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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의 의미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46 14.07.31 09: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의 의미


황룡사탑 복원 ‘단서’ 가능
처마, 창문, 기와, 계단까지 사실적 표현

 

 



우리는 중국·일본 등 동양 삼국을 통 털어 가장 많은 석탑을 가지고 있다. 숫자도 숫자려니와 그 아름다움도 다른 나라의 석탑과 비길 바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했을까?

그러나 우리가 석탑만을 조성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던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석탑보다 훨씬 먼저 만들었고, 또한 꾸준히 조성했던 것이 다름 아닌 목탑이었다. 잦은 외침과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는 조선시대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만이 홀로 남아 우리 목탑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황룡사지, 미륵사지,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제석사지, 실상사 목탑지, 기림사 목탑지, 안성 죽산리 목탑지 등 10여 개가 넘는 사지들이 우리 목탑의 자취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탑의 상륜부만 42척(18m), 총높이는 225척(80m). 몽고 침입 때 불타고 말았지만 21층 빌딩 크기의 거대한 모습과 문헌상에 기술된 그 화려함은 우리 목탑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드러내는데 손색이 없는 대표격 건축물이다. 많은 문화재 전문가와 관련 학자들이 끊임없이 복원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도 이런 아쉬움 때문이다.

그런데 1991년 북한에서 발간한 고려박물관(영문판-사진자료실 참조) 유물도록에서 황룡사목탑 복원의 실마리라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가 발견됐다. 북한에 남아있는 고려 초기 대표적 유물인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목탑 양식을 한 금동 9층탑이 발견된 것이다. 이 금동탑은 전체 높이가 37cm, 기단 부분의 길이는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돼 있는 단아한 모양으로, 기단 4면에 걸쳐 8개 문을 달았고, 각 층마다 창문을 냈으며, 처마마다 기와를 아름답게 조각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목탑 양식 금동탑이다. 특히 계단과 문과 창문의 정교함은 실제 목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표현이 사실적이다.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황룡사목탑을 재현하기 위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 북면에 새겨진 9층목탑 형식의 마애탑과 호암박물관에 소장된 5층 금동대탑 정도가 거의 유일한 자료일 정도다. 그나마 탑골 마애탑은 황룡사와 비슷한 시기에 새겨진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부조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호암박물관의 금동대탑은 9층이 아닌 5층이라는 점과 고려중기 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자료로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금동 9층탑은 신라에서 고려로 나라가 넘어간 직후의 고려초기 작품이라는 점과 백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호오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등 양식상에 있어서도 황룡사목탑의 동시대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다.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가 고려 4대 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광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부인 낙랑공주와 남매 간으로 한 어머니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사위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개연성이 많다. 또 경순왕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황룡사목탑이 웅장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동 9층탑의 모델이 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1991년판 고려박물관 도록에 따르면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금동9층탑 함께 비단 금니 사경(사진자료실 참조)과 발원문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종이(사진자료실 참조)도 함께 수록했다. 이 탑지도 입수하여 국역을 해보면 경순왕과 불일사와 황룡사탑과의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금동9층탑에 관한 내용은 이와 같이 일부 관심자들에 의해 그 사실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한국 학계는 자료수집의 한계에 부딪혔다. 2001년부터 일부 언론과 2004년 11월 한 인터넷 블로그에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실제 북한에서 발간된 도록을 입수하기는 처음이다.
아니 도록은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5층탑 내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과 황룡사탑과의 연관관계를 규명하는 하는 연구는 미진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은 불일사5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을 황룡사9층 목탑의 축소형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국내에서 발견된 유물 중 9층탑에 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황룡사9층탑의 복원과 우리나라 목탑건축사 연구에 진일보한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며, 남한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은 자료를 공개하여 남북한 모두 뜻 깊은 문화재 공동 연구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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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일사

불일사는 951년 고려 광종 때 지은 절이고, 터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절터가 있던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에서 1960년에 개성시로 옮겼다. 옮기기 위해 탑을 해체했을 때, 탑신에서 금동9층탑, 금동5층탑, 금동3층탑, 작은 돌탑 등 20여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이 나왔다. 없어진 탑머리 부분(상륜부)을 새로 만들었고, 이 부분을 제외해도 탑 높이는 17.94m이다.

