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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鹿兒島) 여행기
가고시마는 일본여행지로서는 덜 알려진, 인기가 높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두 번째로 다녀왔다. 왜냐고요?
그냥 . . . 왜가 어딧어 . . .
그러나 내심 궁금한 것이 없지 않아 있긴 있었다.
이쯤에서 나의 궁금증이 궁금해진 사람은 내 친구고, 별 느낌이나 관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제 3자, 병신 지랄하고 있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웬수 . . .
첫 번째는 일본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다고 해야 하나, 특히 근대사 . . .
물론 고대사인들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나, 남다른 관심이 좀 있어 그래도 한 쪼가리 정도는 안다고 자부했다. 그 자부하며 알고 있는 왜와 가야 관계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큐슈의 가고시마 일원이다.
가기 전에 우선 역사책을 하나 읽어봐야겠다 싶어 고른 것이 도쿠가와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기간의 강연 내용을 묶은 책이 있어 읽어봤다. 마침 ‘아츠히메’라는 일본 TV 드라마와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 가고시마 . . .
이해는 그 뒤에 또 다른 의문을 낳는가 봅니다. 이때 ‘과연 혁명이 성공하려면 . . . ’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커다란 대문짝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걸 밀고 들어가 . . . ? 아니면 그냥 지나가 . . . ? 한참을 머뭇거렸다.
여기서 ‘그냥 지나가’라고 하면 내 친구, ‘대문앞에서 어정거리는 거지냐 ?’ 하면 제 3자, ‘끝까지 가봐’ 하면 웬수.
그냥 패스 . . . 그렇지만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정도의 궁금증은 풀어야지 . . . 그러나 가이드는 내 궁금증을 완전히 외면했다.
첫 번째 외면
가고시마 비행장에 내려 그곳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기리시마 어느 골프장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기리시마는 골프치러 한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호텔 뒤 정원에서 북쪽을 향해 보면 화산 봉우리가 펼쳐져 있는데 바로 이 장면이 나는 보고 싶었었다. 김수로왕의 구지봉(龜旨峰) 설화와 똑 같은 설화가 있는 봉우리 高千穗峰, 다까치호봉이 오른쪽에 있고, 韓國岳이라 써놓고 가라구니다께라 읽는 봉우리가 왼쪽에 솟아있다.
高千穗? 高는 우리말로 고, 일본에서도 음독은 고이고, 千은 우린 천인데 일본은 찌, 穗는 우린 수, 일본은 호, 그래서 高千穗峰은 고지ㅎ봉, 즉 구지봉 = 고지ㅎ봉, 龜旨峰 = 高千穗峰. 증명 끝.
구지 이렇게 증명 안 해도 ‘구지후루다케’라고 그들은 부른다. ‘구지가 내려온 산’ 이란 의미. 공식적으로는 ‘다카치호노미네’라고도 하지만 이는 핵심을 흐리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韓國岳은 한국이 보인다고 붙인 이름이 아니라 가야(가라)가 보인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산에서 구마모또 쪽으로 國見山이 연이어 3개가 있는데 무슨 이유일까? 가야인들은 미야자끼로 이동하면서 산에 올라 떠나온 가야가 보이는가를 되돌아 보면서 이동한게 아닌가? 가야가 보이는 봉우리 봉우리가 모두 구니미(國見, 나라가 보이는)산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韓國岳인 것이다.
韓國岳 서북쪽에 구마모또(熊本)에서 큐슈 동쪽해안 미야자끼(宮崎)에 이르려면 韓國岳과 高千穗峰를 잇는 연봉 뒤편 루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계곡이 ‘에비야’ 이다. 그리고 그 들판은 ‘에비노’이다. 에비라는 말은 일본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를 걸. 에비라고 한문이 없어 그냥 ‘えび谷 ’, ‘えび野’ 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에비’ 가 뭔지 알 걸.
