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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 김기택의 시세계
김수이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알아차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사물을 꿰뚫는 통찰. 명상 수행의 대표적인 방법이자 덕목이다. 명상하는 자는 천천히 숨을 쉬면서 자신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윽고 아무런 의지와 노력 없이도 자기 몸이 저절로 숨 쉬고 있음을 알아차리며, 들숨과 날숨을 통해 세계를 호흡하면서 자신이 ‘지금 여기-살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잡념에 휩쓸리지 않고 ‘텅 빈 채’로 주위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충족감을 체험하며, 이번 숨과 다음 숨 사이의 ‘순식간(瞬息間)’에 삶과 죽음의 문턱이 있음을 통찰한다. 명상하는 자는 자신과 미묘한 거리를 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자, 현재의 모든 순간과 만물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 현존(現存)하려는 자다. 숨을 쉴 때마다, 그리고 숨과 숨 사이에서 명상하는 자는 ‘애쓰지 않는 애씀effortless efforts’을 실천한다.
갑자기 몸은 다 없어지고 허공에 멀뚱멀뚱 눈알만 남는 어둠이 되어
나를 둘러싼 거대한 눈알이 한 점 허공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어둠이 되어
긴 대롱을 지나야 그 끝에 간신히 숨구멍 뚫린 허파가 있을 것 같은 어둠이 되어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갈라진다 갈라진다』, 문지, 2012) 부분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진 것이
처음 입은 이상한 몸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 몸 없음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눈」(『낫이라는 칼』, 문지, 2022) 부분
김기택의 시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명상하는 자’다. 김기택의 시는 ‘문명의 야만’이 숨통을 조이고 “대가리 없는 명상 냄새”(「치킨고로케」, 『낫』)가 자욱한 죽음의 도시에서 “답답한 숨통과 내장을 시원하게 긁”(「너무」, 『낫』)을 수 있기를 염원하며 명상을 수행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의 경험을 바라보는 알아차림, 특정한 지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며 고요와 평온에 이르는 집중,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폭넓게 주의를 열어놓는 통찰 등 명상의 기술도 풍부하게 활용한다. 가령, ‘숨 쉬는 일’을 위시해 다양한 몸의 다양한 활동을 계속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 “~(하)고 있다”라는 현재 상황 진술의 서술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 드물지만 “기우뚱거리는 몸 안으로 환한 빛과 음악이 기적같이 흘러들어오”(김진석)는 지복(至福)의 순간을 만나는 것 등은 명상하기로서 김기택 시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기택의 시는 특히 현대세계와 그 파편적 존재들에 관해 고요하고 느린 명상을 수행해 왔다. 한 생명체나 사물, 어떤 사건이나 현장 등에 대해 고통스러울 만큼 집요한 몰입과 의도적인 더딘 필치로 언어화를 수행하는 과정은 곧 명상 수행의 과정이 되었다. 김기택의 시가 “해부학적 관찰과 투시적 상상력”(이광호)을 통해 발휘하는 언어적 수행(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실상을 알아차리고 통찰하는 명상 수행으로 수렴되면서 궁극의 목적을 드러낸다. 내면의 변화를 통한 존재의 변화 및 삶의 변화, 세계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 변화들은 서로 연결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촉발하는 동시성의 관계에 있다. 김기택이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집요하게 묘사할 때, 그 극사실적 언어화의 과정에서 각 시편은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다. 소, 개, 낙지, 풀, 나무, 아기, 노인, 실직자, 사무원, 걸레질하는 여자, 눈먼 사람, 침, 가래, 무좀, 주름살, 삼겹살, 껌, 벽, 틈, 타이어, 무단 횡단, 중얼중얼중얼, 바늘구멍 속의 폭풍, 울음, 소음, 졸음, 속도, 겨울 아침, 봄날 등 ‘김기택 표 만물들’은 김기택 스타일로 연출된 느리고도 역동적이며 무정하고도 유정한 퍼포먼스를 통해 독자를 집중하게 하고 동요하게 하며, 놀라게(경탄/경악) 하고 통찰하게 한다.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걸음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 「한가한 숨막힘」(『껌』, 창비, 2009) 전문
