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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험성(王險城)이 고조선의 도읍으로 사기(史記)에 처음 등장한지 이천년이 넘었으나 그 곳이 어딘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BC 195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망명하여 조선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고 BC 108년에 왕험성이 한군(漢軍)에게 함락되어 고조선이 멸망하였다. 왕험성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한대(漢代)의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으로 알려져 왔는데 험독현의 위치 또한 분명하지 않고 다만 대릉하(大凌河)의 동쪽이며 요하(遼河)의 서쪽으로 파악되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750년 후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옛 낙랑군 왕험성이라는 주장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 괄지지(括地志)에 수록되었는데 원본은 유실되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인용되어 전해 온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사기(史記)의 주석서로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4년(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했는데 진시황본기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 史記 秦始皇本紀
始皇 二十六年, 地東至海曁朝鮮①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爲塞 并陰山至遼東
사기 진시황본기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海)와 조선(朝鮮)에 이르고 , 서쪽은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이르고, 남쪽은 북향호(北嚮戶)에 이르고, 북쪽은 황하(黃河)에 의지해서 요새로 삼고 음산(陰山)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海謂渤海 南至楊蘇台等州之東海也 暨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 髙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바다(海)는 발해(渤海)를 말한다. 남쪽으로 양주(楊州), 소주(蘇州), 대주(台州)의 동쪽 바다에 도달한다. 기(暨)는 급(及 = 및 = and)이다. 발해(渤海)의 동북쪽은 조선국(朝鮮國)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平壤城)은 본시 한(漢) 낙랑군 왕험성(王險城)으로서 바로 옛 조선이라 했다.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조선의 위치가 발해(渤海)의 동북쪽이라고 설명하고서 괄지지(括地志)에 수록된 다른 견해도 소개하였다. 필자는 이태(李泰)가 당태종(唐太宗)에게 고구려 원정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고 본다.
945년에 편찬한 정사(正史) 구당서(舊唐書)가 평양은 왕험성이라고 기록하였고 그 후 왕험성 평양설이 정설로 통해 왔다. 왕험성 평양설은 이처럼 내력이 유구하지만 필자는 새로운 관점에서 사기(史記)를 분석하여 왕험성의 위치가 요하(遼河)의 서쪽임을 입증코자 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BC 108년에 태사령(太史令)이던 사마담(司馬談)이 사망함에 그의 아들 사마천(司馬遷 , BC 145년 ~ BC 86년)이 태사령(太史令)을 승계하였고 BC 90년경 사기(史記)를 완성하였다.
[史記 匈奴列傳]
當是之時, 冠帯戦國七, 而三國邊於匈奴. 其後趙將李牧時, 匈奴不敢入趙邊.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 將十萬之衆北擊胡 悉收河南地 因河爲塞 築四十四縣城臨河 徙適戍以充之 而通直道 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又度河據陽山北假中.
[사기 흉노열전]
당시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중 삼국(三國)이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趙) 장군 이목(李牧, ? ~ 기원전 229)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趙)나라 변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뒤에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 시황제(始皇帝)가 몽염(蒙恬)을 시켜 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호(胡)를 공격해 하남(河南) 땅을 모두 차지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를 유배보내 수비대를 채웠으며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직도(直道)를 개통했다. 험준한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곳을 손보아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 또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과 북가(北假)를 차지했다.
當是之時, 東胡彊而月氏盛. 匈奴單於曰頭曼, 頭曼不勝秦, 北徙. 十餘年而蒙恬死, 諸侯畔秦, 中國擾亂, 諸秦所徙適戍邊者皆複去, 於是匈奴得寛, 複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당시에는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도 흥성했다. 그 때에 흉노의 선우(單于)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진(秦)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몽염이 죽고 과거 육국의 귀족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중국은 온통 혼란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점차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單于有太子名冒頓. 後有所愛閼氏, 生少子, 而單于欲廃冒頓而立少子, 乃使冒頓質於月氏. 冒頓既質於月氏, 而頭曼急撃月氏. 月氏欲殺冒頓, 冒頓盜其善馬, 騎之亡帰. 頭曼以為壯, 令將萬騎. 冒頓乃作為鳴鏑, 習勒其騎射, 令曰:「鳴鏑所射而不悉射者, 斬之.」行猟鳥獣, 有不射鳴鏑所射者, 輒斬之. 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 左右或不敢射者, 冒頓立斬不射善馬者. 居頃之, 複以鳴鏑自射其愛妻, 左右或頗恐, 不敢射, 冒頓又複斬之. 居頃之, 冒頓出猟, 以鳴鏑射單于善馬, 左右皆射之. 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 従其父單于頭曼猟, 以鳴鏑射頭曼, 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 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聴従者. 冒頓自立為單于.
두만 선우(單于)에게는 묵돌(冒頓)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뒤에 총애하는 연지(閼氏, 선우의 아내)가 작은아들을 낳자 두만선우는 묵돌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묵돌을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냈다. 묵돌이 월지에 인질로 있을 때, 두만은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묵돌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돌은 준마를 훔쳐 타고 도망쳐 돌아왔다. 두만은 의도했던 계획이 빗나갔지만 묵돌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돌에게 만 명의 기병을 주고 이끌게 했다. 그러자 묵돌은 명적(鳴鏑: 발사하면 소리 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것으로 말 타고 활 쏘는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 같이 그 곳에 활을 쏘아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을 나갔을 때 묵돌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댄 곳에 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참하였다. 그 뒤 묵돌은 자기가 아끼는 말(馬)에게 명적을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돌은 당장에 그들을 참하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 그는 또 자기의 애처(愛妻)에게 명적을 날렸다. 좌우기병 중에 두려워서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돌은 그들 역시 또 다시 참하였다. 얼마 뒤 묵돌은 사냥에 나가서 선우가 아끼는 말에 명적을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거기에 쏘아댔다. 이제 묵돌은 부하들이 모두 쓸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아비인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에 나갔을 때에 그는 두만에게 명적을 쏘았다. 그의 좌우 부하들은 일제히 명적이 향하는 곳에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죽였다. 묵돌은 잇달아 그의 계모와 이복동생 및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의 자리에 올랐다.