미야자끼 조금 위쪽으로 휴가(日向)시가 있는데 원래 미야자끼에 연해 있는 해안가를 휴가(日向)라고 했다. 日의 음독은 ‘히’ 인데 우리말 ‘해’에 해당. 向은 방향을 의미 하므로 해가 있는 쪽이 되는데, 우리는 바다가 있는 쪽을 ‘바닷가’, 강이 있는 쪽을 ‘강가’라고 하는데 이 ‘가’는 가장자리의 의미고 일본어 가와(側, 우리말 곁)와 같은 말. 즉 ‘휴가’는 ‘해가’, ‘해의 가장자리’ ‘해 곁’이라는 의미.
가야인은 구마모또( 고마[高麗]인 들의 집결지 )에서 휴가(日向)에 진출할 때 에비야(エビ谷, 에비골자기)에서 무시무시한 전투(지도 古戰場跡 참조)를 했음을 암시한다. 휴가에 집결한 가야인은 재정비 후 오오사까, 나라 쪽으로 진출하는데 그곳이 아스카(飛鳥). ‘아스’는 아침을 혹은 내일을 의미하고 있어 가야인은 여기서 새 아침(새 역사)을 열고 찬란한 아스카 문화시대를 연 것이다.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을 우리는 '날 샌다'라고 한다. '날 새다' , '날새' , '나는 새' ,즉 飛鳥. 아스까라는 지명은 이두식으로 표현한 '아침'인 것이다. 그때의 리더가 일본 초대 천황으로 일컬어지는 진무(神武)다. 진무는 아마도 한반도 남해안 김해에서 출발하여 구마모토, 에비야, 휴가를 거쳐 오오사카, 나라로 진출했다. 이를 ‘神武東征’ 이라고 일본역사서 古事記에 기록해 놨다.
(추기 : 단군께서 아사달에 도읍을 하셨는데 여기서 아사는 아침이고, 달은 우리가 양달, 음달 하듯이 땅을 의미한다. 즉 아사달은 아침의 땅, 그래서 세운 나라가 朝鮮(밝은 아침), 그러니 조선이라는 것은 아침의 나라를 이두식으로 적은 것이다. 아스카도 아사달과 같이 아침의 땅에 도읍을 한 것이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못하고 의미가 상통하는 日本으로 한 것이다. 日本 또한 아침의 나라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朝鮮이나 朝日이나 그게 그거인 것이다. 즉 일본인은 단군의 후예인 것이고, 神武[진무]天皇은 神武檀君, 즉 天皇은 또하나의 檀君인 것이다.)
김수로와 허황후는 김가 성의 아들과 허가 성의 아들을 두었는데 허가 성의 두 아들이 진짜 수로왕의 아들일까? 주몽의 아들은 고씨 성인데 온조와 비류는 고씨성이 아니고 부여씨. 당연히 아버지가 다르니 그렇게 해야지. 허씨성의 허황후 아들은 아버지가 허씨( 허황후 前夫, 그 당시는 근친 결혼 가)일 것이다. 그래서 김씨 성의 수로왕 아들 중 아마도 온조, 비류의 경우와 같이 왜로 건너갔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흔적이 구마모또, 에비야, 휴가, 아스카 그리고 진무가 아닐까?
韓國岳, 高千穗峰을 바라보며 이런 상상이 내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을 때 가이드의 한마디. 빨리 버스 타세요! 이런 웬수 . . . 고대사에 무식한 . . . 바로 멀지 않은 곳에 高千穗峰에 강림한 니니기 신을 모신 기리시마신궁이 있건만 . . .
호텔 뒤 정원에서 바라본 다카치호봉, 가라쿠니다케
두 번째 외면
화산 활동이 계속 중인 사꾸라지마와 지열로 인해 따듯한 해안가 검은 모래에 찜질을 하는 이부스키 일정으로 이어지면서 중간에 흑초 양조장과 소주 주조장 방문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메인 일정보다 끼워진 일정, 검은 식초와 고구마 소주에 흥미가 더 많았다. 흑초 양조장은 큰 항아리 수백개를 널려 놓은 우리나라 간장, 된장 담그는 그런 집과 똑 같은 풍경이었다. 양조주를 공기속에 노출하여 초산발효를 시키면 식초가 양조된다는 것은 다 배워서 아는 사실. 양조주를 오래 보관하여 숙성시키면 색이 갈색으로 변한다. 여기서 더 초산발효하여 3년 이상 숙성시키면 검은 갈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그게 흑초다.
