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에서 선정릉/정동윤
봄이 무르익어가는 사월 중순의
하늘은 푸르고 햇살이 따사로운 시절,
서울 속의 강남, 강남 속의 삼성동
그 중심의 사찰인 봉은사에 모였다.
서울 곳곳에서 봄꽃처럼 평생을
노랗게 붉게 하얗게 분홍으로
소신껏 꽃피운 예술가들이
9 호선 봉은사역 1 번 출구에서 만나
곧바로 일주문을 통과하고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봉은사는 수도산 아래에 자리 잡은 절로
신라시대 견성사로 시작하여
조선 성종 때 정현왕비가 선릉의 능침사로
지정하면서 번창하였고
명종 때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보우 대사를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 중흥의 중심 가람이 되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곳의 승과시를
통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사천왕문 지나 2층 누각 법왕루 통과하면
절의 중심인 대웅전과 삼층 석탑을
마주하는데 마당엔 각양각색의 연등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 오신 날이 한 달 가량 남았으니
곳곳에 연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뒤를 오른쪽으로 돌아 지장전, 영산전,
북극보전을 지나니 홍매는 지고 벚꽃마저
봄을 떠나고 있었다
그대신 철쭉과 산사나무 산딸나무 팥배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며 우릴 반겼다
겨우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손님 아니던가.
해마다 봄꽃을 만나지만 볼 때마다
처음 만난 연인처럼 반가움이 겹치는
봄꽃 치매가 올해도 어김없이 도진 듯하다
♥
꽃 치매 환자/정동윤
해마다
봄날이 오면 치매가 도진다
삼성동 봉은사 홍매를 볼 때도
창덕궁 낙선재 백매를 만날 때도
첫날밤 신부 보듯
정겨워하며
떠날 줄 모르고 꽃자리 맴돈다
그뿐인가
남산 벚꽃이
데모하듯 한꺼번에 피어날 때도
서대문 안산 자락길
황매화가 봇물 터지듯 넘칠 때도
인기 연예인 쫓아다니듯
졸졸 따라다니며 열광한다
봄이 올 때마다
작년에, 십 년 전에도 만난
그 꽃들 보면서
서로 사귀기로 한 첫날처럼
보고 또 보고
사진 찍어 다시 보며
벙실벙실 꽃 치매 환자가 된다.
♥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죽기 사흘 전에
'판전'의 글을 남긴 현판을
묵묵히 바라보고 그 옆에 세워 놓은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도 확인하였다
추사는 1852 년 북청 유배지에서 돌아와
과천에 과지초당을 짓고 봉은사로 오가면서
서예와 신앙으로 한가하게 보내다가
1856.10.10 71세로 별세하였다
봉은사 판전은 비노자나불을 모시고 있는데
1855년 남호 영기 스님이 판각한 화엄경
수소연의초 81권을 안치하기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현재 3,438 점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는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판각한 화엄경판이 완성되자
경판전을 짓고 그 현판 글씨를 추사 김정희
에게 맡겼으며 추사는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9 월 말에 '판전' 두 글씨를 완성하고
그 옆에 '칠십일과병중작' 이라고
낙관 하였는데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 라는 뜻으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봉은사 중심에서 벗어나
호젓한 명상길로 올라섰다.
부드러운 흙길이 카스테라처럼 부드럽고
촉촉이 젖어서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신성한 종교 시설에서
맨발 걷기는 경망스러워 보이기에
조용히 충동을 억제하였다
몇몇 사람들도 맨발로 걷기 좋겠다는
생각을 비추기도 하였다
봉은사 명상길 쉼터에 앉아 임 시인이
챙겨온 간식를 나누며 잠시 환담을 나누다
사찰에 온김에 조지훈의 '승무' 를 소환하여
함께 공유하였고 정다운 시인의 시 낭송을
경청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갈증 달래줄 생수를
챙기며 내려오다가 이미 져버린 매화당 앞
매화를 보고는 일주문을 빠져나왔다.
삼성중앙역 방향으로 선정릉까지
큰 길과 골목을 돌아
봄볕 가득 받으며 한가하게 걸었다
65 세를 기준으로 무료와 유료 입장을
분리하여 입장하였다
선릉을 우선으로 왕릉 탐방길로 나서는데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목련은
보이지 않고 철쭉 영산홍 산딸나무 그리고
냉이 민들레 송화가 봄을 채우고 있었다
역사관에 옆의 앵도나무 하얀꽃은
멀리 떠나버렸고 많은 인원으로 불편하여
선정릉 역사관은 스쳐 지나갔다
성종과 중종의 가계도를 기억하며
500 년 넘긴 우람한 은행나무 아래서
신령스러운 생애에 고개 숙였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은 한 홍살문을
지나 따로 떨어진 동원이강릉인데
왕과 왕비가 아래 위로 있으면 동원상하릉,
바로 옆에 나란히 있으면 쌍릉, 합장하면
합장릉, 혼자 있으면 단릉이라 한다
그의 아들인 중종은 홀로 잠들어 있었다
중종의 첫째 부인인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후 일주일 만에 폐비가 되었고
계비인 장경왕후도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기에
제2 계비인 문정왕후가 인종을 키웠고,
인종은 왕위에 오른지 9 달 만에 승하하여
어린 명종이 취임하였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조선의 정치를 흔들어놓기도 하였다
그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 못하고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에 잠들었으며
인근에 그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이 있다
선릉과 정릉 사이의 쉼터에서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이기철'을
함께 공유하였고
박목월의 작시 가곡 '4월의 노래'도 들으며
봄을 만끽하였지만 식당 예약에 따른 시간과
남은 거리를 감안하여 모두 일어섰다
아주 오래된 소나무와 오리나무
상수리나무의 군락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성종과 정현왕비 그리고 홀로 잠든 중종의
왕릉을 멀찍이 둘러보고 잘 조성된
산책길로 편안하게 나왔다.
왕릉 정문 앞의 음식점에 자리 잡았을 땐
오후 5시 반을 넘겼고 걸음은 만 보를 넘겼다
만보의 행복, 우린 걷는 시간보다 밥 먹고
막걸리 한 잔에 나누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다 2호선 선릉역으로 향하였다.
첫댓글 정동윤 선생님!
'봉원사에서 선정릉'명작품 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