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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유대인
유대인을 가슴에 담은 거장(巨匠),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소련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현대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20세기 음악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로 낭만파의 작품을 썼으며, 특히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작품 중 특히 왈츠 음악이 여러 편의 영화음악과 광고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 안나 카레리나. 아이즈 외이드 샷 등)
※ 쇼스타코비치 왈츠
https://www.youtube.com/watch?v=IOK8Jb76ibc
소비에트 반유대주의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 유대인이 아닌 위대한 작곡가는 유대인과 유대 문화를 옹호했습니다.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유주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개방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 편견과 증오, 특히 러시아 사회에 스며든 반유대주의를 그는 혐오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관용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부모님은 반유대주의를 부끄러운 생각으로 여겼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특별한 양육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를 접했습니. 그때도 저는 반유대주의적인 어조를 용납하지 않았고 당시 유행하던 반유대주의 농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가치 없는 허구에 대해 대항했습니다. 나중에는 친한 친구라도 반유대주의 성향이 보이면 단절했습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솔로몬 볼코프 편집:(1984)에서 인용).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에게 연주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음악적 신동으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어린 시절 쇼스타코비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이 음악적 천재가 진정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작곡이었습니다.
1924~1925년에 그는 아직 십 대였을 때 처음으로 본격적인 교향곡을 작곡했고, 그의 강렬한 작품은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음악적 성공에 매료된 쇼스타코비치는 코믹 오페라를 비롯한 다른 작품도 작곡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예술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웠고, 쇼스타코비치의 길고 성공적인 음악 경력이 기대되었습ㅂ니다.
쇼스타코비치는 20대 초반에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 지방의 맥베스 부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간통하고 살인을 저지른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오페라는 아방가르드한 음악이 특징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부부가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는 등 사회적 논평도 담고 있었습니다.
‘므첸스크 지방의 맥베스 부인’은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며 수년간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던 1936년 1월 28일, 소련의 독재자 조셉 스탈린이 소련 정치국원들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러 왔습니다. 2년 전부터 스탈린은 정적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카네기홀 웹사이트에는 "정치인과 군사 지도자, 작가, 영화 제작자, 배우, 음악가 등 수많은 사람이 터무니없는 혐의로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 굴욕적인 공개 재판과 처형을 당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시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들도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 네트워크인 굴라그 시스템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100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친척과 친구 중 상당수가 숙청에 휘말려 체포, 투옥, 살해당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에서 "소련의 권력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처럼 스탈린도 재즈를 포함한 지나치게 서구적으로 간주되는 음악을 타락했다는 이유로 금지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도착한 그날 저녁 볼쇼이 극장에 있었고, 오페라가 끝나기 전에 스탈린과 그의 하수인들이 화를 내며 떠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쇼스타코비치가 인사 할 때 목격자들은 그의 얼굴이 "이불처럼 하얗고"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했습니다. 며칠 후, 정부 기관지 프라브다는 이 오페라에 대한 익명의 논평을 실었고, 많은 독자는 스탈린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음악 대신 혼란"이라는 제목의 이 비평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 작품은 아주 안 좋게 끝날 수 있는 영리한 독창성의 게임이다.“
음악적 이중 의미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참담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친구들은 그의 음악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한 기사를 쓰고 그를 만나기를 거부하며 그를 배척했습니다. 소련 작곡가 연합은 그의 오페라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자존감과 음악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중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는 대신 네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라고 썼습니다. 이 곡은 도전적인 곡이었지만, 스탈린과 정치국의 분노를 불러일으킬까, 봐 수십 년 동안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레닌그라드 심포니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당국을 만족시키는 음악의 작곡으로 복귀했습니다. 결국 그는 유명한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피아노과 학과장을 맡게 됩니다. 훗날 그는 1941년 6월 22일 아침 독일이 소련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의 공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유익하고 건설적인 존재가 무례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며칠 만에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교향곡인 일곱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가장자리에 도착해 도시를 포위하고 나서도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까지 이 교향곡을 작업했습니다. 레닌그라드 포위 공격은 872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41년 11월까지 나치군은 약 300만 명이 거주하던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성인 인구 전체가 동원되어 도시 주변에 대전차 방벽을 구축하여 나치군의 도시 진입을 막았습니다. 시민들은 연료와 식량이 금세 바닥났습니다. 1942년에만 약 65만 명의 레닌그라드 민간인이 굶주림과 질병, 추위로 사망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의 도시 공격 초기에 낮에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밤에는 소방관으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비인간적인 강도로 일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치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작곡하던 웅장한 새 교향곡은 그가 사랑하는 레닌그라드에 바치는 찬가였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2악장을 완성한 후 라디오로 진행 상황을 방송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우리 도시의 삶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이 말을 전합니다. 우리의 예술이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지켜낼 것입니다."
