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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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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과 정가에서 '워딩(wording)'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우리말로는 특정한 단어가 없어서 표현이 애매한 것을 '워딩'이라는 단어가 충족시킨다. 그 뜻은 이렇다.
(글이나 연설에서, 특별히 신중하게 골라 쓴) 자구(字句)의 표현, 단어 선택
말하자면 단순한 말이나 단어가 아니라,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해 분명히 공적으로 내뱉어진 말이나 글귀를 이를 때 '워딩'이라고 한다. 사용 예는 다음과 같다.
"그런 취지의 말을 들은 것은 맞는데, 정확한 '워딩'은 없습니다."
증거가 필요한 재판 상황이나 중대한 일을 다룰 때일수록 '아' 다르고 '어' 다른 자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국정조사 청문회 등에서도 전문 법조인들의 사전 교육을 받은 증인들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신중하고 정제된 증언을 해서 문제가 되었다.
토씨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렇습니다."라고 바로 인정하는 것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고 한다. "답할 때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요?"라고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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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워딩'이 가장 중요한 문서는 성경이다. 사람의 영혼과 목숨의 갈림길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등 큰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실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닌 사람의 기록으로 여기고,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하면서 문자 자체보다는 그 취지에 따라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 어떤 자구를 선택하든 민감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구 하나로 이단이 생겨나기도 한다. 잘못 번역한 하나님의 이름이 종교의 명칭이 되기도 하고, 잘못 표현한 애매한 문장이 어떤 이단의 모든 교리를 정당화하는 열쇠 구절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워딩이 버전마다 다르고 오역이 넘쳐나 갖은 폐해를 양산하고 있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진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믿지는 않는다.
정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선 성경은 한 종류밖에 없어야
한다. 워딩이 여러 개일 수 없다는 거다. 또한 그것은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 하나님이 친히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성경을 사람과 철학에 맞게 다른 세계관을 반영해 번역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해 왔다. 그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구절마다 다른 워딩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종'으로, '앞치마'를 '치마'로, '벌거벗음'을 '하체를 드러냄'으로 바꾼다든지, 과거완료형을 현재진행형으로, 있는 구절을 없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없는 단어를 추가하기도 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과정은 큰 오류로 이어진다. 한 예로 '예수의 어머니와 요셉'을 '예수의 부모'라고 쓰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죄인 인간의 피를 받은 아들이 된다. 대속의 구원 교리 자체가 모두 무너진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은데, 이래도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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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념과 정의를 바꾸려는 사람은 말과 단어부터 바꾼다. 새어머니와 극한의 대립을 하며 '그 여자', '아주머니'라고 부르던 사람이 마음을 열고 상대를 이해하면서 용기를 내 '어머니'라고 부르면, 새어머니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 탄핵 심판 사태의 와중에 어떤 이는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바꾸자고도 제안했다. 그 명칭에 너무 큰 제왕적 권한과 준엄함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 권력형 비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직분의 명칭을 수직적 서열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단어와 자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해서 국제 무역협상 등의 합의문을 채택할 때 매우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한 단어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인다. 단어 하나로 그 합의문의 구속력이 달라지고, 미래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매일 쓰는 트위터 한 구절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세계관과 정치관, 향후 행보 등을 읽고 판단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거의 모든 문제가 말의 선택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안이 중대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성경이 대충 번역되고 전달되어도 아무 이상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경중에 대한 판단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나 구원받고 다시 태어나지 못한 신학자들은 성경의 많은 말들을 바꾼다. 그들은 단지 단어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공격함으로써 다른 개념을 창출하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흠집을 내서 신자들을 분열시키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아집(?)에 빠진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프리메이슨이자 신비주의자인 맨리 홀(Manly P. Hall)은 "우리는 지난 100년간 오류가 없어 보이는 성경들을 만들어냈지만 아무도 우리가 만든 성경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킹제임스 성경의 아성에 대한 무기력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말은 NIV 같은 성경이 빅 히트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맨리 홀과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의 성경, 즉 전혀 다른 워딩을 사용하는 성경들은 20세기 중반을 넘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들이 개념을 바꾸는 방식은 어떤 과정일까?
