舊名). 토산현, 중화현. 철화진. 도호부.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되어 부주현진 60여성을 두고 이곳은 도호부가 되다. 당의 명칭을 그대로 쓰다(雖仍唐舊名).(...) 이연령 등이 항복한 뒤 성의 치소가 훼손되었으나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고(僅存其名) 동녕부에 속하다.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 황주는 안악, 삼화, 용강, 함종, 강서의 다섯 개 현과 장명진을 관할하다.
☞ 따라서 고려사, 요사, 원사 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서희 수복 6주’부터 살펴본다.
2. 서희 수복 6주
(가) 흥화(興化)주
● 河北政区沿革志 承德市(하북정구연혁지 승덕시) 辽为中京道北安州兴化县地。金承安五年(1200年)置兴州,治兴化县(今滦河街西南里许),属北京路;为兴化县、宜兴县地。元属上都路兴州兴安县、宜兴县地。
http://post.baidu.com/f?kz=19828745
요나라 때에 중경도 북안주 흥화현. 금 승안5년(1200년) 흥주를 설치, 치소는 흥화현(현 난하거리 서남 지점)에 두었다.
☞ 즉, 고려의 흥화주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나) 용주(龍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龍州 (요사/지/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용주)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遷城于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併富利、佐慕、肅慎置. 遷民縣.本渤海永寧縣,併豐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용주. 황룡부. 발해 부여부.(..) 황룡현, 천민현, 영평형 등 3개 현이 있다.
*黃龍府 本渤海潛余府,遼太祖平渤海,(..),即此,故城在今吉林農安縣,今遼寧省開原以北及吉林全境、內蒙古東境,皆其轄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황룡부 : 발해 잠여부(..) 옛성이 현 길림 농안현에 있다. 현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과 내몽골 동쪽이 모두 황룡부 관할이었다.
*永平縣 遼置,金省,今遼宁省鐵岭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영평현 요나라 설치. 현 요녕성 철령현이다.
☞ 즉,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에 치소를 두고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 내몽골 동쪽을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다) 통주(通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通州 (요사/지, 권38, 지 제8 지리지2/동경도/통주)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二一]統縣四: 通遠縣.本渤海扶餘縣,併布多縣置. 安遠縣.本渤海顯義縣,併鵲川縣置. 歸仁縣,本渤海強帥縣,[二二]併新安縣置. 漁谷縣.本渤海縣.
통주 : 안원군, 절도, 본래 부여국 왕성. 발해시대 부여성이라 부름. 태조가 용주로 개명,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개현이 있다.
*通遠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통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安遠縣 遼置,今遼宁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안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 漁谷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어곡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 즉,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에 치소를 두고 개원 일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라) 철주(鐵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鐵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 철주)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철주, 건안군, 자사, 본래 한의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 탕지현을 관할 *营口市基本概况 : 唐末,北方先后有契丹、女真、蒙古3个民族政权更迭,并在营口市境内设置地方 政权。辽将渤海国的一些州县迁到营口地域内,在今熊岳镇设卢州领熊岳县,在今汤池镇置 铁州领汤池县,耀州领岩渊县,归州领归胜县,另设曷苏馆大王府和辰州领建安县。(영구시 홈페이지)
영구시 기본개황 : 당말,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 등 3개 민족정권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요나라는 발해의 주현을 영구시 경내에 옮겼다. 현 웅악진에 노주를 설치하여 웅악진을 거느리고, 현재의 탕지진에 철주를 설치하여 탕지현을 거느리고, 요주는 암연현을 거느리고, 귀주는 귀승현을 관할하고, 그 외에 갈소관대왕부와 진주(건안현을 관할)를 설치하였다.
http://www.runsky.com/homepage/dl/spec/2004/forum/cities/userobject1ai449765.html
☞ 즉,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에 치소를 두고 영구시 일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마) 귀주(龜州)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상대로 대첩을 이룬 전적지이므로 특별히 유의하여 찾아 보았다.
●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제12 지리3) 龜州本高麗萬年郡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龜州顯宗九年爲防禦使. 高宗三年丹兵來寇州人拒戰斬獲甚多至十八年蒙兵來侵兵馬使朴犀盡力禦之力屈猶不降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又改定州牧.
