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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 22-23절. 복음 사역을 위한 고난들을 자랑함 1
1.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시작하겠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받은 참된 사도들이고, 바울은 추천서도 없는 거짓 사도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고,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조차도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 수호를 위해서 자신을 선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육신적인 혈통과 복음 사역을 위한 고난의 목록을 자랑하는 내용입니다.
3. 오늘 설교의 제목은 <복음 사역을 위한 바울의 고난을 자랑함>입니다.
22절.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re they Hebrews? So am I. Are they Israelites? So am I. Are they descendants of Abraham? So am I.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Ἑβραῖοί εἰσιν; κἀγώ.
Hebrews are they ? I also.
동사(εἰσιν) 현재형입니다(are they).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Ἰσραηλεῖταί εἰσιν; κἀγώ.
Israelites are they ? I also.
동사(εἰσιν) 현재형입니다(are they).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σπέρμα Ἀβραάμ εἰσιν; κἀγώ.
Descendants of Abraham are they ? I also
동사(εἰσιν) 현재형입니다(are they).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란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이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고, 아람어를 사용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들을 원문으로 읽는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한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Are they Hebrews?—This, then, was one of their boasts. They were Jews of Palestine, speaking Aramaic, reading the Law and Prophets in the original. He, they asserted, or implied, was a Hellenistic Jew (his birth at Tarsus naturally suggesting that thought),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바울도 역시 히브리인이고, 빌립보서 3장 5절에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부모가 팔레스틴의 유대인임을 의미하고,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한 것은 그의 민족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St. Paul’s answer is, that he too was a Hebrew; or, as he puts it in Philippians 3:5, “a Hebrew born of Hebrews.” What he means is obviously that his parents were Jews of Palestine, and that the accident of his birth in Tarsus had not annulled his claim to that nationality.)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란 말에서 제롬은 바울 사도가 길리기아에서 태어난 길리기아인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이 바울의 부모의 고향에 대한 전승일 수 있지만, 바울이 사도행전 22장 3절(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에서 바울이 주장한 말을 결코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 Jerome, strangely enough (Cat. Vir. Illust. c. 5), asserts that St. Paul was a Galilean, born at Gischala; but this, though it may possibly point to a tradition as to the home of his parents, can hardly be allowed to outweigh his own positive statement (Acts 22:3).
벤손(Ben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에서 히브리인이란 창세기 11장 14절이 ‘헤벨’의 후손이란 뜻이고,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고, 그의 부모는 히브리인이고(빌 3:5), 바울은 어릴 때 예루살렘에 가서 유명한 유대인 박사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행 22:3).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기 민족의 언어와 종교에 통달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바울은 실로 히브리인들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었습니다. (Are they Hebrews? — Descended from Heber, (see Genesis 11:14,) and speaking the Hebrew language, though with some variation; so am I — Paul indeed was a native of Tarsus in Cilicia, but his father and mother were Hebrews, Php 3:5. And having been sent to Jerusalem when young, he was instructed by Gamaliel, a noted Jewish doctor, Acts 22:3. So that in Jerusalem he perfected himself both in the language and religion of his nation, on all which accounts he was truly a Hebrew descended of Hebrews)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에서 이스라엘인이란 야곱의 후손이란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셨고, 고대에 야곱은 하나님의 교회의 근원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에 언급된 이유로 이스라엘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이란 호칭은 야곱의 후손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 구성원으로 주어진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할례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개종자들과 혈통적 이스라엘과는 구별되었습니다. (Are they Israelites? — Descended from Jacob, who, in preference to his brother Esau, was chosen to be the root of the visible church of God in that early age, and was called Israel for the reason mentioned Genesis 32:28. This appellation, therefore, signified that the persons to whom it was given were members of God’s visible church by their descent from Jacob, and consequently were distinguished from proselytes who were members by circumcision, and not by descent.)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에서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서 두 종류의 자손의 조상입니다. 즉 하나는 육신의 자손으로서 율법에 의한 자손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인데,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롬 4:13, 16). 