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부록(중)
11. [사기/탁록대전]지금부터 4700년전, 서방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치우천황에게 도전했다.
탁록을 중심으로 황제헌원과 10년에 걸쳐 73회의 전투, 치우은 안개를 일으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 동방의 문화를 전수해주었다. 치우천왕은 머리에 쇠투구와 구리면 갑옷으로 무장, 당대에 처음나타난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고, 철기농기구를 보급하여 농업생산의 혁신을 갖어와 존경과 인기가 무신(武神)으로 받들어 진다. 그런데 사마천은 도리어 [史記]에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역사를 왜곡 하였다. 사마천은 중국 역사의 시조인 황제를 천자(天子)로 만들려 했다. 현대 중공은 그러한 치우를 그들의 3조상으로 올려 놓고 있음을 보고 있다.
[한단고기-신시본기]에서는 이러한 탁록전쟁과 관련한 논쟁의 문제와 진실에 대하여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만들었다고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은 날자별로 작성한 사마광 역사책으로 사기 구전체와 대비, 역사의 교훈(모택동이 애독)이 담김.
12. [상 주(商 周)시대에 한민족의 무대]
[사기 오제본기] 요임금 말 공공(共工)을 유릉으로 유배보내니 북적으로, 곤을 죽이니 동이로 변했다.
[죽서기년]bc3세기 발굴 죽편/ 순임금 25년(bc2333년) 식신씨가 내조하여 활과 화살을 올렸다. 발조선)
[관자]소광 /제한공(bc662년)이 북쪽의 산융을 격파했는데 북쪽에 이르면 산융 고죽 예맥이 있다.
[후한서 권115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며 예(濊)는 범을 신으로 섬겼다.
[抱朴子]<內篇 地眞> 동진의 갈홍 저/에 '옛적에 헌원이 청구국에 들러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얻었다'
고 나온다. 요하문명에서 밝혀진 것처럼 황제(헌원) 이전에 이미 동쪽에 '청구배달국'이라는 문명국이존재했고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昔黃帝東到靑邱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13. [환단고기]/ 조선 세조가 왕권의 부정적 정체성을 벗어나기 위해 명(천자국)에 천자관에 맞지않는 고조선상고서를 위서로 지목하고 수서령을 내렸다. 고성이씨 문중에서 비장 전수하던것을 1911년 계연수가 필사본을 발행30부, 독립운공가와 일부 종교단체 구약서로 쓰이기도 하며 정사에 오르지 못하여 오다가 이유립- 안경전에 의해 발행되였다. 삼성기 상(三聖記 上) 안함로 /삼성기 하(三聖記 下) 원동중 /단군세기 (檀君世記) 이암/북부여기 (北扶餘記) 범방 /태백일사(太白逸史) 이맥, 이상을 모아 편집한 것이 한단고기이다.
중국사서와 불일치한것이 있으나 우리고대사 자료가 강제로 없애진 경위를 이해 하면 일정부분 가치가 있다.
14. [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 말 이암의 국풍사상을 이어 영향받은 태종, 세종이 훈민정음 천문대 등 천자(明)만 할수 있는 일을 단행하면서 유학 대신들의 저항을 받았다, 훈민정음 해례본 문장에는 고대 천자국을 나타내는 국풍 문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단종을 폐위한 세조의 정통성 명분을 위해 명(천자국)에 거슬리는 고조선 사서를 없애는 수서령을 내린것이다.
[승정원 일기] 영조가 고려사 단군편을 찾았음이 기록되고 있고. 세종실록에도 고조선이 등재 됨(일제가
고조선은 실제가 아닌 신화로 왝곡함).
15. [4고전서]과 [거란고전]
[사고전서]/ 청 건융제 역사책. 동양의 5.000년 역사 전량수록 문학, 역사, 철학의 집대성함.
8만권 4천의 학자 13년 소요. 고조선 행적 다수 기록 발견(청왕실은 신라 김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있음).