말이란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새로운 단어는 그 뜻을 몰라도 몇 번 듣다 보면 그 의미가 이해되고, 어느새 자신도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그렇듯이 자기가 쓰는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를 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어들은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의미로 바뀌기도 한다. 약간의 오해나 오용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면 의미 자체가 바뀐다. 그래서 말은 사용자가 만드는 것이지 사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개발새발' 같은 말은 원래 없는 말이었다. 개의 발과 새의 발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른 표현은 '괴발개발'이다. 고양이의 발과 개의 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른 표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괴발개발'이라고 쓰면 오히려 틀렸다고 할 정도가 되니 몇 년 전 둘 다 표준어로 복수 인정되었다. 자장면과 짜장면이 모두 표준어가 될 때의 조치였다. 그렇게 인정하면 그때부터는 틀리던 말도 맞는 말이 된다. 사용자가 말의 의미를 바꿔버린다는 뜻이다.
새로운 개념을 위해 기존의 단어를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일도 많다. '문둥병(나병)'을 한센병으로, '소경'을 '시각장애인'으로 바꿀 때는 사회적 편견이나 인격적 비하를 막기 위해서다. 이런 사례에는 좋은 의도를 지닌 것도 있지만 교묘한 의도를 담는 것도 있다.
젠더(gender)라는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이 1970년대부터 사용하다가 1995년 베이징 여성대회에서 공식 결의한 사회학적 용어로 성(sex)이라는 단어가 오직 남자와 여자만을 지칭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gender에는 성이 단 두 종류만이 아니라는 뜻이 함축돼 있다. 게다가 성적 행위는 오직 남녀 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 기존의 성 구분법은 '성적 차별'이라는 비판까지 담겨 있다.
한국은 '네이버'라는 비대해진 포털 안에서 전쟁 중이다. 단어를 선점하고 키워드를 독점하기 위해 안달이다. 단어 하나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중대한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 번역을 통해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질 거라고 한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순이 다르고 같은 단어라도 뜻이 여러 개인 언어를 기계가 어떻게 잘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번역을 대행하는 한 업체는 "오빠가 밥 사줄게."를 옮긴 "I'll buy my brother Bob."이라는 기계 번역의 황당
사례를 제시하면서 "번역은 사람에게 맡겨라"라고 광고한다.
그러면 정말 쓸 만한 기계 번역은 불가능할까?
황당함을 자아내는 구글 번역기도 일본어는 영어보다 훨씬 잘 번역해 낸다. 우리말과 동일한 한자어가 많고 어순이 비슷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를 바로 한국어로 번역하지 말고, 일어로 번역했다가 다시 한국어로 돌리면 훨씬 나은 번역문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 일어는 왜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 번역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어가 영어를 번역한 사례 데이터가 많아서라고 한다. 일본은 책의 왕국이라 웬만한 원서들은 번역이 잘 돼 있어서 학업이나 연구에 우리보다는 부족함이 덜하다. 일본인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이유도 자료가 다 있어서 기를 쓰고 공부할 필요가 적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이버는 요즘 '맥락을 이해하는 번역 기술'을 연구 중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많은 업체들이 곧 새로운 방식의 번역 프로그램이 언어의 장벽을 허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번역 방식은 '신경망 번역' 등으로 부르는데, 복잡한 메커니즘 때문에 번역 속도가 아직은 현저히 느리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나 다양한 뜻과 뉘앙스를 지닌 단어의 번역은 맥락을 모르거나 어원과 사회 분위기, 새로운 용례 등을 다각도로 이해하지 못하면 쓸 만한 번역이 나올 수 없으므로 구조 자체가 다른 언어 간의 번역은 거의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최근 들어 급속도로 현실화되고 있다. 그런 복잡한 과정은 인공지능의 방대한 '학습 효과'로 가능하다는 뜻이다.
기계가 바둑 고수를 이길 수 있는 이유도 단시간에 엄청난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을 진단하는 AI 닥터 이야기가 요즘 화제인데, 엄청난 양의 의학 서적과 수천 편의 논문을 단시간에 읽고 기억한 후에 암을 진단한다는 것. 시범 진단 결과, 동석한 정상급 전문의 5명의 의견과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학술 자료를 빨아들이는 이 프로그램은 시간이 갈수록 똑똑해지는데, 이미 전문 의사를 능가하고 있다고 한다.