맥나이트는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의 씨를 바울 사도는 여기서 믿음의 자손 즉 영적인 자손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육체적 자손을 의미한다면, 이 질문은 앞 소절과 동일한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맥나이트는 생각하기를 바울이 동의적인 말을 반복하지 않았으리라고 했습니다. (Are they the seed of Abraham? — Inasmuch as Abraham, being constituted a father of many nations, had two kinds of seed; the one by natural descent, called his seed by the law; the other by faith, called that which is of the faith of Abraham, see Romans 4:13; Romans 4:16. Macknight thinks, that by the seed of Abraham, the apostle intended here his seed by faith, or his spiritual seed; because if he had meant his natural seed, this question would have been the same with the preceding: a tautology, he thinks, not to be imputed to the apostle.)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에서 ‘히브리인’이란 말은 ‘넘어왔다’란 히브리 말(עבר: 아바르)에서 나왔는데, 아브라함이 이방나라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은 원래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유브라데강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the word "Hebrew" signified properly one who was from beyond (עברי ‛Ibriy from עבר 'aabar, to pass, to pass over - hence, applied to Abraham, because he had come from a foreign land; and the word denoted properly a foreigner - a man from the land or country beyond, עבר abar the Uphrates)
이 히브리인이란 말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유브라데스 강을 넘어온 사람들이란 말로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the name Hebrew was applied by the Canaanite to them as having come from beyond the river, and was the current name among foreign tribes and nations. See Gesenius' Lexicon on the word עברי ‛Ibriy Hebrew.)
‘이스라엘인이냐’는 말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내어난 원주민이란 영광스러운 말로 사용한 것입니다. (Paul in the passage before us means to say that he had as good a claim to the honor of being a native born descendant of Israel as could be urged by any of them.)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냐’에서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한 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씨란 말은 모든 유대인들이 영광스러운 말로 사용했는데(마 3:9, 요 8:39),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사역을 하는데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특별히 강조했음에 틀림없습니다. (Are they the seed of Abraham? - Do they boast that they are descended from Abraham? This with all the Jews was regarded as a distinguished honor (see Matthew 3:9; John 8:39), and no doubt the false teachers in Corinth boasted of it as eminently qualifying them to engage in the work of the ministry.)
‘나도 그러하고’에서 바울은 자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고,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빌 3:5) So am I-- Paul had the same qualification. He was a Jew also by birth. He was of the tribe of Benjamin; Philippians 3:5.
매튜 폴(Matthew Poo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고’에서 어떤 사람은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 세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차이가 없고, 동일한 것을 확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미묘하게 구분하여,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그들의 혈통이 오래된 영광과 그들이 히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은 자기들의 민족을 가리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Some here inquire: What difference there is in these three things? For to be a Hebrew, and an Israelite, and of the seed of Abraham, seem all to signify the same thing. Nor indeed have we any need to assign any difference, it seemeth to be but the same thing amplified in three phrases. But others distinguish more subtlely, and think the first may signify a glorying in the ancientness of their pedigree, or in their ability to speak in the Hebrew tongue; the second, may refer to the nation of which they were; the third, to the promise made to Abraham and his seed.)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다’. 아브라함 자신은 창세기 14장 13절에서 자신을 히브리인이라고 불리졌다는 것입니다. (besides, Abraham himself is called an Hebrew, Genesis 14:13)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히브리인이란 말이 ‘하바르’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건너가다’라는 뜻이며, 아브라함이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왔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온 것을 말하고, 그래서 아브라함을 ‘하히브리’ 즉 ‘건너온 자’라고 부르며, 그 후손들도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others have been of opinion that the name is derived from "Habar", which signifies, "to pass over"; and was occasioned by one or other of the following events; either from Abraham's passing over the river Euphrates, when he came out of Mesopotamia into the land of Canaan, and so was called Abram, "Hahibri, the passer over", or the Hebrew (x), and so his posterity were called after him;)
히브리인이란 말이 가나안의 후손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는데,바벨에서 언어가 혼잡되어서, 사람의 일부가 요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곳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에게서 가나안 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떨어져나와서 이웃 나라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이 히브리인이고, 옮겨온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or from the posterity of Canaan, who, after the confusion at Babel, settled in that part of Asia which lies between the river Jordan and the Mediterranean sea, and from them called the land of Canaan; and who were called by the Chaldeans, from whom they separated, and by the neighbouring nations, Hebrews, or passers over, because they passed over the river Jordan;)