[북경지리지] 송사에, 조선하를 지나면 고북구가 있다는 기록이 있음. 베이징은 최초 고조선의 도시였고. 금이 수도로 할 때 송이 남쪽에 있었다. 그후에 원의 수도가 된다.남경인 송에서 북의 요로 가는 경로(요의 조선하)가 기록되어 있다.
[거란고전]
삼국유사 고조선기와 유사한 천손민족 구조...“요나라는 빈철(鑌鐵)의 견고함을 좇아 요(遼)라 하였다.,
빈철로 만든 칼은 예리하며 용맹한 거란 병사을 연상한다. 요태조의 어머니가 하늘의 해가 떨어져
품으로 안는 태몽을 꾸고 요태조인 야율아보기를 낳았다고 한다.
거란, 태양신후예,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 전승...
압록강하면 현 북 중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다. 청둥오리(鴨)의 머리처럼 강물이 푸르다는 것이 아니라
“수계(修禊, 부정을 씻는 목욕재계)를 하는 의식, 알복록(閼覆祿)=압록이라 하였다.
이때 ‘알복록’ 즉 ‘압록’이라는 말은 천손민족의 강에서 수계의식을 치르는 것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부족의 이름으로만 생각하였던 ‘읍루’라는 말이 압록의 다른 말이었다.
현재의 압록강처럼 어느 한 특정지역의 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살고 있던나라에 흐르던 강,
즉 도읍지에 흐르던 강임을 알 수 있다. 도읍지가 옮겨 새로운 나라가 들어설때는 또 다른 압록강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 음만 따서 漢족들의 붓끝에서 압록이 ‘오리머리처럼 푸른’ 강으로 둔갑하였다.
평양도 마찬가지이다. 현 평안도의 평양만을 떠올리는데 <거란고전>에서는 평양은 신경(神京)이라 하였다.
신조(神祖)가 앙수달(鞅綏達)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 곳이 신경(神京)이라는 것이다.
즉 앙수달은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서 언급하는 단군 왕검께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
앙수달은 아사달이며 곧 평양으로서 신령스러운 천손민족의 임금이 거처하는 도읍지라는 말이다.
고대에는 위의 압록강처럼 평양이란 말도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거나 이주를 하였을 때에도 따라다닌 이름이다.
예단군왕검이 도읍한 아사달이 현재의 중국 요양이라면, 요양이 평양이 되는 것이며 용양에 흐르는 요하는
압록강이 될 것이다.
마간(瑪玕), 말갈(靺鞨), 발해(渤海), 음이 변해 표기만 달리한 같은 부족
<삼국사기>에는 초기부터 말갈의 이름이 등장한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였는데 말갈이 어디에
존재하였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고민을 한다. <거란고전> 제6장의 기록은 이러하다.
“마간(瑪玕), 말갈(靺鞨), 발해(渤海)는 같은 말을 나타내는 음운으로 서로 이어졌으며 주신(珠申), 숙신(肅愼),
주진(朱眞)도 같은 음으로 서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전통은 자명(自明)한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음이
변하여 표기만 달리 했을 뿐 각기 다른 부족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역시 말갈족이 세운 것이 아니라, 발해나 말갈이나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며 중국의 사서에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말갈이나 발해의 개념을 모르는 데에 생긴 오해일 뿐이다.
<거란고전>의 다른 내용들을 보면 <삼국유사>의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의 개국의 기사처럼 한웅천왕과 웅녀가
결혼을 하여 단군왕검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호마가혜(胡馬可兮)라는 하늘 닭 즉 봉황을 태워 세상에
내려보냈다는 이야기가 한웅천왕이 천부인 3개를 갖고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과 의미상 유사하다.