冒頓既立, 是時東胡彊盛, 聞冒頓殺父自立, 乃使使謂冒頓, 欲得頭曼時有千里馬. 冒頓問群臣, 群臣皆曰:「千里馬, 匈奴寶馬也, 勿與.」冒頓曰:「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 遂與之千里馬. 居頃之, 東胡以為冒頓畏之, 乃使使謂冒頓, 欲得単於一閼氏. 冒頓複問左右, 左右皆怒曰:「東胡無道, 乃求閼氏 請撃之.」冒頓曰:「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 遂取所愛閼氏予東胡.
묵돌이 선우(單于)가 되었을 때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다. 묵돌이 자기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들은 동호는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그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돌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이웃 나라인데,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얼마 후 동호는 묵돌이 자신들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 중에 한 사람을 달라고 청했다. 묵돌이 또 좌우 신하들에 물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동호는 매우 무례합니다. 감히 선우의 연지를 요구하다니, 즉시 출병해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돌은 이렇게 말했다. “이웃하고 있는 나라에 어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총애하던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게 보냈다.
東胡王愈益驕, 西侵. 與匈奴閒, 中有棄地, 莫居, 千餘里, 各居其邊為甌脫. 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 匈奴非能至也, 吾欲有之.」冒頓問群臣, 群臣或曰:「此棄地, 予之亦可, 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 國之本也, 柰何予之」諸言予之者, 皆斬之. 冒頓上馬, 令國中有後者斬, 遂東襲撃東胡. 東胡初軽冒頓, 不為備. 及冒頓以兵至, 撃, 大破滅東胡王, 而虜其民人及畜産.
동호왕은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흉노의 변경을 침범해 왔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1천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버려져 있었다. 쌍방은 각각 자기들의 변경의 지형에 따라서 그곳에 수비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는 또다시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수비초소 이외의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소용없는 땅이니, 우리가 갖도록 하겠소.” 묵돌은 이 문제에 대해 좌우의 대신들에게 또다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은 어차피 버려진 황무지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돌은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줘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했다. 묵돌은 그 즉시 말에 올라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도망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참하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얕잡아보고 있어서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 순식간에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왕을 잡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을 빼앗았다.
既歸, 西撃走月氏, 南並樓煩、白羊河南王. 侵燕代悉複収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 與漢関故河南塞, 至朝那、膚施, 遂侵燕代. 是時漢兵與項羽相距, 中國罷於兵革, 以故冒頓得自彊, 控弦之士三十餘萬.
본국으로 개선한 묵돌은 이번에는 서쪽의 월지국을 격파하여 내쫓고, 남쪽으로 누번(樓煩)과 백양하남왕(白羊河南王)의 영토를 병탄했으며, 연(燕)과 대(代)에 침입해서 일찌기 진나라(秦)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본래 흉노는 하남의 요새를 기점으로 한(漢)나라와 경계를 삼았는데, 그곳에 관문을 설치해서 조나(朝那)와 부시(膚施)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는 연과 대에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원 천하는 전쟁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 때문에 묵돌은 손쉽게 흉노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활쏘기에 능한 군사가 30여만 명이나 되었다.
注 :
조나(朝那) : 지금의 영하자치구(寧夏自治區) 고원시(固原市)
부시(膚施)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유림시(楡林市) 수덕현(綏德縣)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時大時小,別散分離,尚矣,其世傳不可得而次云。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為敵國,
순유(淳維)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혹은 강대하고 혹은 약소해지기를 반복했으며 이합집산 또한 무상했다. 그래서 그 계보를 차례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묵돌의 대에 이르러 흉노는 가장 강대해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하였다.
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置左右賢王, 左右谷蠡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戸, 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 故常以太子為左屠耆王. 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戸, 大者萬騎, 小者數千, 凡二十四長, 立號曰「萬騎」. 諸大臣皆世官. 呼衍氏, 蘭氏, 其後有須蔔氏, 此三姓其貴種也.
대대로 전해오는 관직 호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곡려왕(左右谷蠡王),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 등의 관직을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명한 자를 도기(屠耆)라고 했기 때문에 언제나 태자가 좌도기왕(左屠耆王)이 되었다. 좌우의 현왕(賢王) 이하 당호(當戶)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만 명에서 적게는 몇 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24장(長)이 있었다. 이들을 통상 만기(萬騎)라고 불렀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세습했다. 그중에서 호연씨(呼衍氏), 난씨(蘭氏), 뒤의 수복씨(須卜氏)까지의 세 성이 흉노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이었다.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 以往者東, 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 直上郡, 以西, 接月氏、氐、羌;而單于之庭直代、雲中:各有分地, 逐水草移徙. 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為大(國), 左右骨都侯輔政. 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百長、什長、裨小王、相、封都尉、當戸、且渠之屬.
좌방(左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모두 동쪽에 거주하는데 상곡군(上谷郡)과 마주하고, 동쪽으로 가서 예맥(穢貉) 및 조선(朝鮮)과 국경을 접한다. 우방(右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서쪽에 거주하는데 상군(上郡)과 마주하고 서쪽으로 월지, 저(氐), 강(羌)과 국경을 접한다. 선우의 왕정(王庭)은 대군(代郡) 및 운중군과 마주 보았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영역이 있었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다. 그 중에서 좌우현왕과 좌우곡려왕의 영역이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24장(長)들은 또 각기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비소왕(裨小王), 상봉(相封), 도위(都尉), 당호(當戶), 저거(且渠) 등의 속관을 두었다.