그래서 아브라함은 유브라데강을 건너와서 가나안 사람들에게로 왔고, 가나안 사람의 언어를 배웠고, 계속 가나안에 거주하였고,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이라고 불렀고, 그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처럼 히브리인으로 불렸습니다. (and so Abraham passing over the river Euphrates to them, and learning their language, and continuing there, he was called an Hebrew also, and his posterity after him (y);)
히브리인이란 아르박삿이나 헤벨에게서 유래한 것이란 견해인데, 이들은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와서, 가나안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한 민족이 이 사건으로부터 히브리인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 같지 않습니다. ( or from Arphaxad, or Heber, passing over the river Tigris or Euphrates, and settling in the land of Canaan (z); but it is not likely that a nation should take its name from such an event:)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으로 불렸는데,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처럼 히브리인으로 불렸고, 이 이름은 가나안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이었다는 것이고, 그 이름을 ‘헤벨 하나하르’라고 불렀는데, 즉 ‘강 건너편 나라’란 뜻입니다. (others think it a more probable opinion that Abraham was so called, and hence his posterity after him, from the name which the Canaanites gave to Mesopotamia, from whence he came; calling it Heber Hannahar, or the country beyond the river:)
이것은 마치 우리가 외국인들을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일부 유대인 작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0장 15절에는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히브리인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just as we call foreigners Transmarines, or people beyond sea; and of this opinion were some of the Jewish writers (a); but not Mesopotamia, but Canaan, is called the land of the Hebrews, Genesis 40:15.)]
더 일반적인 견해는 유대인이 대부분 벨렉의 아버지 헤벨이란 이름으로부터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언어가 혼잡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지금 히브리어로 불리고 있으며, 그것이 첫 번째 언어였다는 것이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The more commonly received opinion with the (b) Jews is, and which is most likely, that they are so called from Heber, the father of Peleg, in whose days the confusion of languages was made, and what is now called the Hebrew language being the first and original one, was retained in him and in his family;)
여기서 셈은 히브리인들 즉 헤벨의 자녀들의 조상이라고 했고, 창세기 10장 21절. 헤벨의 자손들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른 것은 마치 이스라엘로터 나온 후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유다에게서 나온 후손을 유대 자손이라고 부른 것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히브리인들이 헤벨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24장 24절에서 앗수르인들은 ‘아수르’로 불리고 있고,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헤벨’로 불리고 있습니다. 즉 헤벨에게서 히브리인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hence Shem is said to be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Heber, Genesis 10:21 that is, the Hebrews, as the same people are called the children of Israel from Israel, and the children of Judah from Judah, and sometimes they go by the name of Heber, as in Numbers 24:24 when as the Assyrians are called Ashur, from whom they have their name, so the Hebrews are called Heber, from whom they take their denomination:)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름이 민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헤벨의 자손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 신앙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셈은 다른 사람들의 조상이지만, 특별한 의미에서 헤벨 자손의 조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종교는 자손들에게서 계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특별히 히브리인으로 불렸으며, 이것은 헤벨의 후손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헤벨의 종교를 계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and it should be observed, that this is not only a national but a religious name, and those people were called so, because they were of the faith as well as the descendants of Heber; so Shem was the father of others, but in a peculiar manner the father of the children of Heber, because the religion he professed was continued with them; and so Abraham is particularly called the Hebrew, not only because he descended from Heber, but was of the same, religion;)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스마엘의 계통이 아니라 이삭의 계통으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또 이삭의 후손은 에서의 계통이 아니라 야곱의 계통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과 함께 떡을 먹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43:32. ( and so his posterity, not in the line of Ishmael, but of Isaac, are so called; and not as descending from Isaac in the line of Esau, but of Jacob; and hence it was not lawful for the Egyptians to eat bread with the Hebrews, not because they were of another nation, but because of another religion, Genesis 43:32.)