또한 신조의 후손이 중원을 정복하고 오원(五原)으로 나누어 통치를 한 사실과 중국의 사서에서 말하는
구이(九夷)의 위치와 내용을 짐작케 하는 내용들도 담겨져 있으며 중원에서의 화하족과의 분쟁에서 패하여
중원에서 나오게 되는 과정 등 다른 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기존의 사서와 비교
검토하고 연구한다면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란고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06년 일본의 압록강군의 병참경리부장으로 심양 일본인 장교
하마나 히로시우(浜名寛祐)에 의해서이다. 고능묘에서 출토 사찰에 보관되어 있었던 사료를 필사하여
1927년에 <거란고전>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부터이다.
하마나 히로시우는 <거란고전>을 통해 제국주의적 사관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와 한국, 일본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며 그 뿌리가 대륙에서 출발한 동일한 천손민족의 후예라는 것을 밝혀 빈약한 열도의 역사를 극복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거란고전>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현 일본의 역사하고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란고전>에 나오는 역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열거한 압록강과 평양 그리고 마한이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요, 순은 동이계나라였으나 [해막상변]으로 인하여 천지변동과 합께 도이족은 몰락해 하화족에
의해서 중원에서 쫓긴다.동이족으로 불리는 한 일 만주족이 중국대륙 초고대 왕조를 세운 선주민이며
거란왕조도 그 후예였다.또 새 사람 곰의 부족이 한반도 남쪽에 침입했다는 기록이나 흉노 부여 고구려 등
기마민족국가의 성립, 야마도국과 고한국과의 교류, 마한 등 환일본해권 문명의 존재를 전하는 귀한 역사서이다.
비미국 씨주감에 말하기를 천지개벽과 대홍수 화재를 경험한 뒤에는 서쪽의 종족이 동으로 점차 들어왔다.
소머리신과 뱀의 몸을 한신으로 불리는 복희와 신농과 황제와 소호, 도당, 우순이 나왓다. 이들은 서방에서
동진한 위인들이다.
제36장에 辰(마한)은 漢을 막아내고 置郡志를 분쇄하다.
진은 개마대산을 험고로 업록대수를 성으로 삼아 한구와 겨뤄 진번과 이둔군을 설치하려는 의지를
부수고 깨트렸다. (이러한 사건은 환단고기에도 수록되여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16. [두로공신도비문] 중국 섬서 함양박물관에 소장. 북주시대 유신(庾信)이 비문을 씀, 두로공은 화북창려현에 있던 연(燕) 모용왕(고조선 선비족)의 후손. 비 서문에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으로 시작한다.
고죽국의 백이숙제 사당 등 난하 변의 수천의 비림을 현대 중공이 개발로 훼손 함. 삼국유사에 고려가 본래 고죽국에서 왔다고 기록하였다. 즉 연(燕) 모용씨는 중국계가 아니라 조선계 선비족임을 알 수 있다.
이선비족 일부가 낙랑인과 합해져 고구려를 거쳐 남하하여 신라에 이주하였다. 이 두로공신도비를 세운 전연(유주소재)은단군조선-고죽국-기자조선(고조선)-낙랑(한4군)-전연(모용씨)이 같은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17. [주몽의 뿌리] 北州 冠軍大將軍 頓陽折衝都尉 高乙德墓誌銘(677~699)에 朱蒙誕大治燕土 受統遙陽
주몽은 연(하북)에 태여나서 그 땅을 크게 다스리고 요양을 받아 통치했다는 비석이 전한다.
고구려족인 고이(高夷)는 하북에서 하왕조 이후 상- 주를 거쳐 한(漢)대에는 晉城에서 고읍(하북)으로 옮겼다. 주몽의 조상이 하북에서 발원하여 요서와 요동 한반도 북부에 동이 조선족의 분포하였음을 알수 있다.
18. [구당서(舊唐書)] <신라전>에는 "신라는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라는기록이 있다.
