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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1절-32절 삼일절및 사순절v
이 사건은 우리민족의 독립선언서를 채택하고 만방에 오늘은 교회력으로1217,3,5.주일입니다 사순절기는 3.1-4,15. 사순절 기간이며 3일절 예배로 드립니다 1919년 기독교를 중심으로 천주교, 불교와 천도교가 힘을 합쳐 일제의 만행에 민족적 비폭력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주로 만세운동이었습니다. 폭력을 통한 살인이나 전쟁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있는 정의와 진리의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일본의 폭력 앞에 무릎 꿇은 사건이었지만 전 민족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 났습니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국가에서 일어난 비폭력항거 운동의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겨레가 독립의지가 매우 강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위대한 3.1 운동과 연결된 한국초대기독교의 생생한 증언과 고백들이 많은데도 아직도 3.1운동과 한국교회의 연결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합니다. 그래서 왜 한국교회력(歷)으로 3.1운동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기억해야 할까요? 라고 질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서의 배경을 한 가지 들어본다면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BC 13세기에 있었던 이집트의 해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이 넘은 사건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노예들이 자유민으로서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구성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이며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한반도의 기독교 선교역사가 1884년에 송천 솔례교회 들어옮 133여년 정도 넘었습니다. 근, 현대사에서 3.1 운동은 비폭력운동이었고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무려 70-80%이상 참여했으며, 투옥되었던 지도자들중 거의 80-90%가 기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일제에게 피해를 많이 당한 사람들과 기관 역시 일제하 교회와 성도들 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기독교인의 숫자는 전 국민의 3% 미만이었습니다. 복음이 한반도에 들어온 지 4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정말로 한반도의 교회가 미약했지만 민족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하여 성서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선포를 한 것입니다. 성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근, 현대사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교회 안에 증가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가진 성서의 삶에 투철한 청년과 성도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앞날을 위하여 어린 시절부터 고민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지혜와 힘을 빌려 이 땅의 현실을 성서의 방법으로 해결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무나 유명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읽지는 않았지만 15장 1-2절입니다. 제가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반대적인 사람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중립입니다. 예수님의 한쪽에는 당대의 죄인이라는 사람들 한쪽은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죄수이며, 한쪽은 죄수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종교적인 사람들 한쪽은 비종교적인 사람들 오늘날로 하면 한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한쪽은 교회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5장은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오늘 탕자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이 3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잃은 것들을 다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한다. ><잔치를 한다> 기뻐서 이웃에게 말하고, 너무 기뻐서 자아도취적인 소리지른다. 입니다. 유대사회 즉 예수님이 살던 AD 1세기의 양이란 가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모두 양은 재산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머지 99마리의 양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한 마리 양을 찾았다고 동네잔치를 벌립니다. 사실 자세히 생각하면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99마리가 중요하지 왜 한 마리가 중요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에서 왜 한 마리가 중요한지 이야기합니다. 새번역으로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 이 양은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으로 누구를 들으라고 한 것입니까? 1-2절의 배경이 되었던 예수가 왜 그 당시의 죄인들인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리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회개할 것이 없으니 기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수에게서 멀리 떨어져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가까이 오려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제이지요. 그것도 장시간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장시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면 잠시라도 같이 있기가 싫습니다. 서로의 귀한 말을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만이 진실하고 신뢰하며 오랜 시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당대의 세리와 죄인들과 신뢰관계가 있고 그들을 하나님나라에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여자의 지참금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두 번째 등장하는 드라크마의 비유 여기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합니다. 짝이 맞아야 하는 10개의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결국 나머지 9개는 별 볼일 없습니다.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밝혀서 찾는 것입니다. 결국 찾으니 시집갈 수 있다고 기뻐하면서 새번역으로 보면 <나화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10절에 새번역으로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길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짝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신랑 신부로 비유할 때 올 사람이 있는데 찾아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탕자의 비유> 역시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성도들은 잘 아는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비유라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오늘날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는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 새번역은 제목을 달기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첫째 아들도 역시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자 아버지 그리고 두 아들 모두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징적인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말하면 첫째 아들은 집에 있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율법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리상 가까이 있다고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오늘 본문의 내용상 죄인들과 세리들이입니다. 