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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인간혁명 30권 제6장 서원(49~54)
<서원 49>
야마모토 신이치는 세계광포를 위해 전력으로 나아갔다. 때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학회에 대한 공갈 및 미수사건으로 체포된 야마와키 도모마사의 재판이 이어졌다. 신이치는 1982년 10월과 그 이듬해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정했다. 1985년 3월 도쿄지방법원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물론 실형이다. ‘양형의 사유’는 ‘피해금액이 클 뿐 아니라 변호사로서 묵비의무를 어긴 배신성이 매우 강한 범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승려와 결탁해 학회공격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주간지 등을 이용해 학회비판을 부추기는 행동’을 하는 한편, 승속화합을 바라는 학회를 협박한 야마와키의 비열하고 악질적인 수법도 명백히 밝혀졌다.
또 재판에서도 여러 허위 공작을 편 점을 지적해 ‘피고인은 수사 단계에서 본 사건의 사실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공판에서 수많은 거짓말로 변명을 만들어내고 허위 증거를 제출하는 등 반성하는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본 사건은 범죄의 정황이 나쁘고 피고인의 죄책이 중대하다’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또한 판결문에서는 ‘피고인의 진술은 신용할 수 없다’는 표현이 곳곳에 보였다. 법정에서 거듭 거짓말한 것도 명백히 드러났다.
야마와키는 ‘징역 3년’이라는 도쿄지방법원의 판결에 즉시 항소했다. 그러나 도쿄고등법원에서도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1991년 1월,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징역 3년’ 형을 확정했다.
1980년 6월, 학회가 경시청에 야마와키를 고소해 1981년 1월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광포의 앞을 가로막는 어떠한 모략도 학회의 전진을 방해할 수 없다. 성훈에는 “악(惡)은 많아도 일선(一善)에는 이길 수 없으니”(어서 1463쪽)라고 씌어 있다.
<서원 50>
신이치는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佛法)의 법리를 근간으로 세계에 평화의 크나큰 조류를 일으키고자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 광선유포를 위해, 승속화합을 위해 최대로 노력하고 전면적으로 종문(宗門)을 외호했다.
종문으로서는 1981년 니치렌 대성인 제700 원기(遠忌, 50년기 이후에 50년마다 갖는 법회)를 마치고 1990년 가을에 거행하는 다이세키사(大石寺) 개창 700년 식전을 어떻게 장엄하게 장식해 성공시키느냐가 커다란 과제였다.
1984년 1월 초, 신이치는 닛켄의 강한 요청으로 다시 법화강 총강두(總講頭)에 취임했다.
3월, 개창 700년 기념 경찬준비회의 자리에서 신이치는 10년 뒤를 목표로 200개 사찰을 건립해 기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원(大願)이란 법화홍통(法華弘通)이니라.’(어서 736쪽) 하는 성훈대로 영법구주와 광선유포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로운 사찰의 건립을 삼가 발원하는 바입니다.”
이 기진은 승속화합을 바라는 학회의 진심 어린 발로였다.
이듬해 1985년 10월, 닛켄이 신이치를 개창 700년 기념 경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신이치는 최대한 성의를 다하자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200개 사찰에 관해서도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립해 기진했다. 마침내 1990년 12월에는 사찰 111개를 기진하기에 이른다.
신이치는 승려들이 날마다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동지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겨 주기 바랐다.
성훈에는 “니치렌과 동의(同意)란다면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이 아니겠느뇨.”(어서 1360쪽)라고 씌어 있다. 니치렌 대성인 말씀대로 고생을 거듭해 홍교에 힘쓰는 동지는 지용보살이자 불자(佛子)다.
홍교하는 사람을 “마땅히 일어나 멀리 마중하여 응당 부처를 공경하듯이 하라.”(어서 1388쪽)는 것이 대성인 정신이다. 불자를 상찬하고 지키고 격려하는 데 광포가 있다.
<서원 51>
1990년 여름, 총본산에서는 학회 청년들이 9월 2일에 개최하는 다이세키사 개창 700년 경찬기념문화제를 준비하느라 연일 땀방울을 흘렸다.
