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아이
2024.7.3.
여유가 없었다. 당장 목숨을 지탱할 먹거리를 찾는 게 큰일이었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멀리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사자처럼 강한 이빨도 없고, 가젤처럼 잽싸게 달아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맹수를 피하여 도망치다 무엇이건 먹고 살아남기 바쁜 생명체였다. 맹수가 먹고 남긴 뼈다귀를 돌로 으깨 먹거나, 웬만큼 배가 찬 야수를 쫓아내고 그가 먹던 부스러기를 빼앗아 먹었다. 열매건 씨앗이건 풀이건 버섯이건 살아 있을 열량을 줄 만한 거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 봤다. 그렇게 수백만 년을 목숨을 걸고 무리를 지어 점차 더 나은 사냥 방법을 개발하고, 자연의 먹거리를 채집하면서 생존의 길을 터득하면서 살아남았다.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갈수록 생존 기술을 개선하는 사람은 매머드 같은 큰 동물도 잡을 수 있었고, 끝내는 거대 동물을 대부분 멸종시켰다. 그래서, 때로는 골수는 물론 고기도 남기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남긴 찌꺼기를 먹으려고 사람 주위에 모여든 동물 중의 하나가 바로 개의 조상이었다. 개는 소나 양과 달리 사람 곁에 스스로 온 동물이다. 쥐처럼 먹이를 찾아 기웃거리다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다. 개는 사람에게서 먹이를 받지만, 쥐는 훔쳐 간다. 쥐와 달리 개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현생 인류는 개의 도움으로 덩치가 훨씬 큰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다고 하는 연구도 있으니, 개와 사람은 수만 년 전부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예민한 청각과 후각, 그리고 빠른 발로 사냥도 같이하고, 낯선 이가 접근하면 알리고, 썰매를 끌거나 가축 떼를 몰기도 하는 개는 비록 힘은 소나 말보다 못해도 그 쓰임새가 가장 다양한 동물이다. 물론, 때론 식량으로도 쓰였으니, 개를 잡아먹은 것은 우리나라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개와 사람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사람에게 길든 동물이고 사랑받는 가축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만 년에 걸친 인간과 개의 관계가 최근 수십 년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한마디로 개의 신분 상승이다. 개는 더는 가축이 아니라 사람의 동격이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정과 떠받듦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예전처럼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생활하고, 사람처럼 치장도 받고, 병원에서 치료도 받는다. 아예,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가 아니라 개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먹인다. 가난한 사람이 먹기 힘든 생고기 같은 값비싼 음식도 주인(아니, 양부모(?))만 잘 만나면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주인이 바빠 산책을 시키지 못하거나, 놀아주지 못하면, 아이처럼 돌보는 사람에게 맡기니 요즘의 애완견은 사람보다 더 편안한 생을 누리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는 아기 유모차보다 강아지 유모차가 더 많이 팔리고, 선진국에서는 개 미장원이 성업 중이고, 각종 개용품이 각 슈퍼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과거의 개는 집을 지키던, 사냥을 하던 사람의 집 밖에 기르는 가축이었지만, 이제 개는 사람과 같이 집 안에 살면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개에게 기르는 사람이 엄마, 아빠라고 스스로 칭하니 이제 개는 비록 사람과 다른 종이지만 입양아가 된 셈이다. 그 지위에 걸맞게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호강하는 중이다: 개 전용 공원, 병원 치료, 돌보미 서비스. 아이는 안 낳아도(?) 이렇게 개를 자식처럼 여기니, 개가 죽으면 장례를 지내고, 묘지에 묻으며 부모라도 돌아가신 듯 슬픔에 빠져 산다. 개보다 먼저 죽으면 유산을 남기기도 하고.
그럼, 도대체 왜 개는 귀공자, 귀공녀가 된 것일까? 무수한 애완견은 중성화 시술을 받고, 때로는 짖지도 못하게 성대 수술도 받는다고 한다. 이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현대 도시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한 조치라지만 씁쓰레한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개가 바뀐 것은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고 애정을 쏟지 못하고 대신 그 외로움을 조그맣고 귀여운 품종의 개를 골라 키우며 아낌없이 애정을 퍼붓게 되었을 뿐.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원하고,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고받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와 부부로 이루어진 핵가족 시대도 넘어 대부분 혼자나 둘이 사는 시대를 산다. 말을 할 사람도, 말을 걸어 줄 사람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일 사람도 쏟아 주는 사람도 드물거나 없는 세상이다. 혹 있다고 해도 경청하고, 관심을 기울일 시간도 없이 쫓기는 현대인이다. 개는 특유의 살가움으로 그들의 외로운 마음을 차지한다. 그래서 예전 같았으면 자녀에게, 가족에게 쏟았을 사랑과 관심과 애정과 시간을 강아지에게 대신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과 같은 지붕 아래 한 공간에 살지 못하고, 개와 같이 사는 세상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어느 종도 같은 종과 어울리는 대신 다른 종과 함께 살지도 않고, 정감을 나누지도 않는다. 개에게 이토록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첫째, 우리는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비용 때문에 자신의 약물치료를 포기한다는 뉴스를 봐도 우리는 얼마나 관계 지향적이고, 다른 존재에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의지하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우리가 가족이든 친구든 타인과 맺어온 공감과 이해, 애정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명이다. 사람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타인과 쌓아 올리는 관계의 구조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후자가 결핍된 시대와 사회에 살면서 개와 다른 애완동물에게서 위안을 얻으려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온전한 사회가 유지되려면 애완동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