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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잊고 앞을 향하여
5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10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12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5-14)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은 바울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바울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먼저 5-6절에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7-9절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12-14절에서 자기 미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 바로 다음에 있는 3장 17절에서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본받으란 말일까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을 본받으란 말은 아니겠지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본받으란 말일까요? 아니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던 자기 모습을 본받으란 말일까요? 모두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과거의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7-9절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은 바울!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 바울! 바울은 이 같은 자기 모습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단어의 오역에서 비롯된 것인데,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은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로운 것’이라고 번역한 말의 헬라어 원어는 ‘제미아’(ζημία)인데, 이 말의 본래 뜻은 ‘손실’(loss)입니다. 즉, 잃어버리거나 감소해서 입은 손해(damage)를 뜻합니다. 이 말을 개역개정은 ‘해(害)’로, 새번역은 ‘해로운 것’으로, 그리고 공동번역은 ‘장해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들의 공통점은 ‘부정적인 것’을 가리킨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그런 뜻이 아니고, 단지 ‘손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자랑으로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손실’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자랑할 만한 것들이지만, 현재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과거에 누렸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으므로 그런 것쯤은 손실로 여겨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어린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좋은 것을 손에 꽉 움켜쥐고 있다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보면 먼저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것을 꽉 움켜쥐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쓰레기로 여기지도, 실패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쯤은 손실로 여겨도, 없는 것으로 쳐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쓰레기’를 내다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마치 ‘쓰레기처럼’ 내다버렸던 것입니다. 쓰레기가 아닌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 안에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바울에게는 더 이상 과거의 삶이 붙들고 싶을 만큼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도 없이 충만한 삶을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손실로, 쓰레기로 여기고 과감히 버렸던 것입니다.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만연돼 있는 ‘신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거저다. 구원은 공짜다’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이 ‘신화’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던 바울이 이 신화 창조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구원이 공짜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는지를 말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손실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기다’는 동사를 ‘완료형 중간태’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료형 중간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뜻하는 시제입니다. 즉, 계산은 과거에 이미 다 끝났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으로 ‘완료형 중간태’ 시제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로웠던 것’을 ‘손실’로 계산하는 행위를 과거에 한 번 하고 끝마치지 않았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손실로) 여깁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 중간태에서 현재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그가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혹은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다, 손실로 계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손실로 계산하고 있고, ‘쓰레기’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지식’이란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니까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가방 끈이 길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지식’이라는 말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이 지식은 ‘객관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적인 앎’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국악찬송 <예수님이 좋은걸> 가사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좋은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좋은걸 어떡합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비길 수 없네 예수님이 좋은걸 어떡합니까
이 가사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심정(心情)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좋은데 이유가 어디 있냐는 겁니다. 그냥 무조건 좋다는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적인 앎’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지금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서,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전개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사랑에 빠져서, 과거에 좋던 것들을 모두 다 버렸습니다. 자기 인생을 거기에 통째로 올인(all-in)했습니다. 멋있고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바울이 자기 인생을 걸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찾은 것과 거기에 자기 인생을 몽땅 걸었다는 것, 둘 다가 참 멋있고 부럽습니다.
미래로부터 현재를 보라
하지만 바울은 아직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마라톤 주자처럼 골인 지점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골인 지점까지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희망을 이루지 못했고, 완전한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완성에 이르지 못했고 비록 과정 중에 있지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기쁘고 감사하다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과정을 즐기라고, 결과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 그 자체가 구원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예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2009년에 개봉한 ‘마이클 만’ 감독의 <퍼블릭 에너미>가 그것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공공의 적>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존 딜린저’라는 실존 은행 강도입니다. 존은 193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기에 불황의 원인으로 지목받던 은행의 돈만 털어서 민중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연방수사국 FBI의 후버 국장은 존을 공공의 적 1호로 규정하고, 최정예 수사관을 투입하여 추적에 나섭니다. 동료 갱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본인도 쫓겨 다니면서도 존은 시카고에 설치된 수사본부 안으로 유유히 들어가 살펴보는 두둑한 뱃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존은 사랑에 빠집니다. 상대는 극장에서 손님들의 외투를 보관했다가 내주는 일을 하는 ‘빌리 프레셰’라는 여성이었습니다.