사꾸라지마 화산 – 이정도는 늘 일어나 폭발 통계에는 넣지 않음
일본의 술 하면 사케 하겠지만, 정작 일본의 사케 생산량은 Liter로 따져도 소주 생산량 보다 적다. 일본의 소주 하면 역시 ‘큐슈’고 그것도 고구마 소주이다. 큐슈는 화산지대라 토양이 배수가 너무 잘 돼 벼농사가 잘 안됐다. 그래서 남방의 고구마를 보급하여 허기를 때우게 된 것인데 이런 연유로 고구마 술이 탄생했고, 기후 여건상 술을 장기 보관하기 위해 증류주인 소주, 즉 고구마 소주로 변천했다. 큐슈지방에는 옛날부터 아와주(粟酒)라는 증류주가 있다. 뜻 자체로는 원료가 조다. 조(粟, 속)와 고량(高粱)은 비슷하게 생겨 구별이 좀 어려운데 아와주는 고량주가 아닌 조로 담근 배갈(白干儿)이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 ‘조 껍데기 술’ 이 있는데 혹시 아와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조 껍데기 술’을 발음할 때 살살 뛰워서 해야지 꾹 눌러서 하면 술의 원료가 바뀌니 조심. 술의 원료가 조라서 아와주라고 하는 것보다 소주 자체가 아라비아 원천 기술이라 인도, 동남아 루트로 전해져 큐슈로 전래됐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몽고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아라비아 오리지날 기술 전래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안동, 제주, 평양의 소주가 유명한 것은 고려시대 몽고군이 주둔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아라비아 지금의 중동 지방은 예로부터 향신료가 발달했다. 향은 알코홀에 녹고, 향 자체도 증발이 쉬워 예로부터 증류기술이 발달했음)
돌아다니느라 갈증이 있는 터에 소주 몇 잔 들이키니 어찔하다. 가이드에 재촉 당하기 전에 버스에 올라 탔다.
소주에 대해서 뭘 알겠어 . . . 가이드상
흑초 양조장
세 번째 외면
시내 관광 일정으로 옛 藩主의 저택과 가고시마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城山, 그리고 시내 번화가 이렇게 3 군데를 방문하는 일정이다. 薩摩藩의 居城 鶴丸城은 城山 바로 아래 위치하는데 현재는 성채는 헐리고 가고시마 縣廳이 있다. 幕末 아츠히메가 島津 薩摩藩主의 양녀로 들어와 德川 쇼군에게 시집을 가게 될 때 까지 이 성에 기거했다. 메이지 유신 후 閉藩縣置 조치에 따라 번은 없어지고 대신 지역 행정이 都道府縣제로 바뀌면서 島津家는 그들의 별장이었던 仙巖園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
仙巖園에는 그들이 서양 신기술을 도입하고자 하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철소, 수력발전소, 영국식 방직공장, 유리공장, 조선소 등이다. 이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부국강병을 할 때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 나라에는 해가 뜨지 않았다.
제철소 유적지 앞의 대포 – 이 대포로 에도에 입성?
이어 城山 전망대에 올라갔다. 미리 공부한 가고시마 시내 지도를 머릿속에 펼쳐 놓았다. 오른쪽 시내를 관통하는 작은 강, 거기에 高麗橋가 있다. 高麗橋 바로 밑에 高麗町이 우리나라 2개 洞 넓이로 차지하고 있다. 왜 고려 다리가 여기에 있고 고려 동네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高見馬場은 고려동네가 보이는 마장동(서울)? 高見橋는 고려 마을이 보이는 다리 . . . ?