<북사(北史) 신라전>을 보면, "신라는 그...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구당서] 지리지 권 38 안동도호부에 당의 영토에는 동쪽 안동부, 서쪽 안서부를 뒀는데, 남북은 한나라 때와 같았으나, 동쫀은 미치치 못해고 서측은 초과했다. 동쪽 한나라때 낙랑 현토만큼 넓지 않은데 지금의 고구려 발해가 그곳이다. 지금의 요동(요녕성)으로 그곳은 당나라 영토가 아니다. (漢地東至 樂浪玄莵, 今高麗 渤海是也. 今在遼東 非唐土也.)
[진서] 권 14 지리지 평주(平州,베에징.하북)에 창려군, 요동군 ,양평 .낙랑군 .현토군 대방군 등 국군(國郡)
5치소를 평주( 하북)관할에 두었다. 즉 하북 요서에 낙랑군이 있었음으 알수 있다.
[북부여기] 진한 6부족이 모여 신라 건국의 모태가 됐고, 요서의 세력들과의 갈등으로 남하하여 경주로
이동했다. 당시(그때)의 신라왕에게 낙랑군공이란 작호를 준것이 중국의 여러사서에 나온다는것은 과거 연고지를 두고 붙이는 이름이라는 사례를 볼때 시사점이 있다.
19. [만주원류고 권4 부족 신라]봉사행정록에서 말하기를 함주에서 동주(同州는 개원촐령계)에 이르고 동쪽으로 큰산을 바라보는데 곧 신라의 경계이다 라고 하였다. 요지(遙志)에서 말한 해주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 라고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즉 해주는 지금의 해성이고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는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였고 발해에 합쳤다가 요나라에 병합되였다). 당 현경 건봉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 많이 신라에 편입되였는데 동서로 900여리가 더해졌고 남북으로 일천여리가 더해졌다. (통일신라 영토는 요동까지임이 확인된다)
[성종실록 12년 梁誠之 상언중]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에서 남쪽으로 삼면이 바다에 둘러있고
육지가 연달아 뻗어 있어 그 거리가 만리나 된다. 당태종은 6차례나 원정했지만 요좌(遙左)에서 공이 없었으며,
한나라는 비록 그 땅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였다.
21. [제왕운기 권상]금나라의 삼한관(三韓觀)
그 선조이신 태사 오고랄은 평주(平州 요서지역)의 산수 빼어난 기운을 주셨네. 짐짓 우릴 일컬어
부모의 나라라고 금나라 사람들의 시에 이르기를 "연지(燕地 북경지역)는 신선이 사는 곳, 삼한은
부모의 나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근본을 잊지 않은것이다. 형제 관계를 맺어 사신을 통하였네"
22.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1925년 일제는 한국사의 왜곡과 식민통치 수행을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고대사를 잘라낸 반도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고조선 기록을 말소한 [조선사(朝鮮史)]를 편찬 보급하였다. 광복후 국사편찬에 있어 자료미비와 일제 잔재인 조선사를 과감히 개폐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데. 마침 홍산유적 등 요하문명의 발굴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역사 되찾기의 대장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23. [고대 발해는 대야택을 지칭한다]
고대에 발해라고 한곳은 지금의 대야택(거야택) 즉 현 산동성 거야현 북쪽에 있고, 고대에는 제수와 사수가 서로 연결되어 접해 있어 바다같이 넓었다. 당나라 때에는 대야택이라고도 불렸다. 송때 거야택의 남부는 마르고 평지가 되었고, 북부는 양산박의 일부가 되었다. 일제침략시대에 이 발해를 현 발해와 황해로 왜곡하여 고대역사를 한반도안으로 축소시켰다.<전국책 월책>에 설명된 “제가 발해를 건너다”의 발해는 거야택이다.
[한서 무제기]원광 3년 봄 황하가 범람해 언덕에서 꺾여 동남류해서 발해로 들어간다는 발해는 거야택이다. 그리고 거야는 동해라고 불렀다.
