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서/ 주덕수
엄혹嚴酷한 시절이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체제의 독재 시절이었다. 1979년 10월, ‘데모’라는 글자의 첫째 자인 ‘데’자도 입에 올리지 못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부마민주항재의 발원지인 부산대학교 사무국 총무과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령 중이라 대학생들의 현실비판이나 투쟁은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의 12개 단과대학에는 학생 또래의 젊은 사복 경찰이 한 명씩 상주하면서 매일매일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본부의 학생과에도 교육연구관 아래 대여섯 명의 교육연구사가 파견되어 매서운 눈으로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부장이라 호칭되는 경찰 책임자가 학생들의 동태를 취합하여 부산시경찰국 정보과와 동래경찰서에 보고하였다. 특히 시위가담이나 불법유인물 배포 등의 전력이 있으면 관리대상이 되어 관계기관의 회유와 사찰이 병행되었다. 무릇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현직 대통령도 패러디하고 시국時局에 관하여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를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겠지만 시계를 41년만 거꾸로 되돌려 그날의 함성과 일련의 일들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항쟁 발발 하루 전날인 10월 15일이었다. 교내 서클파크에서 ‘민주선언문’ 유인물이 발견되었고, 상과대학 학생들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소리가 학교에 파다하게 돌았다. 다음 날은 직원들이 농촌 일손돕기로 인근양산지역으로 벼 베기 노력지원을 가게 되어 있는 날이다. 그래서 중식용 도시락을 주문해야 하는데 사태의 추이를 예측할 수 없어 망설이고 있다가 퇴근 무렵에야 못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일단 주문은 하였다. 10월 16일 출근을 하니 전날 우려했던 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장 나에게는 노력지원을 약속한 장소로 가서 지원불가 통보부터 하고 오란다. 업무용 승용차를 타고 현장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공교롭게도 옛날에 양산군청에서 병무를 담당했던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여기 웬일이냐며 반갑게 인사한다.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입에도 담을 수 없어 학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찮아 노력지원이 불가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인부들을 모두 동원해두었는데 큰일 났다면서 다 올 수 없으면 몇 분이라도 지원해달라고 하였으나 매정하게 거절하고 곧장 학교로 내달렸다. 학교 신 정문에 도착하니 벌써 경찰들이 정문에 집결해 있었다. 교내로 들어서니 시계탑 앞에 안테나를 길게 세운 승용차 한 대가 가고 있는데, 차량번호는 1703호였으며 뒷좌석 선반에 군인 모자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차가 바로 동래경찰서장 차량이었다. 이미 학생들의 행동이 시작되어 관할 경찰서장이 현장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재빨리 학생들의 집결상태를 살펴보았다. 도서관 (현 건설관 및 과학도서분관) 앞 수목이 식재된 잔디밭과 도로 및 계단에까지 몇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으며 계속해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총무과 사무실은 본관(현 인문관) 2층으로 도서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복도에서 바라보면 학생들의 움직임을 모두 다 볼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상과대학에서 출발한 시위 참가 학생들이 합류하니 장소가 너무 복잡해졌다. 그때 학생 중 누군가가 “가자, 운동장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니까 선두가 운동장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유사시 정문 출입문 통제 담당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문수위실로 급하게 달려갔다. 이미 정문 앞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많은 경찰병력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대운동장에 무질서하게 모였던 학생들이 ‘아침이슬’ 등의 노래를 부르며 드디어 정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경찰도 모두 일어서서 전열戰列을 정비하였다. 시계탑주위에 집결한 학생들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정문으로 다가왔다. 이때 어디서 정문 출입문을 닫으라는 전화가 와서 출입문 3개를 급하게 닫게 하였더니 채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문을 열라고 한다. 정문 출입문을 경계로 하여 학생들이 한바탕 밀고 나오면 경찰이 후진을 하고 또 경찰이 전진하면 학생들이 시계탑 앞으로 밀리기를 몇 번 거듭하면서 일진일퇴가 반복되었다. 진압경찰이 정문을 넘어 학교 안으로 들어서면 학생들은 신성한 학원에 경찰이 들어왔다고 고함과 야유를 퍼붓는다. 그러면 경찰이 할 수 없이 정문 밖으로 물러서곤 하였다. 여학생들은 보도블록을 부서뜨려서 돌멩이로 만들었고 남학생들은 계속 경찰을 향해 던졌다. 돌멩이를 맞으며 참고 견디던 경찰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드디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계속 발사되는 최루탄에 나도 눈이 따가워 정문에 머물 수가 없어 사무실로 쫓겨 올라왔고, 학생들도 본관 앞까지 쫓겨 올라왔다. 한편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기 직전에 박기채 총장님이 보직 교수 한 사람 없이 비서만 대동하고 정문 부근에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시위 현장만 지켜보다가 역시 최루가스 때문에 더 머물지 못하고 이내 곧 자리를 떴다. 학생들을 공격하던 경찰이 격해졌다. 시계탑 부근에서 교내로 진입하는 것을 중단하고 학교 정문 밖으로 물러나야 하는데, 계속 진출하여 본관 앞까지 학생들을 쫓아 올라왔다. 그러자 데모에 가담하지 않은 학생들도 경찰이 신성한 학원에 진입했다고 웅성거리면서 울분을 토하였다. 본관 부근에서는 경찰의 잘못 발사된 최루탄에 인문대학 강의실의 창문 유리가 박살나고 말았다. 교실에서 수업 중이던 학생들까지도 교실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경찰을 향하여 소리치고 욕을 하는 등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나는 이날 시위 진압과정에서 경찰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그 이유는 경찰이 시계탑 부근에서 정문 밖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본관 앞까지 과잉 진출한 것이 학생들의 울분을 키워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후 흩어졌던 학생들이 다시 대운동장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트랙을 도는데 한 바퀴 돌고나면 거짓말처럼 몇백 명씩 늘어나기를 거듭하여 순식간에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이때 각 대학에 배치된 경찰 여러 명도 학생들과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돌았다. 이윽고 학생들이 “가자 남포동으로”라고 외치면서 선두가 구 사대부고(현 항공관) 쪽으로 진행하였다. 대학과 고등학교의 경계선인 블록담장을 넘을 수가 없자 체육관(현 NC백화점) 운동장에 세워진 농구대를 끌고 와서 담벼락을 향해 밀어붙이니 금방 무너져 버린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은 아무런 걸림 없이 순식간에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상황이 돌변하니 정문 앞에서 학생의 교외 진출을 막고 있던 경찰의 저지선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정문을 빠져나간 학생들은 18번과 19번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부산시청과 광복동 일대에서 시위를 하게 되었다. 