부자 아버지의 품을 떠나 돈을 밝히는 아들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아들 그러나 역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아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판단할 때 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자유로울지 몰라도 마음 한구석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 둘째 아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첫째 아들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집나간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더 잘 이해하느냐 입니다. 그렇다고 둘째 아들이 모두 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마음을 아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외형적으로 종교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의 잘한 점은 실수와 죄가 있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잘한 점은 그래도 아버지 옆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결국 아버지의 넓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진정으로 회개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녀를 사랑하고 다시 종이 아닌 아들처럼 대우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첫째 아들처럼 너무 형식적 관계를 탈피하고 아버지에게 친근한 아들이 되길 바랍니다. 너무나 법을 따지고 세상의 격식을 따지기보다 마음을 열고 응석받이 아들처럼 늘 함께 놀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토론하는 자녀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나아가 많은 장로님 목사님이라도 아버지 주님 앞에서는 다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 형식적이고, 권위적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 합니다. 첫째아들에게 탕자였던 둘째 아들은 너무나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입니다. 그러나 역시 동생입니다. 인정해 주고, 용서해 주고, 가족으로서 다시 받아주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의 불평은 나는 세상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집에서 봉사했는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탕자를 위해서는 송아지, 반지, 새 옷으로 단장을 하는데, 아버지 옆에서 준비했던 아들은 염소새끼 한 마리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돌아옴이 잔치의 조건입니다. 오늘 세 가지 비유에서 핵심은 잔치입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도 잔치, 한 드라크마를 찾아도 잔치, 탕자의 귀향에도 잔치입니다.
오늘 1-2절의 배경은 주님은 지금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말입니다. 그런데 즐기지 못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비웃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는데 따지지 마십시오. 그냥 주님과 즐기십시오. 그러면서 회개하고 그러면서 용서하고 그러면서 서로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즐거움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공동체 교제를 합니다. 식사를 나눕니다. 그때 즐거워하십시오. 고통이 있지만 기뻐하십시오. 이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육신의 회복과 경제적 회복 마음의 회복을 나누십시오. 잔치에 와서 찌푸리지 마십시오, 세상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 성도들을 통하여 주님은 함께 하시길 원합니다. 자녀들이 즐거우면 부모가 좋듯 공동체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성도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길 원하십니다.
결론-마지막으로 32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할 때 돌아온 탕자를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 하나님 그런데 문밖에서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첫째에게 함께 즐기라고 이제 마음을 풀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첫째아들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어깨에 힘을 풀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에 집중합시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수군거리지 말고 앞으로 오세요. 죄인들이 이미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기간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 하시길 기원합니다
눅15:1~2 말씀과 영접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폭풍의 바다를 횡단하는 지혜의 바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진짜 그렇다는 내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정에 의하여 써 놓은 것이니까 재미있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책 내용 중에 ‘선과 악이 여전히 공존하는 이유’라는 소제목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들어보세요.
‘아주 오랜 옛날, 신은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큰 홍수를 일으키고자 했다. 노아라는 의인만이 신의 뜻을 알고 커다란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대비했다. 대홍수를 앞두고 온갖 동물들이 방주로 몰려왔다. 그때 선(善)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주로 달려왔다. 그런데 노아는 선을 막아서며 방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노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방주에 탈 수 있는 것들은 짝이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선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기의 짝이 될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선은 악(惡)을 데리고 방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대홍수에도 악은 소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선과 함께 이 세상에 공존하게 되었다.’
여러분, 어디 그럴듯하게 들립니까? 꾸며낸 이야기치곤 너무나 잘 만들어진 얘기이기에 자칫 속아 넘어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세상의 악을 다 뿌리 채 뽑아버린 대홍수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악을 동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한 정도가 다를 뿐이지 인간의 죄악 근성은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냐? 악하게 태어나냐?’를 묻는다면 당연히 기독교적인 근거로 답할 때에, ‘사람은 악하게 태어난다’라고 정의하며, 이어 성악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노아의 얘기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오늘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아주 짧은 두 구절의 본문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1절, 2절의 두 구절이 주는 의미가 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짧지만 대조적이고, 또한 ‘1절의 사람들과 2절의 사람들 간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는 거구나’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절과 2절은 내용상으로 볼 때에, 상당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분 같으면 1절의 사람들을 악인으로 보겠습니까? 2절의 사람들을 악인으로 보겠습니까? 1절에서는 본 절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들을 선인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단지 죄인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2절에 나타난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악인들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하신 예수님의 실랄한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을 볼 때에 선한 존재로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1절에 나타난 사람들을 악인으로 볼 것인가? 선인으로 볼 것인가? 참으로 헷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2절에 나오는 사람들을 1절처럼 그들을 선인으로 볼 것인가? 악인으로 볼 것인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 한 번 판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누가 의인이고 선한 존재인가? 말입니다.