흉노제국의 동쪽 지역은 광활한 평원지대라 국경선이 모호하다. 필자는 년간 강수량 380 mm 선을 흉노제국의 국경으로 본다. 유목지대와 경작지대의 분계선이다.
[史記 匈奴列傳]
直上谷, 以往者東, 接穢貉朝鮮
상곡군(上谷郡)과 마주하고, 동쪽으로 예맥(穢貉) 및 조선(朝鮮)과 국경을 접한다.
BC 202년 12월, 해하(垓下) 전투에서 항우(項羽)가 패하고 자결함에 유방(劉邦)이 중원을 제패하니 한(漢) 고조(高祖)이다. BC 201년 가을 흉노가 침입하여 마읍(馬邑)과 태원(太原)을 점령하자 유방이 직접 출정했다. 유방은 묵돌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흉노를 추격하다가 평성(平城, 지금의 大同) 근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당했다. BC 200년 정월의 강추위 속에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묵돌이 포위망 한쪽을 풀어준 덕분에 7일만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후 한(漢)은 흉노에게 해마다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그 후 유방은 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표적이 된 진희(秦豨)가 BC 197년 8월에 조(趙)와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이 직접 출정하여 평정했다. 이어서 초왕(楚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장안으로 불러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위협을 느낀 회남왕 영포(英布)가 BC 196년 7월에 봉기하자 유방이 출정하여 10월에 반군을 격멸했고 영포는 도주하다 살해되었다. 유방은 이 때 화살에 맞아 병석에 누웠는데 얼마 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노관(盧綰)은 유방(劉邦)과 한날 한시에 한 동네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다. BC 209년에 유방이 봉기할 때 합류한 이후 유방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BC 202년 노관은 항우가 책봉한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정벌하고 BC 202년 7월에 연(燕)을 공격하여 연왕(燕王) 장도(臧荼)를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유방은 8월에 노관을 연왕(燕王)에 책봉했다.
[사기 노관열전]
漢五年八月,乃立盧綰為燕王 ... 高祖使使召盧綰 綰愈恐 迺遂稱病不行 上益怒 使樊噲擊燕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 侯伺 幸上病愈 自入謝 四月高祖崩 盧綰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為東胡盧王 居歲餘 死胡中
한(漢) 5년 8월,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다. .... (기원전 195년 2월) 고조(高祖)는 사람을 보내 노관을 (장안으로) 불렀다. 노관이 두려워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자 고조가 노하여 번쾌에게 연(燕)을 치라 하였다. 연왕 노관은 자신의 궁인, 가속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장성(長城) 아래에 머물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려고 했다. 그런데 4월에 고조가 죽자 노관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흉노국으로 도망갔다. 흉노가 그를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 해 남짓 지내다 오랑캐 땅에서 죽었다.
노관열전에는 노관이 싸워보지도 않고 흉노국으로 도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관의 군대와 토벌군 사이에 수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된 번쾌가 출정하기도 전에 참소를 당해 주발(周勃)로 교체되고 번쾌는 장안으로 압송되었는데 도착했을 때 유방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리하여 주발(周勃)이 토벌전을 수행했다.
[史記 絳侯周勃世家]
燕王盧綰反 勃以相国代樊噲将 撃下薊 得綰大将抵 丞相偃 守陘 太尉弱 御史大夫施 屠渾都.破綰軍上蘭 复撃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縣 右北平十六縣 遼西遼東二十九縣 漁陽二十二縣
[사기 강후주발세가]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주발(周勃)은 상국(相國)으로서 번쾌를 대신하여 군을 이끌고 계현(연경)을 함락시켜 노관의 대장 지(扺), 승상 언(偃), 태수 경(陘), 태위 약(弱), 어사대부 시(施)를 사로잡고 혼도(渾都)를 도륙했다. 노관의 군대를 상란에서 격파하고 저양에서 노관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고는 장성까지 추격했다. 상곡군 12개 현, 우북평군 16개 현, 요서군과 요동군 29개 현, 어양군 22개 현을 평정했다.
노관이 주발(周勃)에게 패하자 노관의 수하였던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달아나 조선으로 망명했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 王之, 都王険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연(燕)에 속하게 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三國志魏志東夷傳 韓]
魏略 曰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삼국지위지동이전 한]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한나라(漢)가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정했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準)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圭)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준에게 사람을 보내 한병(漢兵)이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들어가서 지키게 해달라고 거짓으로 고하고는 돌아와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였다.
한국 주류학계는 청천강이 패수(浿水)이고 평양이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청천강이라고 주장한다.
연경에서 청천강까지는 직선 거리가 약 1,200 km로 삼천리에 달한다. 위만의 무리는 군대가 아니라 군인과 관리, 하인들, 여자와 아이들이 뒤섞인 피난민이었다. 식량과 가재도구를 실은 짐수레가 행열을 이루고 대다수는 걸어갔을 것이다. 유방은 기원전 195년 양력 6월 1일에 죽었고 그 후에 출정한 토벌군에게 연경이 함락된 것은 몇 달 후이니 위만이 연경을 출발한 때는 아마도 늦여름일 것이다. 청천강까지 적어도 6개월은 걸리지 않았을까? 북국의 겨울은 일찍 오니 한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1,200 km나 도망갔다는 말인가? 주발이 평정한 요서군과 요동군이 요하 유역이라면 위만 일행은 추격군보다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는 말인가? 천신만고 끝에 국경인 청천강에 도착했을 때 만리장성의 수비군이 순순히 통과를 허락했겠는가?