거짓 사도들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부인하지 않았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에서 안디옥에 가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거짓 형제들과 같았습니다(행 15:1).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히브리인이고 아브라함 계통의 ‘헤벨 족장의 후손’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치할 수 있었는데, 자신도 역시 히브리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엄격한 사실로 말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문이고, 그의 아버지 계통과 어머니 계통도 히브리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It seems that these false apostles were Jews, since it is not denied by the apostle, but granted; they were some such like false brethren as those who came from Judea to Antioch, and disturbed the church there, Acts 15:1 and whereas they boasted of their being Hebrews, the descendants of the ancient patriarch Heber in the line of Abraham; the apostle was able to match them in this, and asserts himself to be an Hebrew too, which he could do with the strictest truth, for he was an Hebrew of the Hebrews, he was an Hebrew by father and mother's side:)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의 후손입니다. (The Jews make a merciful disposition to men to be a sign and evidence of being of the seed of Abraham (g); but in a spiritual sense, an interest in Christ, and faith in him, denominate men to be truly Abraham's seed, and heirs of the promise:)
야곱의 계통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 사람들과 에돔 사람들도 아브라함이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된 자손 메시아가 오시기로 약속된 혈통에 있는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 this is to be understood here in a natural sense, and of being of Abraham's seed in the line of Jacob, for otherwise the Ishmaelites and Idumeans were of the seed of Abraham; but they were his seed in that line in which the promised seed, the Messiah, was to come;)
그러나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이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것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점에서 그들과 동등했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그 위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었습니다. ( though this was of no avail, without having the same faith Abraham had, and believing truly in Christ, as his spiritual seed do, whether they be Jews or Gentiles; however, the apostle was equal to them in this respect; he was of the seed of Abraham according to the flesh, and above them in another, in that he was of Abraham's spiritual seed by faith in Christ Jesus.)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름은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싸우고 이겼습니다. 그래서 영화로운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애굽에서 인도해내셨고, 광야에서 먹이셨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하셨고, 그들에게 특별한 특권을 주셨습니다(롬 8:4). (are they Israelites? so am I. The Jews were called Israelites from Israel, a name which was given to Jacob their ancestor, upon his wrestling with an angel, and prevailing over him; and was accounted an honourable one, or title of honour; for the people of Israel were they whom God chose for a peculiar people to himself above all others, brought them out of Egypt, fed them in the wilderness, and led them through it, and settled them in the land of Canaan, and bestowed upon them special and peculiar privileges; see Romans 9:4.)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찬양하는 데 유별나고 지나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고 했고, 그래서 율법을 받았다고 했고, 모든 민족보다 자기들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다스리는 천사들과 동등이라고 했고, 그들은 죄가 없는 순전한 자라고 했고, 특별히 속죄일에 그러했는데, 바울 사도는 답하기를 자기도 이스라엘 무리에 속했다고 했고, 나다나엘처럼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이스라엘에 속한 참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The Jews are very extravagant in the praise of Israelites; they not only make them the favourites of God, beloved of him, because called children, and had the law given them (c), and extol them above all mankind; See Gill on Romans 3:9 but they even make them equal to the ministering angels, and say they are pure from sin as they, especially on the day of atonement (d), yea, more excellent than they (e): in this also the apostle could answer them, for he was of the stock of Israel, and of the tribe of Benjamin, a son of Jacob, or Israel; and was an Israelite indeed, as Nathanael, for all are not Israel that are of Israel:)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나도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매우 자랑했습니다(요 8:33). 유대인들은 가장 비천한 유대인일지라도 세상의 귀족이요 왕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백성조차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기뻐했습니다. 특히 라세도미니안(스파르타인)처럼. (are they the seed of Abraham? so am I: of this the Jews mightily boasted; see John 8:33 they reckon themselves, even the poorest among them, as the nobles and princes of the earth (f); and even other people have been fond of being reckoned of the stock of Abraham, as particularly the Lacedemonians,)
1. 22절은 소위 육체의 자랑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육체적으로 히브리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랑하면서, 율법주의 거짓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참된 복음과 참 사도임을 입증해주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히브리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참된 복음을 전하는 참 사도였습니다.
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원문을 실감있게 번역하자면,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이런 뜻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인'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의 순수성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혈통상으로 완전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언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모국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아니라, 모국어인 아람어를 할 줄 아는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
바울은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빌립보 3:5.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나 사도가 되는 것은 더이상 육의 혈통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의 자랑을 따라서 자기도 육체를 자랑할 만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자기가 학벌이 가말리엘 문하를 나왔고, 세상 직위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자기가 수백만 명에게 전도했고, 교회를 몇 개나 세웠고’ 하는 것들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얼마나 고생을 했다는 고난 목록을 자랑했습니다.
