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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연단을 이겨내는 믿음의 확실함
장코뱅 추천 4 조회 327 24.11.16 08:32 댓글 3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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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11.16 08:42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다만, 더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분들도 있을까봐 아래에 주석과 기타 댓글을 첨부합니다.

  • 24.11.16 11:13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4.11.16 08:45

    <매튜 헨리 주석>, 믿음의 시련 (베드로 전서 1:6-9)

    "그러므로"라고 한 첫 마디의 말은 앞서 말한 바 성도들의 현재 상태에서의 탁월성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크나큰 기대에 대해서 사도베드로가 말하고 있다. 6절에 있는 말씀은 아래와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간 혹은 잠시 동안 많은 시험으로 인하여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Ⅰ. 사도 베드로는 그 성도들이 큰 역경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그들의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제의하고 있다.

    1. 훌륭한 그리스도인마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바를 항상 소유하고 있다. 크나큰 기쁨은 자체는 용모나 행위에서 나타나지만 특별히 찬양과 감사에서 드러난다.

    2.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들에서 비롯되며 그의 하나님과 또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크나큰 기쁨을 얻는다. 그의 기쁨은 훌륭한 가치가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보화로 인해 이룩된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한 명제는 확실한 것이다.

    3.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인들은

  • 작성자 24.11.16 08:46

    많은 시험으로 인해 크게 근심하게 된다. 각가지의 모든 역경은 시험과 믿음의 시련, 인내 그리고 항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경은 좀처럼 혼자 오지 않으며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찾아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크나큰 근심을 이루게 된다. 보통 인간과 같이 우리들은 개인적 또는 가정적인 문제로 슬픔에 싸이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우리를 자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 그의 교회의 재난과 인간 스스로의 어리석음이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슬기롭고 경건한 마음에 계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9장 2절에 "내게 큰 조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 선량한 사람들은 고뇌와 슬픔이 있으나 얼마 동안이요, 잠깐이다. 그들의 고뇌와 슬픔은 심하나 잠깐 동안이다. 인생의 삶 자체가 잠간이요, 생의 슬픔이 생 자체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어떠한 고뇌의 단축은 그 고뇌의 근심을 약화시킨다.

    5. 크나큰 근심은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량함에 필요하다.

  • 작성자 24.11.16 08:46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게 하시지는 않으나 우리들의 요구와 부족에 비례하여 분별력을 가지시고 행하신다. 이러한 경우에 편리함이나 적합함이라기 보다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므로 그 표현이 "꼭 있어야 한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 요동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3:3)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심을 낳는 이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에만 오는 것이지 아무 때나 임하지 아니하며 필요 이상 오래 머무르지도 아니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고통의 목적과 그 고통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기쁨의 근거를 말하고 있다(7절). 선한 사람들의 고통의 목적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연단의 본성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 시련의 결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다. 아래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해 계획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백성을 단련시키려

  • 작성자 24.11.16 08:48

    함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심이 아니며, 그들의 진보를 위함이지 파멸을 위함이 아니다. 시련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치와 강함을 증거하는 어떤 고통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경험과 탐구이다. 이 시련은 믿음에 임하게 되는데 이는 믿음의 시련이 어떤 다른 은혜보다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고 하면 우리 안에 영적인 선함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만일 이 믿음만이 이룩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믿음이 단련받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믿음의 위로를 받으려 함이며 하나님은 믿음의 영광을 또한 다른 사람들은 믿음의 축복을 얻으려 함이다. 연단된 믿음은 어떤 연단된 금보다 귀하다. 여기에 믿음과 금 곧 믿음의 연단과 금의 연단 두 가지의 비교가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 최고의 가치와 순수성과 실용성 그리고 지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덕성 가운데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 작성자 24.11.16 08:48

    믿음이 영혼을 하늘나라에 인도하며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스런 열매를 맺기까지 믿음은 지속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은 금의 시련보다 더 귀한 것이다. 양자에는 순수함과 찌끼에서의 분리, 그리고 사물 안에 건전함과 양호함의 발견이 있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됨으로 늘어나거나 더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은 당면하는 반대와 고통으로 성취되며 증진되어지고 증가된다. 금은 종국에 가서 "없어질"이란 말씀과 같이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2. 믿음의 연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영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게 되는 존경과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찬양이란 존경의 표현, 혹은 선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오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라고 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명하실 것이다. 영광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채로써 영광과 찬양을 받음으로 하늘에 찬란히 빛난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

  • 작성자 24.11.16 08:49

    (롬 2:10). 만일 연단된 믿음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면 이 사실은 그 믿음이 고난으로 인하여 공격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도 금보다 더 귀한 것이므로 당신에게 믿음을 권유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현세에서의 실용면에서나 마지막 날의 사건으로써 믿음과 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아무리 세상이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역설로 취급한다 하여도 이 사실은 진실로 남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 다시 나타나실 것이며 그가 그렇게 나타나실 때에 성도들도 그와 함께 나타나고 그들의 장엄함은 찬란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빛날 것이다. 연단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존귀와 영광과 찬양은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좀더 찬란하고 영원한 영광을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루신다. "
    Ⅲ. 사도 베드로는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두 가지 설명으로 특별히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이 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탁월을 들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보았으나, 이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본 적이 없다.