[사기 항우본기]에서 “항우가 이미 서쪽에서 와 동해로 정했다.”는 동해는 거야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진서.지도기]를 인용한 <수경주>에서 전하기를 “염구는 춘추시대의 제나라 도읍인 동해임이 밝혀졌다.
현재 범현 경내에 있는 땅이다. 멀리 한나라와 위나라의 동해군이고 발해군 도읍은 동하에 비해 아주 멀다.
위. 진시대의 거야택은 사람들에 의해 동해로 불렸다. 거야가 바다로 불린 건 2천년이 지속된다, 갈석의
위치를 산서에서 화북으로 왜곡하였고, 대야택을 발해로 왜곡하며 한중 고대사를 한반도안으로 축소하였다.
가. 고대의 갈석은 현 산서성 중조산 남부와 황하의 접경이고. 발해는 하남과 산동접경의 대야택으로 불렀다.
나. 위만조선과 한 그리고 수~당과 고구려, 백제는 이지역을 중심으로 대치하였다.
24. [사대모화와 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로 촉소시킨 역사를 고쳐야 한다. 특히 통일신라의 강역이 평양
이남이 아니라 만주 요녕지역 까지로 밝혀지고 있으며, 고려 초기의 서경이 요녕성 요양(개경)이며 거란과의
7차에 걸친접전을 할 때 국경인 요하주변의 6성의 위치도 요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의 국경도 중기
윤관이 설치한 6성의 위치도 간도의 공험진까지이다. 근세조선에서 명(明)을 의식하여 고려역사를 격하하였다.
요하(鴨淥)를 압록(鴨綠)강으로 오인하여 후대에 와서 현재의 압록강을 국경으로 왜곡하는 오해가 계속되였다.
그후 항일시대에 또 한번 '조선사편찬'을 통해 일제 점령의 정당성 강조를 위해 한반도안으로 축소 했다.
고려초기에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고토로서 중국 연안의 금주(요동반도), 등주(산동반도), 무강주와 양주, 천주
그리고 대마도까지 영지로 되여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고려사와 요, 금사에 기록에 나타나 있다
위만조선과 낙랑 위치를 대동강으로 교과서에 표기한 것은 삼국사기 원문을 오역하며 왜곡된 것이다.
[단국조선과 위만조선의 역사적 오해]
[단군조선]은 BC 2333년 건국 초기부터 대단히 강성한 나라였다. 중국의 하(夏)는 왕조가 끝날 때까지 단군
조선을 상국上國으로 섬겼다. 하에서 상(商)으로 중국의 왕조가 교체되는 데에도 동방의 천자국 조선의 영향
력이 작용했다. 조선의 힘을 얻어 건국된 상은 줄곧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다 제12세 하단갑왕 이후 조공
을 거부하더니 제22세 무정 때는 감히 단군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조선의 역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상(은)을 이은 주(周) 역시 조선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 주를 건국한 문, 무왕은 그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이었을 뿐아니라 상의 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주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동이족이었다. 후에 그가 제(齊)에
봉해진 것은 제가 동이족이 많이 살던 산동성 지역이어서 동이족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한나라 초기까지 부여단군에게 옥갑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때 단군의 위세는 한나라 초기까지
이어쪘음을 알수 있다.
[위만조선 실체] 한(漢) 초기 연(燕)의 위만이 1천명 무리를 데리고 번조선으로 망명했다.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국경을 지키게 한다. 위만은 준왕을 배반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고는 그대로 조선으로 유지했다, 준왕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군조선이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번조선의 땅은 단군
조선의 일부였기 때문에 주변에 조선의 거수국들과 북부여 마한 등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이
건재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하고 위만조선은 한사군에 의해 끝났다’고
왜곡하고 있다.
