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까운 영웅 여운형
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라는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총격 후 범인은 곧바로 도주했다. 경호원 박성복이 범인을 추격하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의해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시간만 지체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이 청년을 체포한 후, 사건을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한지근은 공판장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후, 무기체형을 언도받았다. 수감된 후에는 인쇄일을 배우며 모범수로 지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 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의 집에서,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한국민주당 창당맴버이자 ‘혁신탐정단’의 양근환, ‘백의사’의 염동진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여운형은,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과 통일된 조국을 논하였다.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또 있다.
미국도 소련도 아닌, 중립국의 꿈이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율로는 이승만의 두 배가 넘었다. 그대로 가면 여운형의 승리였다.
여운형을 암살한 것을, 미국 비밀문서에는, 백의사 조직이라고 나왔지만, 백의사의 중심축이었던 김구가 여운형을 죽인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민위원회와 공장 자주 관리 운동을 주도했다.
인민위원회는 지역의 방범과 자립에 기여했고, 공장자주관리운동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업 공장을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공동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미군정이 들어서자 해체되었다. 그리고 여운형은 암살당하고.
인민위원회와 공장자주관리운동의 일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대충, 누가 여운형을 암살 했을 거라는 짐작이 간다.
미국은 여운형이 하는 모든 일에 걸림돌이었다.
지금도 미국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때문에 전쟁의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고, 불안하다.
나도 역시 한반도 뿐만아니라, 지구상에 핵이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핵은 그대로 나두면서, 북한만 핵을 버리라고 하는데, 나 부터라도 핵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핵이 유일한 무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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