4. 그러나 유대인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기준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바울은 혈통상으로 순수한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또한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유대인 됨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5. 결혼할 때, 양반 가문 따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진짜 양반은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 잘 받드는 가정이 양반입니다.
결혼할 때, 아직도 성씨 따지는 것은 아직 신앙의 깊이가 얕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가, 목사님에게 여쭈어보고, 전도사님께 여쭈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씨 양반이 아니라, 신앙생활 잘하시는 분이 양반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7-8.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6. 그러나 원래 바울은 이런 혈통이나 학벌이나 세상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저도 세상 명예를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김*환)이 고려대학교 나온 것이 거짓말이라고 비난하기에 할 수 없이 고려대학교 나온 것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장로님(박**)은 원래 태권도와 합기도 등을 많이 해서 도합 격투기 13단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격투기 실력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어떤 젊은 사람이 3년 이상을 괴롭히자,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녀석이 단번에 쭉 뻗어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직장에서 이 장로님을 다시는 괴롭게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전도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장로님이 새벽기도 때 엎드려 기도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이 깡패 장로야> 그러는 것 같아서 한동안 기도를 못 했다고 합니다.
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단검으로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자기는 죽어버렸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8. <파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도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고 찬양했습니다.
찬송가 340장에도 “세상 헛된 신과 영화 모두 내어버렸네.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기 전의 세상 명예를 모두 내어버리고, 예수님을 가장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3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re they servants of Christ?-- I speak as if insane-- I more so; in far more labors, in far more imprisonments, beaten times without number, often in danger of death.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διάκονοι Χριστοῦ εἰσιν;
servants of Christ are they ?
동사(εἰσιν)는 현재형입니다(are they).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παραφρονῶν λαλῶ,
being beside myself I speak
직역하면 ‘정신없는 가운데서, 내가 말한다’는 뜻입니다.
‘정신없는 가운데서’(παραφρονῶν)는 현재분사로서(being beside myself) 현재 정신없는 가운데서 말하는 것을 가리키고 주어가 남성 단수이므로 ‘내가 정신없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고, ‘말을 하거니와’(λαλῶ)는 현재형으로서(I speak) 현재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ὑπὲρ ἐγώ·
more I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ἐν κόποις περισσοτέρως,
in labors more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ἐν φυλακαῖς περισσοτέρως,
in imprisonments more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ἐν πληγαῖς ὑπερβαλλόντως,
in beatings above measure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ἐν θανάτοις πολλάκις.
in death often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벤슨(Ben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사도로서 비교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얼마나 더 거짓 사도들보다 우수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역하면서 일한 것을 말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많은 여행 중에 고난당한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통해서 볼 때, 고대 영웅들 중 누구도 명성을 위해서나 군사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행동했거나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당한 것처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Are they ministers of Christ? — “St. Paul does not compare himself with the false teachers as an apostle, but as a minister of Christ simply. And to show how much he exceeded them in that inferior character, he mentions his labours in the ministry, and his sufferings undergone in his many journeys and voyages, for the sake of spreading the gospel. And from his account it appears, that none of the heroes of antiquity, however vehemently actuated by the love of fame, or of military glory or power, either did or suffered as much in the pursuit of their objects, as the Apostle Paul did and suffered for Christ and his gospel.”)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고’. 여러 해 동안 당한 고난들을 가리킵니다. (I am more so than they; in labours more abundant — Sustained for a long series of years;)
‘매를 수없이 맞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한 것들이었습니다. (in stripes above measure — All endured for Christ and his cause.)
‘갇히기도 더 많이 했고’.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여행하고 고난 당한 기록이 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기 전에 빌립보에서 한 번 감옥에 갇힌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바울의 생애에서 투옥된 것이 간략히 기록하기 위해서 생략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기록한 것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을 것입니다. (In prisons more frequent — In the narrative of Paul’s travels and sufferings, contained in the Acts, we only read of his being imprisoned once, before this epistle was written, namely, at Philippi. But doubtless many particulars of his life, besides the imprisonments here referred to, were omitted in that history, for the sake of brevity.)