김기택의 시-퍼포먼스는 몸의 각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는 바디 스캔Body scan 명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김기택 특유의 바디 스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위의 시는 ‘노인’의 쇠약한 몸과 위태로운 걸음을 묘사하기 위해 관절, 뼈 전체, 갈비뼈, 목, 눈알, 숨소리, 파닥거리는 몸, 가까스로 잡는 균형 등을 하나하나 주시한다. 노인이 아슬아슬한 걸음과 그 걸음 속에 스며 있는 죽음을 “있는 힘을 다해” 상연하는 시-퍼포먼스는 독자-관객인 ‘나’를 어느새 노인의 필사적인 걸음을 함께 걷고 있는 공동(육)체로 바꾸어 놓는다.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발걸음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는 ‘노인’은 ‘나’의 다른(혹은 같은) 시간의 육체이거나 내 안의 잠재태/가능성이다. 김기택의 시는 육체성, 공간성, 소리성, 시간성 등의 물질성을 생생히 구축하고 체험하게 하며, 이러한 ‘물질성의 수행적 창출’을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수행성’의 미학을 빚어낸다. 수행성의 미학은 독자가 자신의 지각에 집중하면서도 지각 대상과 몸을 바꾸는 역치적 경험을 통해 존재와 삶의 변환에 이르게 하는 점에서 명상의 기술과 통한다. 이는 김기택이 현대의 실상을 치열하게 지켜보는 데 몰입해 왔으며, 그의 지켜봄-명상을 통과한 시적 광경들이 자주 고통스럽고 불편한 형상으로 심리적 저항감과 연민, 수용의 마음과 탈주의 열망 등을 복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김기택은 뭇 존재와 현상들에 새겨진 현대세계의 실상을 보고 듣고 아는 일이 시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해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과 허상의 관념조차도 육체를 가졌음을 특유의 관찰안(觀察眼)을 통해 설파해 왔다. 일찌감치 그는 ‘마음도 하나의 육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마음의 육체를 보는 눈은 육안을 넘어선 심안이나 혜안일 터인바, 이는 마음의 육체가 겪는 갖가지 일들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요청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현대세계도 하나의 육체이며, 그에 속한 모든 사물과 현상과 관념 또한 제각기 하나의 육체다. 김기택은 현대세계를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세계라는 ‘공동(육)체’의 일부로서 관찰하고 통찰한다. 김기택의 시 쓰기-명상은 현대세계라는 공동(육)체에 알아차림의 시선을 부여하고 생성하는 일이며, 현대세계 전체가 이행해야 할 알아차림과 변환을 홀로, 조금 먼저 감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택은 숨 쉬고 있음, 앉아 있음, 걷고 있음, 먹고 있음, 자고 있음 등의 물리적 동작과 환희, 슬픔, 고통, 고독, 불안, 두려움 등의 마음 상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 생로병사의 상황들이 어떤 육체의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기, 노인, 병자, 노동자, 다리를 저는 사람, 뚱뚱한 여자, 우주인, 죽은 사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육체들은 개체인 동시에 공동(육)체이며, 지금 여기에 각자 있는 동시에 함께 있는 존재들이다. 이 공동(육)체는 에리카 피셔-리히테를 따라 “신체적 공동 현존”이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로 휘말려드는 사건을 창출”한 예술작품을 통해 “지금 여기hic et nunc, 즉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같이 존재하는 공동 주체Ko-Subjekte”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현대세계는 공동체의 연대를 파괴한 자리에서, 각 개체의 생명과 생존이 파괴적으로 연결되고 연루된 공동(육)체를 배제의 시스템을 통해 부정적으로 활성화한다. 최근 시집 『낫이라는 칼』에 실린 시 「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는 현대세계와 현대인들의 공동(육)체가 시인이자 사무 노동자이며 자연인인 김기택 자신의 몸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적나라하게 현시한다. ‘사무원 기택 씨’의 몸에는 그동안 김기택이 알아차리고 통찰해 온 모든 몸이 고스란히 통과하거나 공존하고 있다. 이는 김기택의 시가 들숨과 날숨, 먹고 먹힘, 죽고 죽임을 통해 연결된 현대사회라는 공동 육체의 명상을, 그 역시 공동 육체(의 일부)로서 대행해 왔음을 알게 한다. ‘사무원 기택 씨’의 몸에 앞에서 본 시 「한가한 숨막힘」의 ‘노인’을 비롯해 ‘사무원’(「사무원」, 『사무원』, 창비, 1999), 걷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걸레질하는 여자, 눈먼 사람 등의 몸이 관통하고 병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김기택에 의하면, 이 수많은 취약하고 필사적이며 부자유하고 기형적인 몸들은 모두 ‘나’였다.
다리에서 걸음을 받아 열심히 걷고 있다.
