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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에서
작가소개 崔泳美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2년 계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제 1 부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 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은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꼽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지난 20여년간 청춘을 위로해온 ‘서른살의 필독서’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는 사랑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후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영미 시인의 기념비적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시대를 응시하는 처절하고도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이 시집은 지금껏 5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내겐 축복이자 저주이며 끝내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시집을 새로이 세상에 내놓”(개정판 시인의 말)으면서 시인은 세편의 시(「지하철에서 6」 「마포 뒷골목에서」 「귀거래사(1992)」)를 덜어내고 과도한 수식어를 쳐내는 등 손톱을 다듬는 마음으로 젊은 날의 시편들을 일일이 손보았다. 간결하게 정돈된 시어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간결미를 뽐내며 당대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비유를 더욱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지난 이십여년간 ‘서른살의 필독서’로 청춘의 아픔과 고뇌를 다독여온 이 시집은 “어떤 싸움의 기록”(최승자, 추천사)이자 깊은 사랑의 기록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는 변했지만 “교과서가 없는 시대에 고투하는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정직하게 노래”(최원식, 추천사)한 시편들이 당대를 건너온 시인의 열정과 어우러져 여전히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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