‘여러번 죽을 뻔했으니’. 여러 가지 최고로 두려운 지경에 둘러싸였다는 것입니다. (In deaths oft — Surrounding me in the most dreadful forms.)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유대인들은 출생시부터 메시아의 일군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Are they ministers of Christ? - Though Jews by birth yet they claimed to be the ministers of the Messiah.)
‘내가 더 그러하고’.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진 것보다 더 높은 직분의 자격들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보다 더 특별한 방법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수고와 시련들을 보임으로써 바울이 그들보다 주 예수님의 일꾼으로서 참된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지식을 확산하려고 노력한 것을 자세히 말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I am more - Paul was not disposed to deny that they were true ministers of Christ. But he had higher claims to the office than they had. He had been called to it in a more remarkable manner, and he had shown by his labors and trials that he had more of the true spirit of a minister of the Lord Jesus than they had. He therefore goes into detail to show what he had endured in endeavoring to diffuse the knowledge of the Saviour;)
거짓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안주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많은 시련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trials which the had borne probably while they had been dwelling in comparative ease, and in a comfortable manner, free from suffering and persecution.)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수고를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도 거짓 사도들이 한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동안 복음전도에 종사해오고 있고 훨씬 더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In labors more abundant - In the kind of labor necessary in propagating the gospel. Probably he had now been engaged in the work a much longer time than they had, and had been far more indefatigable in it.)
‘매도 수없이 맞고’. 내가 더 자주 매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고후 11:24).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증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리스도에게 뚜렷하게 헌신한 사람은 반드시 자주 매를 맞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In stripes - In receiving stripes; that is, I have been more frequently scourged; 2 Corinthians 11:24. This was a proof of his being a minister of Christ, because eminent devotedness to him at that time, of necessity subjected a man to frequent scourging.)
‘수 없이’. ‘거짓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매를 맞았고, 그러므로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한 증거라고 판단했습니다. (Above measure - Exceedingly; far exceeding them. He had received far more than they had, and he judged, therefore, that this was one evidence that he had been called to the ministry.)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바울이 한 번 투옥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빌립보에서 실라와 함께(16:23 이하). 그러나 누가가 많은 것들을 생략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생략한 것은 사실과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자주 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한번 갇힌 것만 말했으나, 이외에도 여러 번 투옥된 것을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n prisons more frequent - In the Book of Acts , Luke mentions only one imprisonment of Paul before the time when this Epistle was written. That was at Philippi with Silas, Acts 16:23 ff. But we are to remember that many things were omitted by Luke. He does not profess to give an account of all that happened to Paul; and an omission is not a contradiction. For anything that Luke says, Paul may have been imprisoned often. He mentions his having been in prison once; he does not deny that he had been in prison many times besides; see on Acts 16:24.)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이것은 죽음의 위험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동등한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고후 1:9 참조). 바울이 종종 죽음의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In deaths oft - This is, exposed to death; or suffering pain equal to death; see on 2 Corinthians 1:9. No one familiar with the history of Paul can doubt that he was often in danger of death.)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1.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느냐, 얼마나 고생했느냐, 얼마나 일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하지, 대접 많이 받는 것이 무슨 자랑이냐?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군이냐?”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넘치도록 수고하고, 복음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고를 했으니, 복이 굴러 들어올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마치 저주받은 인생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고 희생했으니, 주님 말씀대로 기뻐할 일입니다.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뛰놀아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눈물 흘리며, 많이 수고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이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208장처럼, 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장차 주님께서 그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큰 위로를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일하다가 핍박받으면 기쁘게 여기십시오.
이처럼, 주님 위해서 끝까지 충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교회에서 직분 맡은 일군들은 받은 것, 얻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린 수고와 희생을 자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는 상급은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 이상으로 수고한 것만을 상급으로 받습니다.
수고한 것을 세상에서 상급으로 대접을 다 받아버렸다면, 계산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봉사를 많이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보는 데서 일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더라도, 개의치 말고 주님 앞에서 충성하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많이 맡겨주셨다면, 그 물질을 합당하게 많이 써야 됩니다.
시간을 많이 맡겨주셨다면 시간을 많이 써야 됩니다.
재능을 많이 주셨다면 그 재능을 많이 써야 됩니다.