귀주: 본래 고려 만년군, 성종13년 평장사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귀주성을 쌓다, 현종 9년 방어사. 고종3년 거란병이 침입해 항전하여 적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18년에 이르기까지 몽고병이 내침하여 병마사 박서(朴犀)가 진력하여 싸우고 항복하지 아니한 공로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도호부를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치다.
☞ 귀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귀주가 정원대호부와 정주목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귀주가 정주(定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하여 고려사와 요사의 기록을 보자
●高麗史58卷-志12-地理3-020(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定州古稱巴只[一云宣威.]靖宗七年爲定州防禦使置關門恭愍王五年陞都護府別號中山. 有鼻白山.[春秋降香祝行祭.]
정주, 옛 이름은 파지(일명 선위) 정종7년 정주방어사를 두고 관문 설치. 공민왕5년 도호부로 승격, 또 다른 이름은 중산도호부라고도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중산에 관한 고금지명대조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中山——①中山国,战国都顾(今河北定县)。一度为魏所灭,复国后迁灵寿(今平山东北)。公元前296年为赵所灭。②汉郡、国,治卢奴(今定县)。后燕以为都城。隋废。⑧宋以定州为中山府,治安喜(今定县)。④今中山县,宋以来为香山县。1925年孙中山逝世后改今名,中山故里在县南翠亨村。(고금지명대조)
중산-②한나라때, 군, 국, 치소 노노(현 하북 정현) 후연의 도성. 수나라 때 폐함. 송은 정주를 중산부로 하다. 치소 안희(현 하북 정현)
*定州——北魏改安州为定州,北齐改其治所卢奴为安喜县,即今河北定县。北宋末定州为中山府。明改定州。(고금지명대조표)
정주: 북위때 안주를 정주로 개칭. 북제는 그 치소 노노를 안희현으로 하다. 즉 현재의 하북 정현이다. 북송말 정주는 중산부가 되다. 명나라때 정주로 고치다
☞ 현재 하북 정현(定县)이 정주의 치소였고, 전국시대 중산국의 도성으로서, 북송과 고려가 각각 중산으로 불렀다는 것이 고려사와 지나의 고금지명대조표가 일치한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定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정주) 定州,保寧軍.高麗置州,故縣一,曰定東.聖宗統和十三年升軍,遷遼西民實之.隸東京留守司.統縣一: 定東縣.高麗所置,遼徙遼西民居之.戶八百.
정주, 보령군, 고려때 주를 설치, 정동현이 있다.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였다. 동경유수사에 속하다. 호수는 팔백이다.
☞ 즉 요서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한 것으로 보아 정주는 요서군과도 가까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정주의 위치는 아래의 요사 지리지 동경도 보주를 보면 정주와 보주와 연접한 것으로 나타난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保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보주) 保州,宣義軍,節度.高麗置州,故縣一,曰來遠.聖宗以高麗王詢擅立,問罪不服,統和末,高麗降,[七]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於此置搉場.隸東京統軍司.統州、軍二,縣一: 來遠縣.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戶一千.
보주, 선의군, 절도, 고려때 주를 설치. 래원현이 있다.(..)통화말 고려가 항복하여 개태3년 보주 정주 두 개주를 취하여 이곳에 각장을 설치하다. 동경통군사에 속하게 하다. 래원현이 있다. 래원현,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다. 또 해(奚)의 한인 병사 칠백을 옮겨 방어하게 하다. 호수는 일천이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六 志第六 兵志下/五京鄉丁/東京 (요사 지 권36 지제6 병지 하 5경향정/동경) 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萬一千四百.天顯十三年,太宗改為東京. 遼陽府: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
동경, 원래 발해영토. 그 땅에 남경 요양부를 설치. 6개현을 관할. (...) 태종때 동경이 되다. 요양부 : 정주 정동현 장정 일천 육백명, 보주 래원현 장정 이천명
☞ 귀주가 정주가 되고, 정원대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것은 정주(定州)의 정동현(定東縣)과 보주(保州) 의 래원현(來遠縣)의 합성지명(定+遠)으로 보여 진다. 하북성 보정지구는 북경, 천진과 함께 하북의 삼각축을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로서 하북지구는 당시 남쪽의 송, 북쪽의 요나라, 동쪽의 고려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요지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바로 현재의 하북성 정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 곽주(郭州)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郭州本高麗長利縣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郭州顯宗九年爲防禦使高宗八年以叛逆降稱定襄. 十八年避蒙兵入于海島元宗二年出陸隸隋州恭愍王二十年復郡號.
