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카를로 로벨리 저/쌤랜파커스 출판)」
양자의 기묘함은 '양자 중첩'이라고 불리는 현상에서 볼 수 있다. 양자 중첩이란, 어떤 의미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한 대상이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에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자는 여기나 저기 중, 어느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에 존재한다. 하나의 대상에 여러 위치의 중첩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양자 중첩의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전자가 두 곳에 있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우리는 입자가 어떤 의미에서 한 번에 여러 곳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중첩의 결과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양자 간섭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관찰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실체 상태가 바뀐다. 우리는 파동의 진짜 상태를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파동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전자 뿐이다. 전자의 행동은 파동 변수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변수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 숨겨진 변수를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숨겨진 변수를 볼 수 없는 우리는 관찰을 통해 보이지 않던 파동을 입자화 시킨다. 그렇다면 관찰이란 무엇인가? 관찰자란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마침내 [관계]라는 개념으로 인도한다. 너에게는 실재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양자역학은 관찰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말하고 있다.
관찰이라는 행위가 없다면 파동은 입자로 관측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파동은 우리가 관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파동으로 존재하는 전자는 관찰자라는 나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입자화 된다. 관찰자가 있어야 사물의 존재성이 드러나는데, 관찰자인 나를 관찰하는 대상도 존재해야 내 존재성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를 관찰하는 존재가 있어야 그 대상의 존재가 설명 가능하다. 계속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그 어떤 것도 상호 작용을 벗어나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이든 상호 작용하는 그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한다. 아무것에도 영향을 받지도 주지도 않고, 빛을 방출하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은 존재는 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대상의 속성은 그 속성이 발현될 때의 상호 작용과 분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속성이 발현되는 상대 대상과도 분리할 수 없다. 대상의 속성이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 바로 그것이다. 대상 그 자체는 다른 대상에 대한 상호 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다.
양자론은 물리적 세계를 확정된 속성을 가진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대신 관계의 그물망으로 보는 시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대상은 그물망의 매듭니다. 어떠한 상호 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다.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어떤 것과도 상호 작용을 하지 않을 때, 그 전자에는 물리적 속성이 없다. 위치도 없고 속도도 없게 된다.
속도는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갖는 속성이다. 속도는 두 대상에 관한 개념이다. 무언가를 기준점으로 하지 않는 속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두 존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물리적 변수는 사물이 서로에 대해 나타나는 방식을 기술한다. 상호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변수 값을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찰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두 물리적 대상 사이의 모든 상호 작용이 바로 관찰이 된다.
모든 대상들은 상호 작용에 의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하늘이 가진 색은, 하늘을 올려다 보는 나의 눈에 대해서만 색깔을 갖는다. 하늘의 별은 독립적인 존재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그 별이 속한 은하계를 이루는 상호 작용 네트워크의 한 매듭일 따름이다. 전자의 일생은 공간 속에서 하나의 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과 상호 작용할 때, 한 번은 여기, 또 한 번은 저기, 이렇게 사건으로 나타나는 점선이다.
쭉 이어진 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연결된다. 비약적이고, 불연속적이고, 확률적이고, 상대적이다. 전자는 하나의 실체라기 보다는 패턴이고 질서이다. 우리는 사물을 쪼개고 쪼개서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만든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조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조각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만 있을 뿐이다. 슈뢰딩거는 이런 말을 했다.
"입자를 영구적인 실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순간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건들은 때때로 사슬을 이루어 마치 영구적인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만 그럴 뿐이다."
이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들로 나뉘어 있지 않다. 우리가 편의에 따라 여러 사물로 나누어 놓았을 뿐이다.
산맥은 개별 산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부분이라 느끼는 대로 나눈 것 뿐이다. 아이가 있기에 어머니이고, 먹이가 있기에 포식자이고, 위치는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 의하기에 위치이다. 시간 조차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내가 있기에 너가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용'일 뿐이다.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고 해보자. "나'는 존재하는가?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별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없다. 별을 보는 것은 전체의 한 요소이다. 그것을 내가 관례적으로 [나]라고 부를 뿐인 것이다.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할, 궁극적이거나 신비로운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광대하고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다.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의존 없는 각각은 존재할 수 없다. 단독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합안의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현상의 셰계는 상호 의존성과 우연성의 세계이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성장은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한다. 우리의 무지를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의심에 마음을 열고 더욱 더 잘 배울 수 있다.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확실하기 때문에 성장한다는 말이다.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의심이 있기에 배움이 있다. 인간의 뇌는 이전에 일어난 일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보일거라 예상한다.
뇌는 눈에 보일 것으로 예견되는 '상'을 만든다. 뇌가 예상하는 것과 눈에 도달하는 빛 사이에 불일치가 감지되면 그때만 신경회로가 뇌로 신호를 보낸다. 즉, 관찰된 주위의 이미지가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예상한 것과 불일치하는 정보만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는 실제로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무의식적으로 불일치를 탐지하며, 필요한 경우 그것을 수정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를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 [수정한 것]이다. 뇌에 입력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입력이 아닌 우리의 예상과 상충하는 입력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다.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지도, 개념적 구조를 업데이트하고 개선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세계상을 업데이트 한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지도를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양자론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주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을 버려야 한다.
이 세계가 사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낡은 편견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묘사된다. 모든 개체는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하다. 영원한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인 하나의 매듭에 불과할 뿐이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된다. 사물은 다른 사물속에 비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 넘어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자립적인 실체로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자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는 많은 자연 현상 중에서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그 어떤 현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위대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돌멩이 하나도 광활한 세계이다. 확률과 상호 작용이 요동치는 이글거리는 양자들의 은하계이다. 우리가 돌이라고 부르는 의미들은 상대적인 물리적 사건들의 은하계와 우리 사이의 상호 작용이 불러일으킨 것이다. 작은 물망울 하나에도 온 은하가 담겨있다.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방법은 없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아 역시 네트워크 속의 잔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쉽게 이해 하기에는 말이 좀 어려울 수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어떠한 사물도 관계라는 상호 작용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무엇과도 작용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긴 하지만 존재 의미가 무의미해진다. 파동이 아무리 존재한들 그것을 관찰하는 작용 없이 입자화 되지 않는다. 인생은 하나의 선이 아니라, 확률로 존재하는 점선들의 이어짐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된 그물망 위에서만 존재한다. 존재의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 상대적 속성 값, 즉 언제나 변수가 따르기 때문에 모든 작용은 그 순간에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자연이라는 네트워크 속에 일부로써 존재한다. 절대로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삶이 소중한 것이다. 내가 없으면 나와 관계한 모든 셰계가 일순간에 무너진다. 이 세계는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내가 없다면 세상과 우주는 붕괴되어 버린다.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이미지일 뿐, 그 넘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실체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마라.
우리 모두는 하나의 그물망 위에 놓여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너를 비추고 너는 나를 비춘다. 불확실하기에 성장할 수 있는 인생, 인생은 무상하다. 결코 절대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에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마법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상한 인생이 주는 깨달음, 그리고 내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고 배우며 즐겁게 살아가자.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말했다.
"이 우주는 모두 관계 그물망 속에서 존재한다. 어떤 사물도 의존없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이 증명하는 이 세상의 실체는 정말로 기묘하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실체는 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