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씽크대 위의 작은 부엌창은 북향으로 나있다
날마다 설거지하면서 무심한 시선이 건너가는 곳이다.
작은 목련나무가 거기 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가 헤성거려서 목련인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며칠 전 꽃 두어 송이를 피워 눈길을 끌어잡는다.
북향의 어둡고 습한 곳에서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나무에게도 봄은 온다.
양지쪽 목련들이 다 진 한참 후 늦게라도 기어이 가까스로 꽃을 피운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다.
고맙다고 꼬옥 안아주고도 싶다.
왜 이렇게 애잔하고 안타운 걸까?
겨우 며칠 찬 바람에 떨고 있더니 오늘은 한 앞도 남지 않았다.
꽃 시절이란 너무 짧고 허무하다.
너는 거기 서 있었어
찬바람 속에서 하얗게 웃고 있었어
창문이 열리기를
반가운 얼굴 마주하기를
행여 기다리며 서성였을 거야
너는
바람 속에서 떨고 있는데
문쳐닫고 앉아
리모콘만 만지작거리는 나여
노크 소리도
바람소리도
못 들었다 치자
무풍지대에서 깜박 잠을 잤다 치자
어떻하니
아차 아차
뒤 늦은 후회
나의 시가 떠나버렸구나
오늘은 며칠전 영면하신 이외수 님의 시를 위주로 수업을 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겨울비 / 이외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은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 강인한
포켓이 많이 달린 옷을 / 처음 입었을 때
나는 행복했지.
포켓에 가득가득 채울 만큼의 / 딱지도 보물도 없으면서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네.
서랍이 많이 달린 책상을 / 내 것으로 물려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지.
감춰야 할 비밀도 애인도 / 별로 없으면서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네.
그리고 다시 십 년도 지나 / 방이 많은 집을 한 채
우리집으로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행복했지.
그 첫번째의 집들이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
태극기를 대문에 달고 싶을 만큼
철없이 행복했지.
그때 나는 쓸쓸히 중년을 넘고 있었네.
뒤편 / 천양희 (1942~ )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가양대교 / 신용목
얼음과 수증기 사이에 있다고 말하면, 꼭 겨울 빙판과 여름 구름 사이에서 물은
봄과 가을 같지만
봄과 가을만 흘러가는 계절 같지만
달빛 안장 위의 밤
어느 것이 쉬울까, 바다에 빠진 웅덩이를 찾는 일과 웅덩이 속에서 바다를 찾는 일
강에서 눈사람을 부르는 일과
구름을 꺼내는 일
가양대교 위에서 어둠과 물을 구별하는 일
아니,
우리가 물주머니 같은 거라면
물풍선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공원에서
나무가 잎을 피우고 짙어지고 또 잎을 떨구는 일은 꼭 흘러가는 일 같다,
바람 갈퀴를 흩날리며 달려가는 나무를 별빛의 채찍질로 후려치는 일은
꼭 사라지는 일 같다
어느 것이 맞을까, 다리를 걸으며 밤을 건넌다는 것과 밤을 걸으며 다리를 건넌다는 것
어느 것이 꿈일까, 나는 물의 눈동자가 제 깊이 속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밤과 어둠이 서로를 바꾸고 사람과 사랑이 서로를 잃어버리는 바다를 보았다
어느 것이 틀릴까,
나는 봄과 가을이 나란히 검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 / 함민복(1962~ )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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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듯,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우리의 일부가 그림자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발치에도 있고, 우리 바깥에도 있다. 함민복 시인은 그중에서 몇 조각을 이어 붙여 시로 만들었다. 꽃이 쉽게 지는 게 아쉬우니 지는 그림자가 색이라도 입었으면 한다. 어머니 휜 허리 안쓰러우니 그림자라도 펴졌으면 한다. 걸인이 고단하고 추우니 그림자라도 따뜻했으면 한다.
꽃도 어머니도 걸인도 다 서글프지만 그림자는 그중에서도 더 소외된 부분이다. 이걸 발견한 시인의 눈이 귀하고, 거기에 담긴 따뜻한 시선이 귀하다. 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자 지는 자리가 더 추운 겨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