이 문화제는 개창 700년 기념행사의 막을 올리는 것으로 10월에 경찬대법요의 초회와 본회가 개최된다.
9월 2일 해질녘, ‘천좌(天座)에 빛나라 행복의 광채’를 주제로 총본산 대객전 앞 광장에서 경찬기념문화제를 성대히 개최했다.
종문에서는 닛켄을 비롯해 총감 등을 맡은 승려 외 다수의 승려들이 참석하고 학회에서는 명예회장인 신이치와 회장인 아키즈키 에이스케, 이사장인 모리카와 가즈마사 외 부회장 일행이 참석했다.
문화제에서는 예술부와 남녀청년부가 일본 전통음악 연주를 비롯해 우아한 춤, 발레 등 열연을 펼쳤다.
또 각양각색의 민족의상을 입은 세계 67개국·지역 멤버들이 자랑스럽게 퍼레이드를 펼쳐 장내에 큰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세계광포의 서원을 가슴에 품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멤버들의 순수한 마음에 응하고자 신이치도 힘껏 박수를 보냈다.
옆에서 닛켄도 웃으면서 연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해 12월, 종문이 신이치와 회원 사이를 분리시키고 학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실행한다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경찬기념문화제를 마친 신이치는 제5회 중일민간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중국대표단과의 교류회와 제12회 SGI 총회를 비롯해 브라질 상파울루미술관 관장이나 유엔 사무차장, 인도 문화단체 ICDO(국제문화개발협회) 창립자 일행과 회담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치렌 대성인은 “해는 동(東)에서 나오니 일본의 불법이 월지(月氏)로 돌아갈 서상(瑞相)이니라.”(어서 589쪽)고 하시며 세계 광선유포 즉 세계평화를 전망하셨다.
신이치는 그것을 실현하는 흐름을 열기 위해 열심히 거듭 분투했다. 그에게는 나날이 평화건설을 위한 소중한 발걸음이었다.
<서원 52>
신이치는 9월 21일,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서울시 중앙일보사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하는 도쿄후지미술관 소장 ‘서양회화명품전’ 개막식에 미술관 창립자로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신이치는 ‘일본의 문화 대은인’인 한국에 도쿄후지미술관이 소장하는 서양회화를 처음 공개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보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류의 보물’을 함께 공유하는 문화 교류는 혼의 깊은 공명음을 연주해 한일 우호를 촉진하는 길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나아가 그것은 틀림없이 불법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평화·문화·교육 교류를 추진하는 창가학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멤버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22일, 한국을 출발한 신이치는 후쿠오카를 비롯해 사가, 구마모토, 가고시마를 거쳐 10월 2일 도쿄에 돌아왔다.
그리고 6일과 7일에는 다이세키사 개창 700년 경찬대법요 초회에 참석했다. 학회는 이때까지 정본당을 보수, 정비하고 총일방과 총이방 등을 신축해 기진했다.
초회 이틀째인 7일에는 신이치가 발원주(發願主)로서 기진한 대객전 천개(天蓋)의 점등식을 열었다.
연꽃잎 여덟장을 디자인한 천개는 직경 5.4미터, 높이 3.45미터로 신이치가 점등 버튼을 누르자 투조 기법을 사용한 당번(幢幡)과 여러 모양을 새긴 유리그릇이 황금빛을 발산했다.
이날 경찬위원장으로서 축사를 발표한 신이치는 가슴속에 간직한 엄숙한 심정을 피력했다.
“종조 대성인은 개창의 대시주 난조 도키미쓰에게 ‘대난(大難)을 만나야만 이 법화경(法華經)을 안 사람’(어서 1538쪽) 즉 대난을 만나야 법화경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난도 정법을 홍통하기 위해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대난이야말로 더 없는 영광이다. 우리는 이 성훈대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믿음을 평생 깊이 수지할 것을 결의하는 바입니다.”
