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이 혜장스님께 차를 보내 달라고 쓴 걸명소乞茗疏 이야기
산마루에 올라 찻잎을 따고
냇물을 끌어다 꽃에 물주네
문득 고개들어 보니 해는 기울고
그윽한 암자엔 풍경이 울리네
기쁘다..이러한 한가함 이러한 즐거움 이러한 아름다움이여..
아암혜장스님의 백련사 생활을 엿볼수 있는 멋진 선시이다.
유배중인 다산이 혜장스님의 서가에서 육우의 다경 3권을 심독한후에 차 한잔을 마시고 싶어 차시중드는 스님께 부탁했더니 텅빈 차항아리를 보여주었다.
다산은 붓을 들어 혜장에게 편지를 썼다.차를 구걸하는 걸명소였다..
나그네는 근래 차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먹고 있소.차가운데 묘한법은 보내주신 육우다경 3편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의 일곱째잔도 마르게 하였소.
정력이 쇠퇴했다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찬황의 차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아..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달이 푸른물 위에 잔잔히 부숴지는듯 하오.
다연에 차를 갈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자주빛 어린 차순 향내는 그윽하고 숯불일고 샘물 길어다 무쇠솥에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나 물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즐기는 사이에 용단봉병등 왕실에서 보내 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오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수 없는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고해의 바다 건너는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줌 몰래 보내주는 일이라 하오.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품을 주소서..
다산의 걸명소를 받아본 혜장은 그냥 있을수가 없어 불전에 헌다하는 차를 보냈다고 한다.다산은 당의 시인 노동과 그의 칠완다가를 알고 있었고 한림학사 이찬황의 차마시는 버릇에도 익숙하였다.
다산은 부승지로 정조를 보필한 일이 있다.그때 중국사신 접대를 하면서 차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진으로 귀양와서 아암 혜장스님과 교류를 통해서 걸명소와 같은 글을 지을수 있을만큼 차살림이 깊어 졌다고 볼수 있다.
다산은 15세에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였다.두 아들은 아버지가 귀양살던 다산초당을 왕래하던중에 어버지에게 유학을 배우던 초의를 알게 된다.초의가 훗날 추사 김정희와 해거도인 홍현주등 한양의 지체높은 선비들과 교유하게 되는 것도 다산초당에서 인연맺은 두 형제 덕분이다.
다산의 아들 유산은 초의보다 두살위였고 운포와 추사는 초의와 동갑이었다.
고려때 성행했던 우리 차문화는 조선시대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다산과 아암.초의와 추사를 통해서 시.서.화.금.차.향으로 정신문화의 꽃을 피운 아회雅會의 전통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