  • 작성자 24.11.16 08:49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8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마귀도 실로 그렇게 믿는다), 예수의 능력을 믿고 따른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복종과 의지, 그리고 예수로부터 약속된 선한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도들의 괄목할 만한 신앙의 소산물이다. 결과는 사랑과 기쁨이다. 이 기쁨은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너희가 기뻐하느니라."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나타난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감각은 느낄 수 있고 실제적인 것과 소통이 원활하나, 이성은 보다 높은 차원의 안내자이며 이는 보다 확실한 추론에 의하여 원인의 작용과 사건들의 확실성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한층 멀리 올라간다. 그리고 감각과 이성이 발견해 낼 수 없는 특이한 풍요함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2)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게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성실한 사랑을 가진다

  • 작성자 24.11.16 08:50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존경에서 나타나며, 애정은 그를 갈망, 그와 같이 하기로 결심한 의지, 기쁜 생각과 즐거운 봉사와 고난 등등이 사랑의 본질을 나타냈다.

    (3)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있다. 이 기쁨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최선의 발견은 기쁨을 맛봄으로 이루어진다. 곧 그 기쁨은 하늘에 충만된 영공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대의 기쁨 속에는 충만한 하늘과 장래의 영광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슬픔의 조건을 몰아내고 기쁨에 대해 최선의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사람들이 때로는 어둠 속을 걷게 되나 이는 그들 자신의 실수와 무지, 혹은 두렵고 우울한 기질, 또는 약간의 죄된 행위나 얼마간 그들의 기쁨을 저하시키는 신의 슬픈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주 안에서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구원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합 3:18). 그들은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초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9절). 여기에서 아래 사실을 주목해 보자.

  • 작성자 24.11.16 08:50

    [1] 성도들이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전체 인간에게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구원은 여기에서 "믿음의 결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종국에 가서 믿음은 끝난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도우며 그의 사명을 이루고는 영원히 사라진다.

    [2] 사도 베드로는 현재를 말한다. 곧 지금 여러분들은 실로 "믿음의 결국"(영혼의 구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3] 여기서 사용된 말은 시합장에서 승리자가 심판으로부터 면류관이나 상급을 받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구원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상급이요, 이를 위해 수고하는 면류관이며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 더 가까워지는 목적이다. 이러한 점을 알고 넘어 가자.
    첫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그날 영혼의 구원을 성취하고 있다. 곧 구원이란 이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코 죽음으로 중단될 수 없으며, 영원으로 계속 되어지는 하나의 영구한 사건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거룩함과 경건한 마음, 그들의 사명과 하나님과의 교제, 기업의 획득, 그리고 거룩한 성령의 증거를 얻음으로 천국의 시작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 작성자 24.11.16 08:51

    괴로운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언급되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패하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을 얻고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그들이 보다 못한 행복을 상실했다면 그들은 항시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행복은 밀접히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를 정당하게 구한다면 다른 하나도 얻어야만 한다.

  • 24.11.16 11:24

    @장코뱅 한 편의 설교 같은 긴 설명의 주석 설명을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24.11.16 09:18

    <박윤선 주석>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이 귀절의 헬라 원문(* ) 은, 지금 잠간 필요가 있으면 여러 가지 시험에 있어서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구원)으로 크게 기뻐하도다 라고 개역함이 옳다. 베드로의 의미한 바는, 신자도 하나미의 뜻 안에서 곤란에 빠져 잠간 심령상의 우고를 받는 때가 있으나, 그가 받을 구원 때문에 크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레다너스는, 여기 필요가 있으면 (* )이란 어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고난은 신자들에게 우연히 혹은 넘치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정화와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 잠가 이란 것은 신자에게 근심이 잠시 있다가 지나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환난으로 인한 그리스도 신자의 우고는 언제까지나 계속하니 않는다. 혹시 그 환난이 오래 머물더라도 신자는 근심에서 떠나 희열을 가져야 한며 또 가지게도 된다. 신자가 근심을 과도히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지기 쉽다.