25, 백제의 대륙 경영. (뉴스 서천 허정균 저 2014.10.07 1)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두통거리가 되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중국의 사서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오, 월에 이르고 동으로는 일본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24대 동성왕(재위 479~501) 대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고구려의 문자명왕(491~519)과 함께 대륙을 지배했다.
<삼국사기> 대륙지배 역사 축소.고려 시대 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축(癸丑)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서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읽어보니,
그 신기하고도 기적적인 사실이 세상에 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세 번 다시 읽고,
그 근원을 점점 파면서 들어가 보니 이는 환상이 아니라 거룩한 일이요, 국사는 곧은 붓으로 쓴 것이니
어찌 허망된 사적을 썼으리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다시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동명왕의 영웅적인
사적이 거의 빠져버렸다. 이는 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책인 까닭에 괴이한 일을 후세에 보이게 함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를 빼어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이 글로 보아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쓰기 이전에 이미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삼국사>에서 ‘구(舊)’는 <삼국사기>가 편찬되어 나온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삼국에 대한 역사책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고려
중기인 인종 23년(1145)에 와서야 삼국의 역사를 재정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12세기 초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거란을 멸망시킨 만주의 금(金)나라(1114∼1234년)가 송(宋)의
수도 변경(邊京=북송의 서울. 현재의 하남성 개봉)을 위협하면서 고려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요구해오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 이자겸 일파를 물리치는 데 공이 있는 정지상(鄭知常) 등이
서경천도와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국으로서의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금나라나 송나라와 대등한 위치
에서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펼 때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무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편승한 개경파(김부식)가 서경 천도를 주장한 정지상, 묘청 등의 서경파를 누르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계승하자’는 서경파의 주장에 대한 대안으로 신라 계승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김부식은 1145년(인종23년) 신라 위주로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의 편찬을 끝냈다.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삼국의 고기는 문장이 거칠고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적들이 누락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
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후략)
<진삼국사표/동문선>김부식은 우리 고기의 기록을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보고 모두 빼어버렸으며
유교적 이념에 따라 역사를 새로 재편했다. 그 밖에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받들고 있던 금과 송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한반도에 수도(首都)를 둔 신라, 백제, 고구려(고주몽
이후)의 역사만 적었다. 이같은 이유로 만주를 주 근거지로 한 환국(桓國), 배달국(培達國), 왕검조선(王儉
朝鮮), 고구려(高九黎=북부여)나 중국 동해안에서 활동한 백제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백제의 영토>중국의 사서에 대륙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잦은 왕조
교체로 많은 역사서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로 시작하는 정사(正史)라고 부르는 것만도 25개나 된다.
대체로 한 왕조가 끝난 다음에 씌어진 25사에는 주변국들의 이야기를 반드시 싣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상식처럼 통한다.
첫째,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가리고(爲中國諱恥 위중국휘치),
둘째, 중국의 긍지는 높이되 동이의 긍지는 낮추며(矜華而陋夷狄 긍화이누이적)
셋째, 중국의 역사는 상세히 하고 이민족의 역사는 약술한다.(內詳而略外 내상이략외)
그래서 사신을 보낸 것은 조공을 바친 것으로 기록되고 침략을 당하여 땅을 빼앗긴 것은 책봉으로 왜곡된다.
중국의 동해안의 평야지대는 본래 유목민족의 후예이자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살던 곳이었다. 중국은 농경민족
이면서도 진, 한, 수, 당, 송나라 때까지도 도읍이 태행산을 넘지 못하고 협서성이나 산서성, 하남성에 있었다.
