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생도2기 전사자 86명 추서 임관
육사 생도2기 첫 4년제 생도 기간은 1950년 6월 1일부터 임관 날짜 1950년 10월 23일까지 불과 5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육사 해산 명령은 임관 후 발령되었기 때문에 육군종합학교 2기 후보생 시절에는 육사 생도 신분으로 교육 훈련에 임했다. 육사 생도2기 시절 전사자와 소위 임관 후 전사자까지 합산하면 거의 반수가 희생되어 육사 출신 가운데 가장 희생이 많은 죽음의 기로 불리운다. 그 탓으로 살아남은 육사 생도2기생의 응집력은 어느 육사 출신에 비해 강하다. 따라서 육사 생도2기의 동기회는 입교한 6월 1일을 기념해 6.1회로 정했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은 현역 예비역 가리지 않고 불타오르는 한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전사 생도 2기생이 방치돼 있어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둘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첫 정규 사관생도를 엉뚱한 종합학교 출신으로 분류한 처사에 대해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 같은 처지인 1950년 해사 공사 출신은 그대로 기수가 인정된 것을 확인한 동기생 일동의 불만이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이 한을 풀기 위해 내가 나섰다. 물론 전역 후 한참 지난 후 내가 동기 회장 되면서부터 이야기다. 나는 동기회를 소집 후 안건을 1. 생도 신분으로 전사한 동기생 추서 임관. 2. 생도2기 명예 졸업을 관철해 육사 기수에 편입. 이 안건은 만장 일치로 채택 되었다. 당시 육사와 육군본부, 국방부는 우리의 움직임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지난일을 공연히 들추어 내서 귀찮다는 이유에서 였다. 특히 전두환을 비롯해 그들 주력세력 하나회 회원들이 집권중이어서 자기들의 4년제 첫 주자 위치가 손상될 것 같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론에서의 생도2기 동정론을 묵살하는 태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후 1991년 6월 1일. 동기회 이름으로 1차적으로 동기생 전사자 추서임관 건의서를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앞으로 작성 제출하였다. 그러나 곧 돌아온 회신은 냉담하였다. 전사자 유해가 없었고 전사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단념할 6.1동기회가 아니었다. 계속 공문을 보내는 한편 각자 연고를 따라 영향을 미칠 관계 부서에 시위성 탄원을 계속했다. 일간 신문을 통해 또는 다른 언론을 이용해 전파된 육사 생도2기 전사자 실상이 보도되자 비로소 국방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은 하나회 출신 노태우였는데 노태우는 그 소식에 접한 후 동정의 언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약한 다른 하나회 출신과 달리 노태우는 비교적 인정이 많은 편이었고 베트남전 맹호 재구대대장 내 다음다음 3대 대대장을 역임한 관계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훗날 들었다.
요청은 동기생 전사자를 전투중 확인한 동기생이 증언서류를 구비하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그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전투중 함께 하면서 전사장면을 보거나 전상 당한 생도의 현장에 있었던 경우, 짝을 지어 그대로 확인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나도 바로 옆 호에서 포탄에의해 비참히 잔해로 변한 동기생 이름을 적어낸 결과 1992년 10월 15일자 국방부 인사명령 제 335호로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전사자 생도 86명의 추서임관이 확정됐다. 이어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위패 봉안실에 육사 생도2기 전사자 86명의 위패가 육군소위 임관 계급으로 정중히 봉안되었다. 전두환 소령, 유학성 준장에 의해 말소되었던 육사 생도2기가 비로소 소생, 육사의 바른 역사가 영구 기록됐다. 동기생 일동은 동기회에서 만세까지 부르며 기뻐했다. 피로 맺은 전우애의 승리였다.
이제 다음 작전은 육사 생도2기생의 명예졸업과 육사 기수에 편입되어 당당한 육사인으로 남는 일이었다. 이미 86명의 생도2기 전사자가 육사인의 이름으로 추서 입관이 실현된 이상 생도2기 생존자의 명예 졸업과 육사 기수에의 편입은 가능성이 더 명료해졌다. 국방부는 내가 생각해낸 유인책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 경우 유인책은 성공을 위한 전술이었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혹시 김종욱 생도를 아시나요? 저희 외할아버지의 동생이 비운의 육사2기라고 집안 어른들께 들었는데 집에 자료가 없어서 맞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950년 7월 1일 전사하여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미혼으로 전사하여 찾는 이 없는 무덤이라 매년 국립 서울 현충원에 수양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벚꽃구경 간다는 핑계로 남편, 두 아들과 함께 33묘역을 찾아갑니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외가의 모든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인 저 또한 군에서 법무관으로 봉직하다 얼마 전에 퇴역하였습니다. 육사 2기가 잊혀진 이름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고안의 명복을 빕니다.
글 내용으로 보아 저의 동기생임이 분명합니다.
입교 한 달만의 비극이라 고인을 기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의 마음 속에서 소중히 담아 고인의 안타까움을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생도2기 박경석 드림
혹시 군번이 12049이고 김 종자 욱자 쓰시는데 육사 2기 명단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육사에 연락, 확인한 결과 생도2기생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한편 군번 또한 생도2기생이 아닙니다.
아 그랬군요. 추서계급이 육군 중위라는 것만 알아서 어떻게 임관하셨는지가 궁금했는데 집안 어른들의 기억은 틀렸나봅니다. 노량진 전투 중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시간내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