곽주. 본래 고려 장리현. 성종13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곽주성을 쌓음. 현종9년 방어사가 되고, 고종8년 반역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하여 부르고,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海島)에 들어갔다가. 원종2년 육지로 나온 뒤 수주(隋州)에 속하게 하고 공민왕 20년 다시 옛 군 이름을 되찾다.
[요사]에는 고려에 포로가 되었던 여진인이 요나라 성종에게 개경으로부터 곽주에 이르는 노정에 관해 진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新校本遼史/本紀/卷十五 聖宗六/開泰二年 (요사 본기 권15 성종6/개태2년)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臣三年前為高麗所虜,為郎官,故知之.自開京東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于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淥江,並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上納之
병인, 장마류가 고려사정을 아는 여직인(주1)을 바쳤다. 왕(요의 성종)이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3년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이 되었던 고로 압니다. 개경 동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대채가 있는데 크기가 개경정도 되고 여러 주에서 보낸 진귀한 공물로 쌓여 있으며, 승주, 나주 등의 남쪽에 또한 두 개의 대채가 있는데 공물의 쌓인 바가 그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직(주2)의 북쪽을 얻고,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서 대하(大河)(주3)를 거슬러 올라가면 곽주와 대로(大路)(주4)를 만납니다. 고려를 가히 취할 수 있습니다.” 왕이 받아 들이다.
*필자 주 : 주(1) 여직(女直)은 여진(女眞)과 같다. (2)갈소관여직은 현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연윤 이북에 있었었다고 한다.(갈소관로치소고 : 동만군, 북경문물, 1992년 제1기). (3)대하(大河)는 현 대릉하 또는 난하로 추정된다. (4)대로(大路)는 단지 큰길을 가리킨 것 같지 않다. 행정구역명칭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요나라에서는 ‘00로’라는 행정구역이 없었다. 요사가 후대의 金과 元나라때 기록 된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사가가 기록 당시의 행정구역명칭을 혼용하여 쓴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즉, 북경지방이 대녕로(大寧路)에 속하였는데, 위의 대로는 대녕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 曷苏馆路治所考 董万军 《北方文物》1992年第1期(갈소관로치소고, 동만군) 辽代曷苏馆女真,金曷苏馆路治所,确在营口地区盖县南部和复县永宁澗以北地域内设置
요대의 갈소관여진, 금대 갈소관로 치소는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영윤 이북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http://www.bjkg.com/wenxzl-sub1.asp?id=812
●金史 卷024志第五 地理上(금사 권24 지5 지리 상) 盖州,奉国军节度使,下。本高丽盖葛牟城,辽辰州。明昌四年,罢曷苏馆,
개주, 봉국군절도사, 하. 본래 고려 개모성, 요나라 진주. 명창4년 갈소관을 폐하다.
☞위 여진인의 진술을 보면,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현재의 만주를 가로질러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에 도착한 뒤 압록강(현재의 요하)을 건너서 또다시 대릉하 또는 난하와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다소 추상적인 진술이나 대체적으로 현 하북성 중․북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래에 하북성 향하현의 연혁을 더 살펴 보자.
● 하북성 香河县 建置沿革 향하현 설치연혁(향하현 홈페이지) 公元936年,石敬塘(后称晋高祖)勾结契丹(后称辽)灭后唐,割燕云十六州给契丹,此地属契丹。 契丹会同元年(938年),于武清孙村置榷盐院,为贮盐新仓。后居民集聚,渐成井肆,遂由武清、漷县(今属通县)、三河划出部分地域置香河县。时县境较阔,约辖 至元九年 (1272年),属大都路大兴府。至元十三年,升梆阴县(今北京市通县漷县镇)为州,香河县属大都路漷州,明洪武元年(1368年),香河隶漷州,属山东行省北平府。
http://www.xianghe.cn/zjxh/xhxz.htm
기원936년, 석경당(뒤의 진 고조)이 거란(위의 요)과 연합하여 후당을 멸하고, 연운16주를 거란에게 할양하여 이곳은 거란에 속함. 거란 회동원년(938년) (..) 무청(武清), 곽현(漷县, 현재 통현), 삼하(三河)현의 부분을 떼어내어 향하현을 설치(...) 원나라 지원13년(1276년) 향하현은 대도로 곽주(漷州)에 속함.