역사학자 존 바하의 설명에 따르면, 나치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한창이던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여러 음악가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해 (7번 교향곡의)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가 피아노 악보를 두드리는 동안 사이렌 소리가 또 다른 공습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대피소로 보낸 그는 루프트바페의 폭격과 대공포에 맞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9월 말 적의 군대가 도시 주변의 전선을 안정시킬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악장 중 3악장을 완성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치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대피했고, 1941년 말 소련의 임시 수도인 쿠이비셰프에서 교향곡을 완성했습니다. 이 곡은 풀 오케스트라와 하프, 피아노, 드럼과 하프가 추가되는 대작입니다. 1악장만 해도 거의 한 시간 반에 걸쳐 진행되며, 교향곡으로서는 영원에 가까운 긴 대작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에 헌정했습니다. 1942년 초 스켈레톤 오케스트라와 함께 처음 연주된 이 곡은 곧바로 이 도시의 상징이 되어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나치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피아노 트리오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다음 작품은 나치의 잔학 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소련 신문은 트레블링카와 마즈다넥 수용소의 나치 경비병들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주변에서 춤을 추다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1943년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나치의 만행에서 영감을 받아 친밀한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은 그가 작곡한 두 번째 피아노 연주곡이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2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물을 통한 웃음"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 음악의 복잡함과 고유의 소리를 좋아했고, 나이가 들면서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커졌기 때문에 유대인 주제를 음악에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작곡가로서 성숙해지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 음악 형식이 주는 복잡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주제가 한 곡에서 슬픔과 기쁨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음악적 감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유대 민속 음악이 저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이 음악은 지칠 줄 모르고 다면적이며 비극적이면서도 행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의 항상 눈물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이러한 유대 민속 음악의 특성은 제가 생각하는 음악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음악에는 항상 두 가지 층위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고통받았기 때문에 절망을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모든 민속 음악이 다 아름답지만, 유대인 민속 음악은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련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하고 특히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 음악의 장점에만 매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은 순전히 음악적인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반유대주의를 한 개인의 전반적인 도덕성 결여의 징후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나는 종종 유대인에 대한 태도로 사람을 테스트합니다. 우리 시대에 품위를 지키는 사람은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지만, 저는 적어도 30년 동안 이 점을 주장해야 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동료 러시아인들이 반유대주의적 비방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유대인을 주제로 한 음악을 작곡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쟁 후
소련에서 반유대인 편견은 결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된 후 새로운 차원으로 치솟았습니다. 소련의 공식 선전은 서방 성향의 지식인들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악마화를 키워갔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에 대한 태도는 크게 바뀌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형제애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이 밝혀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은 유럽에서 가장 핍박받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중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반격하고 싶었습니다. "유대인은 저에게 상징이 되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무방비 상태가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죠. 전쟁이 끝난 후 저는 그 느낌을 음악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좋지 않은 시기였죠. 사실 그들에게는 항상 안 좋은 시기였죠."
1948년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한번 친서방 성향으로 비난받으며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같은 해 소련의 이디시어 연극 스타 솔로몬 미코엘스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미코엘스는 쇼스타코비치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인 작곡가 미치슬라프 바인베르크의 장인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예술적 자유 탄압이 특히 유대인을 가혹하게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헌책방에서 발견한 이디시어 책 '유대인 민요'를 바탕으로 항의의 의미로 유대인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Y. M. 소콜로프가 편집한 '유대인 민요'라는 책에 기초해 곡을 썼습니다.