주류학계는 산해관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아무도 살지 않는 빈땅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류학계는 산해관에서 지금의 요양(遼陽)까지는 본래 동호(東胡)의 영토였고 요양에서 청천강까지는 조선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위만이 망명하기 90 년 전에 연나라가 정복했다고 한다. 유목생활하는 동호족은 모두 떠나고 그 땅에는 연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을 터인데 위만은 동족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하고 조선으로 가야만 했다는 말인가?
요양을 지나서 청천강까지는 정착생활하는 조선족이 그대로 머물러 살았을 터인데 그 지역의 조선족은 秦의 공격으로 燕이 멸망할 때, 그리고 시황제 사후 전국적 반란으로 진(秦)이 멸망하고 이어서 항우와 유방이 싸우는 혼란 속에서도 한족(漢族)의 지배에 순종하며 숨죽이고 지냈다는 말인가? 북방의 흉노족은 중원의 혼란을 틈 타 잃었던 영토를 모조리 수복했는데 청천강 남쪽의 조선은 아무 생각 없이 먼 산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위만은 연나라 사람들의 동쪽 끝 정착지인 요양에서 왜 동쪽 방면으로 가지 않고 하필이면 남쪽 조선으로 갔을까? 조선은 오래 전부터 연(燕)나라의 적국이 아니었던가? 청천강 패수설을 주장하는 주류학계는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못한다.
사실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은 과거에 연나라(燕)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모조리 수복하고 더 나아가 연나라 본토의 동부 지역을 점령했다. 한무제(漢武帝)를 이은 소제(昭帝) 6년(BC 81년) 염철주(鹽鐵酒)의 국가전매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대토론회의 내용을 30년 후 환관(桓寬)이 염철론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o 염철론(鹽鐵論) 벌공편(伐功篇)
大夫曰 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寧王踰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대부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은 연나라를 넘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을 격파하고 영지를 멸했으며 조나라 무령왕은 구주(句注)를 넘어 대와 상곡을 지나 임호와 누번을 경략해 멸하였고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천리 밖으로 물리치고 요동을 넘어 조선을 침공했다.
o 염철론(鹽鐵論)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俱強,並為寇虐, 朝鮮踰徼,劫燕之東地 , 東越越東海,略浙江之南 , 南越內侵,滑服令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방의 오랑캐가 강해져 모두 노략질과 포학을 저질렀다.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나라의 동부 지역을 빼앗았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부를 약탈했고,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다.
구주(句注)는 구주산(句注山)을 말한다. 구주산은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요새로 지금의 안문산(雁門山)인데 서형산(西陘山)이라고도 하며 안문관(雁門關)이 있다.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 서북에 있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과거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았는데 진시황이 연을 멸하고 이 곳을 요동외요라 불렀다. 염철론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이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요동외요를 수복하고 그 너머 연나라의 본토까지 빼앗았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을 은폐하고 청천강이 패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BC 109년에 漢나라 군대가 패수를 건너와 1년 동안 격전을 치른 끝에 왕험성을 점령하고 조선 땅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을 설치했다. 한(漢)나라와 조선의 전쟁은 사마천(司馬遷)의 장년기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고조선에 관한 사기(史記)의 기록은 모든 사서(史書) 중에 신뢰성이 으뜸이다. 당시의 전쟁 상황은 사기 조선열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史記 朝鮮列傳]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효혜제(孝恵帝 재위 BC 195 ~ BC 188)와 고후(高后 : BC 180 死) 때를 맞아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자 요동 태수는 위만과 약조하기를, 위만은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으며 만이의 여러 군장들이 천자를 뵈러 들어오고자 할 때 막지 않기로 했다. 이를 듣고 주상이 허락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고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譙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禦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馳入塞① , 遂帰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 即不詰, 拝何為遼東東部都尉② . 朝鮮怨何, 発兵襲攻殺何.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漢의 망명자를 유인하여 점점 많아졌고,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지도 않았다.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뵈려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 漢은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를 나무라고 깨우쳐주려 했으나 끝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다 국경인 패수에 임하여 부하를 시켜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천자에게 고했다. 주상은 꾸짖지 않고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했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습격해서 섭하를 죽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사기(史記)의 주석서로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4년(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했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① 塞 : 平州 榆林關也.
새(塞)는 평주(平州) 유림관(榆林關)이다.
② 遼東東部都尉 : 地理志云 遼東郡武次縣 東部都尉所理也
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요동군 무차현(武次縣)은 동부도위의 치소(治所)라고 했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736년 당시 당나라(唐) 평주(平州)에는 노룡현(盧龍縣)과 임유현(臨渝縣)이 있었고 임유현(臨渝縣)에 장성과 임유관(臨渝關)이 있었다. 당나라(唐) 평주(平州)에 유림관(榆林關)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사기정의(史記正義)가 유일한데 위치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없어서 신뢰성이 없다. 다만 당나라(唐) 평주(平州)의 동쪽 관문 임유관은 지금의 산해관이니 장수절(張守節)은 한나라(漢)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가 임유관에서 가깝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史記 朝鮮列傳]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発兵距険.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縦,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斉兵七千人先至王険.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収散卒, 複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천자는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 해(BC 109)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뜨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병사 5만으로 요동을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을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군을 이끌고 선봉에 섰으나 패하여 흩어졌다. 다(多)는 달아나서 돌아왔으나 군법에 따라 목이 잘렸다. 누선장군은 제(齊)의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탐지하고 곧바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은 패하여 분산도주했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에 십여 일 숨어 있다가 흩어진 군사들을 점차 찾아 수습했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격파하고 전진할 수 없었다.
