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功扶)란 무엇인가 ?
마음그릇 心椀 박 찬
우리 말에
《공부》라는 말이 있다.
공부를 한자로 쓰면
《工夫 또는 功扶》가 된다
아무리 뜯어보고 해석해도
글자형에서《공장 인부》정도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참으로 이상하다
《工夫 또는 功夫 功扶》는
현대어에서
실제로 영어의
《to study》라는 말과
상응한다
라틴어 어원인
《studēre》도
《학문을 한다》는 뜻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습득한다는
뜻과 의미이며
개념적
지식의 한계를 넓힌다는 뜻으로
상승지향 엘리트주의적
함의(함축적 의미)를
갖는다
동양 삼국의
서양언어 번역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Study》의 번역어는
일본어에서는
《벤쿄오스루(勉強する)》로
중국어에서는
《니엔수(念書)》로
되어 있다
일본말《벤쿄오스루》는
《억지로 힘쓴다》는 뜻으로
사실
공부라는 것이
억지로 해야만 하는
괴로운 것이라는
매우
정직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국말《니엔수》는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스터디》의 방식
실제 행위 내용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다.
예로부터
중국(中國)에서는
선비(유학자)를
《뚜수르언(讀書人)》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공부 Study》의
번역어로서는 일본어나
중국어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만이
유독 공부(工夫 功扶)라는
요상한 자형(字型)을
선택했을까 ?
《工夫, 功扶》라는 글자는
선진 문헌(先進文獻)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당나라 때
고승(高僧 선사)들의 어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工》은《功》의 약자이고
《夫》는《扶》의 약자이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도와서(扶)
공(功)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한다》는 말도 단순히
《출세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을 성취한다》
《공을 이룬다(成功)》라는
뜻이다
이러한
《공부》라는 개념을
가장 많이 활용한 사상가가
바로
신유학의 발판을 마련한
주희(朱熹 1130~1200)라는
인물(人物)이다
그가 편찬한
신유학의 앤톨로지인
《근사록(近思錄)》에서
송학(宋學,
주자학)의 선구자
정명도· 정이천 두 형제의
사상(思想)을 표현하면서
《공부》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리고
그의《어류(語類)》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수양론을 펼치면서
《공부(功扶)》라는 말을
무수히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서양 언어인
《Study》를 번역하는데
《공부》를 고집한 것도
우리나라가
정통 주자학의
완강한 전통을 연속적으로
담지(湛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꽁후우(功扶)》는
쿵후라는
좁은 무술(武術)의 개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단련을 통하여
이루어 달성(達成)하는
모든 신묘한 경지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선반공이 쇠(金屬)를
정교하게 깎거나
서예인이
능란하게 붓을 휘두르며
글씨를 쓰고
자유자재로
붓을 놀린다든가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他的工夫不錯》
(그 사람 공부가 대단하다)》
라고 표현한다
희랍철학에서
덕(德)이라는 것을
《아레떼(aretē)》라고
표현하는데
아레떼는
바로 칠예(七藝 7가지 재주)의
모든 방면에서
한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단련을 통하여
목표점을 이루어 달성하는
탁월함(excellence)을
의미한다
이렇듯
공부(工夫)와 아레떼는
거의 같은 뜻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시
노자(老子)의 사상에서
유래(流來) 된
《도덕(道德,
모랄리티 Morality)》은
도(道)와 덕(德)의
합성어이다
《도덕경》51장에 보면
"
도는 생(生)하는 것이고
덕은 축(畜)하는 것이다
(道生之 德畜之) 라는
함축된 명제가 있다
도(道)가
생생(生生)하는 천지(天地)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라면
덕(德)이란
그 천지의 생생지덕을
몸에 축적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다
도덕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교육(敎育,
가르치고 배움)이란
축적해 나가는 과정
즉 오랜 시간(時間, 세월)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시간의 예술이다
모든 주체가
철저히 시간성(時間性)에
복속(伏束)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해보자
모든《공부》는 그러함으로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공부(功扶)》는
이성의 선험적 구성이나
비시간적 깨달음이 아니다
축(畜,
짓고 쌓음) 되어야만 하는
덕(德)이다
그 덕(德)이 바로 교육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morality)의 핵심(核深)을
형성하는 것이다
공부(工夫 쿵후)는
몸과 마음의 단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것은
기나긴 시간을 통하여
공부를 축적해 나갈 때만
이루어짐(成取)이
가능(可能)하다
퇴계 이황의 말년 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는
우주(宇宙)와
인간의 삶(人生事) 전체가
상술(橡述 저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명(天命)》이라는
단어(單語, 문장, 글자)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 명령하는
하늘(天命)
인격적(人格的)
주재자의 가능성으로서의
천(하늘 天)이라는
관념(觀念 시선. 시각. 개념)이
소실(잃어버림 消失)되어
버린 것이다
천명(天命)
즉,
하늘의 명령이 무엇이냐 ?
라는 질문(물음)에
퇴계 이황은
명쾌히 대답한다
" 천(天)은 리(理)일 뿐이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人間罪惡)를
사(捨, 용서)하여 줄 수 있는
하늘(天)은
결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위(言行)는
나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곧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곧 참되고 참 된 진리(眞理)이며
나의 자아(自我)이고
자성(自性)이다
나의 마음은
나(我)라는 존재(사람)의
일신(一身)을 주재한다
즉 나의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경(敬)이다
그래서
퇴계의 철학을
경(敬 공경함)의 철학이라
말하고
그의 교육론을
경(敬 공경함)의 교육론
이라고 말한다
주희(朱熹)는
학자(學者)의 공부로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이사(二事)를
말했는데
그는 암암리
이 두 가지의 양자(兩者)가
서로 서로 상대를 밝혀
호상발명한다고
말하면서도
궁리(窮理, 궁극적 진리추구)
즉,
객관적 사물의 탐구에
더 역점을 두었다
퇴계는
거경과 궁리를
근원적으로 포섭하는
경(敬)의 철학(哲學)을
확립하고
철저히
우리 몸에 내면의 본질을
파고 든 것이다
경(공경할 敬)이란
우리가 위에서 말하는
《몸의 공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것은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이
사라진(소실된)
이 지상에 던져진
고독(孤獨)한 인간(존재)이
스스로의
자각(自覺 깨우침)에 의하여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경(敬)은
우리말에서 보통
《진지함 (earnestness)》
《공경함 (reverence)》을
뜻한다
또한
신유학(新儒學)의
독특한 용어(표현)로서는
일차적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의미가 된다
그 것은
마음(心 靈魂)의 상태가
오직 하나에 전념(몰두)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산란함)도
없는 것이다
경(敬)은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이라는
말(언어 단어)로 바꾸어
환치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집중(集中)
곧《집중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학습과 공부(功扶)의
효율성을 지배하는 근원적
마음에 상태를 의미한다
학생(學生)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양이
곧 공부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공부(功扶)의 핵(核心)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중하는 마음의 상태가
경(敬)이요
참으로
진정한 공부(功扶)인
것이다
이러한
경(공경할 敬)의 마음을
잘지키고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핵심인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항상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처음에
옳바로 마음을 일으키며
첫 마음 먹은대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느끼며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수행하여
대오각성(大悟覺惺)
정각(깨달음)을 성취하라
그 것이 곧 Study(공부)요
옳고 바른(正道)
배움의 학인(學人)이며
인간사 사생고락
(人間事死生苦樂)
육도윤회(六道 輪廻)를
벗어나 해탈(解脫)을 이루는
참된 공부(功扶)인 것이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