<3세기 중엽 고대 교역권 형성>
백제인들이 노·돛·키를 장착한 범선을 타고 대양항해를 하여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의
일로 그 중심지는 중국 동해안 남쪽의 주산군도였다고 김성호(金聖昊)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에서 주장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나타나는
회계동제인(會稽東제人), 회계동현인(會稽東縣人), 회계동야인(會稽東冶人) 등이 바로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중국 절강성 일대에 진출한 백제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며, 3세기 중엽에 이들 백제인은 주산군도와 한반도
및 규슈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하는 고대교역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증거로 이 일대에서 신나라(新:BC8~AD23) 때 주조되었던 왕망전이 출토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백제(百濟)’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사서에 백제인이 등장하는 것은 진(晉:265~419)나라 때부터이다.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역사를 담은 <주서(周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송·제·량 때 강좌(江左)를 점거하였으며 북위가 중원을 차지한 후에는 양측에 모두 사신을 보내어
번을 칭하면서 벼슬을 받았다.(自晉宋齊梁 據江左 後魏宅中原 竝遣使稱蕃 兼受封拜)” <주서(周書) 백제전>
여기서 강좌(江左)는 오(吳)·월(越)의 땅을 이른다. 이를 뒷받침하듯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영토를 “서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른다(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고 했다.
주서 백제전에서는 그들의 수치스런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서인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에는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의 땅을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
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索籍民戶 分封王爵屯戍險塞 軍征賦調悉準內地)
이는 단순한 교류가 아닌 식민지 개척임을 말해준다. 백제는 이들 중국에 있는 식민지를 ‘담로(담魯)’로
편성해 왕의 자제종친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는데 이러한 담로가 해외에 22개가 있었다.
<백제의 요서 경략>
중국의 25사 중의 하나인 <송서(宋書)> 등에 실린 백제의 요서(遼西)경략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논란이
된 것은 19세기 초 남인 계열의 실학자인 한진서(韓鎭書:숙부인 한치윤과 함께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지음)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의 저서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 권8 지리고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에 관한
기사에 대해 말하기를, “삼가 고찰컨대 바다 건너 수만리의 요서지역에 몇 개 군을 점거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로서 <송서>의 명백한 착오이며 <양서(梁書)>와 <통전(通典)>은 <송서>를 답습한 것이어서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자국에 불리한 기사를 반복했을 리 만무하다.
김부식 이래 반도사관이 굳어져 있음을 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요서지방은 오늘의 요동반도 서쪽이 아니다. 현재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태행산
맥의 서쪽이 요서지역이고 동쪽이 요동지역이다. 요동반도는 9세기에 요(遼)나라가 만주에서 나타나면서
생긴 이름이다. 또한 바다를 건너간 것도 아니다. 태행산맥 동쪽에 있던 백제 세력이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세를 확장한 것이다. 다음 <송서>의 기록은 백제의 요서경략과 함께 태행산맥의 동쪽, 즉 오늘의 하북성
일대가 백제의 영토임을 알려주고 있다.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는데 그 후 고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으며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송서 권97 열전 이만편(夷蠻編)>
백제와 고구려가 요동지방, 즉 오늘의 하북성 남부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할 무렵 중국의 북부는 선비, 흉노 등 5개의 북방 호족이 무려 16개
의 나라를 세웠었던 혼란의 시대였다.
백제의 요서진출은 근초고왕(재위:346~375), 근구수왕(375~384) 대에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이루어졌다.
<진서(晉書)> 모용황전 봉유(封裕)의 상소문에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무리들은 모두 병세지도(兵勢
之徒)”라 한 부분이 요서지역에서 백제가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선비족의 전연(前燕) 모용황은 요동을 장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342), 요서의 우문씨를 토벌하여(344)
오늘의 북경에 도읍(350)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그 중심지역인 요동, 요서지역에서 백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양서>에서도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장악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점거하여 진평군
사이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라고 적고 있다.