(중략)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囲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좌장군은 패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왕험성으로 와서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왕이 성을 견고하게 수비하여 여러 달 동안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封參為澅清侯,陰為荻苴侯,唊為平州侯,長為幾侯。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為庶人。...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원봉 3년(BC 108년)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래도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거왕의 대신 성기가 다시 반항하여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상(相)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두었다. 참을 홰청후(澅淸侯)에, 한음을 적저후(荻苴侯)에, 왕겹을 평주후(平州侯)에, 장항(長降)을 기후(幾侯)에 봉(封)하였다. 노최(路最)는 아비가 죽었고, 매우 공(功)이 크므로 온양후(溫陽侯)가 되었다.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로 기시(棄市: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고 시신을 길거리에 버려두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은 군대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기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은 죄로 죽여야 마땅했지만 돈으로 속죄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양군(兩軍) 모두 굴욕을 당하였고 제후로 봉해진 장수가 아무도 없었다.
서진(西晉 265 ~ 316)에서 사마표(司馬彪)가 후한(後漢)의 역사 속한서(續漢書)를 저술했다. 사마표의 생몰년도는 불분명한데 서진(西晉) 혜제(惠帝 재위 290 ~ 307) 말년에 60여 세로 사망했다고 하니 240년대 초에 출생했을 것이다. 속한서는 290년 무렵 삼국지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는데 대부분 망실되고 지(志)만 전해 와서 이를 속한지(續漢志)라 한다. 지리지(地理志)에 해당하는 것이 군국지(郡國志)로서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 ~ 125년) 이후의 행정구역이다.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남조(南朝)의 양나라(梁, 502~557)에서 유소(劉昭, 514 ~ 565)가 주석을 달았다. 사마표의 원문과 유소의 주석은 훗날 북송(北宋, 960 ~ 1127)에서 속한지(續漢志)라는 이름으로 후한서에 합본되어 정사로 인정되었다.
속한서 군국지(郡國志)에 의하면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년) 때 요동군의 무려현, 험독현, 방현과 요서군의 창료현, 빈도현, 도하현을 합쳐서 요동속국(遼東屬國)을 신설했다. 군국지 요동속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마표(司馬彪)의 원문에 유소(劉昭 514~565)가 주석을 달았다.
후한서 속한지 제 23권 군국지(郡國志)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 以為屬國, 都尉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1]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 史記曰 王險 衛滿所都 [2]
房
요동속국(遼東屬國)
옛 감향(邯鄉)으로 서부도위(西部都尉)였다. 안제(安帝) 때 요동속국을 만들어 도위(都尉)가 별도로 여섯 성(城)을 다스렸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① 창료현(昌遼), 옛 천료현(天遼縣)이다. 전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1]
② 빈도현(賔徒),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③ 도하현(徒河),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④ 무려현(無慮),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⑤ 험독현(險瀆),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 했다. [2]
⑥ 방현(房)
[1]과 [2]는 유소(劉昭)의 주석이다. 험독현이 왕험성이라는 것이다.
무려현, 험독현, 방현은 전에 요동군에 속했다.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는 대릉하와 세하(細河)였다.
무려현은 의무려산에 인접해 있고 험독현은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 있다.
후한(後漢)을 이은 삼국시대 조위(曺魏, 220 ~ 265) 왕조는 244년에 요동속국에서 창료현(昌遼縣)과 빈도현(賓徒縣)을 분리해서 창려군(昌黎郡)을 신설하고 창료현(昌遼縣)을 창려현(昌黎縣)으로 개명했다.
속한서 군국지(郡國志)의 유주(幽州) 낙랑군 열구현에 유소(劉昭)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후한서 속한지 제 23권 군국지(郡國志)
樂浪郡 列口縣 : 郭璞注山海經曰 列 水名 列水在遼東
낙랑군 열구현 : 곽박(郭璞)이 산해경(山海經)에 주를 달아 이르기를 열(列)은 강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遼東)에 있다고 했다.
곽박(郭璞, 275 ~ 324)은 서진(西晉)의 학자다.
※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요동군의 속현으로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응소(應劭, 204년 死)는 후한(後漢, 25 ~ 220)의 역사학자로서 190년경 한서(漢書) 주석서를 저술했는데 원본은 유실되고 험독현(險瀆縣) 대목이 다른 서책에 인용되어 전해온다. 당(唐)나라의 사마정(司馬貞, 679 ~ 732)이 편찬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史記索隱]
應劭曰 險瀆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응소(應劭)가 말했다.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험한 강물에 의지하기에 험독이라 한다.
남북조시대 유송(劉宋, 420 ~ 479) 왕조에서 배인(裵駰)이 저술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史記集解]
應劭注 漢書地理志 遼東險瀆 朝鮮王舊都
응소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아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수록되어 있다.
◇ 사기집해(史記集解)
王險城 :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왕험성 :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군(昌黎郡)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했다.
서광(徐廣, 352 ~ 425)은 동진(東晉, 317 ~ 420)의 역사가이다. 창려유험독현야(昌黎有險瀆縣也)는 "창려군(昌黎郡)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라는 뜻인데 이는 오류이다. 창려군은 예전의 요서군을 분할하여 신설하였고 험독현은 요동군에 속하였다.
안사고(顔師古, 581~645)는 당(唐)나라 초기의 저명한 언어학자이며 역사가로서 수서(隋書) 편찬에 필진으로 참여했다. 구당서(舊唐書) 안사고열전에 의하면 정관(貞觀) 11년(637년)에 당태종(唐太宗)이 안사고에게 한서(漢書) 주석서의 집필을 명했다. 한서주(漢書注)는 641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서지리지 낙랑군에 대한 안사고의 주석이다.
◇樂浪郡 : 武帝元封三年開 應劭曰 樂浪郡故朝鮮國也
낙랑군 :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에 개설했다. 응소가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라 했다.
朝鮮 : 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조선현 :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다고 했다.
