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 너 이리 앞으로 나와 !!! " 눈이 번쩍하게 귀싸대기를 시작으로 한참을 두드려 맞는다. 방어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속수무책일 따름으로 방법은 없는 것이 아닌가. 난생 처음 이렇게 맞아보기는 처음이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인정사정 없이 무자비하게 팬단말인가.주위는 쥐 죽은듯이 침묵과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어느 한 사람 나서서 말릴 형편이 아니다. 1962년도 가을 어느 날이다. 동북고 3학년 세개반의 학생 150여명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다음 날 아침이었을 게다. 몇몇 학생녀석들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간 사건이 발단이다. 6.25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황폐화되어 하루 세끼 굶지 않는 것이 다행인 하루하루이다. 경제 사회 교육 정치등 국가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이 안되는 불안정한 시대이다. 어린 나이에도 집안 생계를 위하노라 제 때에 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한 친구들이 제법 있는 상황이다. 너댓살 나이가 많은 형아닌 동기들인 셈이다. 고3이면 스무살을 넘긴 친구들이 끓어오르는 육모방망이를 주체키도 힘들었을 게다. 교복을 뒤집어 입거나 형이나 아버지의 잠바를 끙쳐 가지고 오기도 했으리라. 선생님 몰래 밤 나들이를 위하여. 몇 녀석들이 담장을 넘는다. 휘영청 밝은 달은 신호삼아 이리저리 화방(花房)을 찾아 헤맨다. 짙은 화장빨에 이끌려 씰룩거리는 엉덩이 뒤를 따라 두평도 안된 골방으로 들어선다. 그녀가 꽃같은 화녀(花女)인지 곧 화를 불러오는 화녀(禍女)인지 화냥년인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지 않은가. 급할 때는 어디서든 바지가랭이를 내려야 하는 남정네만의 유전자가 아니더냐. 화장품 담배 술 밤꽃의 비릿한 냄새까지 뒤섞여 쩔어있는 방안이다. 뻘건 조명이 어두컴컴한 방안을 밝히고 있다. 주체키 힘든 박달나무 보다 더 뻗뻗한 뿌리를 옥문(玉門)아닌 하발통에 박아넣지만 일분도 채 안되어 흰거품을 토해낸다. 거푸 너댓번을 쏟아내고 일어서니 다리는 후들거리고 하늘에는 별들이 오락가락이다. 가득하게 가두워 두었던 녀석들 댐의 물을 빼고 나니 몸은 가벼우나 밤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자고 있는 친구들 틈으로 파고들어 시침이를 떼고 있다. 이미 선생님이 인원 파악을 끝낸 상태를 녀석들만 모르고 있다. 주임선생님인 3반 담임 SK LIM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진 상황이다. "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몰래 숙소 담장을 넘은 녀석들이 몇명이 있는데 도저히 용서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 " " 선생님 모처럼 수학여행을 왔으니 조금은 자유시간을 주시면 ~~~" 겁없이 한 학생의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참았던 분풀이 대상을 찾은 것이다. 평소에는 말이 별로없이 그런대로 학교생활에 충실한 JN CHOI라는 모법생이 아닌가. 요즘 내 자식이 그런 상황을 당한다면 어느 부모가 가만히 있겠는가.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학생의 인권과 의견을 무시한 무자비한 폭행 사건일 터이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으면 아니 된다는 무언의 교훈이 사회적 저변에 깔려 있을 세월이었다. 감히 항변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벌을 받은 것이 아닐까. 부모님에게도 말 한마디도 못 하고 혼자 감내하는 방법이 유일한 것이었다. 80을 바라보는 지금도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다. 흑백영상 필림으로 가끔 쓴 웃음을 가슴으로 삼키곤 한다. 졸업 3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때 그 선생님과 화학선생님 세계사선생님을 모시고 남이섬으로 야유회를 가던 그날이다. 동기회장이던 그 때 그 학생이 관광버스 속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수학여행에서의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맞은 심정을 토로한다. 너무나 섭섭했고 그 당시는 힘들었으나 선생님이 보고싶고 그리웠다고 말이다. 