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승만은 외교 활동을 보다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
1939년 12월 30일 호놀룰루에서 워싱턴D.C.로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1941년 8월 1일에 뉴욕의 플레밍 H.레벨사를 통해 그를 전 미국 사회에 알리게
되는 「일본 내막기 오늘의 도전(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당시 세계가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고립주의로 인해 국제 관계에서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민주주의가 기반을
잃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과 통상, 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야욕을 보이는 일본이 머지않아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승만은 이미 1933년 1월경부터 일본의 팽창을 경고하고 있었다.
1933년 1월 13일 일기를 보면, 이승만은 강대국들이 일본에 대해 단지 한국을 먹잇감으로
삼은 데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조만간 한국은 일본의
침략야욕의 첫 번째 단계일 뿐이고 만주가 다음 단계이며 이마저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고 제네바 주재 미국영사에게 말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극동의 평화를 실현하고 국제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이 함께 모여
일본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지』 3부작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펄벅(Pearl S. Buck)은
일본 내막기에 대한 서평을 「아시아 매거진(The Asian Magazine)」에 기고하였다.
그녀는 1905년에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허용함으로써 재앙이 시작되었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면서 이 책을 격찬하였고, 이후 펄 벅 부부와 이승만은 함께 만나 담소를
나누고 점심을 같이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특히 펄 벅은 문학가로서뿐만 아니라
1941년 자신이 설립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를 통해 미국 대중에게
동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파하는 일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후 - 이승만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 친한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일본이 실제로 진주만을 공격하자 일본 내막기』는 3쇄를 기록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높아진 지명도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김삼웅은 이에 대해 이승만이 미일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상당한 확신을 가졌으며
그에 따라 적극적으로 주미외교위원부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당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동분서주했다.
- 이택선 저, 이조 간, ‘우남 이승만 평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