그 걸음걸이에 맞춰 셔츠가 소매를 휘젓고 있다.
팔꿈치와 무릎이 구부러질 때마다
피부에 촘촘하게 새겨지고 있는 주름들이
소매와 바지 뒤판에 자리를 잡고 펴지지 않는다.
재킷이 그의 거북 목에 맞게 굽어져 있다.
그의 기형적인 걸음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구두 뒷굽은 끈질기게 바깥쪽만 닳고 있다.
편마모된 뒷굽을 합리화시키느라
바짓가랑이는 대칭을 그리며 활처럼 안쪽으로 휘고 있다.
- 「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낫이라는 칼』) 1연
현대세계의 공동(육)체로서 김기택은 자신의 몸 안에 타자의 몸이 있음을 발견하거나, 타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흔적 없이 이입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오줌이 마려워 방광이 터질 듯한데 “손가락이 눈이 되고 다리가 되도록 헤매도/ 작은 가방 안은 넓고 넓어/ 열쇠는 보이지 않”을 때 “온몸에 가득 찬 시각장애인이/ 컴컴한 시력을 긁고 또 긁어대”(「방광은 터질 것 같은데」)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극한의 슬픔 속에서 “숨막힘을 숨 쉬”는 ‘유족’의 숨을 알아차리며 함께 숨 쉬는 것은 후자의 결정적인 예다. 한편, 시 「죽은 눈으로 책 읽기」에는 양방향의 운동성을 지닌 몸이 출현한다. 책을 읽으며 글자들 속에서 이 글자들을 읽은 모든 눈과 “나의 첫 눈”이 합체하는 장면은 김기택의 공동(육)체가 공간의 확장성만이 아니라 시간의 확장성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래전에 죽었는데도/ 그 눈들은 아직 이 문장을 읽고 있다./ 죽은 눈 위에 다른 눈이 겹치고/ 또 다른 눈들이 읽으며 쌓인 문장의 지층 위로/ 나의 첫 눈이 얹힌다./ 죽은 눈알들이 터질까 봐/ 글자들 사이를 발끝으로 조심조심 디디며/ 문장들 속으로 들어간다.”(「죽은 눈으로 책 읽기」)
숨 막힘을 숨 쉰다
안 삼켜지는 덩어리를 삼키다가
안 뚫리는 콧구멍을 뚫다가
튀어나오려는 붉은 눈알로 숨 쉰다
들뜨는 피부로 숨 쉰다
곤두서는 머리카락으로 숨 쉰다
식도가 딸려 나올 것 같은 목구멍으로 숨 쉰다
내장과 핏줄을 뽑아 올려서 숨 쉰다
근육과 골수를 짜내서 숨 쉰다
남은 수명을 단축시켜 숨 쉰다
- 「유족」 전문
김기택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의 몸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김기택이 포착하는 동물들은 현대문명이 초래한 동물의 수난을 피력하는 한편으로, 파괴적인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에 대한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층 이루고 있는 탄력”을 자랑하는 토막 난 ‘산낙지’(「산낙지 먹기」, 『껌』)는 현대문명이 생명에 가하는 폭력과 그 폭력에 유린당하며 살아-죽어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최후의 알레고리로 부족함이 없다.