고려사(광종대)를 보면 “五年春 創崇善寺 追福先●”라고 했다. 광종 5년(954년) 생모인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왕건의 셋째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결국 숭선사는 국찰이었던 것이다. 절터의 중요성이 인식되자 이제 단순한 답사모임에서 학술단체로 거듭난 예성동호회가 95년 대대적인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절의 건물터와 축대 등의 흔적과 명문기와들을 잇달아 확인, 절의 규모와 역대 증·개축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알다시피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불교신앙의 공간인 절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조 왕건 또한 오랜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절을 지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광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종 2년(951년) 송악성 남쪽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창건,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개경 동쪽에는 불일사(佛日寺)를 창건, 모후인 순명신성왕후를 기렸다.

대봉은사는 태조의 진영을 모셨으며 광종을 비롯한 역대 임금들은 해마다 6월 태조의 기일이 되면 이곳을 찾았다. 또 동쪽에 어머니를 기리는 절(불일사)을 세운 것도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음을 나타내고, 광종 자신이 삼한통일을 이룩한 태조의 정통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태조는 강력한 호족세력을 주무르기 위해 결혼동맹을 펼쳐 29명(혹은 30명)의 배우자 사이에 무려 34명의 자식(왕자 25명, 공주 9명)을 두었다. 그랬으니 후계자 문제는 골치아픈 것이었다. 태조가 죽고 둘째왕후인 나주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혜종이 등극했지만 끓는 물처럼 불안했다. 나주 오씨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혜종은 즉위 2년만에 무너지고 정권은 왕요(정종)·왕소(광종) 형제로 넘어온다. 형제의 생모인 유(劉)씨는 중부내륙 호족인 유긍달(劉兢達)로 대표되는 충주 유씨(忠州 劉氏)의 딸. 형제는 외가인 충주세력은 물론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서경(평양)을 개척한 왕식렴과 막강한 평주 가문을 이끈 박수경 등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잡은 것이다.

배다른 형 혜종과 친형 정종에 이어 고려 초 활화산 같던 정권다툼 와중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은 949년 등극한 광종, 즉 왕소였던 것이다. 그런 광종이 즉위하자 마자 잇달아 국찰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광종은 수도인 개경에 어머니를 모시는 불일사를 세웠는데 왜 또 충주에도 어머니를 기리는 숭선사를 창건했을까. 우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유달리 깊었다는 것. 광종은 어려서 신주출신인 신주원부인 강씨(왕건의 22번째 부인)의 양자가 되어 생모의 품을 떠나있었다. 그런 만큼 생모에 대한 정이 사무쳤을 것이다.

또 하나 광종의 외가로서 자신의 입신출세에 주춧돌을 놓은 충주호족세력을 위무하면서 혼자만이 외가의 후손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어머니 명복을 비는 숭선사를 충주에 건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광종 스스로의 나라를 개척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숭선사 창건에 담겨있는 것이다.


■ 불일사 5층 석탑

이 석탑은 원래 경기도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에 자리한 불일사터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1960년 현재의 위치(개성시 내성동의 공원)로 옮겨온 것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으며 전체적인 형식은 신라 석탑을 이어 받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고려적인 표현기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현재 기단은 2층으로 되어 있으나 바닥돌은 없어지고 밑기단은 댓돌 위에 벽을 세우고 기둥을 내었다. 네 벽면에는 귀기둥과 각 면 두 개씩의 사잇기둥을 새기고 있다. 덮개돌은 윗면이 평평하여 밑면에는 괴임턱을 내고 있다. 윗기단은 네 벽면을 세우고 귀기둥만을 덮었으며 덮개돌은 밑에 낮은 3단의 층단받침을 내고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중심부에는 낮은 2단의 턱을 돋우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5층으로 몸돌은 각 층마다 네 벽의 모퉁이에 귀기둥만을 새겨놓고 지붕돌은 밑면에 낮고 좁은 3단의 층단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처마의 끝선은 위 아래가 같은 곡선을 그리면서 네 귀가 들리고 처마 끝과 층단받침의 끝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있어, 신라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기법이 나타나 이 석탑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상륜부에는 비교적 높은 노반이 2층으로 이루었고, 그 위에는 연꽃 장식의 보주가 놓여 있는데 이들의 석재는 뒤에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전통적인 신라석탑이 고려의 석탑으로 계승되면서 부분적으로 표현기법이 달라져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부근에 세워졌던 현화사탑의 조형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탑의 높이는 7.94m이다. 바른사각형의 높은 대돌을 한단으로 놓은 아래 바닥단 한 변의 길이는 4.32m이다.