바로 그 대난이 다투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서원 53>
닛켄은 다이세키사 개창 700년 경찬대법요의 초회 첫날 설법에서도 또 이튿날 발표한 경찬문에서도 창가학회의 공적을 칭송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래 신도단체 창가학회가 크게 발전함으로써 일본뿐 아니라 세계로 정법정의가 넓혀지고 있다’며 절찬했다.
신이치는 초희가 끝나자 곧바로 지도차 아이치로 갔다. 이후 다시 총본산으로 돌아와 12일과 13일에 개최하는 경찬대법요 본회에 참석했다.
본회 이틀째에 닛켄이 신이치에게 개창 700년 경찬위원장으로서 기념사업을 추진해 외호의 사명을 다한 공적이 참으로 현저하다며 감사장과 기념품 목록을 증정했다.
닛켄 등은 그로부터 얼마 뒤, 학회를 파괴하기 위한 모략을 꾸며 실행에 옮겼다.
경찬대법요를 마친 신이치는 각국의 식자들과 대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네지데트 세린 터키 앙카라대학교 총장 부부를 비롯해 평화학자 요한 갈퉁 박사, 코넬 카파 뉴욕국제사진센터 이사장 부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의 파비오 로베루시 모나코 총장 일행 등과 거듭 회견했다.
동서냉전이 종식된 지금이 바로 21세기를 향해 새로운 평화의 다리를 놓을 때라고 정하고 진검승부를 벌이는 나날이었다.
12월 13일, 신이치는 노르웨이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의 스베레 루두가르도 소장과 세이쿄신문사에서 회담했다.
소장이 제안한 ‘환경안전보장’을 주요 주제로 대화했다. 이는 환경문제와 군축문제를 한데 묶은 안전보장의 구상이다.
신이치는 불법의 ‘의정불이(依正不二)’ 원리 등을 소개해 환경파괴를 비롯한 기근, 역병, 전쟁이라는 사회적 혼란은 인간의 선성(善性)을 해치는 ‘탁한 생명’ 속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생명 자체를 변혁해 정화하는 테 평화를 위한 확실한 길이 있고 불법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인간혁명>이 SGI의 평화·문화·교육 운동의 근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원 54>
신이치가 루두가르도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 소장과 회담한 13일, 도쿄 스미다구에 있는 사찰에서는 학회와 종문이 연락회의를 열었다. 학회에서는 회장 아키즈키 에이스케 등이, 종문에서는 총감 후지모토 니치준 등이 참석했다.
연락회의를 마치려고 할 때쯤 총감이 아키즈키에게 봉투를 건넸다. 지난달 16일, 학회창립 60주년을 축하하는 본부간부회에서 신이치의 스피치를 녹음한 내용을 바탕으로 질문서를 작성했으니 문서로 답해달라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성급한 요구였다. 학회 최고간부들은 종문 측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키즈키는 무언가 의문이 들면 문서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연락회의 자리에서 서로 대화하자고 요청했다. 총감은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문서를 들고 돌아갔다.
그러나 종문은 3일이 지난 12월 16일자로 학회에 문서를 발송했다. ‘우편물이 도착한 날부터 7일 이내에 종무원에 필착하도록 문서로 책임 있는 회답을 바란다’고 씌어 있었다.
신이치는 스피치에서 세계종교로 비약하기 위한 포교의 방법과 종교운동의 추진방법에 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 본의를 알려고 하지 않은 일방적인 추궁이었다.
그리고 신이치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대합창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독일어로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것은 기독교의 신을 찬탄하는 격이라 대성인 본의에 위배된다”는 등 일방적인 의견으로 질문했다.
12월 16일, 신이치는 제1회 장년부총회를 겸한 본부간부회에 참석해 이날은 베토벤 탄생 220년에 해당한다며 ‘내 정신의 왕국은 천공에 있노라’는 의연한 악성(樂聖)의 삶을 언급했다.
베토벤은 왜 고뇌 속에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자신이 획득한 환희 찬 경애를 미래를 위해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이렇게 통찰했다. 바로 위대한 음악가의 일념은 학회정신과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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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