浿水 : 浿水西至增地入海,
패수현 :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含資 :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현 : 대수가 서쪽으로 대방현(帶方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呑列 :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列亦作洌
탄렬현 : 분려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현(黏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820 리를 흐른다. 列은 洌로 쓰기도 한다.
昭明 : 南部都尉治
소명현 : 남부도위가 다스린다.
不而 : 東部都尉治
불이현 : 동부도위가 다스린다.
안사고는 요동군과 현도군의 하천을 알기 쉽게 기술하고서도 낙랑군의 하천은 애매모호하게 기술했다. 패수가 낙랑군에 있다고 하면서도 패수가 평양성을 지나간다는 공지의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 안사고가 한서주를 저술하면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한다고 부기했다면 패수가 어느 강인지 명확했을 것이다.
안사고는 한서주에서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遼東郡 險瀆縣 :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요동군 험독현 : 응소가 말했다. 험독현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며 험한 강물에 의지하기에 험독이라 한다.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臣瓉)이 말했다.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이 원래 험독현이었다.
師古曰 瓚説是也
안사고(安師古)가 말했다. 신찬(臣瓉)의 말이 옳다.
※학계에서 차자시(此自是)의 해석을 두고 논란이 있으나 이는 본질과 상관 없는 문제다. 응소, 신찬, 안사고 모두 험독현을 위만의 도읍 왕험성이라고 했다. 다만 응소는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 했고 신찬은 낙랑군에 속한다고 했다. 한서지리지 원전에 험독현은 요동군에 속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사고는 신찬이 옳다고 했다.
신찬(臣瓉)은 서진(西晉, 265~317년) 시대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경력과 생몰년대 심지어 성씨마저 미상이다 신(臣)은 그의 성씨가 아니라 단지 신하라는 뜻이다. 서진(西晉 265~316) 시대에도 사기(史記)에 기록된 패수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신찬이 어느 지역을 낙랑군으로 지목했고 어느 강을 패수로 지목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신찬이 낙랑군으로 지목한 곳은 요하 서쪽일 수도 있으며 신찬이 말한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안사고 시대에는 누구나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다. 안사고는 한서주(漢書注)에서 낙랑군에 패수가 있다고 기술하면서 신찬이 말한 낙랑군 패수는 대동강이고 왕험성은 평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사고가 그렇게 명기하지 않았지만 한서주(漢書注)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중대한 모순이 있다.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왕험성이 있고 이곳이 바로 험독이라 했는데 응소에 따르면 험독은 험한 강을 끼고 있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험독은 왕험성이고 패수에 접해 있다. 그런데 사기(史記)와 위략(魏略)에 따르면 패수는 한(漢) 나라와 조선의 국경이고 만번한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며 만번한에서 동쪽으로 한참 더 가야 왕험성이 나온다.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만번한은 예성강 또는 임진강이라야 하고 왕험성은 한양 근처 한강변이라야 한다. 그런데 한강변은 마한의 영역이거나 아니면 조선과 마한의 경계이니 왕험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대동강은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아니다.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만번한은 청천강이고 패수는 압록강이라야 한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지만 대동강은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아닌 것이다. 안사고 설을 수용한 조선왕조에서도 그렇게 인식했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술하기를 평양은 왕험성이고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는 압록강이며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라고 했다.
왕험성이 패수에 접해 있다고 한 신찬의 주장이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을 안사고가 몰랐을 리 없다.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다면 압록강을 패수라고 해야 사기의 기록에 부합하는데 당시에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기 때문에 안사고는 이를 한서주에 명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평양 일대를 낙랑군의 옛땅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것이 안사고의 의도였다. 안사고는 자신의 구상을 뒷받침할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존재도 불투명한 신찬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찬이 했다는 말도 출처 미상이니 안사고가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한서지리지와 속한서 군국지에 혐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사고는 험독현이 낙랑군에 속하며 낙랑군은 입록강 동쪽이라고 주장했다. 안사고의 주장은 낭설임이 분명함에도 정설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한서에는 낙랑군과 관련된 사건 기록이 아무 것도 없고 후한서(後漢書)에 낙랑군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 後漢書 循吏列傳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樂浪太守 建武 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至遼東,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후한서 순리열전]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낙랑태수를 자칭했다. 건무 6년(서기 30)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치라 했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王閎)이 군결 조사와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했다.
◇ 後漢書 光武帝本紀
光武帝 建武 六年 六月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후한서 광무제본기]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 6월 초, 낙랑 사람 왕조가 낙랑군을 점거하고 불복했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을 보내 공격했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했다.
※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라는 대목은 후한서 원전이 아니고 당나라 측천무후의 둘째아들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이다. 서기 30년 당시 요동의 옛 조선 땅에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후한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시대까지는 일반적으로 왕험성과 낙랑군의 위치를 요하 서쪽으로 보았다.
◇ 後漢書 光武帝本紀
光武帝 建武 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후한서 광무제본기
광무제 건무 20년(서기 44년) 가을, 동이 한국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귀순했다.
◇ 後漢書 東夷列傳
光武帝 建武 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渔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
[후한서 동이열전]
광무제 건무 3년(서기 47년) 겨울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군에 와서 귀순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했는데 요동군 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국경에 머물렀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서안평, 낙랑군, 대방현이 요하 유역에 있다.
◇ 三國志魏書東夷傳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순제(順帝 재위 125~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167) 년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현과 거향현을 약탈했다. 또 서안평현을 공격하고. 그 길에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붙잡아갔다.
◇ 三國史記 太祖王本紀
太祖王 九十四年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妻子
태조왕 94년(146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漢) 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고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붇잡아 왔다.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은 평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周書 異域列傳]
高麗者 治平壤城 其城東西六里 南臨浿水
고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그 성은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안사고가 집필에 참여하여 636년에 편찬한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隋書 東夷列傳]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고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수서동이열전]
평양이 왕험성이고 낙랑군의 치소라는 학설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살펴보자.