■ 경순왕 사실(敬順 王 事實)

후당명종천성이년정해(後唐明宗天成二年丁亥)에 왕(王)이 내형(內兄) 경애왕(景哀王)을 이어 섰다. 왕청태이년(王淸泰二年)에 견훤(甄萱)이 경성(京城)에 들어와 왕(王)을 옹립(擁立)하나 국세(國勢)가 벌써 기울었으므로 국토(國土)를 고려(高麗)에게 넘기려고 도모하니 태자(太子)가 간하되 듣지 않고 이르기를 "외롭고 위태(危殆)하기가 이러하니 지탱할 수 없는데 무죄(無罪)한 백성(百姓)으로 어육(魚肉)이 되게 함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한다" 하며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글을 올려 고려에 신라의 천년사직을 물려줄 뜻을 청하여 9년을미11월(九年乙未十一月:935)에 송도(松都)로 들어가니 고려(高麗)태조(太祖)가 들밖에 나가 영접(迎接)위로(慰勞)하고 유화궁(柳花宮)에 관사(館舍)를 정하며 장녀낙낭공주(長女樂浪公主)로 취처(娶妻)하게 하고 관광순화위국공신상주국락낭왕정승위(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位)를 배(拜)하고 태자(太子)가 세급록일천석(歲給祿一千石)을 올리며 동갑제일구(東甲第一區)의 궁(宮)을 주고 또 신란궁(神鸞宮)을 創建하여 주었으며 신라(新羅)를 제(除)하고 경주(慶州)로 하여 인해 식읍(食邑)으로 주고 경종원년(景宗元年)에 또 상부(尙父)를 더하니 그 책고(冊誥)에 대략 이르기를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며 벼슬은 왕작(王爵)이었다. 기풍(氣風)은 영걸(英傑)이오 문장(文章)은 재사(才士)로다 병법이 풍부하고 지모가 비상하도다"라고 하였고 호(號)를 더 하고 훈봉(勳封)도 여전(如前)하고 식읍(食邑)도 일만호(一萬戶)로 하였다.

대송태평흥국사년·고려경종삼년무인사월사일(大宋太平興國四年·高麗景宗三年戊寅四月四日)에 죽으니 시호(詩號)는 경순(敬順)이다.

장우(葬于) 장단부남팔리 성거산 계좌 정향원(長湍府南八里 聖居山 癸坐 丁向原)이라.

■ 경순왕릉 비문(敬順王陵 碑文)

◎전면(前面)

경순왕(敬順王)은 신라(新羅) 제56대왕(第五十六代王)으로 후당천성2년무자(後唐天成二年戊子)에 경애왕(景哀王)의 대(代)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셨고 청태을미(淸泰乙未)에 고려(高麗)에 나라를 넘겨주었으며 송태평흥국무인(宋太平興國戊寅 : 서기978년) 고려 경종 3년 4월 4일(高麗 景宗 三年 四月 四日)에 훙(薨 : 서거)하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례(王禮)로서 장단고부남 8리 계좌지원(長湍古府南 八里 癸坐之原)에 安葬하였다.

지극한 행실이요, 순수한 덕망이시라 영걸(英傑)하신 모훈(謀訓)이 굳센 의열(義烈)이시다.

성상(聖上 : 영조)이십삼년정묘(二十三年丁卯 : 서기 1747년) 月 日에 개립(改立)하다.

◎후면(後面)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경순왕릉(敬順王陵)이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남(縣南) 8리(八里)(今府東二十里 與地勝覽北十里 云誤矣)인데 오래도록 능소(陵所)를 잃었다가 영종3년(영(英宗三年) 정미(丁未)에 비로소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정묘(丁卯)에 찾았고 영역(靈域)에는 국가(國家)에서 일국내외(一局內外)의 분묘(墳墓)를 이장(移葬)하는 한편 개봉(改封)하여 비(碑)와 석물(石物)을 세우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祭祀)지내고 본부(本府)에서 해마다 향사(享祀)하는데 군대(軍隊)를 설치(設置)하여 영구(永久)히 수호(守護)하는 등 전말(顚末)을 대략 기록한다.