가이드로부터 이 설명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라는 것 애저녁에 알아 차린지 오래다.
李參平 일행이 왜란 때 끌려와 정착해서인가 했더니 그러면 조선이라 해야지 고려라 한 것이 앞뒤가 안 맞는 거 같다. 그러나 가고시마 항구 앞바다는 錦江灣이다. 이삼평이 일본에 가서 하사받은 이름이 金江三兵衛, 계룡산 자락 박정자 근방이 그의 고향이다. 그러니 錦江⟶金江, 參平⟶三兵, 관계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마도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항전하다 오끼나와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때 이곳 가고시마에도 온 것이 아닐까? 그러면 아와주와 조껍데기술, 연관이 있는 거 네 . . .
가고시마시 지도
일본 메이지 유신의 3걸 중 두 명이 高麗橋를 사이로 하나는 강 위쪽(지도의 ST), 또 하나는 강 아래 쪽 동네(지도의 OT)에서 불x(북한 말로 전구)친구로 자랐다. 그중 사이고다까모리(ST)는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에도 막부를 굴복시키고 에도(동경)에 무혈입성을 했다. 선이 굵은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무용지물이 되는 거 역사에서 너무 많이 보아 왔다. 그는 책상 앞에 안자 꼼꼼하게 일을 따지거나 길게 질질 끄는 회의가 질색인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 오오꾸보도시미찌(OT)는 혁명정부의 요직에서 승승장구 출세길을 달렸다. 그 둘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혁명정부는 육군이 세계 최강이라고 하던 프랑스식으로 훈련된 막부의 군을 독일식의 철저한 제식훈련으로 길들여진 군기가 시퍼런 군대로 만들었고, 마침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의 전후 잉여 무기를 값싸게 들여와 무장까지 시켰다. 이 신식 군에서 밀려난 각 藩의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들은 사이고(ST)에게 몰려들었다. 의리의 사나이 사이고(ST)는 이들을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나보다. 사이고(ST)는 반혁명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꾸보(OT)와 싸웠다. 이것이 西南戰爭이다. ‘라스트 사무라이’ 영화는 이때의 이야기다. 사이고는 城山 뒤 한 동굴에서 자결하므로서 두 불x 친구의 막은 내려졌다.
사이고의 집 근처에 메이지 유신 기념관이 잘 되어 있어 볼만한 데 가이드는 알고 있는지 . . . 明治가 제아무리 明해도 촛불만 하겠어 . . .
高麗橋 근방에 살면서 묘하게도 사이고는 적극적 征韓論자이고, 오오꾸보는 신중론자였다. 두 사람은 高麗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두 무사는 삼별초의 후예 아닐까? 삼별초 고려 무인들은 제주도를 탈출하면서 그들의 나라 고려를 어떻게 가슴속에 새겼을까? 그렇다면 사이고와 오오꾸보의 征韓은 무슨 의미일까?
오오꾸보도 그 후 정적(幕府派)에게 암살당하고, 이또히로부미등 長州派(征韓論)가 득세하면서 조선은 서서히 식민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 長州派의 후예 아베, 지금 그는 닛뽄도를 뽑았다. 땅 따먹기 전쟁은 옛말, 지금은 경제. 경제 임난인가 경제식민인가?
가고시마 장님 가이드를 따라 다닌 일행들 아무런 불만 없으니 만족한 여행이었나 보다. 우리 사람들도 불만 없이 잘 먹으며 만족하고 살고 있으니 평화로구나.
첫댓글 역사학에다가 어문학, 전술학, 지리학 그리고 양조에 필요한 미생물학까지 버무려서 비벼낸 力作이로고!
게다가 시대상에 대한 풍자도 양념으로 곁들이고.
몇 군데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고로 이 논문을 주제로 세미나 한번 엽시다.
그리고 호텔 후원에 서 있는 선글라스 여인은 누군가요?
소생의 last 주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