"죽은 아이를 위한 애가"와 "비애의 노래"부터 "행복"과 "어린 소녀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 감정의 영역을 아우르는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어 대신 이디시어를 노래에 사용한 것조차 당시에는 도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들이 공개적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작곡했습니다. 1955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에야 마침내 이 곡들이 연주되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유대인 민요
현악 사중주 8번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사후 소련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지만, 공산당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검열해야 했던 좌절의 천재였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소련 선전 영화의 악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60년 소련에서 상대적으로 예술적 자유가 보장되던 시기, 니키타 흐루쇼프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소련 작곡가 연맹 사무총장직을 제안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마침내 러시아 음악을 자유화하고 발전시킬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고민한 끝에 쇼스타코비치는 그 직책을 수락하고 당에 입당했습니다. 훗날 그의 아들 막심은 이 결정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고, 아내 마가리타에게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선언하라는 협박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쇼스타코비치는 또 다른 영화 작업을 하던 중 드레스덴을 방문했습니다. 이 방문을 계기로 쇼스타코비치는 홀로코스트를 비판하는 또 다른 주요 작곡을 시작하게 됩니다. 독일에서 작곡한 현악 사중주 8번은 쇼스타코비치의 이전 전쟁 논평에서 주제를 불러일으키며, 음악 평론가 에릭 브롬버거가 "전투 소리 위로 비명을 지른다"라고 묘사한 2악장에서 그가 "유대인 주제"라고 부른 테마를 재연합니다.
현악 사중주 8번의 다섯 악장은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함께 연주됩니다. 이 곡은 또한 매우 개인적인 곡이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의 첫 악장에 자신의 이니셜을 넣었습니다: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위한 DSCH.(이 곡은 E-플랫을 "Es"로, B를 "H"로 표기하는 독일 악보를 사용하여 작곡되었습니다.)
바비야르
바비야르는 키예프 외곽에 있는 계곡의 이름입니다.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나치군은 열성적인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바비야르에서 10만 명(대부분 유대인)을 학살하고 시체를 계곡에 버렸습니다. 1941년 9월 29~30일 이틀 동안에만 약 3만 4천 명의 유대인이 이곳에서 살해당했습니다.
20년 후인 1961년, 소련 당국은 "해빙"으로 알려진 짧은 기간 동안 예술적 자유를 조금씩 확대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소련의 젊은 시인 예브게니 예프투셴코는 그 시기에 바비야르를 방문하여 그곳의 심오한 악과 이 잔학 행위를 무시한 소련 국민과 정부의 부끄러운 침묵에 대한 강렬한 시를 썼습니다. 예프투셴코의 시 '바비야르'는 1961년 소련의 저명한 문학잡지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시에는 안네 프랑크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등 유대인 희생자들을 언급하며 소련이 표면적으로는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대했지만 "사랑하는 소련 국민"은 "더러운 손"을 가졌으며 유대인 증오에 가담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예프투셴코의 강렬한 시를 읽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13번째 교향곡인 바비야르는 풀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남성 합창단을 필요로 합니다.
카네기홀 관계자는 이 웅장한 작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길한 오프닝 종소리부터 조용한 마지막 음까지, '바비야르'는 강렬한 관현악, 냉소적인 유머, 부드러움의 순간으로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모든 악절에서 솟구치고, 으르렁거리고, 물리고, 질주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13번 교향곡 바비야르: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권층 러시아인인 그가 동료 유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놀라운 공감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유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반유대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원칙적인 작곡가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By: Dr. Yvette Alt Miller
참고: Kennedy Center/ carnegiehall.org / BBC / oxfordsong.org
Quoted in Testimone: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as related and edited by Solomon Volkov: 1984.)
글: <월간샤밧> 편집장
<월간샤밧> 카슬레브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지금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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