*역자 주) 향하현은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음
●지나의 어떤 연구자가 쓴 아래의 글에는 위 하북성 향하현 홈페이지와 내용이 같으나 곽주를 漷州라고 표기하지 않고 郭州라고 표기하고 있다.
天津市的武清县和河北省的香河县并入二十几个村庄,类似元朝的郭州,只是比郭州小得多。《辽史》、《元史》、《寰宇通志》和《方舆纪要》中记载:郭县原名霍村镇,辽代改为郭阴县,元朝至正十三年升格为郭州,并且管辖武清和香河两县。明朝初年,降为郭县,
천진시 무청현과 하북성 향화현의 28개 촌장을 합하면 원나라의 곽주와 유사하다. 요사, 원사, 환우통지, 방여기요에 기록된 곽현의 원명은 곽촌진이다. 요나라 때에는 곽음현(郭陰縣)이었다가, 원대에 곽주(郭州)가 되어 무청(武清)과 향화(香河) 두 개현을 관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http://www.clcn.cn.net/guest/search/st_dianzi/st_jw/zgny/zgny29.htm
☞ 즉, 곽주는 우리의 역사교과서 기술과 다르게 만리장성 너머 현재의 북경과 천진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이것은 위 요사에 나오는 여직인의 진술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Ⅳ. 서희 개척 6성
1.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
●新校本遼史/志/卷三十九 志第九 地理志三/中京道/中京大定府 (요사 지 권39, 지제9, 지리지3 중경도, 중경 대정부) 統州十、縣九:10주와 9현을 통괄한다. 大定縣.白霫故地.以諸國俘戶居之.대정현 長興縣.[三]本漢賓從縣.以諸部人居之.(장흥현, 한의 빈종현, 여러부 사람이 거주하다) 歸化縣.本漢柳城縣地.(귀화현, 본래 한의 류성현지이다.)
(가) 장흥진(長興鎭)
위 요사 중경대정부조 기록을 보면 관할 9현 중에 장흥, 귀화현이 있다. 장흥진은 그 중 장흥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의 빈종현이라 하였다. 노북경망(老北京网)에 실린 당대의 북경지방의 행정구역 설명(唐代地方行政区)을 보면 빈종현은 선주(鲜州)에 속하였고, 그 치소는 로현 고성(현 북경 통현 동쪽8리 고성촌)에 있었으며 빈종현을 관할하였다고 되어있다.
鲜州,寄治于潞县之古潞城(今通县东8里之古城村),领宾从县 선주, 로현의 옛 로성에 치소를 설치(현 통현 동쪽8리 고성촌),
http://www.oldbeijing.net/Article_Show2.asp?ArticleID=2351
☞위 요사와 노북경망의 기록으로 볼 때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에 있었다. 즉, 장흥진은 그 위치가 곽주와 인접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 귀화진(歸化鎭)
중경대정부에에 귀화현이 있었다. 귀화진은 위의 귀화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화현은 한의 유성현(柳城縣)이라고 하였다. 고대사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바로 그 유성(柳城)이다. 柳城县(중국고대지명대사전)
汉置,后汉省,故城在今辽宁省兴城县西南,清一统志谓故城即后魏及唐之营州、辽之兴中府,今河北省朝阳县,按后汉书注,故城在今营州南,则汉柳城非唐之营州治可知,又李兆洛谓在今永平府境,陈芳绩历代地理尚革表,谓今昌黎西五十里静安社为古柳城。
한대의 유성은 현 요녕성 흥성현 서남이다. 청 일통지에는 고성이 곧 후위와 당의 영주이고, 요나라의 흥중부는 현 하북성 조양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주에 따르면 고성은 영주의 남쪽에 있었다. 즉, 한의 유성은 당의 영주치소가 아니다. 이조락은 현재의 영평부 경내라고 하였다. 진방적은 역대지리상혁표에서 현재의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가 옛 유성이라고 하였다.