당(唐)나라에서 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런 대목이 실려있다.
◇ 사기정의(史記正義)
秦始皇本紀 : 括地志云 髙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진시황본기 :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으로서 바로 옛 조선이라고 한다.
朝鮮列傳 : 括地志云 髙驪都平襄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조선열전 :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고 또 옛날에 이르기를 조선땅이라 했다고 한다.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인데 원본은 망실되고 일부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전해온다. 필자는 고구려 원정을 구상하고 있는 당태종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고 전의(戰意)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괄지지에 담겨 있다고 본다. 644년 6월에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명하였고 11월에 제1진이 출정했다.
정사(正史)로서는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 936~946)에서 945년에 편찬한 구당서(舊唐書)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다음과 같다.
◇ 구당서(舊唐書)
高麗者,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구려의 국도는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땅이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흔히 고려로 표기했다. 구당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평양은 낙랑군의 옛땅이며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인식되었다.
북송(北宋, 960~1127)에서 974년에 편찬한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 外國列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 外國列傳)
高麗,其國都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려의 국도는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땅이다.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新唐書) 또한 같은 내용을 기술했다.
◇ 신당서(新唐書)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고구려 군주는 평양성에 살고 있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漢) 나라의 낙랑군이다.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외성을 지었고 남쪽은 패수에 닿는다.
조선왕조에서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중국 사서의 기록을 수용하여 평양을 왕험성으로, 압록강을 고조선의 패수로, 대동강을 또 다른 패수로 인식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 평양부(平壤府)
평양은 왕험성으로 단군(檀君)조선, 기자(箕子)조선, 위만(衛滿)조선의 도읍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대동강은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다.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1913년 9월 일본인 고적조사단이 대동강 하구 북안에서 점제현 신사비(秥蟬縣 神祠碑)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비석은 후한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서기 8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대동강 일대가 낙랑군의 옛땅이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조사단은 비석이 발견된 지역을 낙랑군 점제현으로 결정했다.
사기에 의하면 한(漢)나라는 위만조선을 침공하면서 육군과 수군이 열구(列口)에서 만나 왕험성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열구는 열수(列水 또는 洌水 )의 하구(河口)를 말한다. 그런데 한나라 육군이 패수 서쪽에서 참패하여 발이 묶이고 수군만 열구에 상륙해서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가 참패했다. 이 기록으로 왕험성이 열수에서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천년 동안 평양을 왕험성이라 했기에 일본인들은 대동강을 열수(洌水)로, 대동강 하구 남안을 열구현(洌口縣)으로 결정했다. 漢과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압록강과 청천강으로 견해가 갈렸는데 훗날 이병도는 청천강을 패수로 정했다.
낙랑군 속현의 지명 - 주류설
漢軍의 작전계획 - 주류설
지금의 황해도 재령평야는 본래 바다였고 조선 중기부터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재령평야가 바다였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바다를 재령만이라고 부른다. 사기에 기록된 전쟁 과정을 왕험성 평양설에 적용해 보자. 사기에 의하면 漢나라 육군과 수군은 열구(洌口)에서 합류하여 왕험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좌장군이 이끄는 육군은 청천강을 돌파한 뒤 평양의 측면을 지나 남진하여 점제현에 도착한 후 재령만 입구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평양의 조선군은 한나라 육군의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차단할 터이니 원정군은 굶주림을 피할 수 없다. 육군과 수군은 열구에서 합류하여 재령만을 우회한 뒤 북진해서 평양을 앞에 두고 또다시 대동강을 건너야 한다.
재령만 입구 남안은 합류 지점으로 최악의 장소다.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열구현의 위치는 말이 되지 않는다. 육군과 수군이 합류할 지점 열구는 당연히 재령만 입구의 북안이라야 한다. 따라서 점제현 신사비는 본래 있던 곳에서 재령만 입구 북안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재령만 입구 북안이 열구현이라면 평양이 왕험성일까? 그렇지 않다. 평양이 공격 목표였다면 육군과 수군이 구태여 재령만 입구 북안에서 미리 합류할 필요가 없다. 육군은 청천강을 건너 북쪽에서 평양으로 직행하고, 수군은 재령만과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 정도 작전계획은 기초 상식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기에 기록된 漢나라의 작전계획은 평양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평양은 왕험성이 아니다.
실전에서는 漢나라 육군이 패수 서쪽에서 초전에 참패하고 진격이 저지되었다. 육군이 약속된 기일까지 열구에 도착하지 않자 수군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 패하여 분산도주했다. 누선장군을 비롯한 수천 명의 패잔병은 십여일동안 산속에 숨어있다 나와서 부대를 재편성했는데 평양 근처에는 수천 명이 십여일 동안 숨어있을만한 깊은 산이 없다. 이것으로 보아도 평양은 왕험성이 아니다.
BC 195년에 위만 일행이 임유관(산해관)을 나와 건너갔던 패수(浿水)가 여전히 두 나라의 국경이었다. 좌장군은 요동의 임유관을 나와 패수로 향했다. 한나라 육군 선봉부대가 패수 서쪽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주력군이 패수에서 저지당했다.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패수가 남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장군이 이끄는 육군은 패수를 지나 열구에서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합류하여 왕험성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산동성 봉래에서 배를 타고 발해로 나갔다. 발해의 명칭은 고금이 동일하다. 지도를 보면 수군이 상륙한 열구(洌口)가 지금의 요서 지방 해변이란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열구(洌口)는 열수(洌水)의 입구인데 필자는 열수를 지금의 소릉하로 본다. 패수는 어디인가? 육고하를 패수로 보아야 사기의 전쟁 기록에 부합한다.
