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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121편의 ‘실족(失足)’의 의미
실족(失足)이란 말을 해석할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는데 힘이 모자라니까 하나님은 늘 도와주셔야겠다
하는 의미인가 하면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그런 것이 펠라기우스(Pelagius)의 주장입니다. 신학상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반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 이야기이니까 꼭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업지만, 어거스틴 시대에 굉장히 그를 반대하고 일어났던 그릇된 사상과그릇된 신학적 논설인데, 그 후에 개혁 시대에는 펠라기우스적인 사상이 알미니우스주의로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유대주의 가운데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것들을 다 합해서 신학상 공통점을 말할 때 율법주의 혹은... 계율주의(normism)라 합니다.
신학상 계율주의라 할 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데 모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겠다 하는 이런 사상인데, 만일 이 시를 잘못 해석하면 그런 사상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특별히 그런 신학 용어를 쓰지 않고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사상은 그런 사상을 가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아, 나를 실족지 않게 하신다.
그리므로 조심해서 잘 걸어가면 내 힘이 모자라는 것이나 인간으로서 부족해서 넘어지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붙들어서 나를 잘 가게 하신다’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모자라는 부분만 붙들어주시면 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여기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반듯이 걸어간다 할지라도 언제 지뢰가 터질는지, 언제 적이 나를 습격할는지, 누가 나를 지키다가 잠시라도 한눈을 파는 동안에는 적이 와서 나를 공격해서 넘어뜨릴는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아주 첨예한 위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를 지키시는 이는 잠시도 쉬실 수가 없다. 졸지도 아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것이다. 졸든지 주무시든지 하면 큰일 난다’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 실족한다는 말은 소위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식의 생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사 이 세상에서 그 영광을 위해서 정하신 일을 해 나가도록 하셨는데 영광을 위해서 정하신 그 일을 내가 해 나가려고 할 때는 자기 자신의 힘을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성신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성신의 능력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성신의 능력으로 나를 이끄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 데나 천사와 같이 흠 없이 잘 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제한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意識)의 능력의 제한이 다 있어서 그 제한 안에서 그 사람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잘 이루어 나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가게 하시고 내가 갈 수 있게 힘 주셔서가는 동안에 나는 힘만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받고잘못된 생각이 들어오고 혹은 옛사람적인 기능이 나를 순간적으로라도 지배해서 실족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실족지 않게 하신다’하는 시를 읊으면서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고 표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김홍전 )
(2) 전혀 새로운 시간-받아들임
(시 121: 1- 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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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내는 올해의<사순절>에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있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성전에 나와서 보내는 한 시간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분주하게 돌아가던 모든 세상의 일을 과감하게 그칠 때... 거기서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맞으며...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일이나... 우리의 걱정이나 염려들... 이런 것에 얽매어 있다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쉼을 경험하게 됩니다.
엿새 동안에 세상을 지으시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던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안식에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평화와 고요와 행복을 망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의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이란 여분의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절정... 그 자리에 안식일이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일곱 번째로 맞이하는 날은 지난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을 하고도 다하지 못했던 일들을 보충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식일은 엿새 동안의 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우리를 지탱해주는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심은 일곱 번째 날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한 주간을 이렇게 보낸다고 합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부터 삼일 동안은 내가 맞았던 안식일을 회상하며 보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그러니까 안식일이 오기 삼일 전부터는 앞으로 맞이할 안식일에 대한 기대 속에서 세상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회고하며... 그리고 앞으로 내게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그래서 매일 매일의 삶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주일을 여분의 날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시간이 남을 때에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일과 예배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에...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젖어 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처럼 자주 성전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어서 멀고... 그렇다고 요즘처럼 교통 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그들은 대개 일년에 세 차례씩 성전에 갔습니다.
봄에 맞이하는 유월절과 초여름에 있는 오순절... 그리고 가을에 있는 초막절이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삼대절기인데... 이때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성전에 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절기를 맞아 성전을 향하는 한 나그네의 노래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요.
생각해보면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기가 되었을 때에 성전에 오르는 일 말입니다.
보통 한 주간 동안 축제가 계속되니까... 자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성전에 가고... 한 주간을 그곳에 머무르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꽤나 많은 시간을 성전을 향하는 일에 사용하였겠지요. 적어도 두 주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상적인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바라보는 삶의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것을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다른 지형에 비해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평균고도가 해발 800미터 정도 되니까... 평균고도가 바다면 보다도 낮은 사해의 광야지역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려면 그들은 거의 1,000미터 이상을 올라가야 합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는 모든 순례자들은 그들의 마지막 순례는 결국 높게 솟은 산을 향하여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 성전을 향해서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순례자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할 일도 많은데... 한 주간 이상 거의 두 주간씩이나 집을 비우는 일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그가 가는 길이라는 것이 결국은 고달픈 나그네의 길입니다.