존과의 첫 데이트 자리에서 빌 리가 묻습니다. “실례지만 무엇을 하시는 분이세요?” “은행 강도입니다.” “네? …아니 정말 무엇을 하시는 분이시냐고요?” “은행 강도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빌리가 말합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렇게 꼭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존은 자신의 과거를 빌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고, 가출해 감옥을 자기 집 드나들 듯 살아온 이야기, 탈옥해서 은행 강도가 된 이야기 등등. 그러다가 존의 한 마디가 주목을 끕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Where are you from)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Where we are going to)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은 일반적으로 고향 혹은 국적, 출신 등 우리의 과거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은행 강도 존은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Where we are going to)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온 곳보다 가야할 곳, 곧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존은 과거에 의해 자신의 삶이 규정당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즉 존은 한 인간의 가치가 과거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 출신과 배경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세계에 도전장을 던졌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현재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총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나는 과거의 산물입니다.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오늘의 나를 형성하고 규정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내일의 나 역시 오늘의 결과물입니다. 오늘은 이미 내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일 추수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오늘’을 ‘오! 늘~’이라고 해석하고 살았듯이,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 비로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과거의 결과물이고,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은 진리임에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은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1+1=2일 뿐입니다. 1+1=3이거나 4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Where are you from?’을 묻는 것입니다. 고향이 어딘지, 어떤 집안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가 그 사람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무(無)수저나 흙수저 출신임을 한탄합니다. 내 출신 배경이 오늘의 나를 규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오늘은 과거의 산물이고, 미래를 담고 있다”는 말은 분명 진리지만, 이 진리만 작동하는 사회는 열린사회가 아니라 닫힌사회이며, 닫힌사회는 고인 물처럼 결국 썩어서 공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이 진리를 넘어선 더 큰 진리를 주장합니다. 즉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느냐 뿐 아니라 ‘Where we are going to’, 어디로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타고난 숟가락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지금의 나를 보자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다시 말해, 온 곳이 아니라, 가야할 곳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내 가치는 과거 또는 그 과거의 총체인 현재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할 곳, 즉 미래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가 아니라 미래,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에서 지금의 우리를 보자는 것입니다. 즉 capability를 reality가 아니라 possibility를 보자는 것입니다.
뒤를 잊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자
오늘의 본문 말씀이 증언하는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예수, 그와 사랑에 빠져서 자기도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를 붙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13-14절) 있습니다. 화려했던 과거나 편안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심장이 끓게 하는 미지의 목표를 향해 인생의 나머지 열정을 다 쏟는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노인은 과거에 살고, 청년은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노인은 옛날을 추억하며 사는 자요, 청년은 푸르른 꿈을 품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며 살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노인과 청년은 나이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젊더라도 추억으로 살면 노인이고, 늙었더라도 미래의 소망으로 살면 청년입니다. 저는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젊은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함께 꿈을 꾸고, 그 가슴 뛰는 꿈의 실현을 위해 함께 힘을 합치고 열정을 쏟는 젊은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이런저런 일들을 했네 하는 추억 회고에 머물지 않고, 변화된 세상 속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지금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가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감히 지금 우리가 수요일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공동체’가 그 답이라고 믿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렴풋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분명해 집니다. 그러니 아직 공부에 동참하지 않은 분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제라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치열하게 공부하고, 함께 장밋빛 꿈을 꾸고, 함께 그 꿈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십시다. 끝으로 제가 작년 ‘그리스도 왕 주일’에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라는 제목으로 했던 증언의 결론을 다시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 속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또 우리교회의 미래청사진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기독교인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다르게 믿습니다. 하지만 많이 다르게 살지는 못합니다. 아주 약간 그렇게 살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삶, 신앙과 실천의 괴리에서 오는 공허감이 깊습니다. 그 괴리감을 극복할 답이 바로 공동체생활에 있습니다. 예배생활을 생활예배로 바꿀 실질적 대안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노인문제, 청년문제, 결혼문제, 출산문제, 육아문제, 취업문제, 환경문제 등등이 그 속에서 해결됩니다.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십시다. 토론하십시다. 지혜를 모으십시다. 계획하고 실행하십시다. 그래서 오늘 여기 세상 속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하나님 나라 운동 공동체, 21세기 에클레시아를 재건하고, 그것을 널리 확장시켜 나가십시다. 그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