☞ 필자는 일단 진방적의 이론을 택하여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를 귀화진의 위치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장흥, 귀화 설치를 같이 하였고, 군사적으로 서로 상응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어야 하므로 장흥과 가장 가까운 창려 서쪽을 채택하였다.
2. 안의진(安義鎭)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지12/지리3) 安義鎭顯宗九年築城.
안의진, 현종 9년에 쌓았다. 안의라는 지명은 신당서에 나오는데 상곡군에 속한 9개 府 중의 하나이다.
● 新校本新唐書/志/卷三十九 志第二十九 地理三/河北道 (신당서/지/권39/ 지제29/지리3/하북도) 易州上谷郡,上.土貢:紬、綿、墨.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縣六.有府九,曰遂城、安義、脩武、德行、新安、古亭、武遂、長樂、龍水.有高陽軍.易,上.容城,上.本遒.武德五年,以容城及幽州之固安、歸義置北義州.貞觀元年州廢,縣還故屬.聖曆二年以拒契丹更名全忠,神龍二年復故名,天寶元年又更名.遂城,上.淶水,上.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郎山.有永清軍,貞元十五年置.五回.中下.開元二十三年析易置,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省.
역주 상곡군, 현은 6개소, 부는 9개, 수성, 안의(安義), 수무, 덕행, 신안, 고정, 무수, 장락, 용수,...
● 산서성 장치시(长治市) 长治市位于山西省的东南部,居太行之巅,古称"上党".<释名,释洲国>说:"上党,党,所也,在山上,其所最高,故曰上党."<文献通考>说:"其地极高,与天为党,故云."<潞安府志>说:"潞以水名,其称上党 五代后唐庄宗初,置潞州。梁末帝时(913-921年),改为匡义军,岁余,唐灭梁,改为安义军。后晋(936-947年),复为昭义军。后汉、后周(947-960年)因之。具治潞州。
산서성 장치시는 산서성 동남부에 있다. 옛 명칭은 상당이다.(...) 오대 후당시 로주를 설치..당이 량을 멸하고 안의군으로 개칭하다. 후진때 소의군이 되다...
http://club.heima.com/show_topic.aspx?forumid=198605&topicid=840003
☞ 후당 때 산서성 장치시가 안의군이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의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3.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흥화진(興化鎭)성 곽주, 귀주, 흥화진성은 위 서희 수복 6주 중 곽주, 귀주, 흥화주와 명칭이 같은 것으로 보아 그 곳에 성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서희 개척 6성”은 “서희 수복 6주”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Ⅲ. “서희 수복 6주”가 ‘강동6주’ 로 알려진 원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희 수복 6주와 개척6성은 현 하북성 북쪽에서부터 요녕성 요하(압록강) 동서에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라고 백과사전과 국사교과서에 기록되고 있을까?
언제부터 강동6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혹시 이러한 용어도 식민지사학자들이 만든 용어라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세뇌교육과 최면을 건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잘못된 용어는 적합한 다른 용어를 찾아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Ⅳ.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서희수복 6주’ 중 흥화주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 귀주는 현재의 하북성 정현, 곽주는 현재의 북경과 천진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서희 개척6성’ 중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 귀화진은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 나머지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흥화진(興化鎭)성은 위의 6주 위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위치 비정은 역사적 사실관계를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나라와 지나의 사서, 지나의 고대지명사전에 실려 있는 동일 지명을 찾아서 추정한 것이어서 한계가 있다. 필자의 조그마한 노력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구이넷 회원 여러분의 의견제시를 기대한다.
이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이트에서 만이라도 “강동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희 수복 6주’ ‘서희 개척 6성’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며, 더 좋은 용어가 있으면 제시하여 같이 검토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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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산책 (2006-04-05 11:37:05)
서희6주(서희수복6주), 서희6성(서희개척6성)으로 써도 될 듯하네요.