■ 영정기(影幀記)
원주(原州) 남면(南面) 용화산(龍華山) 고자암(高自庵)에 있다.

우리 경순왕(敬順王)의 화상(畵像)이 옛날에는 계림(鷄林)에 있더니 임진(壬辰)난리(亂離)에 전각(殿閣)과 함께 타버렸다. 인묘(仁廟) 정묘(丁卯)에 후손 하담공(荷潭公)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 때에 전각(殿閣)을 옛터에 중건(重建)하였으되 화상(畵像)은 모사(模寫)할 근거(根據)가 없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해마다 봉사(奉祀)하여 표충(表忠)의 향화(香火)가 그치지 아니하여 비록 사녀(士女)의 마음을 위로 하나 화상(畵像)을 보지 못하니 실로 후손(後孫)의 유감(遺憾)이었다. 강원도인(江原道人)에게 듣건대 화상(畵像) 한 폭이 원주(原州) 용화산(龍華山) 고자암(高自庵)에 있다하니 전설(傳說)로는 왕이 손국(遜國)한 후로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명산(名山)을 편답(遍踏)하다가 제천에 이르러 이궁(離宮)을 지어놓고 서(西)쪽으로 산에 올라 용화산의 빼어난 것을 바라보고 그 상봉(上峰)에 올라가 산(山)을 따라 돌을 깎아 미륵(彌勒)을 조성하고 절을 지으니 이름은 학수사(鶴樹寺)이며 또는 소제(小齋)를 미륵(彌勒)앞에 세우니 곧 고자암(高自庵)이다.

왕(王)께서 여기에 머물고 놀은지 역시 오랬다면 화상(畵像)이 여기에 있는 것도 당연하니 생각해 보면 당시에 왕을 따라다니던 신하(臣下)들이 망국(亡國)의 한을 애통(哀痛)하면서 이 땅은 왕이 마음붙인 곳이므로 화상(畵像)으로 전(傳)하여 유적을 뵈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불자들이 왕의 백성을 위해 나라를 버린 인자한 마음을 흠모하여 화상을 받들어 명성을 길게 함인가 고려(高麗) 중세(中世)에 절의 전각이 무너지고 인적(人跡)이 그친지 몇해런가?

황산거사(黃山居士)란 분이 우연(偶然)히도 칡덤불을 헤치어 무너진 벽위의 완연한 전날의 화상(畵像)을 발견하고 전각(殿閣)을 새로 지어 봉안하였더니 조선(朝鮮)조 국초(國初)에 이목은, 권양촌과 권상국, 희와 권도관(李牧隱 權陽村과 權尙國 禧와 權都官)도 이 여러분의 감개(感慨)한 뜻을 실천하므로 다시 옛 전각을 중수(重修)한지도 다시 三百年이 지내여서 비단이 박락(剝落)되어 얼굴빛이 차차 옛 모습을 잃게 되었더니 경주인(慶州人)인 김공필진(金公必振)은 역시 왕의 후손으로서 숙종정사년(肅宗丁巳年)에 원주목민관(原州牧民官)이 되어 분향(焚香)봉사(奉祀)하고 녹봉(祿俸)을 털어 김무진(金武眞)과 승려의 근실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화공(畵工)을 求하여 새로 본떠 화상을 모시는데 새로 전각을 대웅전(大雄殿) 오른편에 지어 이봉(移奉)하였더니 정축년(丁丑年)에 절은 화재(火災)로 불타버리고 오직 영정(影幀)모신 전각(殿閣)만 우뚝 서서 있으되 간호(看護)할 사람이 없어 퇴폐(頹廢)한지가 또 30년(三十年)에 이르므로 승려들이 또 암자(庵子) 왼편에 옮겨 세우니 곧 當?(英宗) 정사년(丁巳年) 봄이다.