  • 작성자 24.11.16 09:18

    늘 기뻐해야 신앙을 보존시키며 활기 있게 한다.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쳐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라. - 이 귀절은 고난 중에서 기뻐할(6절) 이유를 보여준다. 고난 중에 기뻐하면서 견디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 신자가 고난으로 인한 시험을 당해야 경성하게 되어 그의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서 믿음을 배우게 되며, (2) 그리할 때에 그의 믿음이 연단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며, (3) 그의 신앙 인격에 들어 있던 찌꺼기들(약점들)이 떨어져 나가며, (4) 시련을 잘 통과한 신앙이라야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마25:21)라는 칭찬을 받고, 또 영광과 존귀 (내세의 상급)를 받겠기 때문이다. 연단을 받아 굳어진 금도 마침내는 달라지지만, 고난으로 연단을 받은 신앙은 영원히 존속하여 빛나며 천국의 보배가 된다

  • 작성자 24.11.16 09:19

    그러므로 신자들은 평안한 중에서 잘 믿다가죽겠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평안히 살면서 주님을 믿었던가? 그는 그곳을 떠났다(창12:1-4).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쳐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곧, 그들(이 편지를 받을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땅 위에 계셨던 예수님을 만나 보지는 못했으나, 신앙으로 그를 사항하며 그를 즐거워한다는 의미이다. 요20:29 참조. 버틀러는 말하기를, 보이는 것은 그림자요 보이지 않는 것은 실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관에 감촉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사실을 만족하게 여기고 그를 사랑할 것이다. 역대의 무수한 순교자들이 예수님을 대면해 보지 못하고도 그를 사랑하여 생명까지 바치지 않았던가!

  • 작성자 24.11.16 09:19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여기 이제 란 말(* )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내세와 대조시킨 현세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본서의 독자들의 입장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가리킨다.
    보지 못하는 란 어귀(* )는 현재사로서 계속적으로 보지 못함을 의미한다. 기독신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되 그를 육안으로 보기를 사모하지 않아야 된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20:29).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이란 것은 성령님의 감화로 오는 기쁨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특히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게 하는 역리적인 것이어서, 자연법으로써는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또한 그것을 영광스러운 기쁨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영광스러운 내세의 기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쳐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 작성자 24.11.16 09:20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이 문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고 사랑하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면 그를 위하여 아낄 것이 무었이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8:37)라고 하셨으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마10:28)라고 하셨으니, 영혼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 수 있다.

  • 24.11.16 11:35

    @장코뱅 박목사님의 주석도 괜찮고, 공감이 됩니다.

  • 작성자 24.11.16 09:30

    <호크마 주석>,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Stibbs, Blum).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 )는 '프루레오'(* )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 작성자 24.11.16 09:31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1:7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 본절은 약 1:3과 유사하여 혹자는 베드로가 야고보서를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그러나 야고보와 베드로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에 참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급되는 반면 본문에서는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2)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본문에서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차이점과 같은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히나'(* )로 인도되는 목적절로믿음의 시련을 수식하고 있다(Michaels). 베드로가 시련을 통한 믿음과 금을 비교하여 강조하는 바는 (1) 참된 믿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금이 불로 연단 받듯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연단 받는다는 사실이다.

  • 작성자 24.11.16 09:31

    베드로는 이러한 강조점을 통해 고난당하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igg, Leighton, Michaels).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이 참된 신앙이 온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종말론적 보상 혹은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다리는 온전한 '구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롬 2:7,10; 빌 1:11; 히 2:7,9, Michaels).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받음이라'의 헬라어 '코미조메노이'(* )는 '코미조'(*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구원이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보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현재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주어질 상급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Stibbs, Blum).

  • 작성자 24.11.16 09:32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의 구원'(* ,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 이분법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보기 쉬우나(Dihle)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브리적 이해 속에서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2:25; 4:19,Dautzenberg, Selwyn).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다(Michaels).

  • 24.11.16 11:46

    @장코뱅 호크마 주석은 세밀하고 담백하여 더 애호가 됩니다.

  • 24.11.16 11:45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히 12:10에서 가르쳐 주고 있네요.
    모든 선한 것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럽고 무능하고 불의한 것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도 하시고 강하게 연단하신다는 것을 알면 감사함이 앞설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기쁨으로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존재로 나올 것을 기대하며 소망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숙한 믿음과 합당한 열매가 있는 삶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는 것의 중요성을 일러주셨는데요. 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4.11.16 11:48

    요약과 추가적인 좋은 설명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 24.11.17 16:08

    공감합니다22

  • 24.11.16 11:49

    좋은 포스팅이네요. 연단은 우리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구원을 확고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 24.11.16 16:06

    아멘!!

  • 24.11.17 16:10

    아멘22

  • 24.11.18 16:22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묵상을 읽고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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