연구를 해본 건 아니고 단지 sumer님의 윗글을 보고서 느낀 감인데, 너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기본적으로 6주든 6성이든 어느 일정지역에 집중분포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로는 지금 대륙사서에는 당 이전의 사서들도 (누차 얘기하는 것이지만) 요동, 요서의 기준이 총 5개 정도 된다는 거죠. 가장 문제가 되는 영정하와 요하의 문제인데 윗글에서도 보면 북경 서남 요서지명들이 여럿 등장하고 북경~천진의 요동지명들도 여럿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지금의 요하 일대로 보이는 지명들도 여럿 있고....
결국 사서기록에도 영정하 기준과 요하 기준이 혼재되어 구분이 잘 안된다는 거죠. 님의 분석에 의하면 거란은 지금의 내몽골 정도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요. 하북성 중북부와 요녕성이 고려니까...
예를 들면 철주 같은 경우 漢 안시현이라는데 이때 이들의 기록은 요하 하류 일대로 보고 쓴 것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한의 안시는 요동군의 속현으로 북경~천진에 있었다는 겁니다. 또 곽주 같은 경우는 천진 일대로 보이는 고대 현이름 중에 平郭평곽이 아닌가 생각되거든요.
기록은 하북성의 고대의 요서지명, 요동지명을 쓰면서도 그것들을 인식하기는 요하 기준으로 인식하고 썼는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건 위사 기준이지요. 사서상의 지명들 자체가 요동/요서는 옮겨져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리고 또 위의 분석에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저렇게 지역이 넒게 분포할 경우, 동서로 무척 길게 늘어져 예컨대 거란이 북에서 남으로 난하 일대나 천진 일대를 치면 바로 허리가 잘려버리지요. 군사전략상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위 기록들을 어느 정도 믿을 경우 산책이 추구하는 실사 기준으로 보면 영정하 기준 요서, 요동의 지명들이 많아 하북성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저 기록들을 남긴 사람들은 요하 기준으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냥 대략 봐서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유성, 창려라는 지명도 원래는 북경 서남 요서군 지명인데 기록에는 의도적으로 요서로 설정하고 기록을 해두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 기록들을 지금 분석할 때 북경 서남으로 보아야 할까? 지금의 요서로 보아야 할까? 이런 얘긴데....지금의 요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 자칫하면 역부회가 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잘 따져보아야 할 겁니다. 본말이 상당히 헛갈려요.
산책은 서희6주를 지금의 요서 정도로 봅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 있지만 대능하나 난하의 동쪽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거란의 동경을 학계에서는 遼陽요양으로 보는데 산책이 보기에 朝陽조양 정도로 보거든요.
이와 관련하여 고지도들을 보면 난하 하류 산해관 정도에서 요동반도 북쪽 철령의 북으로 방향을 보면 동북방향인데 비스듬히 목책이 쳐진 것 있지요. 그것이 조양의 동남을 지나면서 뻗쳐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서희6주는 (그 전에 잃었다가) 그때 당시에 확보한 지금의 요서지역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철주를 개원과 철령의 서쪽에 있는 철법/법x 일대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거죠.
고구려수도 평양을 지금의 창려로 보는데 이곳이 고려 서경이자, 원의 동녕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얘기들은 연구한 결과가 아니고 단순 감이므로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고대사산책 (2006-04-05 11:38:15)
거란이 일어난 곳을 산책은 고구려와 거의 같다고 보거든요. 단단대령(칠로도산) 동쪽 적봉의 북 정도.... 그래서 서희 말에 거란의 동경도 원래 고구려령이었다고 했는데 초기고구려 영역이 난하 일대였다는 거죠(주로 난하의 동편). 이 일대에 거란의 동경도 있었다는 건데 그것이 朝陽조양 정도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윤병진 (2006-04-05 13:51:39)
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1010년) 11월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壬辰,崔士威等,分軍出龜州北,恧頓,湯井,曙星,三道,與契丹戰,敗績。
=> 이 기록으로 보면, 강동 6주중의 하나인 흥화진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쪽에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당시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 |
첫댓글 글을 읽다가 ...다른일 보고와서 또 읽다가 한자 어려워서 쉬었다가 또 다시읽다가....몇번을 하다보니 앞에 읽고 느꼈던 내용은 모두 까 먹고 맙니다 마지막 끝의 결론은 이해를 좀 하겠습니다 만 글이 제가 읽기엔 좀 난해해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난 나중에 읽어야지 ..공부하기 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