아무래도 1절에 나타난 세리와 죄인들은 태생이 좋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고 못 배운, 한 마디로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볼 때에 저급한 신앙을 가졌다고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죄와 불법의 사람들’이란 꼬리표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에도 불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같은 경우에는 로마와 결탁하여 백성의 세금을 늑탈하는 직업이었으니 매국노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성경에선 죄인의 부류로 창기까지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기는 누가 봐도 죄인입니다. 사회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리든 창기든 그들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었고,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 냉대와 무시를 받고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죄와 불법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과 항상 거리를 두었고, 식사자리에는 절대로 초청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죄와 불법의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일단은 옷차림부터 단정하고, 깨끗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것입니다. 가풍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자들입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인격도 휼륭하게 보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는 자들이고, 말씀대로만 살려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서기관들 같은 경우에는 성경을 필사하는 직업을 가졌는데, 필사할 때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목욕재개를 하고 다시 팬을 들었으니, 그들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얼마나 선한 직업을 가진 자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기도를 두 번, 혹은 세 번씩이나 하고, 안식일도 철저히 지키기에 율법에 있어서 흠결을 찾기가 여간해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우습게 들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구분법에 의하면, 1절의 세리와 죄인들은 명백하게 악인 혹은 죄인이라는 것이고, 2절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절대적으로 선인 혹은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판명이 났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은 또 다른 판단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한 판별법은 그저 육신적 안목으로만 구분한 판단일 뿐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한 객관적인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선 육적 안목만으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분별이 없이는 진정한 판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란 결코 육적인 차원만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엔 세리와 죄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렇게 나누는 구별법이 바로 육적인 안목에 의한 구분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판별법인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사람을 판별하는 구별법이 있으니, 그것은 1절과 2절 후반부에 나타난 내용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보여주는 영적인 판별법은 무엇이겠는가?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영적 판별법의 첫 번째 기준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구약시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옷을 빨고, 물로 씻으며, 관유와 동물의 피 등을 옷과 몸에 뿌리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그런 방식으론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신약적 방법은 무엇이냐? 했을 때에 그것은 디모데전서 4장 5절이 말씀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방식이 예수님을 전후로 하여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제사나 행위의 외적인 측면을 더 강조했다면, 신약에서는 영적인 내면, 즉 마음과 영혼에 더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제사의 행위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을 1절에 적용하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한 자들로 불려 질 수 있다’하는 것입니다.