한무제의 조선 침공도 - 이광헌 설
전쟁터 상황도
실전에서 누선장군의 수군이 열구에 상륙하여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한 것은 왕험성이 상륙지점에서 멀지 않음을 말해 준다. 위의 지도에서 C는 대릉하, 요하, 혼하, 태자하의 강줄기가 모여들어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한 곳이다. 해변은 물론 내륙 깊숙히 수십 km에 걸쳐 소택지와 진펄 지대가 전개되어 육상 통행과 군사작전이 불가능하다.
만약 해성이 왕험성이라면 한나라 수군 7천 명은 B에 상륙하게 된다. 그렇다면 임유관(산해관)을 출발한 한나라 육군 5만 명은 B에서 수군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장거리를 전진해야 하는데 갈수록 보급선이 늘어져 식량수송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대릉하를 건너면 광대한 소택지 C를 우회해야 하고 이어서 요하, 혼하, 태자하를 연속으로 건너야 한다. 태자하를 건너면 조선군의 본거지 해성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어 수군과 합류하기 전에 결전을 벌여야 한다. B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육군과 수군의 합류가 애시당초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므로 육군과 수군이 합류해서 왕험성을 공격한다는 한나라의 계획 자체가 합류 예정지는 B가 아니라 A임을 말해 준다. A는 임유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서 수군이 발해를 건너올 동안 육군이 도달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비록 실전에서 육군이 초전에 참패하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는 조선군이 예상 밖으로 강했기 때문이지 무리한 계획 탓은 아니다. 또한 육군과 수군의 합류예정지가 A라는 것은 왕험성이 A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작전계획에 비추어 보아도 왕험성의 위치는 요동이 아니라 요서임이 분명하다. 흉노와 조선이 국경을 접했다는 사기의 기록도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필자는 의무려산 인근에 위치한 북진시(北鎭市)를 왕험성으로 본다. 의무려산의 주봉인 망해봉(望海峰)은 광활한 평원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고대로부터 聖山으로 모셔져왔기에 조선의 도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무려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많은 봉우리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맥이다. 漢나라 수군이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분산도주했고 누선장군 양복은 십여일을 산속에 숨어있다 나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했다. 수군 병력이 원래 7천 명이었으니 도주하여 산속에 숨어있던 패잔병이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요동과 요서 일대에 그럴만한 산은 의무려산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해성(海城)을 왕험성으로 보았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왕험성의 위치를 해성으로 명시했으나 패수와 만번한은 요동 일대라고만 했다. 고조선의 경계를 북으로 개원(開原), 동으로 흥경(興京), 남으로 압록강이라 하고 서쪽 경계는 명시하지 않았으나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이라 한 것으로 보아 요하를 서쪽 경계로 본 것이 분명하다.
단재 신채호 설
漢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패수였으니 요하가 패수이고 만번한은 요하와 해성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만번한은 혼하 또는 태자하인데 두 곳 모두 요하에서 너무 가깝다. 사기에 이르기를 만번한이 너무 멀어 지키지 못하고 물러났다가 漢初에 패수를 조선과의 국경으로 정했다고 했으니 패수는 만번한과 근접한 곳이 아니다. 태자하를 만번한으로 본다면 패수는 대릉하 또는 그 서쪽이라야 한다. 또한 단재설에서는 진번이 누락되어 있는데 그 위치를 설정하기가 몹시 애매하다.
흉노제국의 영토는 유목지대에 국한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녹색선이 유목지대와 경작지대의 분계선이다. 그렇다면 < ? > 지역은 누구의 영토라는 것인가? 사기에는 흉노와 중국이 상곡군에서 만리장성으로 국경을 접했다고 했다. 만약 < ? > 지역이 흉노의 영토라면 흉노와 중국의 국경은 요하까지 연장되므로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게 된다. 단재설에서는 흉노가 상곡군 동쪽에서도 漢나라와 접하고 있어서 흉노가 동쪽에서 조선과 접경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어긋난다. 따라서 단재설은 성립할 수 없다.
이덕일은 란하가 패수이고 고조선과 낙랑군의 도읍인 왕험성의 위치는 갈석산 부근 창려현이라고 주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란하를 지목한 근거는 水經에 기록된 아래의 한 구절이다.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북위(北魏 386~534) 시대에 력도원(酈道元 466~527)은 水經注에서 이 문장을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즉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로 해석했다. 이덕일은 이 문장에서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東入于海)"라는 뒷 부분은 무시하고, "패수는 동남쪽으로 흐른다"라는 앞 부분을 근거 삼아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란하를 패수로 지목했다.
이덕일 설
필자는 東入于海 즉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해석은 틀렸다고 본다. 수경의 원문은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于海> 즉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흘러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로 해석해야 한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란하를 패수로 지목하려면 먼저 필자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란하는 패수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기에 의하면 위만은 천여 명의 피난민 무리를 이끌고 연경에서 동쪽으로 달아나 만리장성을 나갔다. 위만이 인솔한 무리가 성벽을 넘을 수는 없고 관문을 통과했을 터인데 동쪽으로 나가는 관문은 산해관이다. 당시에는 임유관(臨楡關)이라고 했다. 현재의 만리장성이 당시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이덕일도 인정한다. 위의 지도를 보면 연경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도중에 란하를 건너야 하는데 위만은 산해관을 나온 뒤에 패수를 건넜으니 란하는 패수가 아닌 것이다.
이덕일은 또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문장을 근거로 란하 하류에 있는 창려현(昌黎縣)을 낙랑군의 치소이자 고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갈석산 인근에 있는 창려현이 고대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문헌고증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논쟁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기에 의하면 패수와 왕험성은 만리장성 바깥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덕일의 주장은 논쟁할 가치도 없다. 이덕일은 역사의 진행과정을 살피지 않고 옛 문헌의 단편적인 문장에 매달린 결과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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