그날 많은 시민들이 가담하였으며, 다음날에는 동아대학교와 고신대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가 학생 위주의 시위가 아닌 시민이 더 많이 가담한 시위로 변했다. 이는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 등장 이후 7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부산시민들의 분노이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정부투쟁이었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출근하니 나더러 비행기를 타고 문교부(현 교육부)에 출장을 갔다 오란다. 그때 당시 새까만 졸병인 행정서기가 비행기로 출장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라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다 하고 내심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총장의 사표였다는 것은 며칠 뒤에 알았다. 당시 부산・서울간 비행기요금이 편도에 11,330원이었는데 공무원 9년차인 나의 봉급 총액이 163,000원으로 갑근세, 기여금, 의무보험금 등의 기본공제를 하고나면 실수령액은 14만 원 정도였다. 학교는 그날(10월 17일)부터 11월 22일까지 휴교에 들어갔다. 서울 출장을 다녀온 다음 날 정부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부산시 전역에 10월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비상계엄의 선포에 따라 학교에는 포항의 해병부대가 대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주둔하였다. 이때부터 교직원 외에는 일체 교내출입이 불가하였기 때문에 나는 일상 업무를 그만두고 정문 수위실에서 해병 대위와 같이 출입자 중 교수 및 직원 여부를 확인해주는 일을 하였다. 당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과 대학생들도 학생이기 때문에 교내 출입이 불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실험 중인 자료를 분석 정리해야 하고, 배양 중인 생명체가 모두 죽게 된다고 학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끝내 출입이 거절당하는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때의 안타까운 심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0월 18일에는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가 경남의 마산시(현 창원시) 지역으로 확산되어 경남대학교와 마산대학 학생들과 일부 마산시민들도 가담하는 부산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정부는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같은 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학교를 방문하여 총장실에서 주둔 부대장을 만나 파견군인의 수를 물어본 후 금일봉을 하사하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41년 전인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로 비롯된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와 함께 민주주의를 향한 한줄기 외침은 부산시민들이 합세하였고 인근 마산지역으로 확산되어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10・26사태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대에서 시위가 발생한 열흘 후에 10・26사태가 발발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를 이끈 부산대학교의 자랑스러운 민주화 정신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전통과 자부심이다. 민주화, 민주화 모두 쉽게 말들 하지만 그리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민주화는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광복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으나 정착되기까지는 온갖 시련과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많은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학생, 시민들이 싸우고 싸워서 쟁취한 것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서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구제해 주는 것을 검토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이는 국가가 저지른 가해행위이므로 형사보상뿐만 아니라 민사 손해배상(정신적 피해)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지금까지 홀대받아 우리나라 4대 민주화 항쟁 중 유일하게 국가기념일에 들지 못하였다. 정부는 지난해 9월 17일 부마민주항쟁 발발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만시지탄이지만 덕분에 뜻깊은 40주년 기념식을 정부 주관행사로 최초로 치르게 되었으며 부마민주항쟁의 위상을 되찾았다. 한때 부산대학교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느낀다. 2016년 공무원연금공단 부산지부에서 퇴직공무원 자서전쓰기 강좌가 5개월간 진행되었다. 이 강좌 결과물로 <내가 나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퇴직공무원 자서전 모음집’을 발간하였다. 나는 이 책에 ‘추억의 장소 셋’이란 자전적 에세이를 실었는데 그중 마지막 3번째 장소로 ‘장전동 부산대학교’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전후의 상황 기술이었다. 그 글이 계기가 되어 2018년 8월 13일 국무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의 관계자와 관련 증언을 하게 되었다. 이 증언 내용을 2019년 부산대학교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10・16 부마민주항쟁 부산대학교 증언집>을 발행하면서 나의 증언 내용도 게재를 하였으면 하여 동의를 해주었다.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이 되는 201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는 그날의 정신을 계승하는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다. 나는 부산대 학생, 교수, 행정직원 등 30명의 목소리를 담은 <마흔 시월, 민주주의를 노래하다(10・16 부마민주항쟁 부산대학교 증언집)> 발간 출판기념회에 증언자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운동장에서 진행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및 국가기념일 지정 경축 KBS음악회’도 참석하였다. 이 음악회는 부산대와 경남대에서 동시에 펼쳐졌고, TV로 이원 생중계되었다. ‘기록을 남기는 민족은 위대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 민족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조선왕조실록》을 남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인적 기록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체제하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시위의 현장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소정의 임무를 수행한 것만으로도 남들의 관심의 대상인데 그것을 글로 쓰고 또 증언으로도 남기고 또한 그 증언이 책으로 발간되어 나름대로 보람된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하다. 이상이 내가 부마민주항쟁 시 직접 겪고 바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기억을 되살려 기술한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좀 더 정확한 기술을 위하여 그때 당시의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만남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돌아가시어 뜻을 이룰 수가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 41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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