며칠 뒤에 약국으로 불현듯 찾아오셔서 사과를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당혹스럽기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고맙기도 하던 그 순간이 바로 어제와 같다. 55년 동안을 가슴앓이를 하며 가슴 속 깊은 곳에 고이 잠재우던 추억이다. 오늘 2018년 12월 8일에야 활짝 피운 날이 아닌가. 고교 9회 동기생이며 산행과 둘레길을 어디든지 함께한 위짜츠 버쁘바 엉카페 대바기 까토나 다섯지기가 신경주행 KTX에 오른 것이다. 위짜츠는 자칭 네살이 많은 형넘이라고 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주관은 뚜렷하며 흔들림이 없는 보수의 뿌리가 깊다. 삶에 낙천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삶을 사는 개병대 사나이이다. 엉카페는 K대를 마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애교심이 강한 녀석이다. 언제나 모임에서 화제의 씨앗을 뿌리고 토론의 불씨를 살리는 사회 정의와 정치에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는 팽론가이다. 15,000 이상 걸음이 넘으면 힘들다며 엉까고 있는 노객이 아닌가. 버쁘바는 법대 출신으로 딱 한번 고시에 도전하곤 접어버린 현명한 판단의 소유자이다. 상대방 이야기에 주로 경청을 하며 객관적인 모습을 가진 녀석이다. 대바기는 고교 밴드부의 출신으로 음악을 전공한 플루웃 연주자이다. 착하고 선한 성품으로 남에게 무엇이든 주려고 하는 베푸는 노신사이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경주와 호미곶을 찾았다. 수학여행을 동행한 그 현장의 증인이자 산행의 동반자인 백년지기인 다섯명의 노객들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UNESCO에 등재한 도시 경상북도 경주의 옛 정취를 만끽하리라. 불국사의 다보탑 석가탑, 토함산의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 대릉원의 천마총, 월정사의 교각, 양동마을, 교촌마을 말만 들어도 노객의 가슴은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얼마나 변했을까. 세월이 흐르면 인간처럼 백발에다 쭈글쭈글 늙고 병들고 낡지는 않았을까. 꿈 많던 10대의 까까머리 학생의 눈에 각인되어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이기를 기원해 본다. 경주시티투어버스는 오전에만 가능하기에 콜밴으로 예약을 한 것이다. 안압지를 야경(夜景)을 보려고 저녁으로 늦추었다. 우선 토함산 석굴암으로 첫 발을 향한다. 토함산은 예상외로 높이가 745m로 산정상의 동쪽에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을 시작으로 774년 신라 혜공왕 때 완공을 했다. 설화에는 김대성이 환생하여 전생의부모를 위하여는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창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로 여러 차레에 걸쳐서 개보수(改補修)를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석굴암 본존불상이 탄생하게 된다. 누수문제 불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공법이 추가 된 모습이다. 55년 전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면 지금의 석굴암은 관광 상품화한 인공미가 들어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실의 중앙에 서서 동해로 향하여 안좌한 석굴암 본존불상은 그 조각의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문화유산이다. 반쯤 열린 눈, 온화한 눈썹, 방금이라도 설법할 듯한 자애로운 입, 생명력을 간직한 깨달음의 모습으로 인자하면서도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경주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론 석굴암이 백미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포항 호미곶의 해돋이는 하늘에 짙은 구름에 휩싸여 기대를 저버린 꼴이다. 바다물 위와 호미곶 해돋이 광장 곳곳에 세워진 손은 갈등과 분열을 버리고 함께 상생하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다. 바닷가 둘레길을 걸으며 하얀 물거품을 뿌리며 일렁이는 파도소리는 노객들에게는 건강과 희망의 나팔소리가 아닐까.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저 푸른 바다가 아픔과 저림으로 얼룩진 삶의 무게를 말끔이 씻겨주기를 기원해 본다. 졸업 100주년이 되는 날에는 백두산 천지를 온통 알콜로 발효시켜 너도 나도 한 잔씩을 마시며 통일가를 불러봄은 어떠하리오까.
2018년 12월 18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