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더라도 인간 존재는 매일매일 죽음과 따로 놀지 못하는데, 밤마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것이요 더 미시적으로 보면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생리적인 현상조차 삶과 죽음의 반복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한데 늙음은 갈수록 취급받지 못하고 자주 타박의 대상이 된다. 종국엔 한결같이 늙어갈 사람들이 늙음을 비웃고 천대하는 것이다.
늙음을 천대하는 무의식의 근저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부정이 도사리고 있다. 장례는 철저히 산 사람들의 질서를 재편하는 용도로 변경되고 또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관혼상제’를 보면 분명 술과 고기를 금하고 있는데, 상주는 차마 아니 그런다 해도 문상객들은 여지없이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화투판을 벌여놓고 떠들썩하게 밤을 지샌다. 이를 두고 한국인 특유의 축제형 장례라고 할 수 있을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궁리)를 보면 꼭 그렇지 않다. 죽음에 대한 사유의 부족과 또 막연한 공포와 부정이 죽음을 다시 죽게 하고 우리 삶에서 죽음을 소거해갔다고 본다. 이는 삶에 있어서 곧 전체성의 상실이다. 빛과 그림자를 떼어놓는 일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애써 죽음을 밀쳐 놓았을 때 삶도 함께 밀쳐놓고 마는 일이 된다. 바람을 만나 부푸는 풍선처럼 죽음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
죽음을 하나의 지엄한 통과의례로 보려는 시각은 그의 오래된 저작 <한국문학과 민속연구>에서도 뜨겁게 되풀이되고 있는 바, 화생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달이 이울어짐과 차오름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거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러면 죽음도 삶과 함께 춤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은 자들의 현현이며 늙음과 죽음은 결국 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윤대녕 소설가
첫댓글 우리들 모두가 죽음을 기억하며 이땅을 살아 간다면 ..감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