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인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오르세미술관을 갔었다. 언제 여기를 또 오겠느냐고, 온 김에 작품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기억하고 싶으니 일찍부터 나서서 보자고 하셔서 9시도 못되어 호텔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사! 벌써 줄이 몇 줄 몇 줄 겹쳐져져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오르세 궁의 자리였다고 한다. 오르세 궁은 근대기에 외무부 건물로 사용하려던 계획이었지만 결국에 ‘회계 감사원’과 ‘프랑스 최고 행정 재판소’ 건물로 사용되었고 1871년 파리 코뮌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화재 후 약 30년 간 내전의 공포를 상징하는 폐허로 보존되다가 1900년 박람회 때(사진 1), 오를레앙 철도회사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토지를 양도 받아 기차역이자 호텔을 세웠다.(사진 2) 1939년에 철도역 영업을 중단한 이후, 용도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애시 당초 설계부터 기차역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역 이상의 무엇으로 사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 소속 박물관국에서 미술관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였다. 1970년대 초반은 19세기 건축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 났던 시점이기 때문에 1978년 프랑스 정부에서 오르세 역을 ‘역사 기념물(Historical Monument)’로 지정하였고 시위원회를 조직하여 역 건물을 활용하여 미술관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1986년 12월 미테랑 대통령이 오르세 미술관의 개관을 선포하였고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현재 프랑스를 찾는 가보고 싶은 미술관 중의 하나가 되었다.(사진 3) 당시 철거하자는 주장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70년대부터 프랑스 정부가 보존·활용책을 검토하지 않았다면....오르세 미술관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원칙상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을 전시하도록 되었고, 1848년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1914년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 센터가 담당하도록 분담을 하였다.
문화재청 소속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유산 창의적 활용』에 대한 논문공모 및 학술발표를 계획하고 있다. 논문의 주제는 문화유산의 활용에 관한 연구와 문화유산의 미래가치 창조에 관한 연구로 나누어 공모한다. 문화유산의 활용에 관한 연구는 무형문화유산의 전승현황과 활용과제, 문화유산 보존 관리 사례를 통한 활용 활성화 방안, 전통문화 및 전통의례 복원, 재현사업 활성화 방안, 문화유산 관광자원화 성공사례와 활용방안을 세부 내용으로 하고, 문화유산의 미래가치 창조에 관한 연구에서는 문화유산 활용 활성화를 통한 사회적이고 경제적 가치 창출방안, 창조적 인재 양성을 위한 문화유산 교육 활성화 방안, 문화유산 기반의 문화상품 개발 및 실용화 방안을 세부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문화재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많은 고민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건물 외관만을 남겨 둔 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행사장으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기능을 되살릴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있어야 하겠다.
정읍 진산동에 영모재가 있다. 이 건물은 1915년에 새롭게 개축한 것으로 당시의 주인인 김평창이 구한말 기생학교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본 건물인 농산재는 기생학교의 기생을 명인, 명기로 등급을 가리는 심사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한 장소가 영모재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영모재는 솟을대문 상량문에 표기된 개국 524년 을묘년(乙卯, 1915년). 당시 평창은 아버지 덕홍(德洪)에게 효자정문이 내려지자 기존 죽산안씨(竹山安氏) 사당의 작은 대문을 헐고 현재의 높은 홍살문 솟을대문으로 짓고 거기에 효행의 정려를 두었다. 근대기 재실 건축으로 대문간채와 재각(齋閣)이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재각으로 사용된 농산재(사진 4)는 건물을 향하여 왼쪽에 방을 앞뒤 2열로 구성한 겹집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대문간채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고직사 기능을 지니고 있다.
농산재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그린 산수화가 벽면에 첩부되었거나 그 흔적이 있다. 또 대문간채(사진 5)에는 연화도, 호작도, 기학선인도, 방아 찧는 토끼(사진 6) 등의 벽화가 근대기의 회벽화와 단청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남아 있다. 호작은 민중의 힘, 모란은 부귀, 봉황은 관직 등용을 상징하는 뜻으로 자주 그려졌는데, 민화적인 요소가 재각의 대문간채에 그려진 예는 유일한 곳으로 생각된다. 또한 대문간채는 담장의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는데 쌍희(雙喜)를 담은 아름다운 담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근대문화유산인 이 영모재는 당시 건물의 목적을 부활시켜 활용하고 있다. 몇 해 전 영모재에 살고 있는 분과 인연이 있어 답사 끝에 영모재를 들릴 예정이라고 하였더니 광주와 남원에서 소리꾼을 초청해 우리 학생들은 뜻하지 않은 복을 누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런 소리의 향이, 몸짓의 아름다움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올 해 봄, 문화재돌봄을 위해 예찰을 나갔을 때, 농산재 처마 밑에 다유락이라는 당호를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또한 바로 앞 주말에 다유락 행사가 있었음을 알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알고보니 영모재의 다유락 행사는 매년 개최되며 올해로 3회째였다. 피에로 최경식 씨의 쇼와 김광숙씨의 전통 접시 춤과 외국인의 기예, 피아노독주와 통기타연주 등의 쇼, 서승아씨 등의 연예인들이 자리에 함께 하였다. 매년 한 번 이루어지는 행사보다 매주 이어지는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그 행사를 여는 목적이 영모재의 본래 목적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집주인도 집을 잘 관리하여야 하며, 우리 문화재돌봄사업단도 관리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 보조하므로 오고 오는 세대에게 우리가 어떤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살았는가를 전해주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음을 부담한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돌봄 사업단은 부분부분 허물어진 담장 보수를 돕고, 창호를 새롭게 고쳐주기로 하였다. 올 여름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풍성한 문화예술의 장이 되길 소망하면서....그래서 이름이 알려져 오르세미술관처럼 관람객이 몇 바퀴를 도는 줄을 서 있기를 소망하면서.... 전경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돌봄사업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