<통전(通典)>의 기록에는 이 백제군의 위치를 “오늘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진(晉)의 수도는 중국 동해안으로부터 수 천리 떨어진 황하 상류의 낙양(洛陽)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근구수왕이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대권을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 오늘
대동강 이남을 병탄하고는 이에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하얼빈)까지 쳐들어가 부여 서울을 점령,
북부여가 오늘 개원(開原)으로 천도함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오늘 섬서성에서는 진왕 부견이
강성하매 근구수가 또 진(秦)과 싸우니, 오늘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분피(奔疲)케 했으며,
남으로 오늘의 강소, 절강 등지를 가진 진(晉)을 쳐서 또한 다소의 주군을 빼았다”
<북위와의 전쟁>
5호16국의 혼란기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386∼534)
북위는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한 다음 후연을 격파, 하북평야에 5호16국의 혼란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한 강국이었다. 북조는 위(魏)를 비롯하여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 535~557), 북제(北齊,550~577), 북주(北周, 557~581)의 다섯 왕조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남조는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으로 이어지며 수(隋)에 통일
될 때까지 교체가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백제 24대왕 동성왕(東城王 479~501) 제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혹은 마모:摩牟)이며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
의 아들이다.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에게 요서 백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마침내 동성왕(東城王:
479~502) 10년(488)에 북위가 쳐들어왔으나 이를 물리쳤다. <삼국사기>는 이를 짤막하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의 기사를 두고 그럴 리가 없다 하여 고구려를 백제로 잘못 기록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다음 <자치통감>의 기사는 북위가 침공한 곳은 요서지역의 백제식민지였음을
밝히고 있다. “북위가 병력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위서(魏書)>에는 이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기록했다. “태화 12년(488년) 소색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 군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군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
<위서> 고조기(高祖紀) 동성왕이 즉위한 해에 회수 이남 남중국에는 남제(南齊:479~502년)가 송을 무너뜨리고
들어섰는데 위에서 소색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뒤를 이은 무제(武帝)이다. 위 기사에서 ‘중(衆)’은 외국인
군대를 일컫는 말이다. 2년에 걸쳐 고구려군과 백제군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사로 보아 이 무렵에
고구려와 북위, 백제와 남제 간에 동맹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데에는 고구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북위의 침략으로 위기를 느낀 연왕 풍홍(馮弘)은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 하면서 맞이해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연왕 풍홍이 436년 북위의 공격으로 고구려로 망명해 와서 송(宋)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재기를 기도하자
고구려는 풍홍을 억류해두었다가 438년 풍홍을 죽이고 북위의 편을 들어준 바 있었다. 이로써 비로소 북위는 439년
오호16국의 혼란을 평정한 것이다. 고구려로서도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서 북위와 동맹을 지속했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의 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남제(479 ~ 502)는 동성왕(479~501) 재위중에 형주를 중심으로한 작은 왕조이다. 24년 동안 왕은 7번이나 바뀌었다.
.북위가 490년 다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군을 공격해 왔다. 이 때의 상황이 <남제서>에 기록
하기를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했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남제서>이 490년(경오년庚午年)의 전쟁 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지난 경오년 북위가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
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쓰러진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꺾이고 그 사나운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남제서>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북위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북경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 전열을 정비한 위는 다시 494년12월 대군을 일으켜 다시 백제와 남제를 공격했다.
남제군은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두 달만에 북위 효문제가 직접 전장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 북위군은 효문제와 함께 총퇴각했다.
이 때 백제군의 활약이 “사주자사 소탄이 백제군과 함께 오랑캐를 격파하였다.” 라고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도 동성왕 19년(497년)에 북위는 또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에도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물러났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 동안 무려 5회
에 걸쳐 큰 전쟁을 치른 위는 이로써 하북성 이남을 백제-남제에 내주고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대륙 동해안의 평야지대를 장악한 동성왕은 장수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의 문자명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이 때가 백제의 최성기이자 우리 민족의 최고 전성기였다.
<삼국사기>에 “동성왕 22년(500)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었으며,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 임류각은 동성왕의 묘와 함께 산동성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구당서>에 “그 왕은 동서 두 성에 거처한다.(其王所居 東西兩城)” 라는 기사도 있다.
[출처] 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부록(중)|작성자 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