영적 판별법의 두 번째 측면은 ‘그들이 예수님의 영접을 받았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2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을 영접한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말씀을 거꾸로 돌리게 되면,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혹은 ‘그들이 믿었다.’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인들인 그들이 죄가 없고 선하신 예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한 위가 되시는 선하신 예수님의 영접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인이나 악인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들을 시기하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말하고 있는 그들은 주님의 영접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기에, 이 상황에 대하여 엄밀히 따지게 되면, 그들 곧 거기에 모였던 종교지도자들은 겉은 선하게 보였지만 사실상 선한 주님의 영접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은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선악간의 존재구분은 단 두 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냐? 듣지 않는 자냐?’로 구분하는 이 첫 번째의 판별법과, 두 번째로는 ‘그들이 예수님의 영접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이 영적인 차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외적인 견지에서 사람을 구분하지 않기 바랍니다. 저 사람이 선한 지, 악한 지를 구분하는 것은 사람들의 입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영접함의 처사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말씀과 영접’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선인과 악인, 죄인과 의인의 판별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비록 이 땅에서 죄인취급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하셨다면 그들을 이미 선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겉모습으로만 판별하여 입술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고, 사람이 선하게 되는 방법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그 하나님의 판단에 우리를 맡기며 동시에 오직 말씀과 믿음 가운데 더욱 굳건히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빌립보서4:9~13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 v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앞으로 몇 주 동안 “성공인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번에는 요셉을 통해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이 되려면 1)먼저 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고 2)환경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3)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야 한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이 되려면 어떤 생각과 말을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이 되려면
1.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말이 믿음의 말일까요? 오늘 봉독한 성경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환경은 감옥에 갇힌 환경입니다. 그런데도 감옥 속에서라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바울처럼 “할 수 있다”는 말을 우리 입에서 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사실 인간의 힘이나 지혜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육체에 가시가 있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교사역을 이루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되어진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세요. 그들은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가나안땅의 형편을 보았음에도 그들의 입술에서는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할렐루야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떤 말들이 나옵니까? 믿음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한번 해보자 하는 믿음의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can의 말, will의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말대로 성공하게 해 주십니다. 영어로 can은, 할 수 있다, will은,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 해보자,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하는 인생은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늘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그리고 매사에 해보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뭔가를 한 번 해보고 도전해 보려는 모험정신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이 성공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해보려고 하거나 하려는 의지가 없어 그 기회를 기회로 받지 못하고 그것이 기회인지 조차도 모르고 놓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하면 된다” “한번 해보자” 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살립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치기 할 때 그의 자세를 보세요. 14년을 두 아내 종처럼 살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오늘 외삼촌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후로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양중에 점 있거나 검은자 아롱진 양을 다 가려내시오. 그리고 그 후로 그런 것이 태어나면 다 내 것이 되게 합시다. 만약 그렇지 않은 양이 있다면 그것은 도적질한 것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라는 것입니다. 양의 점이 있는 짐승이 없는데 그 흰 양 사이에 교배를 시켜 점이 있거나 얼룩진 것이 태어날 확률은 유전학적으로 극히 희박한 계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그를 도전하게 만들고 결국 거부가 되어 나옵니다. 할렐루야 모두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선포함으로 일어난 기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은 can의 개척정신, will 의 정신이 투철했던 것입니다.
2. 남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칭찬의 말과 인정의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은 나 혼자는 불가능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즉 동역자와 동지가 필요합니다. 그들과 함께 일할 때 성공이 가능합니다. 재벌은 누구냐? 남을 내 돈 버는 일에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나 혼자는 아무리 돈을 벌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을 어떻게 움직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말과 행동에 있습니다. 특히 칭찬, 격려, 인정의 말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한번 연습해 봅시다. “잘했어, 수고했어, 역시 최고야, 대답합니다, 당신이 최고야, 정말 멋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옆에 있는 분에게 한번 고백해 봅시다. “권사,장로,집사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하오” 왜 베드로가 주님위해 목숨 바쳤나요? 주님은 한번도 베드로를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엄청난 실수를 했고 엄청난 과오가 있는데도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인정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생명을 걸 수 있다.
3.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꿈을 이루는 성공인생이 되려면 사람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게 무엇일까요? 1)신앙고백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올바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의 신앙고백으로 그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후 그는 위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있도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는 천국열쇠를 부여받는 사람이 됩니다. 다윗도 보세요. 시편 23편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그 시를 쓸 때 평탄한 때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왕으로 세우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바디메오도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기에 문제 해결을 받았고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도 주님 앞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결국 주님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성공은 무엇이며 그 성공인생은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교훈하는 성공인생들의 모습을 우리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시고 남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하시고 신앙고백을 잘하는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특별한 헌신과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특별한 헌신과 특별한 감동이 필요합니다. 평범한 헌신도 받으시나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서 하는 특별한 헌신, 시간이 없고 힘들어도 그럼에도 행하는 봉사가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생명을 건 헌신, 목숨을 바치는 결단이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느헤미야를 보세요. 그들의 헌신은 바로 특별한 헌신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일들을 해냅니다. 3)하나님께 영광 영혼구원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귀히 여기시는 사역은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런 일에 생명을 걸고 사는 사람을 보시면 감동을 벋으십니다.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성공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믿음의 말, 남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하고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성공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