슬프다. 영전(影殿)이 창건(創建)한 후로 황폐(荒廢)한 것이 두 번이오 중건(重建)한 것이 두 번이오 옮겨 건축(移建)한 것도 역시 두 차례로 상하계(上下計)가 벌써 팔구백년(八∼九百年)이로되 칡덤불 속에서도 영정(營庭)이 썩지도 아니하고 화재(火災) 때에도 불타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신기하였다.

이것은 왕이 백성의 어육(魚肉)을 차마 못하여 국왕(國王)의 자리를 버린 그 어진 마음과 지극(至極)한 혜택(惠澤)이 천지신명(天地神明)을 감동(感動)시켜 이 한 폭 영정(影幀)을 무궁(無窮)한 영겁(永劫)에까지 보호(保護)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유한은 계림(鷄林)은 곧 왕의 옛 도읍(都邑) 터요 왕의 선대(先代) 능(陵)이 있고 백성(百姓)의 자손(子孫)들이 아직까지 차마 잊지 못하는 왕의 영혼(靈魂)이 천년(千年)동안 첨성대(瞻星臺) 사이에 강림(降臨)할 터인데도 그의 제사(祭祀) 때에 위패(位牌)를 돌이켜 보면 이 진상(眞像)의 영정(影幀)이 일시 놀이하던 절간에 머물러 있으니 하담공(荷潭公)으로 하여금 이 진본(眞本)이 있는 것을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이 아깝도다.

영정(影幀) 앞에 나아가 바라보면 인후(仁厚)하고 자혜(慈惠)하는 기운이 애연( 然)하게 높은 코·큰 귀며 무성(茂盛)한 눈썹 적은 수염으로 위는 풍부(豊富)하고 아래는 약간 좁은 편 몸집은 헌걸차면서 비대하여 관복(冠服)과 상(床) 탁자(卓子)가 모두 왕자(王者)의 위의(威儀)이다.

제천(提川)의 궁전(宮殿)은 왕(王)의 이궁(離宮)의 터요, 원주(原州)의 배현(拜峴)은 곧 왕(王)이 미륵(彌勒)을 망배(望拜)하던 곳이니 용화산(龍華山)의 학수사(鶴樹寺)는 지금 미륵황산(彌勒黃山)으로 바뀌었거니와 홀로 고자암(高自庵)만은 구호(舊號)대로이다.

인제현(麟蹄縣)의 왕의 거처(居處)하던 땅은 김부왕동(金傅王洞)이라 이름하여 읍지(邑誌)에 나타나서 사적(事蹟)이 많이 있고 호남(湖南)의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도 영정(影幀)이 있었는데 왜인(倭人)이 그 나라에 가져다가 모사(模寫)한 후 환봉(還奉)하였다 한다.

옛날 들은 대로 신중하게 기록하여 여기에 첨부하니 외람한 것을 잘 알게된다면 우리 경순왕의 후손으로서는 모두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예손(裔孫) 한장(漢章) 재배기(再拜記)

■ 경순왕(敬順王) 영정사실기 (影幀事實記)

경순왕(敬順王)의 영정(影幀)은 본전(숭혜전)에 봉안(奉安)한 것이 도합 4본이다.

원본은 은해사(銀海寺)로부터 옮겨왔고 정조 18년 갑인(甲寅)에 2본을 다시 본떠서 1본은 본전의 감실(龕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봉안하고 1본은 을람(乙覽:임금님이보심)에 제공한 후 도로 본전에 보내어 구본(舊本)과 함께 궤 안에 봉안하였다.

고종(高宗) 40년 계묘(癸卯)에 또 1본을 다시 본떠서 본전의 감실(龕室)에 봉안하고 구본도 또한 궤 안에 봉안하였다.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또 경순왕(敬順王)의 영정(影幀) 1본이 있으니, 이는 후손(後孫) 한장(漢章)이 기증(寄贈)한 것이요.

원주(原州) 용화산(龍華山) 고자암(高自庵)에 또 1본이 있으니, 이는 후손(後孫) 사목(思穆)이 기증(寄贈)한 것이며 하동 쌍계사에 또 일찍이 1본이 있었는데 연전에 본전으로 옮겼다가 이제 하동 경천묘에 도로 봉안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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