내게 맡겨주신 분량을 따라 감당할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감당하는 것이 넘치도록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맡겨주신 분량을 감당하고 더욱 넘치도록 감당하심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2007년에 저희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서 상가와 가정집들이 물에 잠기고 교회조차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성도들이 성도들의 상가에 가서 옷가지들을 꺼내고, 할머니가 갇힌 집에 가서 구조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그 때 정신 나간 노회 임원과 중진들이 목회자들 해외여행을 논의하려고 교역자회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역자회 장소에 찾아가서 악을 쓰면서, 교인들은 폭우로 죽어가는데, 목사들이 이런 때에 놀러 갈 생각이나 하고 있느냐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양심 있는 목사들부터 자리를 피해서 그 해에 교역자 수련회로 놀러 가는 일을 취소한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찾아가서 도와주고 위로해주어야 마땅한데도,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불행을 도외시하고, 놀러 가려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목회자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수없는 고난을 당한 것처럼은 못할망정, 눈앞에 벌어진 성도들의 불행을 도외시하고, 놀러 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여기서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공동번역)에는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라고 했는데,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말함에 있어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달리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본 절은 적대자들과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을 백번 양보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바울 자신은 더욱 확실하고 뛰어난 사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1. 바울 사도는 복음 전도를 하다가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고, 사도행전 23장에는 예루살렘 감옥에 갇혔고, 사도행전 24장에는 가이사랴 감옥에 2년간 갇혔고, 사도행전 28장에서는 로마 감옥에 3년간 갇혔고, 디모데후서에도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나옵니다.
물론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 이전에는 빌립보 감옥에 갇힌 것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감옥에도 여러번 갇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예수 전하는 것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린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갇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2.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갇혔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간 것 때문에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로마 황실에 복음이 파고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감옥 안에서 황제 경호부대원들 즉 로마 원로원의 자제들에게 전도함으로써, 그들의 부인들이 먼저 예수를 믿어서 로마 황실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빨리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같이 투옥된 고위 정치범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 선교라는 특수 전도를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다 보니, 생각지 않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고, 특수한 환경 속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수한 환경 속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또 개척교회, 미자립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특수한 환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기도해주시고, 복음의 능력과 열매가 풍성히 맺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2.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그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사도행전에도 충분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고대 교회의 증언에 의하면(로마의 클레멘트), 바울이 감옥에 갇힌 횟수는 모두 일곱 번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클레멘트 1서 5:6).
고린도후서가 기록되기 전, 바울의 투옥은 사도행전 16장 23-30절에 기록된 대로, 빌립보 감옥에 투옥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투옥 생활이 더 여러번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세상 복으로 따지자면, 참으로 복 없는 사람이다 싶지요?
감옥에 들어가고, 매도 수없이 맞고....
그러나, 틀림없이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분입니다.
불신자 눈으로는 하나님이 돌보지 않고 버려버리고, 내팽개쳐진 인생이라고 생각될 만큼 너무도 험난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핍박하고 욕하고 악한 말을 할 때 기뻐하라. 하늘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5:11-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섬기시다가, 직분 감당하시다가,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다가, 사람들에게 욕먹고, 병나고, 경제적 손해를 보고, 괴로움을 당했다면,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매를 맞은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절부터 이어지고 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 바울은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 전도에서도 돌에 맞아 죽을 뻔했으며, 사도행전 17장에서도 유대인들이 잡아 죽이려고 해서 도망갔으며, 사도행전 18장 에베소 전도 때에도 민중 반란으로 죽을 위험을 당했으며, 사도행전 24장에는 유대인들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안 먹겠다고 맹세한 위험을 당했으며,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바다 풍랑으로 인해 죽을 뻔했고, 24절-27절에 나오는 고난 목록처럼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23절은 고난의 총론이고, 24절-27절은 고난의 각론입니다.
2.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대해서는 1장 8-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열거하는 그의 업적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업적이 승리의 사례가 아니라 패배와 고난의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인간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과도 일치되는 것입니다(11:30; 12:5, 9, 10).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극심한 고난을 당해도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 중에도 석방되어서 꼭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그 소망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난다고 합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무서운 태형을 당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매 맞아서 죽는 사람보다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고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들입니다.
사명이 다 끝나지 않는 한 죽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는 동안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년)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주님의 돌보심을 받고, 죽도록 충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같이 세세토록 존경받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큰 상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