먹고 쉬고 자는 일이 마땅치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떠나면서 머뭇거림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한번 빠지는 것이 어떨까... 1년에 세 번씩이나 성전을 찾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야...'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법도 하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기에 갈등을 억누르고 성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얼마쯤 가다 보니까... 순례자가 자기뿐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처럼 하던 일을 멈추고 성전을 향하여 출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반가운 것인지... 이런 저런 말을 건네며 그들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서히 눈앞에 높은 산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는 이제 산을 향하여 오르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그의 마음 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지난 시간 동안 나를 도우신 분은 누구시지? 하는 물음입니다.
이제껏 그는 항상 자기의 인생이 남다를 것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더 나은 것도 없고... 특별히 더 모자라거나 부족할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절기를 맞이해도 더 감사한다든지... 특별한 감정을 느낄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특별한 절기가 되어도 별 다른 감회가 없이 아주 덤덤하게 성전을 향하여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마음 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남에게 드러내 보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셨기에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닌가?
문득 그의 마음 속에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가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농사를 짓고... 양을 기르고... 정신 없이 살다가 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그렇게 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일년이 이런 식으로 지나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나를 도우신다는 것... 이런 것들을 다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시온 산을 향하는 그의 마음 속에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껏 열심히 세상을 사느라고 잊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새삼스런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가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오르다가 문득 깨달은 것...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이 살던 인생이 다시금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는 뗄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제 비로소 그에게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었고... 이제껏 그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던 가장 귀중한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떼어놓고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이제껏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놀라운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덕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깊고도 심오한 사랑...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맞닿아 있다는 것! 그 사랑을 방해할 수 있는 세력은 세상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받아들일 때 그는 자신의 삶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다는 것! 그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한 시간 동안 잠시 이곳에 와서 앉아 있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우리가 바쁘게... 분주하게 사느라고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놀랍고 원대하신 하나님의 계획... 이런 것들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심오하게... 오늘 이 사람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세상 살이에 정신 없어서 하나님을 잊고 산 시간이 수 없이 많았지만... 결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단 한 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내가 살아 온 과거와 내가 서 있는 오늘과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내일을 하나님의 사랑의 빛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문득 자기가 깨달은 여호와! 그 분을 가리켜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적어도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고 고백할 때...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산을 오를 때... 그 주변에는 잡다한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이 크게 변질 된 때였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방신들의 제단을 지나치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혼란이 올 법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단을 향하여 오르기를 그치고 적당히 아무 곳에나 머무르면서 이방신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고지식하게 꼭대기까지 올라갈 까닭이 있을까?
이러한 유혹도 있을 법합니다.
그 때에 그는 이렇게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지요.
“나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로다...
나의 삶을 책임지시고 나의 운명을 바꾸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가 어떤 신에게 경배하든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이 세상과 나의 운명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가리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고 고백할 때에 그 속에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곳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얼마나 귀한 곳인가...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말씀이외는 다른 어떤 것도 개입할 틈이 없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그래도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어떤 제품을 살 때... 그 제품이 좋고 나쁜 것을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휴대폰을 하나 산다고 칩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에 들어가는 부속이 어떤 것이고... 그것의 기계적인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설계는 어떻게 되었고... 이런 것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휴대폰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삼성>에서 만든 애니콜이라면... 혹은 그것이 <엘지>에서 만든 싸이언이라면... 우리는 그 속을 뜯어보지 않고도... 그 구조는 잘 모르더라도... 그것이 괜찮고 쓸만한 제품이라는 것은 일단 인정을 하고 들어갑니다.
우리가 <삼성>이나 <엘지>라는 회사를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었다면...' 그것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물론 세상의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전쟁과 갈등의 상처로 얼룩져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점점 더 고갈되어가고 있고... 환경은 더 이상 회복이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의 세상이 아름답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여러 가지 갈등과 상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고... 오늘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으며... 우리의 내일을 희망적인 눈으로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는 이 사람의 여정... 그것은 받아들임의 여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붙잡힌 삶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답고, 희망으로 가득한 참 좋은 곳이라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의 그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전환점이 된 것을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곳을 오를 때마다 일상의 분주한 삶 속에서 잊혀졌던 하나님이 다시금 생각나고... 그 하나님의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이 다시금 느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섭리가 있고... 견고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날마다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된 발걸음이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