번역기 외에도 언어 관련 프로그램의 지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은 기계가 인간의 생각을 조금씩 개조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인공지능 AI 프로그램에 수백 편의 SF 영화 시나리오를 학습시키면 웬만한 결론에 도달하는 B급 수준의 시나리오를 쓴다고 한다. 이제 이런 비싼 기계를 가진 자가 어중간한 시나리오 작가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그들의 인건비보다는 적지만 막대한 사용료를 기계의 감가상각비와 유지비 명목으로 받아 폭리를 취할 날이 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로봇을 청소하거나, 그것을 학습시키거나, 로봇이 두는 바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바둑알을 대신 바둑판에 놔주는 식의 일을 할 것이다.
이제 동시통역사도 필요 없고 번역가도 점점 필요가 없게 될지 모른다. 100명의 번역가가 지닌 학문과 언어적 능력, 과거 경험 등을 인공지능 기계가 학습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섬세한 인간적 감성의 부재와 기계적 오류가 문제이겠지만 충분히 어느 선까지는 가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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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계도 인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제 그 기계를 다루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기계를 지배하는 자의 생각이 곧 미디어가 되고 여론이 되며, 세상의 흐름이 된다.
우리는 네이버와 구글의 막강한
위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 대가로 이미 이용을 당하며 생각과 삶의 패턴을 읽히고 있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귀속된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원치 않아도 그 안에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미래를 위협하는 인공지능의 포인트는 '학습'과 '활용'의 능력이다. 학습은 인간의 두뇌를 대체할 능력이고, 활용은 개념을 바꾸는 능력이다. 비성경적 생각을 가진 자들이 기계를 선점하고 자신들의 개념을 학습한 기계가 성경과 신앙서적을 번역하고, 소설과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등 모든 미디어에 손을 댄다면 '개념'이 바뀌고 의미조차 새롭게 형성될 것이다.
한국이 개발하고 선점한 로봇과 프로그램이 활용되면 울릉도 옆의 그 돌섬을 '독도'라고 번역할 것이고, 일본의 기계가 선점하면 '다케시마'라고 번역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악한 자들에게 이 기술이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인류는 구글과 같은 거대 기업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거의 세계 통합주의자들이며 진화론자이고 무신론자이며 뉴에이저들로서 기독교와 하나님의 대적자들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선점하는 자가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악한 자들의 네거티브 공세를 우리는 다 막아낼 수 없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대승을 거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끝없이 벌어진 일이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한 이후로 오늘날까지 말씀을 부정하고 바꾸는 일은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공격받았다. 인공지능의 번역 문제는 새로운 종류의 도전일 뿐 어느 시대에나 그에 맞는 방식의 위협이 존재했다. 전쟁은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갈수록 그 위협은 심각해질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 때에 지식이 현저히 증가하리라는 예언은 인공지능으로 인해 더욱 가깝게 실현될 것이다.
성경과 신앙 지식이 위협당하고 있다. 중대한 단어들을 불신자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종교적 관점으로 바꾼 성경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제 악한 자들의 신경망을 답습한 번역기들이 '하나님'을 '신'으로, 'God'을 'god'으로 워딩을 바꾸면서 오래된 전쟁의 역사를 이어 갈 것이다.
실로 언어 전쟁의 시대이다. 단어 하나를 두고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우리 자녀들의 영혼은 갈 곳을 잃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로 시작되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승리하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은 결국 모든 개념을 점령하기 위한 말씀에 대한 공격, 언어의 전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종종 성경에서 생물이나 인격체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때에 곧 모든 백성들이 코넷과 피리와 하프와 트럼본과 비파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엎드려서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니라. (단 3:7)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또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본 물들 곧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니라. (계 17:15)
언어가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이 언어를 다스리고, 천사가 언어에게 영존하는 복음을 선포하며, 음녀는 언어 위에 앉아 있다.
민족과 족속과 백성이 싸우듯 언어도 스스로 전쟁을 치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언어는 다른 언어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의 군사라면 마땅히 성경의 참된 워딩을 지키는 이 싸움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