화분이 갑자기 꿈틀거린다 싶더니
막 사라지는 네발이다
보도블록이 물결친다 싶더니
어슬렁거리는 줄무늬다
쓰레기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싶더니
찢어진 쓰레기봉투에서
돋아나는 발톱이다
어둠에 빛이 새어 나온다 싶더니
빛 구멍 뚫린 눈알이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혼자 걸어갈 때면
가끔 뒤통수가 운다
발밑이 운다
「야생 2」 부분
풀이 땅에 구멍을 뚫고 있다/ 땅속에 숨통을 심고 있다// (…) // 풀이 썩은 어둠에 푸른 파이프를 박고/ 여린 숨을 퍼 올리고 있다
「매몰지」 부분
구멍 뚫린 의자가
제 구멍으로 내 구멍을 보고 있다
내 구멍과 변기의 구멍이 하나가 된다
내 어둠과 변기의 어둠이 이어진다
내 깊이가 변기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다
- 「변기」 3연
한편, 김기택의 시에 그려진 몸들이 그 종(種)에 상관없이 인간, 동물, 식물, 사물, 광물, 에너지 등의 운동성을 자유롭게 발산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 「야생 2」에서 길고양이는 화분으로 붙박여 있다가(식물성), 보도블록으로 물결치고(광물성의 에너지화), 다시 쓰레기봉투에서 돋아나는 발톱이 되었다가(사물성과 동물성화), 어둠 속 “빛 구멍 뚫린 눈알”이 되고(에너지), (인간의) 뒤통수와 발밑이 되어 운다. 시 「매몰지」에서 ‘풀’은 식물의 강한 생명력을 동물성과 인간의 행동으로 표출하며, 시 「변기」에서 ‘변기’는 시적 주체인 ‘나’와 동일한 위상을 지닌 “보고 있”는 주체로 그려진다. ‘변기’는 ‘나’의 밖에서 ‘나’를 통찰하고 있는 명상의 주체이자 ‘나’의 다른 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상하는 자로서 김기택의 공동(육)체는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김기택은 현대문명이 설정한 만물(萬物)의 위계를 뒤집고 해체한다. “모든 이의 발 앞에 구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되”(「부음」)었거나 구석에 방치된 존재들을 불러 모아 평등하게 하고, “숨넘어갈 것 같고 숨 끊어질 것 같은 이 숨말을 붙여주어야”(「너무」) 회생할 것 같은 현대세계의 숨을 고르고 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자 한다. 이번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칼날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하고 남이 아닌 나를 향하는 ‘낫’은 김기택이 추구하는 명상의 자세를 함축한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다.
김기택 시의 공동(육)체에는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김기택의 시는 언어들의 위계도 재구성하고자 하는바, 주어 중심에서 술어 중심으로, 명사 중심에서 동사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실체 중심에서 행위와 운동 중심으로 나아간다. 이는 언어 자체를 넘어 언어로 표상된 존재와 사고방식과 미학, 현대세계의 인간중심주의와 권위주의 등을 전복하는 일과도 연결된다. 즉 김기택의 시에서는 사람, 개, 꽃 등 하나의 명사가 특정 동사나 명사를 점유하거나, 명사에 따라 동사의 쓰임과 위상이 제한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의 동사가 서로 다른 층위와 계열의 명사들을 포용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구체적인 예로, ‘숨통’이라는 명사는 인간, 동물, 식물, 사물, 추상적인 개념 등에 의해 차별 없이 공유되며, ‘갈라지다’라는 동사는 틈, 벽, 건물, 콘크리트, 땅, 식물의 가지, 뿌리, 사람의 피부, 손금, 가죽장갑, 소리 등을 대등하게 아우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상하기로서 김기택의 시에서 가장 부정적인 형태의 몸이나 존재를 지칭하는 말은 다름 아닌 ‘명상’이다. “‘30년간의 장좌 불립(長座不立)’” 고행에 정진하고 있는 사무원(「사무원」), “머리가 없어서 명상에 잠겨 있”는, “엉덩이가 머리가 되도록/ 깊이 명상에 잠겨 있”는 ‘공원의 의자’(「공원의 의자」),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는 “물아일체와 무아지경”의 비둘기(「비둘기에 대한 예의」) 등은 자아를 망실한 존재의 생존, 사물로 비유된 생명의 결여, 맹목적인 생명의 “막무가내 활기”(「참새구이」)를 우리로 하여금 힘겹게 직시하게 한다. 김기택은 이 마비된 존재와 생명의 ‘죽은 명상’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우리가 문득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겨를’은 거리에서, 아기 앞에서 등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가 ‘나’의 존재를 활짝 열어놓을 때 온다. “몸 없는 숨이 혼자 걷는 순간에 온다. 저녁 7시 거리의 혼잡과 소란에 팔다리가 달려서 걸어가는 순간에 온다.”(「겨를」)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아기 앞에서」).
‘나’의 몸이 없어지는 ‘겨를’과 ‘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무너지는 무장해제의 순간에 ‘내’가 경험하는 일이 ‘명상’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늘구멍 속의 폭풍’처럼 숨막힘을 숨 쉬고 있는 현대세계와 우리 자신의 숨통을 뚫어주는 일이 지극한 평온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와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되”어 “한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가”(「눈먼 사람」)는 ‘눈먼 사람’이야말로 ‘명상하는 자’의 실제적이고도 역설적인 이름일 것이다. 김기택의 안내를 받아, ‘온몸의 길’과 ‘한평생의 체중’을 실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눈먼 사람’은 이제, 이미 우리 각자이며 우리 모두다. 명상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self-observation’ 능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는 능력을 키우는 일임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